2007. 1. 9. 21:44
미소공위(1946.3, 1957.5)
(4.7언론인회, 기자 25시, 1984, 30)
모스코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미.소 공위' 절차를 토의하는 미측의 하지 중장(왼쪽)과 소측의 스티코프 중장.
아이 업은 아이
(조선일보사, 감격과 수난의 민족사,1988, 58)
동생을 등에 엎고 사과를 파는 소녀 행상의 모습에서 해방은 되었으나 팍팍한 삶의 현실을 볼 수 있다(1947년 10월)
쌀공출(1946)
(이경모, 격동기의 현장, 눈빛, 1991, 40)
1946년 12월 전남 담양에서 공출하는 광경.
9월 총파업(1946.9)
(조선일보사, 감격과 수난의 민족사,1988, 93)
사진은 1947년 4월의 철도 노조원들의 집단 시위. 46년 9월 총파업 때도 시위 양상은 비슷하였을 것이다. 9월 총파업 관련 사진을 구하지 못하여 이 사진을 대신 넣었다.
1946년 9월 27일 '남조선파업 대구시 투쟁위원회' 사무실. 대구에 있는 각 산별노조 간부들과 청년들이 이곳에 모이기 시작했다. 간부가 아닌 노조원들은 직장 안에 있는 노조사무실에 모여 구호와 노래로 분위기를 띄웠다. 노동자들은 다 같이 '쌀을 다오 !' '일급제 반대 !' '임금인상!' 등의 구호를 힘차게 외쳤다. 그리고 각 직장노조 사무실이나 투쟁위원회 사무실 앞에 모여 '적기가'와 '해방의 노래' '농민의 노래' '인터내셔날가', 그리고 '나아가자 조선' 등의 투쟁가들을 함께 불렀다.(정영진,{폭풍의 10월},한길사.).
'쌀획득투쟁'이 온나라 곳곳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던 1946년 7월과 8월, 주로 기관차 와 차량을 고치던 '서울 철도국 경성공장'에서도 전평의 분회대표를 중심으로 쌀배급과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투쟁을 벌였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정은 '적자타개와 노동자관리의 합리화'라는 핑계를 대면서 운수부 종업원 25 %를 감원하고 월급제를 일급제로 바꾼다는 방침을 밝혔다. 노동자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노동자들이 가슴에 묻어둔 투쟁의 불씨에 기름을 부운 셈이었다. 드디어 9월 13일 경성공장 노동자 3천 700여명은 태업에 들어갔다. 16일 노동자들은 요구사항을 문서로 만들어 미군정 운수부장에게 전달하고 21일까지 성의있는 대답이 없으면 파업한다고 통고했다. 19일부터 부산철도 당국에 같은 요구조건을 내걸고 부산철도공장 노동자 약 7천명이 23일 오후 1시 파업에 들어가면서,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그 다음날 서울의 1만 5천명 철도노동자들이 부산노동자들에 호응하여 파업에 들어갔다. 파업은 곧 전국 철도노동자들로 번져 4만명이 참가함으로써 모든 열차가 멈췄다. 9월 26일 전평은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위하여 남조선의 4만 철도노동자를 선두로 일대 민족투쟁을 전개한다."는 '총파업선언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경제적 요구와 함께 정치범 석방, 반동테러 배격, 정간된 신문의 복간과 구속된 사원 석방, 지명수배와 체포령 철회 등을 요구했다. 이것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을 함께 벌인다는 전평노선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9월 28일부터 10월초까지 서울의 중앙전신전화국,우체국,경성전기주식회사, 부산전신국등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다. 남한 일대의 운수와 통신기관은 마비되었다. 이밖에 10월 2일 인천부두노동자 3천명이 파업하고, 출판부문노동자도 파업했다. 전평의 아성인 조선해원동맹 산하 선원은 인천 목포 부산 등 항구에서 실업선원생활보장을 요구하며 9월 27일부터 태업을 하고 10월 3일 파업에 들어갔다.(김사옥, {한국노동운동사}, 산경문고)
9월 총파업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 얼마일까. 그때 통계들은 서울에서만 295개 기업에서 파업이 일어나 3만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하고, 1만 6천여명의 학생들이 동맹휴학했으며 남한 전체로 보면 25만 1000여명 노동자가 파업에 참가했다 한다. 또 다른 자료는 서울 6만 5천을 비롯 남한 전체에서 26만 4000명이 파업에 참가했다 한다.( 성한표, [9월총파업과 노동운동의 전환] {해방전후사의 인식} 2) 이 9월 총파업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큰 총파업이었다.
미군정이 파업노동자를 가장 크게 친 것은 '남조선 총파업투쟁위원회'가 있던 용산 경성공장을 습격한 사건이다. 장택상 수도청장이 지휘하는 2천명 남짓한 경찰들은 농성하던 2천 철도노동자를 30일 새벽 2시에 공격했다. 그리고 '애국청년단'과 '대한노총'사람들이 농성장에 들어가 두명을 죽이고 1400여 파업노동자를 검거했다. 이때 '장군의 아들' 김두한도 큰 몫을 했다. 김두한은 이렇게 떠벌였다.

" 여러곳에 숨어있던 전평원을 색출, 창고에 몰아넣고 점검해보니 2000여명이나 되었다. ......너희들 중에 이번 파업간부를 뽑아내어라. 안 그러면 할 수 없다. 개솔린을 뿌리고 불을 지르겠다. ..... 모든 철도원에게 즉각 취업하라고 지시했다. 만일 직장에 복귀하지 않으면 가족까지도 몰살해버리겠다고 말한 후 서약시켰다."

그때 대한노총 영등포 기계제작소 분회 선전부장이었고 이 작전에서 후문 소대장을 맡았던 김말용씨의 증언을 더 들어보자. "30일 아침부터 영등포지역 대한노총원들과 함께 출동하여 외부세력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경비를 섰습니다. 후문 쪽에서는 김두한이가 쌍권총을 들고 서있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긴장되는 순간이었지요." " 9월말인데도 파업노동자들을 구하러 온 사람들은 모두가 반소매의 흰옷을 입고 있었는데, 총격전에 밀린 흰소매부대들은 마포강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고 우익들이 그 뒤를 쫒아가면서 총을 요란하게 쏘아댔습니다. 총을 피해 강으로 뛰어든 사람도 있고 사살된 사람도 수십명이 되었습니다.({월간노동자}, 1989년 창간호.)(최규진)

10월 인민항쟁(1946.10)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1993, 63)
사진은 '대구폭동'의 중심지가 됐던 대구역 광장 앞의 상가 건물.
쌀 지키는 의용 경찰대
(4.7언론인회, 기자 25시, 1984, 43)
'대구폭동' 이후 각 지역별로 청년단원을 동원, 의용경찰대를 동원하여 쌀을 지키는 모습.
조선민족청년단(1946.10)
(이경모, 격동기의 현장, 눈빛, 1991, 36)
전라남도당 결성식(1947년 여름). 앞줄 맨 왼쪽에 있는 이가 뒷날 신민당 국회의원과 국회부의장을 지낸 김녹영. 우익 단체인 민족청년단과 대동청년단은 국방군에 병력을 공급하는 주요 원천이 되었다.
남조선 노동당 결성(1946.11.23)
(중앙일보사, 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1992, 239)
1946년 밀담을 나누고 있는 박헌영과 여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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