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6. 7. 11:24

위그노

https://namu.wiki/w/%EC%9C%84%EA%B7%B8%EB%85%B8%20%EC%A0%84%EC%9F%81

 고대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파리의 중심은 센 강 위에 항공모함처럼 떠 있는 '시테섬'은 방어에 적합하고. 그 시테섬의 중심에는 노트르담 성당

대표적인 고딕양식으로 당당하고 반듯하다. 성당 정면에 세워진 두 탑은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그 가운데 놓인 거대한 장미창은 은은한 화려하다

장미창 아래 일렬로 늘어선 왕들의 동상에는 위엄이 넘쳐난다. 이곳이 중세 이래로 프랑스 왕들이 미사를 드렸던 '왕의 교회'이기에 외관이 장중하고 다양한 스테인드글라스와 조각으로 장식된 내부의 화려함도 상상을 초월한다.

 

나폴레옹도 자신의 황제 대관식 장소로 이곳을 선택했다.

 

16세기에 유럽은 종교 때문에 분열됐고 다퉜다. 15세기에 절정을 이룬 교황청의 부패와 무능은 여러 국가와 다양한 계층의 반발을 샀다.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독일에서 행해진 조직적인 면죄부 판매는 특히 증오의 대상이 됐고, 마르틴 루터(Luther·1483~1546)'95개조 반박문'(1517)으로 파국을 맞았다.

 

교황으로부터 벗어난 새로운 교회가 생겼고 이 교회는 순식간에 유럽 전역으로 번졌다. 신앙의 분열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이어졌다. 프랑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더 심했다. 종교 간 분쟁에 부르봉, 기즈, 몽모랑시 등 대()귀족 가문들 간의 권력 싸움, 권력 집중을 추구하는 중앙 정부와 자치를 원하는 지방 세력 간의 다툼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1562년부터 양측은 전쟁에 돌입했다. 당시 프랑스의 권력자는 카트린이었다.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 출신인 카트린은 급사한 남편이 남긴 분열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딸과 신교도의 수장이며 프랑스의 왕족으로 강력한 부르봉 공작 가문의 수장이며 남프랑스의 작은 왕국 나바르의 왕이기도 했던 앙리 드 나바르와의 결혼을 추진했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오만한 귀족들 틈에서 자랐기에 강직하고 단호한 콜리니에게서 아버지와 보호자의 이미지를 함께 느낀 샤를 9세에대한 콜리니 제독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지자

카트린은 권력 상실에 대한 위기감, 콜리니에 대한 질투, 아들에 대한 배신감으로 치를 떨었다.

카트린은 콜리니를 제거하기로 하고 암살을 사주했다. 암살이 실패로 끝나면서 사태는 파국을 향했다. 분노한 왕은 암살과 관련된 모든 이를 색출해 법정에 세우겠다고 맹세했다.

카트린은 승부수를 던졌다.

아들에게 내가 암살의 배후이다

"어머니가 왜요?"라고 절규하는 아들에게 카트린은 "왜냐하면 이 왕국을 몰락시킨 무능한 왕을 낳은 사람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무너진 샤를 9세는 "모두 죽여! 다 죽여 버리라고!"

왕은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드디어 샤를 9(Charles )를 둘러싼 측근들이 간절히 원했던 말이 튀어나온 것이다. 여기서 '모두'는 왕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콜리니(Coligny·1519~1572) 제독을 비롯한 신교도 우두머리 스무 명을 뜻했다.

 

왕의 어머니인 카트린(Catherine· 1519~1589)과 가톨릭 귀족들은 결혼식을 정적을 제거하는 기회로 활용하고자 했다. 카트린은 침착하게 처형 담당자를 결정했다.

 

마침 그들 모두는

며칠 전 1572818일 노트르담 대성당 앞마당에서 거행된 신교도의 수장 앙리드나바르(Navarre·1553~1610)와 왕의 여동생 마르그리(Marguerite·1553~1615)의 결혼식 일명 마고의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석했기에 파리에 머물고 있었다.

 

드디어 재가를 얻어냈다.

 

1572824일 새벽, 성당의 종이 울리자 살인자들은 일제히 행동을 계시했다. 콜리니 제독이 가장 먼저 살해됐다. 광기(狂氣)는 순식간에 파리 전역으로 번졌다. 왕의 입에서 튀어나온 '모두'의 범위는 가볍게 스무 명의 경계를 넘어섰다. 신교도뿐 아니라 더 많은 가톨릭교도도 평소에 개인적으로 원한을 가졌던 이웃에 의해 살해됐다.

 

재미 삼아 벌어진 살인과 약탈, 강간과 방화도 무수했다. 왕의 명령도, 법의 권위도 파리 시민들의 광기 앞에선 무력했다. 몇몇 광신적인 사제들이 부추기는 가운데, 인간사냥은 사흘 동안 계속됐다. "센강 쪽으로 내리막을 이룬 골목길마다 마치 폭우라도 쏟아진 듯 피가 급류처럼 흘렀다."

 

파리의 학살 소식은 바람처럼 지방으로 퍼져나갔다. 학살의 비극은 지방에서는 석 달 동안 계속됐다. 전국에서 1~14000명이 희생됐다. 가톨릭과 신교 간의 화해는 루비콘강을 건넜다. 피로 물든 결혼식은 더 깊은 증오와 더 피비린내 나는 내전(內戰)을 프랑스의 앞날에 내던졌다.

 

이듬해 530일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로 큰 충격을 받아 병상에 누운지 오래였던 샤를 9세가 죽자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치의 셋째 아들이며 샤를 9세 동생으로 폴란드 국왕이 1575221일에 랭스에서 앙리 3세로 대관을 치르면서 프랑스 왕위에 올랐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5%99%EB%A6%AC_3%EC%84%B8

 

 파리의 신교도 대부분이 죽음을 맞았지만 새 신랑 앙리 드 나바르는 살아남았다. 그는 신성(神聖)한 프랑스 왕의 핏줄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가톨릭으로 개종해야 했다. 앙리는 살아남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가톨릭으로 종교를 바꾸고 연금 상태에서 불안한 삶을 이어가던 그는 신교도들의 도움으로 파리를 탈출했다.

대학살 후 프랑스의 내전은 더 격렬해졌다. 전투, 약탈, 무질서, 기근이 전국을 강타했다. 어느 진영도 물러서지 않았다. 1589년 앙리 드 나바르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발루아(Valois) 왕가의 마지막 왕인 앙리 3(Henri )가 후사(後嗣·대를 잇는 자식) 없이 사망한 것이다.

앙리 3세의 뒤를 이어 가장 가까운 혈족인 앙리 드 나바르가 앙리 4세 되어 왕위에 올랐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5%99%EB%A6%AC_4%EC%84%B8

 하지만 국민 대다수가 가톨릭 교도인 프랑스에서 신교도 국왕이 설 자리는 없었다.

 

탁월한 정치 감각의 소유자였던 앙리 4세는 누구보다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선택해야 했다.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온 나라를 피로 물들일 것이냐, 아니면 왕국 전체를 위해 자신의 신앙을 포기할 것이냐?

 

앙리 4세는 정통성을 갖춘 국왕인 동시에 막강한 군사력과 탁월한 리더십까지 갖추고 있었다. 무력으로 가톨릭을 굴복시키고 내전을 끝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앙리 4세는 나라를 위해 자신의 신앙을 포기했다. 파리도 용서했다.

 

20여 년 전 사랑하는 친구와 동지들을 자신이 보는 앞에서 무참하게 학살한 사람들을! 정통성을 갖춘 자신을 끝까지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도시를! 맺힌 한()의 크기는 컸지만 왕은 프랑스가 더 이상 전쟁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은 종교를 바꿨지만 신교도들에게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 줬다. 낭트의 칙령(1598)이다.

 

그렇게 전쟁은 끝났다. 평화가 찾아왔고 재건이 시작됐다. 앙리 4세가 결혼식을 올렸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서쪽으로 시테섬을 따라 십 여분을 걸어가면 유명한 퐁뇌프 다리가 나온다. 그 다리 앞에 당당한 앙리 4세의 기마상이 서 있다.

 

그러나 앙리 4세도 정치적·종교적 문제로 항상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 특히 낭트칙령으로 위그노에게 종교적 자유를 허용한 게 결정적으로 가톨릭 교회의 원한을 사게되었다. 이후 그는 무려 17차례나 암살 위기를 겪어야 했다. 결국 1610514, 독일의 율리히 공작령 계승 문제를 두고 루돌프 2세와 개신교 제후들이 갈등을 보이자, 개신교 신도들을 도우면서 합스부르크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대규모 원정계획을 의논하기 위해 쉴리공작을 만나러 가다가, 넘쳐나는 마차들로 인해 정체상태였던 파리 시가지에서 카톨릭교도 프랑수아 라바이약(François Ravaillac)에게 칼로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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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리 4세는 프랑스 생드니 대성당 바실리카에 안장되었다. 그가 죽고 장남 루이 13세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국정은 강력한 가톨릭 옹호자였던 모후 마리 드 메디시스의 손을 거쳐 가톨릭교회 추기경 리슐리외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루이 14세대에 이르러 가톨릭교회의 숙원대로 퐁텐블로 칙령으로 낭트 칙령은 철회되고, 개신교인들을 가혹하게 박해하게 된다.


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