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 2. 12:25

서기 67년부터 7년간 유대인들이 로마를 상대로 벌인 ‘유대전쟁’은 편협한 민족주의에 매몰된 유대 지도자들의 선동 때문에 일어났다. 5개월간의 예루살렘 공방에서만 110만 명이 죽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불탔고 유대인들은 2000년간 나라를 잃고 세계를 떠돌았다.

유대사가(史家) 요세푸스는 이렇게 기록했다. ‘유대전쟁 때 유대인의 참혹한 피해는 로마군이 저지른 학살보다 주전파(主戰派)와 화해파의 대립, 그리고 주전파 내부의 주도권 다툼에 따른 인민재판식 처형과 약탈에 주로 기인했다.’

서기 131년 가을에 바르 코크바와 라비 아키바가 로마의 통치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코크바는 구세주를 자처하며 반란을 선동했고, 유대교회 사제인 아키바는 이를 성전이라고 주장하며 종교면에서 코크바를 지원합니다.코크바는 132년 초에 예루살렘을 장악하게 됩니다.

이에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 순행을 나와있던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바로 군단을 출격시키는데 총병력은 대략 4만명이었습니다.유대전쟁은 유대북부부터 착실히 점령해 나간 로마군에 의해 134년초의 예루살렘 함락을 끝으로 종결되게 됩니다.

유대전쟁이 끝난 후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전후처리에 나서게 됩니다.유대는 더 이상 유대로 불리지 않고 팔레스타인이 공식 명칭으로 정해집니다.예루살렘이라는 이름도 사라지고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바뀝니다.그리고는 예루살렘에서 유대교도를 모조리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하드리아누스의 명령은 예루살렘 거주를 금지했을 뿐, 그 다음은 각자 마음대로 연고를 찾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또한 유대인 전원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유대교도만 추방했고, 그것도 예루살렘에 사는 것만 금지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로 하여금 유대 땅을 떠나 각지로 흩어지게 한 결정적인 계기입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이산 경향이 강하기는 했지만 이때의 강제 이산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이후로 로마에 대한 유대교도에 의한 대규모 저항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로마에 맞서기 위해서

보수여 진보여 우리는 무엇을 해야합니까?

로마의 그늘에서 살아야 편하다고 솔직히 말하지 못하고

예루살렘 공방 당시 유대의 두 세력 지도자였던 요한과 시몬처럼 일마다 나서 길길이 뛰지는 않는지

‘로마군의 병기 몇 개를 훔친 뒤 거들먹거리며 로마를 약올리고 있지 않은지 되돌아 보십시오.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말하며 밥먹고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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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