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받는 날을 빼고 나면 일생이 며칠이랴.’
언젠가 중국 고전 번역본 시리즈 중에서 이런 제목을 마주한 때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옛날이나 21세기나, 도(道)의 경지에 올랐거나 일상에 파묻혀 살거나,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의 버거움을 얘기하는 듯해서입니다.
한평생으로 넓힐 것도 없이, 올 한 해 고통 받은 날을 다 빼고 나면 우리에게 온전히 남은 날은 며칠이나 될는지요. 괜스레 발걸음이 빨라지는 12월입니다. 해 놓은 일 없이 또 한 해가 가는구나, 뒤돌아보며 마음이 스산해지는 때입니다.
올 한 해도 다들 많이 힘들었습니다. 저마다 할당받은 삶의 무게만으로도 어깨가 휘어지는데, 북핵이니 집값이니 해서 국민 노릇하느라 고생했습니다. 많은 것을 누리고 살면서도 자신과 남을 격려하기는커녕 대놓고 투정하는 지도자를 보면서 참 어처구니없어 하기도 했습니다.
살다 보면 개인이든 나라든 고통과 시련이 닥칠 때 스스로를 단련하고 성숙해지는 기회로 삼는 지혜가 필요하겠죠. 개인적인 얘기라 망설였지만, 얼마 전 잠시 병원 신세를 졌을 때 도전을 헤쳐 나가는 용기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병원의 X선 검사실 앞은 오전 6시경이면 늘 북적댑니다. 걸어서, 혹은 보호자와 함께 휠체어를 타고 하나둘 나타난 환자들이 금세 대기실의 50여 개 의자를 채우고도 남습니다. 마치 사이보그처럼 온몸에 주렁주렁 줄을 매단 환자들이 단체 사열이라도 받듯 한자리에 모인 모습을 보니 처음엔 낯설다 못해 서글프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입니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오전 6시가 기다려집니다. 몸의 자유를 잃어버린 환자들을 통해 삶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배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링거에다 코와 배에 매달거나 소변을 배출하는 줄까지 합쳐 예닐곱 개 줄을 매단 이들도 잠시 일어설 힘만 있으면 어떻게든 한 걸음이라도 더 걸어 보려고 갖은 애를 씁니다. 하루라도 빨리 낫기 위해 온 힘을 쥐어짜 몸을 움직여 봅니다. 그러다 보면 줄은 하나씩 줄어들고 휠체어에 앉아서도 고개조차 가누지 못했던 환자의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늘 자신이 욕심 부린 일을 성취하지 못했다며 아등바등합니다. 한데 병원에 가 보고서야 많은 사람에겐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일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삶의 무거움을 견뎌 내는 일 자체가 빛나는 성취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걷고 밥 먹는 사소한 일상을 되찾기 위해 눈물겹게 노력하는 일, 부실하고 빈약한 존재 자체를 날마다 보듬고 살아가는 일이 모두 경이롭고 아름답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니 해 놓은 일 없어도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아온 우리에겐 서로 격려와 응원이 필요합니다.
인생은 고통의 바다라고 하지만 거친 파도가 강한 어부를 만든다고도 하지요. 고만고만한 고뇌와 좌절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 올 한 해 겪은 고통과 시련도 우리를 더 나아지게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계 상황에 처한 인간을 탐구한 작가 사뮈엘 베케트의 말대로 ‘처음에는 실패한다. 다시 덤벼 보지만 또다시 실패한다. 하지만 실패를 통해 조금씩 나아진다’고 믿으면서요. 그런 점에서 오늘은 한번, 스스로를 위해 또 사랑하는 이를 위해 인생응원가를 외쳐 보면 어떨까요.
으랏차차 여러분!
고미석 문화부장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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