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은 마지막 웃음이 진짜 웃음인 것’처럼 인간의 참 삶은 마지막을 잘 마무리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인간사회엔 이성에 바탕한 상쇄율(相殺律)이 있어 공이 과를 상쇄하기도 한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한국 근대사에서 아관파천을 주도해 나라의 이권을 러시아에 넘겨준 친러파....
이범진(李範晉:1852~1911)
본관은 전주(全州) 이씨, 자는 성삼(聖三)이다. 그의 부친은 이경하(李景夏)이며 조선왕조 무관으로 병인양요 때 로스제독이 이끄는 프랑스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로 이끈 주역이다.
이경하의 서자로 서울 낙동에서 출생하였으며 1879년(고종 1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명성황후(明成皇后)의 후원으로 궁중에 출입하였고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882년 통리기무아문 주사로 임명되었고 1884년 홍문관 수찬,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서 1887년에 협판내무부사.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친일내각을 구성하여 내정간섭을 강화하자 이에 위기를 느낀 고종과 민비는 이범진, 이완용을 입각시켜 친러내각을 구성했다.
농상공부대신서리가 되어 친로정책을 추진.
1895년(고종 32) 일제가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키자 러시아공사관으로 달려가 도움을 요청.
일제와 친일파가 주도하는 제4차 김홍집내각이 들어서자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하여 1895년 10월에 고종황제를 미국공사관으로 탈출시키려는 춘생문(春生問)사건을 주도하였다가 실패하자 러시아의 도움으로 중국 상하이로 망명.
춘생문사건(春生門 事件)-1895년 을미사변 이후 친일세력에 의해 감금되다시피한 고종이 친미파에게 밀지를 내려 왕궁 밖으로 탈출하려고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사건
. 단발령 등 과격한 개혁으로 민심이 소란한 틈을 타서 다시 국내에 잠입한 이범진은 러시아를 설득하여 조선으로 군대를 파견하도록 하였다. 1896년 2월 7일 인천(仁川) 제물포항에 러시아 군함이 입항했으며 1백 여명의 군사가 러시아공관 수비를 명분으로 서울에 입성.
이범진은 엄상궁과 긴밀하게 협조하여 고종황제와 황태자를 러시아공관으로 옮기는 1896년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후 김홍집, 정병하 등을 몰아내고 아관파천내각의 법무대신 겸 경무사가 돤다.
그해 7월 군인을 경복궁에 투입,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 농상공부대신 정병하(鄭秉夏) 등을 죽이고 박정양(朴定陽)을 수반으로 친러파 내각을 조직하였다. 이범진은 을미사변 재수사를 주장하여 일본을 압박하였다.
그러나 권력투쟁에서 밀렸는지 1896년 7월 제물포에서 프랑스 군함을 타고 미국 워싱턴으로 떠나 주미공사로 3년간, 1899년 3월 프랑스공사(公使)에 임명되어 1900년 부임지인 프랑스 파리에 도착하여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가한 대한제국의 공식행사를 주관하였고 1900년에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압력이 높아지자 일본 견제를 위한 러시아 외교 강화 차원에서 1901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상주공사로 전임되어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공사를 겸임하였다.
1901년 다시 러시아공사에 임명되어 일본을 견제하는 외교적 역할을 부여받았다.
고종과 짜르의 밀서를 전달하며 러시아의 지원을 호소하였지만 러시아는 만주지역의 이권사업에만 관심을 두었다.
주러시아공사로 있을 때 러시아는 한국의 친로수구파정부에게 용암포 항의 조차를 요구하였고 한국정부에서는 이를 허락하여 용암포 조차를 승인하는 공문을 이범진에게 보냈으나 이범진은 용암포의 러시아에의 조차를 강경하게 반대하고 이 공문을 러시아정부에 전달하지 않았다. 한국정부에서는 그를 파직하고 참서관 김인석을 대리공사로 임명하여 이 공문을 전달한 다음에 후에 이르러서야 공사로 복직시켰다.
용암포사건 (龍巖浦事件)-1903년(광무 7) 러시아가 한국의 용암포를 강제점령하고 조차(租借)를 요구한 사건
1904년 2월 러일전쟁(露日戰爭)의 패전으로 조선에서 러시아 세력이 몰락하자 이범진은 러시아에서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조선으로 돌아 갈 수 없는 그의 처지.....
일본 외무성은 주재국 정부를 통해 외교권을 박탈당할 때까지 한국이 청·일본·미국·러시아·영국·프랑스·독일 등 9개국에 개설한 한국 공관 폐쇄를 요구했다..
한국 외교관들이 본국의 훈령이 없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자, 12월 외부대신 이완용 명의로 폐쇄 훈령을 내렸다. 주일공사 조민희, 주독공사 민철훈, 주미대리공사 김윤정, 주청(駐淸)대리공사 박태영은 훈령에 따라 공관 기록과 재산을 주재국 일본공사에게 넘기고 귀국했다. 주불(駐佛)공사 민영찬은 고종의 밀명을 받고 워싱턴을 방문해 미국 국무장관에게 을사늑약의 무효화를 위한 도움을 구했지만,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
주러공사 이범진(李範晉·1852~1911)은 일제의 소환에 불응하고 양국황제의 밀사의 명목으로 계속 러시아 수도에 체류하면서 러시아 공사관이 폐쇄된 이후에도 선생은 페테르부르크 시내의 아파트에 옮겨 살면서 1910년까지 여권발급 등 공사업무를 계속하였다.
1907년 고종은 이범진을 통해 국제사회에 조선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1907년에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이 파견하는 밀사 이상설, 이준이 러시아 수도에 도착하자 그들과 협의하여 고종의 친서를 작성하고 아버지가 공사로 있던 상트페테르부르크 공관에서 1등 서기관으로 일하던 아들 이위종을 밀사로 임원 겸 통역으로 동반케 하였습니다. 러시아 황제에게 후원을 요청하여 특사들을 러시아 호위병의 보호를 받으면서 헤이그에 무사히 도착케 하고, 러시아 대표의 알선으로 각국 신문기자들에게 한국밀사들이 연설할 기회를 만드는 등, 헤이그 밀사 파견과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또한, 1908년에 연해주에서 의병을 조직할 때 지원금을 보내었으며, 1909년에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의 계동학교, 세동학교, 신동학교를 통합하여 큰 규모의 한민학교를 설립할 때에도 1천 루불을 보내어 교포들의 교육 구국운동을 지원하였다.
해외 항일 언론의 모태이기도 한 ‘해조신문(海潮新聞)’이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간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범진은 곧바로 축하편지와 함께 지원금을 보낸다. 3년 전 ‘황성신문’에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의 논설로 세상을 일갈했던 장지연 선생이 주필을 맡은 ‘해조신문’은 재러 한국인들이 만든 최초의 한글신문으로서 비록 3개월 동안(1908·2·26~5·26) 총 75호를 낸, 단명의 신문이었지만, 국내외 동포들의 항일 민족의식을 북돋는 데 크게 이바지한 애국의 목탁이었다. 이범진은 같은 해 연해주 크라스키노에서 결성된 대표적 의병투쟁 조직체인 ‘동의회(同義會)’에도 금 1만루블을 휴대한 아들 이위종과 그의 장인인 사돈 놀켄 남작을 보내 지원한다. 그뿐만 아니라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거주지 신한촌의 민족교육기관인 한민학교 설립에도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러일전쟁 이후 일제가 더욱 악랄하게 기승을 부리자 이범진은 국내 진공까지 시도한다. 당시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전 간도관리사 이범윤(李範允)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연해주 방면에서 두만강을 건너서 일거에 함경도를 점령하고, 길게 몰아쳐서 서울에 들어가 승리의 노래를 연주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럴 때 자신이 총사령관, 이범윤이 부총사령관이 될 것이라고 거듭 천명한다. 그 후 안중근의 의형제인 엄인섭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협심해 의병봉기를 일으킬 것을 촉구한다.
그는 1905년 6월부터 1911년 1월 자결할 때까지 홀로 비서와 함께 살았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전 재산을 정리해 서슴없이 각지에 후원금으로 보낸다. 자료에 의하면, 당시 그는 자산으로 7만루블을 갖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 미주 국민회에 5000루블, 미주 무관학교에 3000루블, 미주 신문사에 1500루블, 하외이에 1000루블, 블라디보스토크 청년회에 2000루블, 블라디보스토크 신문사에 1000루블을 각각 기증한다. 그리고 자신의 장례비로 5000루블, 아들 이위종 부부에게 약간의 금액을 유언으로 남긴다. 장례비만 남겨놓고 독립운동에 사재를 다 털어놓은 처지라서 옷이나 시계 등 가재를 전당포에 맡기고 돈을 빌려 쓰는 궁핍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1911년 1월14일과 22일자 지면에 한 동양인의 자결과 장례 소식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1월13일 낮 12시 한국 공사인 ‘왕자 이범진’(59세)은 체르노레친스카야 거리 5번지에 있는 방이 6개가 달린 한 목조건물 거실에서 천장 전등에 밧줄을 설치하고 목 매달아 사망했다. 밧줄로 목을 맨 상태에서 권총으로 자신을 향해 총 3발을 쐈으나 탄환이 벽과 천장을 향해 빗나갔다. 고인이 관할 경찰서장 앞으로 보낸 유서에는 “그 누구에게도 잘못이 없고 지극히 평정한 마음 상태에서 자결한 것이며, 이는 조국이 주권을 빼앗긴 상태에서 더 이상 목숨을 부지할 명분이 없고
이범진은 고종황제에게 “우리의 조적에게 복수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자결 원인을 담담히 적고 있다.
1월21일 ‘애국왕자’의 시신이 안치된 페트로파블롭스키 병원에서 거행된 장례식에는 친지들과 함께 각지에서 온 한국 교민대표단과 조문객 등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 고인을 바랬다. 태극기가 덮인 관과 조문객을 태운 세 대의 운구열차가 핀란드역을 떠나 장지인 우즈펜스키 묘지에 이르러 그곳에 시신을 안장했다. 비명에 간 고인의 유언이런가, 영안실이나 장지에서는 아무런 장례의식이나 추도사도 행해지지 않았다.
대한은 이미 죽었습니다. 전하께서는 모든 권리를 빼앗겼습니다. 소인은 적에게 복수할 수도, 적을 응징할 수도 없는 무력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소인은 자살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소인은 오늘 생을 마감합니다
이위종 (李瑋鍾 , 1887~?)
주 러시아공사를 지낸 이범진(李範晉)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7세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영국·프랑스·러시아 등 각국을 순회하여, 영어·프랑스어·러시아어에 능통하였다. 1896년 부친이 주미공사로 임명되자 워싱턴으로 갔으며 1899년 부친이 다시 주 프랑스 공사관으로 임명되자 공사관 서기생으로 일했다. 1901년 러시아 페테르부르크 주재 한국공사관 참사관을 지냈으며 러시아 놀켄 남작의 딸과 결혼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러시아공사관이 폐쇄된 후에도 부친 이범진과 함께 러시아에 남아 외교적 활동을 전개했다.
1907년 고종의 밀령을 받고 이준(李儁)·이상설(李相卨)이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자 부친 이범진과 함께 러시아 황제 짜르에게 지원을 요청하였고 이위종은 이들과 함께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네덜란드의 헤이그로 갔다. 일본의 방해공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만국기자협회를 통하여 연설할 기회를 얻어 일본의 야만적 침략행위를 공박, 세계의 여론에 호소하였다. 이에 일본은 이들 3인에 대한 궐석재판(闕席裁判)을 열어 종신형을 선고하고 체포령을 내렸다. 현지에서 울분으로 순국한 이준을 헤이그 시립공동묘지에 안장하고 이상설과 함께 미국으로 갔다.
그 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최재형(崔在亨), 이범윤(李範允) 등과 의병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여 두만강 일대를 중심으로 항일 군사작전을 펼쳤지만 일본을 의식한 러시아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부친 이범진의 자결로 받은 충격과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졌으며 러시아 시민이되어 혁명에 가담하였고 혁명군과 연대하여 조선의 해방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후 그의 행적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러시아 귀족인 놀켄 남작의 딸 엘리자베타와 결혼해 낳은 3명의 딸 가운데 둘째 딸의 후손인 피스쿨로바는.
"1919년 8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3.1절 기념 집회에서 이위종인 것이 거의 확실한 한국인 적군(赤軍) 장교가 연사로 나와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들을 모아 부대를 조직한 뒤 시베리아와 한국에서 일본인들을 몰아내기 위한 전투에 내보내 줄 것을 소련 정부에 요청하자고 호소했다는 신문기사 뿐이다. 이후의 행적을 보여주는 자료는 구하지 못했다.
이에 앞서 그가 1910년대 중반 블라디미르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볼셰비키 혁명 후 적군에 입대해 극동 지역에서 혁명 간섭군인 일본군과 싸웠다는 기록도 있다. 러시아 공산당 적군(赤軍)의 힘을 빌려 일본을 무찌르고 조국을 해방시키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라고 전한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초상화 출처 http://www.consumertimes.net/news/article.html?no=6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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