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오적’이란 말....
마녀사냥 내지 희생양의 의미가 다소 곁들인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 침략을 막고자 하는 사람들이 고종과 대한제국을 부정하기 힘들기 때문에 대신 몇 사람에게 상징적인 책임을 집중시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대신들의 그 후 행적을 보면 국가와 임금에 대한 충성은 차치하고 “인간이 어찌 저럴 수 있었을까?” 싶은 파렴치한 면모를 많이 보인다. 그러나 1905년 당시에는 고종에게 적어도 충성하는 척이라도 하며 그 눈치를 보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고종에 의해 그 자리에 임명된 자들이었고, 고종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지 않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을사조약 체결에서 그들이 매국 행위를 했다 하더라도 그 역할은 고종의 대리인 노릇을 크게 넘어서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과연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나? 당시 대한제국 의정부에는 참정 한규설을 위시해 8명의 대신이 있었다. (9인이라고 하는 설도 있으나 명단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태진, 사사가와 노리가츠 공편 <한국 병합과 현대>(태학사 펴냄) 소수 이태진, “1905년 ‘보호조약’에 대한 고종황제의 협상지시설 비판”에 나타난 8인뿐임.) 참정대신 한규설(1848~1930), 외부대신 박제순(1858~1916), 내부대신 이지용(1870~1928), 군부대신 이근택(1865~1919), 법부대신 이하영(1858~1919), 학부대신 이완용(1858~1926), 탁지부대신 민영기(1858~1927)와 농상공부대신 권중현(1854~1934)이다.
이들의 경력을 살펴보면 우선 정통 관료의 비중이 적다는 점과 대외관계 종사자의 비중이 크다는 점이 눈에 띈다. 정통 관료에 제일 가까운 것은 문과 출신의 박제순과 무과 출신의 한규설이었다. 이지용은 흥선대원군의 형 이최응의 손자인 종친이었고, 민영기는 여흥 민씨 척족이었다. 이완용과 이하영은 문과 출신이지만 일찍부터 대외관계에만 종사했다. 권중현은 ‘일본통’으로 등용된 인물이었고, 이근택은 임오군란 때 충주에 피신해 온 민비에게 잘 보여 고종의 측근으로 자라난 인물이었다.
이들 중 다섯 명이 ‘을사오적’의 이름을 받았다.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친일파 99인>(돌베개 펴냄)에서 이들의 행적 두드러진 것을 뽑아본다.
이완용은 원래 영어를 익히고 ‘미국통’으로 활동하다가 아관파천 때 친러파 정부에 참여해 정치적 위상을 키웠다. 독립협회 초대 회장을 맡았으나 대한제국 건립에 독립협회를 이용하는 목적을 넘어 깊이 개입하지는 않았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산이 분명해지자 일본에 협조적인 태도를 취해 을사조약 체결 당시 의정부 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고, 합병조약 때는 총리대신으로서 주동적인 역할을 맡았다. 당시 대부분의 친일파가 일본에 일방적으로 손을 내밀고 매달린 것과 달리 이완용은 일본 쪽에서 필요로 해서 손을 뻗쳐 온 경우라 볼 수 있다.
권중현은 개화파 중 일본통으로 평판을 누리고 있다가 1888년 일본 시찰을 계기로 친일 활동을 꾸준히 하게 되었다. 1897년 황제 즉위를 청하는 상소에 앞장선 공으로 대신의 반열에 올랐다. 1907년 군부대신 직에서 물러난 후로는 적극적인 활동이 없었다.
이지용은 을사오적 중에서도 가장 더러운 소문을 많이 일으킨 인물이다. 탐관오리로서의 악명도 쟁쟁했고, 너무 앞선 신여성이었던 그 아내 홍씨가 일본인들과 놀아나며 일으킨 엽기적 스캔들이 <매천야록>에까지 적혀 있다. 을사조약에 앞서 1904년 2월의 한일의정서도 그가 외부대신 서리로서 저지른 일이었다. 을사오적이 일본의 뇌물을 받았다는 말도 떠도는데, 다섯 사람이 다 사전에 뇌물을 받은 것 같지 않지만 이지용이 받은 것은 분명하다.
이근택은 임오군란 때 왕실에 줄이 닿은 인물인데 대한제국 설립 무렵부터 중용되기 시작했다. 재정-외교 분야의 이용익과 나란히 군사-경찰 분야를 맡아 고종의 가장 큰 신임을 오랫동안 받은 친러파 기수였다. 러일전쟁 개전 직후 이용익이 납치되다시피 일본에 끌려간 반면 이근택은 친일로 돌아섰고, 친일파 중에도 악질 친일파로 이름을 날린 사실이 <매천야록> 여러 기사에 나와 있다.
김윤식의 문인인 박제순은 친청파로 경력을 시작했고 1902~04년간에도 주청 공사 직을 지냈다. 한규설의 전기에는 박제순이 마지막까지도 “이미 이 사람의 뜻은 정해져 있습니다. 힘이 미치지 못하면 죽을 따름이지요.” 하며 조약 반대의 뜻이 굳건했다고 한다. 그가 마지막 회의에서 무슨 이유로 뜻을 바꿨는지는 어느 자료를 봐도 석연하지 않다. 한규설이 축출된 후 참정대신 자리를 물려받았고 합방 후까지 계속 일제에 협력하였으나 특별히 두드러진 행동은 없었다.
이렇게 다섯 사람이 ‘을사오적’이다. 8인의 대신 중 3인이 이 오명을 피했으나, 그중에서 친일을 끝내 거부한 사람은 한규설 하나뿐이었다. 이하영과 민영기는 을사조약 한 가지 일에만은 나서지 않았지만, 어느 친일파 못지않게 일제에 열심히 협력했고 합방 때 작위도 받았다.
이지용이 회의를 끝내고 나오면서 “나는 오늘 병자호란 때의 최명길이 되고자 한다. 국가의 일을 우리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일갈했다는 이야기가 <매천야록>과 정교의 <대한계년사>에 나와 있다. 당시의 친일파도 나름대로 자기합리화에 애썼음을 알겠다. 그러나 이건 너무 얄팍하다. 최명길에게는 벌어져 있는 전란으로부터 구해줘야 할 백성이 있었고, 청나라에 항복해서 잃는 것은 명나라와의 관계뿐이었다. 명나라와의 관계도 물론 중요한 것이었지만, 비현실적 정통론으로 나라를 망치는 것과는 댈 것이 아니었다. 1905년의 상황을 1636년의 상황에 갖다대다니, 정말로 두터운 낯가죽이다.
이지용과 함께 <매천야록>에서 많이 씹힌 것이 이근택이다. 그런데 이근택의 처신은 이지용처럼 확실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에 관한 <매천야록> 기사를 뽑아 본다.
이근택은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와는 형제의를 맺었고, 이토 히로부미에게 의탁하여 의자(義子)가 되었다.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었으며 일본 신발까지 신고 일본 수레에 앉아 항상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출입하였다.
한 취객이 그의 수레를 당기며 흘겨보고 말하기를 “네가 왜놈이라 하는 이근택인가. 오적의 괴수로 그 영화와 부귀가 이에서 그치는가.” 하니 이근택이 크게 노해서는 그를 결박지워서 경찰서로 보냈다. 그 취객은 모진 고문으로 기절하였다가 밤이 깊어 깨어나서 말하기를 “네놈은 반드시 나를 죽일 것이다. 나 또한 명백히 욕질을 하였으니 죽어도 통쾌하다. 저들의 손에 죽느니 스스로 죽자.” 하고 드디어 의복을 찢어 목을 매어 자결했다고 한다.
이근택의 아들은 한규설의 사위다. 한규설의 딸이 시집올 때 계집종 하나를 데리고 왔는데, 세상에서 말하는 교전비라는 것이다. 이때 이근택이 대궐에서 돌아와 땀을 흘리며 숨찬 소리로 아내에게 억지로 맺은 조약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가 다행히도 죽음을 면했소.”
계집종이 부엌에 있다가 그 말을 듣고는 부엌칼을 들고 나와 꾸짖었다. “이근택아. 네가 대신까지 되었으니 나라의 은혜가 얼마나 큰데, 나라가 위태로운 판국에 죽지도 못하고 도리어 ‘내가 다행히 살아났다’고 하느냐? 너는 참으로 개나 돼지보다도 못하다. 내 비록 천한 종이지만 어찌 개, 돼지의 종이 되고 싶겠느냐? 내 힘이 약해서 너를 반 토막으로 베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차라리 옛 주인에게 돌아가겠다.” 그러고는 뛰어서 한규설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 계집종의 이름은 잊어버렸다.
이근택은 임오군란 때 충주에 피신해 온 민비에게 매일 신선한 생선을 바쳐 점수를 땄다고 한다. 열여덟 살 때의 일이다. 그러고도 미관말직을 겨우 얻어가지고 있다가 민비가 죽은 후 어느 일본상점에서 민비의 것으로 보이는 수대(繡帶)가 눈에 띄어 거금으로 사다가 고종에게 바치면서 총애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에피소드가 100% 사실일 것 같지 않다. 조폭 스타일의 충성관계에 너무 전형적인 에피소드이기 때문에 임금과의 밀착관계를 적당히 설명하는 데 쓰인 얘기 같다. 마찬가지로 임오군란 때 민비와 인연을 맺었던 이용익과 함께 다년간 고종의 심복 중의 심복 노릇을 한 것은 이런 식의 개인적이고 직선적인 충성 외에는 이유를 생각할 길이 없다. 그런 인물은 부귀영화를 찾더라도 한 구멍에서만 찾는다. 이리 재보고 저리 재보며 유리한 쪽으로 말을 바꿔 타는 스타일이 아니다.
미천한 신분 때문에 어차피 선비들의 입방아에 오르기 쉽던 그는 친러파 치안 책임자로 일할 때도 위악적 태도로 “더럽고 악랄한 놈”이란 악명을 자청했을 것 같다. <매천야록>에 적힌 정도의 행태는 욕을 일부러 사서 먹음으로써 의도하는 방향의 처신을 쉽게 하기 위한 책략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절의가 분명히 드러날 인물인 한규설이 그와 사돈을 맺었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겉보기만으로 판단해 버릴 인물이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이근택의 ‘변절’이 고종의 밀명에 따른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고종은 술수와 책략에 사족을 못 쓰는 임금이었다. 을사조약 같은 상황 앞에서 그가 양다리 걸치기를 시도하지 않았으리라고 상상하기 힘들다. 한편으로는 밀사들을 통해 조약 체결이 자기 뜻이 아니었다고, 국권 회복을 도와달라고 열강들에게 읍소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믿을 만한 충복을 친일파에 들여보내 정보도 수집하고 조그만 이익이라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을 것이다.
“5적”이란 이름이 굳어져 있지만, 사실 당시의 8대신 중에 ‘7적’이 있었다. 대한제국 신하 노릇을 온전히 한 대신은 한규설 하나뿐이었다. 이들을 대신으로 임명하는 데 일본의 강압이 있은 것도 아니었다. 오랜 기간에 걸친 고종의 선택이 남긴 결과였다.
을사조약과 경술국치 앞에 목숨을 스스로 끊은 사람들도 있었고 의병과 독립군으로 나선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게 드러난 행동을 하지 않아도 자기 자리에서 피눈물을 흘린 사람들은 수없이 많았다. 그런데 1905년 11월에 국사를 앞장서서 맡고 있던 8인의 대신 중 7인이 을사조약 체결을 피할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이면서 사태의 진전에서 개인적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을 사양 없이 받아들였다. 대한제국 의정부는 당시의 국민들 또는 지식인 계층과 다른 분위기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밤중에 조약이 날인된 후 일본인들이 군인들을 이끌고 물러간 뒤에야 연금 상태에서 풀려난 한규설을 둘러싸고 대신들이 한바탕 방성통곡을 터뜨렸다고 한다. 통곡 중에 그들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들이 떠오르고 지나가고 있었을까 궁금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자기 옆의 동료 대신이 자기와는 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는 사실을 함께 일해 오면서 각자 잘 알게 되어 있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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