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신문과 독립협회에 대해선 잘못 알려진 사실이 너무나 많다.
http://news.joins.com/article/22083310
‘일제 밀정’ 의혹까지 받는 #서재필 독립신문을 넘겨받은 #윤치호
최초의 순한글 신문인 독립신문 창간, 최초의 시민단체라 할 수 있는 독립협회 창건, 외세에 대한 독립 의지를 밝힌 독립문·독립관·독립공원 조성 계획 등은 모두 1896년에 일어난 일들이다. 1896년의 화두는 ‘독립’이었다. 독립신문이 그해 4월 7일, 독립협회는 7월 2일 첫선을 보였다. 이때 ‘독립’은 구체적으로 어떤 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할까.
‘독립’이란 글자가 들어가는 일련의 행사는 모두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국내 망명(아관망명·1896년 2월 11일)한 시기에 진행됐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갑오왜란·1894년 7월 23일) 이후 궁궐에 유폐돼 있던 고종이 아관망명을 통해 기사회생한 지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독립신문이 창간된 것이다.
청일전쟁에서 패한 1895년 이후 청나라는 이미 한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난 상태이므로 ‘반청 독립’은 사실상 큰 의미가 없던 상황이었다.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 터에 독립문을 세웠기에 ‘반청 독립’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이미 지나간 청일전쟁 이전의 과거사였다. 중국의 오랜 속박을 포함해 모든 외세로부터의 독립을 고종이 추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 외세 가운데 독립문 건립 당시 상황에서 한반도를 통째로 삼키려 했던 일제의 위협이 가장 강력한 현실적 폭력이었음을 놓쳐선 안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일본군이 조선의 왕후를 무참히 시해한 을미왜변(1895년 10월 8일) 직후였다. 일제의 폭압성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이 하늘을 찌를 때였다. 독립신문·독립협회·독립문의 독립은 당연히 항일 독립의 의지를 고취하기 위한 일련의 움직임이었으며 이는 곧이어 창건되는 대한제국의 성격과도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었다.(황태연,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691~692쪽)
독립신문과 독립협회에 대해선 잘못 알려진 사실이 너무나 많다. 제대로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독립신문 창간을 정치적·재정적으로 뒷받침한 이가 고종이었다는 사실조차 1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묻혀 있는 실정이다. 아관망명으로 왕권을 회복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관망명 성공 후 불과 두 달도 안 돼 독립신문을 발행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그 이전부터 준비가 돼 있었기 때문이다. 독립신문 준비는 1년 전인 1895년 6월 박정양 내각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 외무성의 비밀자금으로 운영되는 한성신보가 당시 유일한 신문으로 여론을 독점하고 있을 때였다. 한성신보는 단순한 신문사가 아니었다. 일제의 왕후 시해에 관련됐다. 한성신보 사장 아다치 겐조(安達謙藏)는 자사 기자들을 동원·지휘하여 왕후 시해에 직접 참여했다. 한성신보는 일제 외무성 첩보기관지였던 것이다.(김문자,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 320~344쪽)
1895년 2월 17일부터 4개 면으로 발간된 한성신보는 3개 면이 거의 한글전용에 가까운 국한문혼용이었고 1면만 일본어였다. 친일 조선인들을 겨냥하거나 조선인의 친일화를 위한 신문이었던 것이다. 1896년 5월 말께 1911부를 발행하고 있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1896.5.30) 신문 하나를 여러 명이 돌려 읽던 당시 관례를 고려하면 약 1만2000부 이상의 영향력을 가졌을 것으로 평가받는다.
소위 ‘갑오개혁’이란 이름 아래 이런 일들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인데, 1888년 초대 주미공사를 지낸 박정양은 근대적 신문의 정치·사회적 역할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일본인이 서울에서 민간 신문의 외양으로 내는 한성신보의 편파 보도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한철호, 『친미개화파 연구』 173쪽)
일제도 박정양의 움직임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당시 도쿄아사히신문은 1895년 6월 29일 1면 ‘한국 조정의 한 기현상’이라는 제하에 ‘영어파(정동파)’가 한성신보를 누르기 위해 순국문 신문을 발행하려 한다고 보도했다. 삼국간섭으로 친일파 권력이 다소 약화된 상황을 활용해 박정양은 한성신보에 대항하기 위해 ‘한글전용 신문’을 기획했던 것이다.
아관망명 성공 직후 박정양의 보고를 받은 자리에서 고종은 ‘독립신문’이란 제자(題字)를 부여하고 정부 자금을 차관 형식으로 제공했다. 독립신문이 민간 신문의 외양을 취하기 위해 나중에 서재필을 등장시키지만 사실상 ‘정부대변지’로 창간된 것이다.
그런데 서재필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본인이 독립신문을 “조선 사람의 근소한 후원을 얻어” 발행했으며 자신이 독립신문으로 명명했다고 거짓말을 했다.(김도태, 『서재필 박사 자서전』, 238쪽) 서재필은 갑신정변(1884) 실패 후 일본을 거쳐 미국에 망명했다가 1895년 12월 25일 밤 서울에 도착했다. 박정양의 한글전용 신문 계획이 추진된 지 6개월이나 지나서였다. 독립신문 계획은 서재필과 전혀 무관하게 계획됐던 것이다.
‘친미 정동파’로 분류되는 당시 박정양 정부의 우리말 신문 발간 계획은 그러나 을미왜변으로 김홍집-박정양 연립내각이 붕괴되면서 일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을미왜변 이후 다시 정권을 잡은 친일 개화파 내각(제4차 김홍집 내각)에서 내부대신 유길준이 서재필에게 외부협판직을 주려고 한국으로 불러들였다가 일종의 또 다른 정부대변지를 서재필과 발간하는 방향으로 계획을 변경했다. 이때 친일파 유길준과 서재필이 구상한 것은 영문판·한문판(韓文版)을 합본한 신문이었는데, 이 계획을 미리 알게 된 일본공사관이 그런 신문이 만들어지면 한성신보가 위축될 것을 우려해 그 계획을 폐기시켰다.(『윤치호 일기』 1896년 1월 31일, 2월 2일, 2월 4일)
그런 가운데 고종의 아관망명이 성공한 후 다시 박정양 내각이 들어서면서 상황이 바뀌었고 즉각 독립신문이 발간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독립신문은 일본공사관에 의해 폐기된 유길준-서재필의 영·한문 계획이 실현된 것이 아니라 당연히 박정양의 한글전용 신문 계획이 실현된 것이었다.(한철호, 『친미개화파 연구』 119~120쪽)
서재필은 자서전에서 자신이 독립신문 발간 계획을 유길준에게 설파해 유길준에 의해 승인되고 준비된 것인 양 거짓 서술하고 있다. 그는 유길준의 신문 계획이 좌초된 일과 박정양의 이름 자체를 숨기고 있다. 그러면서 독립신문이 자신의 창안으로 이뤄졌다고 꾸며댔다. 그런데 일찍이 독립신문 연구의 기초를 놓은 신용하는 서재필의 이 거짓말을 참말인 양 인용하며 서재필과 독립신문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신용하, 『독립협회 연구(상)』 24~25, 28, 42쪽)
더욱더 문제가 되는 것은 이만한 오류를 우리 국사학계가 제대로 걸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류는 누구나 범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고치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보니까 신용하의 연구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양 계속 인용되면서 그 권위에 힘입어 독립신문이나 독립협회에 관한 엉뚱한 억측들이 계속 재생산되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황태연,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703쪽)
서재필은 어떻게 독립신문 창간에 참여하게 됐을까. 박정양은 한성신보가 1896년 2월 18일자 신문에서 고종을 비난하는 기사를 싣자 독립신문 창간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 유길준의 신문 계획이 무산되면서 졸지에 실업자가 된 서재필은 이때 박정양의 부름을 받고 독립신문에 참여해 핵심적인 역할을 맡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고종과 아관망명정부가 미국에 귀화한 필립 제이슨(Phillip Jaisohn·서재필)에게 정부 공금을 차관으로 제공해 미국인 제이슨이 운영하는 민간 신문 형식으로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이 창간됐다.
그런데 소위 ‘갑오개혁’의 주역들을 역적으로 규정했던 고종이 ‘친일 경력’이 뚜렷한 서재필에게 중책을 맡긴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기록은 아직 보이지 않지만 아마도 박정양이 그랬던 것처럼 미국에서 의사 자격증까지 취득한 엘리트를 그냥 내치지 않고 어떻게든 국익을 위해 활용해보려고 했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겠다. 또 미국인으로 귀화해 미국 생활을 오래 했기에 성급하게 날뛰었던 12년 전 갑신정변 때와는 성향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한성신보에 맞서는 ‘정부대변지’로 창간된 취지를 살려 초기의 독립신문은 고종의 노선과 부합되는 논설을 펼치기도 했다. 초기의 영문판 논설에서는 독립문 건립 결정자가 국왕이라고 밝혀놓기도 했다. “Today we rejoice in the fact that the King has decided to erect upon the ruins of the arch outside the West Gate, a new one to be entitled Independence Arch 독립문.”(오늘 우리는 국왕이 서대문 밖에 있던 관문의 폐허 위에 ‘독립문’이라는 명칭의 새 관문을 건립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다. - The Independence, June 20th, 1896. ‘Editorial’) 박정양 등 상황을 알고 있는 이들이 생존해 있던 당시에는 서재필도 함부로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점차 ‘친일 본색’을 드러냈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의 논설을 통해 ‘독립’의 의미를 ‘항일 독립’이 아니라 청일전쟁 이후 이미 현실성을 잃은 ‘반청 독립’으로 교묘하게 뒤틀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해 조선을 독립시켜준 것을 조선인들이 감사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관망명 직후인 1897년 3월 말의 논설에서부터는 ‘반러 독립’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반청’과 ‘반러’를 주장하는 그에게서 ‘반일 독립’은 보이지 않는다. 러시아는 고종이 강력하게 동맹을 요구했음에도 오히려 만주와 한반도를 저울질하면서 한국 내정에는 거의 간섭하지 않았는데도 서재필은 반러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고종이 아관망명정부와 대한제국 시기를 통틀어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강병 육성과 첨단 무력 확보였다. 이 같은 고종의 강병 노선을 음해한 것도 독립신문이었고, 그 뒤에는 언제나 서재필과 윤치호가 있었다.(황태연,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850~852쪽)
일제가 친일개화파를 앞세워 실행했던 소위 ‘개화’ 정책이란 것들에서 국방 문제는 언제나 제외됐다.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1894년 10월 23일 고종에게 내민 소위 ‘제2차 내정개혁’에서 조선의 군비를 “내란을 진정할 만한 병력” 수준으로 제한했다. 반(反)상식적 한군론(限軍論)이었다.(『승정원일기』 『일성록』 1894.10.23)
서재필은 이노우에의 논조를 반복하고 있다. “조선에서는 해군과 육군을 많이 길러 외국이 침범하는 것을 막을 까닭도 없고 다만 국중에 육·해군이 조금 있어 동학이나 의병 같은 토비나 진정시킬 만했으면 넉넉할지라.”(독립신문, 1897.5.25) 고종이 동학농민군과 의병들에게 밀지를 내려 항일 연합전쟁을 긴밀히 전개하고 있는 상황에서 독립신문은 동학과 의병을 토비로 폄훼하고 이를 진압하는 수준의 군대면 족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서재필로부터 독립신문을 넘겨받은 윤치호도 한국 군대가 외적을 막으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 안의 도적’을 잡으려고 존재할 뿐이라고 주장해 이노우에와 서재필의 반상식적 군사론을 반복하고 있다. “대한에서 양병(養兵)하기는 외국과 싸우려 함도 아니요 다만 대한 국내를 보호함이라.”(독립신문, 1898.5.24)
당시는 국망 상황이라는 점을 그때나 지금이나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국망이라는 절체절명의 시기에 군사력을 늘려도 시원찮은데 오히려 증강을 억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정상국가의 평상적 상황에서도 나오기 쉽지 않은 이 같은 궤변을 ‘근대적 공론장의 시초’ ‘민주주의와 민권운동의 기원’ ‘선구적 계몽운동’ 등으로 높이 평가하는 것이 올바른 역사 해석일까.
서재필은 ‘일제 밀정’ 의혹까지 받는 인물이다. 그런 행각은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서 여기저기 눈에 띈다. 1896년 페테르부르크에 파견된 민영환 특사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와 교섭한 내용을 당시 수행통역관 윤치호로부터 전해들은 서재필은 이를 일본공사에게 ‘밀고’하고 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1897.11.17)에 ‘밀고’라고 적혀 있다.
또 미국공사 존 실(John M. B. Sill)이 이완용에게 러시아 장교의 교관 고빙(雇聘) 반대 행위를 그만두라고 요구한 일이 있는데 이런 사실도 서재필이 일본공사관에 알려주고 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1897.5.25) 고종이 러시아와의 동맹을 가장 중시했던 민감한 외교전쟁 시기에 일본 측이 먼저 알아서는 안 되는 외교비밀이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친일·반러 활동에 주력하면서 독립신문은 민심의 지지를 점점 잃어가다가 1899년 12월 4일 종간호를 냈다. ‘정부대변지’로 출발해서 ‘정부배반지’로 둔갑하며 아관망명정부와 대한제국 정부의 항일독립 의지를 무력화시키려 했던 이 신문의 종말은 초라했다. 그럼에도 오늘날 그 반대로 기억되고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900년 이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해 (0) | 2019.08.08 |
---|---|
한국 최초 신문 전면 광고 (0) | 2016.07.29 |
김천택의 청구영언 (0) | 2016.07.25 |
120년전의 기구한 사연 (0) | 2016.07.13 |
역사채널e 최부와 표해록 (0) | 2015.1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