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 8. 09:37


조선왕조 그리고 대한제국 마지막 황후는 순종의 두 번째 부인인 순정효황후(1894 ∼1966)다. 윤택영(尹澤榮 1866 ∼1935)의 딸로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순종의 황태자 시절인 1904년에 황태자비 민씨(훗날 순명효황후로 추존) 가 사망하자, 1906년 12월 13세에 황태자비로 택봉되었고, 1907년 일본이 고종을 강제폐위하면서 순종이 황제로 즉위하자 14살의 나이에 황후가 되었다.

그런데 친정아버지인 윤택영이 당시 황후이던 엄비에게 거액의 뇌물을 바쳐서 간택되었다는 소문과 그때 진 빚에 얽힌 일화들...



엘리자베스 키스의 화집인 <옛한국(Old Korea, 1946년 영국 발행)>의 그림 중에 '궁중 예복을 입은 공주(Princess in court dress)'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녀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후인 해평 윤씨 순정효황후(1894 ∼1966)의 여동생 연희전문 부교장을 역임한 유억겸(兪億兼 1895 ~ 1947)의 부인인 윤희섭이다.

조선시대 예복(禮服)인 당의(唐衣)를 입고 화려한 족두리를 쓰고 있는 모습이 예사로운 신분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한다. 키스는 이 그림을 설명하면서


"그녀는 머리에 까만 띠를 하고, 그 위에 금으로 만든 새를 붙이고 있었다. (She wore on her head a black band with a tiny gold bird in the front, the Korean insignia of royalty.) 그녀가 몰락한 조선왕조 왕족의 공주라는 표시였다. (This was a Princess of the deposed Korean Royal House.)"

--<옛한국> 65쪽

키스는 이 여인이 "크리스천 계열 대학의 교수와 결혼한 유부녀였다(She was married to a Korean professor of a Christian college. <옛한국> 65쪽)"


당시 서울에서 크리스천 계열의 대학은 연희전문뿐이었고, 연희전문 부교장을 역임한 유억겸(兪億兼 1895 ~ 1947).


근대 유명 인물들의 신상을 기록한 <인사흥신>(1935년 발행)에서 유억겸을 찾아보면, 근대의 선구자 유길준의 아들이다. 1937년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던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사건으로 윤치호(尹致昊)·장덕수(張德洙) 등과 함께 검거되어 3개월 동안 옥고를 치뤘다. 광복 후에는 연희전문학교 교장,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 회장, 미군정청 학무국장, 1946년 초대 문교부장 등을 지냈다. 문교부장 당시 국립대학설립안(국대안)을 실현시켰지만, '국대안 반대운동'이 전개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가회동(嘉會洞 9-2호)에 거주하고 있고 부인은 윤희섭(尹喜燮 1905년 11월 생)이다.



그리고 윤희섭이 왕실과 어떤 관계인지는 1936년 9월 21일자 매일신문 기사를 통해 확인된다.


매일신보 1936년 9월 21일자에 실린 ''대비전하 생모 사망' 부고 기사를 보면, 유억겸 연희전문 부교장의 부인은 '창덕궁 대비전하'(순정효황후, 당시 호칭 윤비)의 여동생임이라고 했다. 따라서 연희전문 부교장 유억겸은 해풍부원군 윤택영 후작의 사위로 순종과 동서간이다. 따라서 엘리자베스 키스가 그린 여인은 '공주'가 아니라,

"당당하고 기품이 있었다.'면서, 그녀가 거처하는 방에는 사치품이 없고 깔끔했다고 했다.



그러면 이 그림은 언제 그린 것일까?


삼천리 잡지 1940년 3월호에 실린 '전 연희전문학교 부교장 유억겸' 기사를 보면 그가 윤희섭과 1922년에 결혼했음을 알 수 있다.


一, 先生 氏名 유억겸(兪億兼) 연령 44 고향 경성(京城) 학력 도쿄 제국대학(東京 帝國大學) 법학부 졸업

영부인(令夫人) 氏名 윤희섭(尹喜燮) 연령 35 고향 경성(京城) 학력 가정교육 뿐

★ 두 분께서는 연애결혼 하섯슴니까, 媒約 결혼 하섯슴니까.

「媒約 결혼」

★ 결혼식은 몃해 전, 어느 지방서, 그때 주례는, 축사한 인사는, 주요한 내빈은?

「距今 심팔년 전, 京城, 故 이강원(李康原) 목사 주례」

★ 신혼여행은 어느 지방으로 몃츨 동안이나 가섯슴니까.

「간 일 없읍니다」

二, 貴 가정의 가훈

「信 言行心思 善」

--<삼천리> 제12권 제3호(1940.3.1)


키스는 이 여인이 유부녀라고 했으니, 1922년 이후에 그린 그림이다. 그런데 키스는 <옛한국>에서 이 여인이 흰 상복을 입고 있다고 했다.


결혼을 한 1922년 이후 이 여인이 당한 상은 1926년 순종 국상, 1935년 친정아버지 윤택영 상, 1936년의 친정어머니 상이니, 1926년에서 친정어머니 상을 당한지 일년이 되는 1937년 즉 21살 ~ 32살 사이에 그린 그림이다.



친정아버지인 해풍부원군 윤택영과 그의 형 윤덕영(尹德榮:1873∼1940)은 우리나라 근대 황실 인척 중 가장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 형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황후의 아버지 윤택영은 조선 최고의 '채무왕'이었고, 숙부 윤덕영은 이완용에 버금가는 친일파였다.




윤택영이 큰 빚을 졌음은 1907년 6월 1일자 황성신문 기사를 통해 확인된다. 물론 기사에서는 결혼비용으로 진 빚이 2백만 냥이라고 했지만, 여기에는 황태자비 간택 뇌물 비용도 포함되어 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황성신문에 공개된 윤택영의 빚은 2백만 냥으로, 대한제국 금융 자료에 의하면 당시에는 10냥이 1원이었다. (쌀 한가마니에 4원) 따라서 2백만 냥이면 20만원인데, 당시 서울 시내에 있는 웬만한 기와집 값이 만원이었으니 20채 값이다. 요즘 서울 아파트 값으로 환산하면 최소 60억 원 정도다.



기사에 의하면 빚쟁이들이 매일 윤택영의 집 앞에서 빚 독촉을 했고, 순종은 황실의 체면과 품위유지를 위해 빚의 절반인 10만원을 특별하사금으로 하사했다. 그러나 자신보다 나이가 두 살이나 어린 장인을 둔 순종과 '채무왕' 아버지를 둔 황후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황성신문은 1910년 1월 15일자 보도에 의하면, 1907년에 20만원이던 윤택영의 빚은 순종이 반을 갚아줬음에도 불구하고 1910년에 50~60만원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1월 22일에는, 황후가 열흘마다 5백 원씩 보태준다는 설이 있음을 보도했다. 어질고 순하다는 평판의 황후의 마음고생을 시킨 건 친정아버지뿐이 아니었다. 윤택영은 강제합병 후 황후의 친정아버지에 대한 예우로 후작 작위를 수여받고 은사금으로 무려 50만원을 하사 받았었다. 당시 50~ 60만이던 빚을 다 탕감할 수 있는 액수였다. 그러나 그 돈으로도 빚을 갚기에 부족했는지, 1911년에는 빚 받으러 온 빚쟁이에게 재산이 3백 원뿐이라고 주장했고 빚쟁이는 소송을 했다. 결국 1911년 4월 11일, 집안에 있던 물건에 대해 경매가 붙여져 부인의 옷, 고종이 하사한 꽃병까지 경매되는 수모를 당했다.(‘매일신보’ 1911년 4월13일자 ‘윤후작의 재산경매’)


이런 수모에도 불구하고 윤택영의 빚은 계속 늘어났고, 빚쟁이의 단련을 견디다 못한 그는 큰아들 윤홍섭을 데리고 베이징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1920년 7월8일이었다. 그렇다면 1922년에 있었던 그림의 주인공인 둘째딸 결혼식은 어떻게 중매를 했고 어떻게 치뤘을까?


매일신보 1922년 11월 17일자에 보면, 황후의 여동생이자 윤택영의 둘째딸 '차순'(본명이 희섭이기 때문에 아명으로 추정)이 나이가 18세가 되어 "삼촌되시는 윤덕영 자작의 주장으로" 유길준 선생의 둘째 아들 유억겸씨와 약혼하고, 오는 20일 오전에 간동 97번지 윤택영 본댁에서 결혼식을 한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약혼 후 5일만에 결혼식을 하는 이유는 중으로 도망간 윤택영이 서울에 오래 머물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해도 무리가 없을듯하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할때, 당대의 명문가인 유길준 집안에서 '채무왕' 집과 혼사를 맺는다는게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에 대한 답은 <삼천리> 잡지 1939년 6월호에 있다.


人物評(一), 忠北知事 兪萬兼論 (인물평, 충북지사 유만겸)

氏의 父君(부군)이 바로 韓末 開化(한말 개화)의 先鋒(선봉)인 兪吉濬(유길준)씨다. 외국 유학을 처음 간 이요 改革內閣(개혁내각)의 內部大臣(내부대신)까지 지냈으며 그 第一子婦(萬兼씨의 夫人)(첫번째 며느리, 만겸씨의 부인)를 선택할 때에 優生學的(우생학적) 견지에서 또는 婚閥(혼벌)을 타파하는 의미에서 北婚(북혼)을 일부러 하였다는 것으로 보아도 당시에 보기 어려운 개화가정이었든 것을 알 수 있다.

-삼천리 통권 11권7호(1939.6.1)


혼벌은 세도가, 명문가, 재력가에서의 정략결혼인데, 유길준 가문에서는 큰 아들 유만겸이 결혼할 때도 혼벌을 타파한 개화가정이기에 '채무왕' 딸도 며느리로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윤택영은 빚쟁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줄 알면서도 둘째 딸의 결혼식에 참석했을까? 그 답은 순종실록에 있다.


딸의 혼인을 치루는 후작 윤택영에게 돈을 하사하다.

--<순종실록부록> 1922.11.15일


윤택영은 11월 15일에 서울에 있었고, 빚쟁들에게는 하사금 받아 주겠다고 둘러대며 결혼식을 치뤘을 것이다. 그리고 윤택영은 결혼식이 끝난 후 다시 중국으로 도망갔다.

중국에서 지내던 윤택영이 다시 귀국한 것은 1926년 순종이 승하했을 때다. 당시 언론 보도에 의하면 윤택영은 기차를 타고 왔는데, 빚쟁이들 때문에 서울역에서 내릴 수가 없어 문산역에서 내린 후 황실에서 보내준 승용차를 타고 빚쟁이들이 몰려 올려 올수 없는 창덕궁으로 직행했다. 그리고 상이 끝난 후에는 다시 문산으로가서 중국행 열차를 타고 다시 베이징으로 도주했다.



윤택영이 다시 중국으로 달아나자 빚쟁이들은 법원에 윤택영에 대한 파산신청을 했는데, 신청된 1926년 당시 채무 총액이 350만원이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당시 언론들은 재판때마다 중계방송하듯 공판결과를 보도했다.


조선의 마지막 부원군 윤택영은 순종 장례 이후 다시 고국 땅을 다시 밟지 못하고 1935년 10월 23일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났다. 황후 나이 어느덧 42살이었다. 13살 때부터 시작된 마음고생은 그렇게 끝났고, 허망한 슬픔만 남았다.



창덕궁을 떠나 낙선재로 간 순정효황후는 몰락한 왕실 친인척의 뒤치닥거리를 하면서 남은 생을 보냈다. 덕혜옹주가 기억상실증에 걸려 돌아오는 모습도 지켜본 황후는, 1966년 낙선재에서 71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슬하에 자녀는 없었다.




순정효황후는 1910년 9월 28일 국권이 강탈될 때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가 진행되는 것을 엿듣고 있었다.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합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황후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치마 속에 옥새(玉璽)를 감추고 내놓지 않았다. 그러자 숙부인 윤덕영이 황후의 치마 속으로 손을 넣어 옥새를 강제로 빼앗아 이완용에게 바쳤다.



윤덕영은 이 일로 강제합병 후 자작의 작위를 수여 받았고, 은사금 5만원을 받았다. 194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친일기관인 중추원 부의장, 고문 등의 요직을 역임했고, 총독부의 전시정책 자문기관인 시국대책조사위원회의 위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과 고문을 지냈다. 그는 아우와는 달리 재물을 모았고, 1920년 설립된 해동은행의 초대 은행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고종황제 국장 때 ‘분참봉첩지’를 위조해 판 혐으로 수사를 받게 되면서 곧바로 하차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분참봉첩지 위조사건’은 윤덕영이 주동이 되어 몇몇 다른 귀족들과 함께 고종황제의 장례식 때의 임시직인 ‘분참봉’에 임명한다는 첩지를 위조하여 판매한 사건이다. '분참봉' 첩지가 있으면 양반출신 행세를 할 수 있던 시절이라 수요가 있었고, 윤덕영은 이를 이용해 위조 첩지를 팔았던 것이다. 황후의 숙부이기에 벌일 수 있던 웃지못할 사기극이었다.

http://blog.ohmynews.com/arts/273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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