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여전 돈 벌때 어디엔가 올렸던 글이다.
미국의 주간지 ‘라이프 매거진’은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중의 한 사람으로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를 꼽았다.
그가 어떤 사람이기에 세계가 이렇게 새롭게 주목을 하는 것일까?
테슬라는 ‘비운(悲運)의 과학자’로 불린다.
전구하면 누구나 에디슨을 떠올리지만, 오늘날 쓰고 있는 전기는 에디슨이 설립한 회사에 입사했던 테슬라의 힘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 에디슨에게 치여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채 불우한 말년을 보냈다.
100건이 넘는 특허 말고도 숱한 아이디어를 냈지만 대부분 당시 기술로는 꿈도 꾸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간 탓에 ‘미친 과학자’라고 손가락질만 받았다. 이제 테슬라를 재평가하는 사람들은 그가 리모컨, 형광등뿐 아니라 레이저, 로봇, 수직이착륙 비행기까지 발명했다며 에디슨보다 탁월한 발명가로 받든다.
테슬라는 그의 업적만큼 살았을 때 인정받지 못했다. 특히 라이벌이었던 에디슨 때문에 그의 업적은 많이 가려졌다. 1882년 테슬라가 에디슨 연구소에 들어가 발전기와 전동기를 연구할 때부터 에디슨은 천재적인 테슬라의 재능을 질투에 불타는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당시 에디슨이 차린 에디슨 전기회사는 직류전기를 사용했는데 이를 통해 큰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애초 에디슨은 테슬라에게 전기를 싼값에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고안하면 거액을 안겨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테슬라는 에디슨의 직류시스템의 문제를 지적하며 교류시스템을 만들었다. 하지만 에디슨은 테슬라에게 돈을 주기로 한 약속을 어겼고, 테슬라는 에디슨에게 사표를 던진다.
위기의식을 느낀 에디슨은 기자들을 불러 모아 교류 전기에 대한 부정적이고 끔찍한 인식을 심어주려 교류가 직류보다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사람들을 모아놓고 개와 고양이를 교류 전류로 태워 죽이는 엽기적인 실험을 반복했는데, 이 때문에 근처의 개와 고양이의 숫자가 1/10로 줄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급기야는 3자를 시켜 테슬라의 교류 특허를 사들인 다음 그것을 이용해 최초의 ‘전기의자’를 발명하여 뉴욕 주 교도소에서 최초의 전기의자 사형집행을 하여, ‘교수형보다 더 끔찍한’ 장면을 대중들에게 보여준다.
에디슨은 마르코니보다 먼저 무선전신을 발명한 테슬라의 특허권을 취소시키는 데도 개입했다. 테슬라는 1943년 대법원 판결로 특허권을 되찾았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이 과정에서 테슬라는 교류를 널리 보급하기 위해 자신의 특허권을 포기하기도 했다. 1915년 뉴욕타임즈에 테슬라와 에디슨이 노벨물리학상 공동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기사가 났지만 결국 둘 다 노벨상을 받지 못했는데, 테슬라와 에디슨중 한사람이 함께 상 받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기이한 삶처럼 그의 성격도 특이했다. 식사 전 광택이 나도록 스푼을 닦아야 하는 결벽증이 있었고, 손수건은 하얀 비단으로 된 것만 썼다. 호텔방의 호실은 3의 배수여야만 했고, 비둘기에 집착해 말년 그의 호텔방에는 비둘기 새장이 가득했다고 한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발명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테슬라는 1943년 뉴욕의 한 호텔에서 쓸쓸히 숨을 거뒀다.
위인전에는 에디슨이 돈만 밝히고, 저항손실이 많은 직류송전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고집했다는 내용은 없다.
에디슨은 벌어들이는 달러의 액수로 자신의 발명품을 평가하기 좋아했다. ‘위대한 천재’ 에디슨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자본의 탐욕은 비열하고 끔찍하지만, 당시 미국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원동력이기도 했다.
인격적으로는 에디슨은 스쿠루지급이고, 테슬라는 에디슨의 그늘 때문에 암흑화된 인물이다.
조금만 잘 살펴보면 에디슨보다는 오히려 테슬라를 위인전에 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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