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1920'에 해당되는 글 42건

  1. 2011.01.07 이화학당
  2. 2011.01.06 Village life in Korea circa 1991
  3. 2011.01.05 선교사가 본 이 땅의 사람들(1910년경)
  4. 2011.01.02 명동촌
2011. 1. 7. 18:41

The Reverend Corwin & Nellie Taylor Collection

http://www.usc.edu/libraries/archives/arc/libraries/eastasian/korea/resources/kda4.php

이화학당은 1886년(고종 23) 해외여성선교회에서 파견된 메리 F. 스크랜튼(Mary F. Scranton)이 서울 황화방(皇華坊), 지금의 중구(中區) 정동(貞洞)에 설립한 한국 최초의 사립여성교육기관이다. 제1대 당장인 스크랜튼의 교육이념은 기독교 교육을 통하여 한국여성들을 ‘더 나은 한국인으로 양성하는 것’, 즉 한국인의 긍지와 존엄성을 회복하고 진정한 한국인을 육성하는 것이었다.


이듬해인 1887년 2월에는 고종황제가 외아문을 통해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교명과 현판을 하사하였다. 이는 조선의 사액서원에 비견되는 것으로서 이화학당이 국가로부터 공식적인 인정을 받은 최초의 근대식 여학교임을 의미한다. 이화라는 교명은 ‘배꽃같이 순결하고 아름다우며 향기로운 열매를 맺으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한 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이화학당은 점차 학제를 정비하여 1904년에는 중등과를, 1908년에는 보통과와 고등과를 신설함으로써 마침내 보통·중등·고등과정의 일관된 학제를 마련하였다. 이화가 중등과를 먼저 설치한 것은 이화의 교육이 여성의 고등교육을 지향해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교사 양성이 시급했던 당시의 사회적 요구를 수렴한 것이었다. 이화학당은 1908년 6월 5명의 제1회 중등과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1910년에는 4년제의 대학과를 설치하여 1914년 4월 신마실라·이화숙·김애식 등 한국 최초의 여대생을 배출하였다.


아울러 1914년에 이화유치원을, 1915년에 유치원사범과를 차례로 신설하고, 1917년에는 중등과를 대학예과로 개편하였다. 또한 1918년에 보통과와 고등과를 보통학교와 고등보통학교로 분립개교하였고, 1925년에 대학과와 대학예과를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개편하였으며, 1928년에 유치원사범과를 이화보육학교로 독립하였다. 이렇듯 이화학당 내에 있던 각급 교육기관들이 독자적인 발전을 추구하면서 독립된 학제로 운영됨에 따라 1928년에 ‘이화학당’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폐기되었으나, 친근하고 익숙한 ‘학당’이란 칭호가 계속 사용되었다.

[출처] 이화학당 [梨花學堂 ] | 네이버 백과사전


Lower Grade Girls, Ewa Haktang School, Seoul

Higher Mathmatics

College Graduates, Ewa Haktang, 1914

Ewa Haktang Recitation Hall

Wreath Drill at Ewa Haktang


Girls of Ewa Haktang Girls' High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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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
2011. 1. 6. 11:09

Village life in Korea circa 1991, Masatake Terauchi (and Google Books)

The link to the book on Google Books: books.google.com/books?id=KtNxAAAAMAAJ&pg =PP1#v=onepa...






Village Life by J. Robert Moose, published in 1911. It describes just what the title says, village life in Korea. I have to admit I grow a little weary of seeing A-frames (every one of these books by early Christian missionaries and other travelers seems to include at least one A-frame), but the other images were stunning, including several of women's 'fashion' and others of mourning. Either way, great book for meandering a bit. Home being where we are from, Moose's descriptions are amusing as invariably everything in Korea is compared to North Carolina and Virginia. Although I like both these two States, I suspect Korea would fare a lot better in direct comparisons today.

http://michaelgallagher.posterous.com/village-life-in-korea-circa-1991-masatake-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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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
2011. 1. 5. 23:45

From Google Books;

Korea for Christ By George Thompson Brown Davis(1910년경으로 추정되나 확인 필요)







http://www.flickr.com/photos/michaelgallagher/4629955687/in/photost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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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
2011. 1. 2. 19:44

1899년 2월 18일, 함경북도 종성에서 얼음이 채 풀리지 않은 두만강을 건너 드넓은 땅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142명의 사람들. 그들은 북간도의 낯선 땅에 ‘동쪽을 밝힌다’는 ‘명동촌’을 세웠다. 그 중심에 기증자의 증조할아버지 김약연이 있었다. 그들은 명동촌에 명동학교와 명동교회를 세워 민족교육의 요람으로 만들고, 나아가 북간도 전역에서 한인들을 위한 교육과 독립운동 등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명동촌을 간도문화의 발상지로 자부하고 있었다.

길림성 화룡현의 장재촌(현 용정시 지신진)으로 집단 이주해 첫 조선인 공동체마을 '명동촌'

'항일 민족운동의 기지'였음을 입증해 주는 유물들이

1919년 3월13일 북간도 용정의 해란강변에서 수만명의 조선인들이 독립 만세를 부르고 있다



1941년 3월 일제의 외국인 퇴거령으로 용정을 떠나 캐나다로 돌아가게 된 제창병원 수간호사 배외도(오른쪽)와 명신여고 교장 안도선(오른쪽 두번째)을 김약연 목사(왼쪽 두번째) 가족들이 전송하면서.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1910년 무렵 완성된 명동촌의 약도. 1899년 김약연 선생을 비롯 함북 종성 오룡천의 5현으로 불리는 다섯 가문 142명이 집단이주해 황무지에 개척한 북간도 첫 조선인공동체이자 항일민족운동의 기지였다. 5현은 규암 김약연, 소암 김하규, 문병규(문익환 목사의 조부), 남위언, 윤하현(윤동주 시인의 조부) 등 다섯 선비를 일컫는다. 일제는 1920년 10월 경신대토벌 때 명동학교와 명동촌을 불령선인 양성의 책원지로 지목해 교사를 불태우는 등 탄압했다

길림성 동북부 라자구의 동굴 벽에 태극기와 독립군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42064.html




http://kr.blog.yahoo.com/huntkimkorea/8386.html






http://blog.joinsmsn.com/media/index.asp?page=2&uid=_gosmdochi_&folder=7&page_size=5&viewtype=1

1962년 서울 동국대 교정에서 월남한 명동학교 출신들이 처음으로 동창회를 열었다. 신민회 회원으로 개교 산파 노릇을 한 정재면 선생(앞줄 오른쪽 세번째), 문재린(왼쪽 옆) 목사, 그 아들인 문익환(뒷줄 오른쪽 네번째) 목사, 김기섭, 윤영춘, 윤영규씨 등의 모습이 보인다. 1908년 명동서숙으로 출범한 명동학교는 명동중학교와 명동여학교로 증설되면서 25년간 1200명의 인재를 배출하며 간도 독립운동의 기지가 됐다.

1920년 경신참변 때 일본군이 한인 독립군을 총살하고 있는 장면.(재미 사료수집가 맹우열씨 소장)

1929년 8월30일 ‘명동 기독여자청년회 제9회 창립 기념식’에서 그네타기(추천) 대회를 연 뒤 찍은 기념사진이다. 앞쪽에 상품으로 나눠준, 크기가 다른 5개의 무쇠솥이 놓여 있고, 뒷줄 맨 오른쪽에 문익환·동환 목사의 어머니 김신묵씨 모습도 보인다.

용정’이란 이름이 비롯된 용두레우물 터에 서 있던 ‘용정지명기원지정천’ 비석의 1920년대 모습. 중국의 문화혁명기에 없어졌다가 훗날 복원된 비석의 처음 모습을 알려 주는 귀한 사진이다. 19세기 말 조선 이민들이 오래된 샘을 발견해 용두레를 설치하면서 이름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1928년 4월29일 명동촌 설립자인 규암 김약연 선생의 회갑 기념으로 장재촌의 자택 규암재 앞마당에서 찍은 사진. 오른쪽 중절모 차림이 규암, 왼쪽 어깨 뒤로 맏딸 인순, 그 옆이 부인 안연씨, 세 사람 건너 주시경 선생의 수제자로 당시 명동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던 박태환 선생의 모습이다.

강원용·문동환 목사, 안병무 박사와 더불어 은진중학교 17회 동기생인 장하린 전 종로서적 회장이 1937년 무렵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다. ‘바이올린 장’으로 불린 그는 소질을 살려 43년 일본 도쿄(동경)제국고등음악학교에 입학했다.

1935년 8월 용정 북부교회(감리교)의 여름성경학교를 마친 교사들. 뒷줄 오른쪽 끝 안경 쓴 이가 문익환 목사, 왼쪽 끝이 윤동주 시인이다. 대학 진학 준비를 위해 은진중 3년을 마치고 평양의 숭실학교로 전학하기 직전 모습이다.

1918년 명동학교에 입학한 나운규(오른쪽) 감독의 교복 차림. 수업시간에 거울 보며 웃는 연습만 하던 ‘엉뚱한 학생’이었던 그는 1926년 10월 서울 단성사에서 각본·주연·분장·감독까지 도맡은 첫 영화 <아리랑>을 개봉한다.

1937년 용정 시내의 한 국숫집에서 당시 은진중학교에 다니던 강원용(가운데) 목사가 친구들과 국수를 먹고 있다. 강 목사가 작고한 뒤 발견돼 이번에 처음 공개하는 사진이다.



1932년 명신여고 7회 졸업 앨범 사진. 용정 출신으로 이화여전을 나와 1931~32년 이 학교 국어교사로 있던 모윤숙(가운데 왼쪽) 시인의 모습도 들어 있다. 명신여학교는 1913년 영국인 선교사 베이커의 부인 박혜선(레베카)이 세운 곳으로, 가운데 보이는 건물이 초기의 기와집 교정이다.

용정의 광명중학생들이 1929년 겨울 어느날 교정에서 신나게 눈싸움 놀이를 하고 있다. 1912년 기독교계 영신중학교 부속 영신소학교로 설립됐으나 1924년말 재정난으로 히다카 헤이고로라는 일본인 낭인에게 넘어가 은진(기독교), 대성(연길 공교회·유림), 동흥(대종교) 등과 달리 친일계 학교로 변해갔다. 1936년 봄 윤동주 시인과 함께 대학 진학 자격을 얻고자 유일한 5년제였던 광명에 편입했던 문익환 목사는 “일본인 선생들이 학생들을 일본 외무성 순사나 만주육군사관학교에 보내려고 혈안이 된 그런 학교였다”고 얘기하곤 했다.


1910년대 초 조선 주재 캐나다 장로교회선교협의회 소속의 구례선(로버트 그리슨) 목사와 부인 레나가 간도지역 선교를 위해 말을 타고 두만강을 건너는 희귀 사진이다. 구례선 목사는 정재면 선생과 더불어 실학자였던 규암에게 기독교 신앙을 전도함으로써 명동촌을 명동학교와 명동교회를 축으로 한 민족교육과 교회운동의 기지로 탈바꿈시켰다.

1929년 4월27일 열린 명동여학교 동창회 기념사진. 1911년 명동학교 부설로 명동여학교가 문을 열면서 명동촌 여성들은 비로소 한글을 깨치고 자신만의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고만녜’로 불리던 문익환 목사의 어머니도 이 학교를 다니며 ‘김신묵’이란 이름을 갖게 됐다고 한다. 뒤이어 1914년 용정의 명신여학교, 1920년 화룡현 명신사 삼도구 충신향의 삼명여학교, 1921년 화룡현 삼개사 만진기의 정신여학교, 유하현 삼원포의 삼성여학교, 연길현 용진사 대교동의 교향여학교 등이 잇따라 생겨났다.


1920년대말 용정을 감싸고 흐르는 해란강 위에 놓여 있던 목제 용문교 위에서 물놀이를 나온 대성중학교 학생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항일독립지사들이 말을 달리던 바로 그곳이다


1940년 무렵 용정 은진중학교의 부례수(브루스) 교장이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김약연 등 간도 대표 15명의 요청으로 캐나다 선교회가 1920년 세운 은진학교는 일제의 탄압으로 1925년 끝내 문을 닫은 명동중학교의 맥을 이었다. 일제가 금지한 우리말은 물론 영어·성경·국사·과학실습·다양한 특별활동 등 수준 높은 수업으로 수많은 지도자를 키워낸 민족교육의 산실이었다.

3·13 만세운동의 현장 오층대건물


1947년 무렵 중국 공산당 명동지부 임원들
http://education.hani.com/arti/SERIES/216/354662.html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artid=7121&code=115


큰 하나를 위하여-문익환

http://www.kbs.co.kr/end_program/1tv/sisa/manhistory/vod/1328116_968.html


1918년 명동학교에 입학한 나운규의 교복 입은 모습.

http://kr.blog.yahoo.com/hj40252/4400


1930년대 해란강에서 북간도 명동촌에 있던 은진학교 학생들이 한 여름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해란강은 중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용정 부근을 흐르는 두만강의 지류로 독립군의 노래 <선구자>에 등장하는 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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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