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 24. 16:33

The Moffett Korea Collection

http://digital.library.ptsem.edu/default.xqy?action=view-src&uri=/METS/moffett.xml&page=10&count_results=false&id=dmd001&p=2에 가시면 더 많은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아래 글은 대부분

http://hanulh.egloos.com/4498141에서 퍼 옮겼습니다


1890년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선교활동과 교육활동을 한 사람 가운데 사무엘 모펫(Samuel A. Moffett, 1864~1939)

그는 우리나라를 무척 사랑하여 마포삼열(馬布三悅)이라는 한국 이름까지 얻었습니다.

1890년에 그는 자원하여 조선에 와서 서울과 평양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1901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신학교를 설립해 초대 교장에 취임해 근대교육에 힘을 쏟았습니다. 1918~28년에 숭실중학교와 숭실전문학교의 교장을 역임하는 한편, 평안남북도에 많은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특히 그는 1912년에 일어난 '105인 사건' 으로 한국의 애국자들이 투옥되자, 이 사건이 사실무근의 날조이며, 고문 등 비인도적 방법이 자행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매큔·에비슨 선교사 등과 함께 당시의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에게 항의하는 한편, 미국의 장로회 본부에 일제의 탄압과 만행을 보고해 국제여론을 환기시키는 데 힘썼습니다.
그는 1936년 병을 얻고 요양을 위해 귀국하였다가, 1939년 10월 24일 캘리포니아 몬로비아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이런 그가 우리나라에 머물면서 당시 모습을 촬영한 사진을 여러 점 남겼습니다. 이 사진들은 'The Moffett Korea Collection'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는데...

모펫 컬렉션의 경우 그 시기의 거의 대부분의 서양인들이 남긴 사진자료와 마찬가지로, 기존에 서울 지역에서 운영되던 상업 사진사들이 촬영한 사진을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 컬렉션에 포함시키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입니다. 창덕궁의 사진과 신무문 사진, 그리고 후속 포스팅에 소개하신 사진 상당수는 이미 모펫이 내한하기 몇년 전에 당시 서울에서 사진관을 차려 영업하고 있던 일본인 무라카미가 촬영한 사진으로 여겨집니다. -진성당 거사 http://veritasest.egloos.com/


Mulberry Palace Grounds in Seoul

'Mulberry Palace' 라는 건, 경희궁을 일컫는 말로 20세기 초 국내에서 활동한 서양인들의 표현에 자주 보이는 표현입니다. 경희궁이 철종 때 이후 퇴락하고 전각들이 황폐해진 채 남아있다가 대한제국의 성립 전후에 이 일대에 대규모로 뽕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경희궁 일대를 Mulberry Palace라고 불렀던 것이구요.


North Gate of Kyongbok Palace, Seoul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 주변의 모습으로, 고종 초년에 중건된 신무문이 보입니다. 신무문 너머로 보이는 산은 북악산이며, 이 문을 지나면 바로 지금의 청와대 정문이 나타납니다. 당시에는 신무문 주위로 부속건물이 일부 보이는데, 일제시대 그 건물들은 헐려 없어졌습니다.

1961년 5·16군사 쿠데타 직후 청와대 경호를 위해서 이 일대에 30경비단이 들어섰습니다. 30경비단 지역은1979년 12월 12일 이른바 신군부에 의한 '경복궁 모의'가 있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1997년 군부대는 철수하였지만 신무문은 한동안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신무문의 일반인 통행이 허용된 것은 2006년 9월 노 전 대통령 재직 시의 일입니다.

View of Seoul Showing Three-storied Temple of Heaven on Skyline, 1900~1914

원구단 일대의 모습.

왼쪽에 보이는 3층 팔각지붕 건물은 신위를 모시던 황궁우이고, 오른쪽에 보이는 둥근 지붕의 건물이 원구단입니다.

1897년 8월 14일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한 뒤 연호를 광무로 고치고 이곳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원구단을 쌓았습니다. 10월 11일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정하고, 그 이튿날 원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원구단은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 의미 있는 곳입니다.

일제는 한일합방후 이 일대를 총독부 소관으로 하고, 1913년 원구단을 헐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철도호텔(지금의 웨스틴조선호텔)을 지었습니다. 이 일은 일제가 대한제국의 상징적 의미가 있는 곳을 의도적으로 말살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그에 따라 지금은 원구단의 북쪽 모퉁이에 있던 황궁우의 팔각당 만이 대한제국의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광화문(光化門)은 법궁인 경복궁(景福宮)의 정문입니다. 지금은 광화문 네거리에서 광화문까지 넓디넓은 세종로가 뚫려 있습니다. 세종로 동편에는 미국 대사관, 문화체육관광부가 있고, 서편에는 세종문화회관, 정부중앙청사 별관과 같은 건물들이 높이 들어서 있어, 위의 사진처럼 산자락에 감싸 안긴 경복궁의 모습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동편으로는 기로소, 호조, 한성부, 이조, 의정부가 들어서 있었고, 서편으로는 자예원, 공조, 형조, 사헌부, 병조, 예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거리를 육조거리라 하였습니다. 사진을 보면 육조거리에서 경복궁으로 들어서기 전 광화문 앞쪽을 보면 길 양옆으로 해태가 한 마리씩 서 있습니다. 당시 해태의 위치는 평소 우리가 아는 위치와는 많이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해태는 중국 고대부터 전해오는 상상 속의 동물입니다. 본래 뿔이 하나이고 성품이 충직하여 시시비비를 잘 가려주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해태를 사헌부 대문 앞에 돌로 조각하여 세웠습니다. 이는 그 앞을 지나 궁궐로 들어가는 관원들에게 행동을 바르게 하고, 옳은 말을 하도록 무언의 요구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여기부터는 궁궐의 영역이므로 왕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은 탈것에서 내리라는 하마(下馬)의 표식도 겸하고 있었습니다.

Hyangwon (lotus) Pavilion and Bridge Spanning the Pond in Kyongbok Palace in Seoul

사진은 경복궁내에 있는 향원정
의 모습입니다.

자경전을 지나 경복궁 안으로 계속 들어가다 보면 커다란 연못이 있습니다. 그 한가운데에 둥그런 섬이 하나 떠 있고 거기에 육모 지붕을 한 이층짜리 정자인 향원정
(香遠亭)
이 있습니다.

사진에서 볼 수 있는, 섬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취향교
(醉香橋)인데, 지금의 다리 모습과는 다릅니다. 그 이유는 원래 있었던 취향교가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없어져서 1953년에 다시 세웠기 때문입니다. 이 다리는 모양뿐만 아니라 위치 또한 달라졌습니다. 당시 연못 북쪽에 건청궁이 있었는데 취향교도 이에 맞추어 연못의 북쪽에 있었습니다만 다시 세우면서 지금처럼 남쪽으로 옮겼습니다.

Palace Building Where Queen Min was Murdered

사진은 건청궁의 모습입니다. 사진에서 보이는 건물은 명성황후와 하녀들이 거처하였던 황후의 여궁(與宮)인 옥호루(玉壺樓)입니다. 그리고 이 사진을 찍은 시기는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난 이후로 보입니다.

건청궁
(乾淸宮)은 1873년(고종 10년)에 지었습니다. 경복궁 중건 사업은 대원군이 주도했던 반면에 건청궁의 건설은 고종이 주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건청궁은 왕으로서, 정치가로서 스스로 서려는 고종의 자립 의지의 징표라 할 수 있습니다.

건청궁은 우리 민족의 울분이 서려 있는 을미사변, 즉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난 곳입니다. 1895년(고종 32년) 8월 20일 새벽, 일본 공사 미우라가 이끄는 일본 공사관 직원, 일본군, 일본 낭인, 조선 신식군대인 훈련원 등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이 건물 저 건물을 모조리 뒤진 끝에 경복궁의 뒤쪽 끝 건청궁의 한 건물인 곤녕합에서 명성황후를 찾아내어 찔러 죽이고, 그 시신을 건청궁 동쪽 녹원(鹿園)
으로 끌고가 석유를 끼얹어 태웠습니다.

1929년 일제는 이런 자신들의 만행을 지우기라도 하듯 경복궁에서 대규모 박람회를 열면서 건청궁 일대를 헐어 없애버렸습니다. 이후 한동안 건청궁 터는 빈터로 남아 있다가 최근에 다시 복원되었습니다.

Kyongbok Palace Library, Seoul

사진은 집옥재(集玉齊)의 모습입니다.

건청궁 터에서 야트막한 담장을 넘겨다보면
신무문 동쪽에 옛 건청궁에 속했던 건물인 집옥재가 있습니다. 왼쪽에 팔우정과 오른쪽에 협길당이 있는 이 건물은
고종이 서고 겸 서재로 썼던 중국풍의 화려한 건물입니다.

원래는 팔우정과 협길당과 함께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으로 지어졌으나, 1888년 고종이 거처를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옮기면서 함께 이전되었습니다. 고종은 이곳에 선대 임금의 어진(御眞)을 봉안하고 외국 사신들을 접견하는 장소로도 이용하였습니다.


Palace Guard Tower, Seoul Old Kyongbok Palace guard tower on southeast corner.

사진은 경복궁 동십자각을 경복궁 내에서 찍은 모습입니다.

동십자각(東十字閣)은 당시 사진으로도 알 수 있지만 원래 경복궁 담장의 동남쪽 모서리에 있던 망루에 해당하는 건물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동십자각 외에 서십자각도 있었는데, 담장이 축소되면서 서십자각은 없어지고 지금처럼 동십자각만 경복궁 사거리 길 한가운데 덩그러니 남게 된 것입니다.


지금 동십자각이 서 있는 위치를 고려할 때 지금의 광화문은 원래 위치에서 조금 안으로 눌러앉은 것이고, 경복궁의 동쪽 담장은 상당히 더 물러앉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정한 한양에는 4개의 대문(大門)과 4개의 소문(小門)이 있었습니다. 4개의 대문은 유교의 오상(五常)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 의거해, 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에 돈의문(敦義門), 남쪽에 숭례문(崇禮門), 북쪽에 숙정문(肅靖門)을 두었습니다.

참고로 한양을 안쪽에서 둘러싼 4개의 산을 내사산(內四山)이라고 하였는데, 동쪽의 타락산, 서쪽의 인왕산, 남쪽의 목멱산, 북쪽의 북악산이 이에 해당합니다.

4대문의 사이에 4개의 소문을 두었는데, 북문과 동문 사이에 혜화문(惠化門-東小門), 동문과 남문 사이에 광희문(光熙門-水口門)을, 남문과 서문 사이에 소의문(昭義門-西小門), 서문과 북문 사이에 창의문(彰義門)을 두었습니다.

서소문이라 부르는 소의문(昭義門)은 소덕문(昭德門)이라고도 불렸다고 합니다.

이 문은 지금의 서소문동 큰길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광희문(光熙門)과 함께 시신을 성 밖으로 운반하던 통로로 사용되었고, 궁궐에서 죄를 지은 사람들이 이 문을 통해 도성 밖으로 쫓겨났다고 합니다. 이 문 역시 1914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부근의 성곽과 함께 완전히 철거되어 지금은 사진을 통해서만 그 모습을 대강 알 수 있을 뿐입니다.



Outside East Gate, Seoul. Note trolley tracks, 1899.
1899년 동대문의 바깥쪽 풍경.

동대문은 한양의 다른 성문들과 함께 조선 태조 때인 1398년(태조 7년)에 세워졌습니다. 도성의 성문답게 석문을 쌓고, 그 위에 이층 문루를 세웠습니다. 또 이 대문은 한양의 사대문 중 유일하게 옹성(甕城)을 만든 성문으로, 당시 조선이 동쪽의 방어에 크게 신경을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1453년(단종 원년)에 고쳐 지었고, 1869년(고종 6년)에 새로 세워서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당시 한양에는 이미 전차가 운행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동대문이라 부르는 흥인지문(興仁之門)은 한양 도성의 동쪽 대문입니다.

인(仁)은 동쪽에 해당하므로 문의 이름에 '인(仁)'자를 붙었고, 다른 문의 이름들과는 달리 이름이 네 자인 것은 한양 동쪽 산인 타락산의 지세가 약해 산의 기운을 돋우기 위해 '지(之)'자를 하나 더 더했다고 합니다.


Inside the East Gate, Seoul

동대문 안쪽 거리 모습.

기다랗게 난 길을 따라 초가집과 기와집이 뒤섞여 있습니다. 지금 위치로 어디쯤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이 변했습니다.

West Gate, Seoul

서대문의 모습입니다.


돈의문(敦義門)은 한양 도성의 서쪽 대문으로, 흔히들 서대문이라 부릅니다. '의(義)'는 서쪽에 해당하므로 문의 이름에 '의(義)' 자가 붙었고, 한양 도성의 4대문 가운데 가장 많은 수난를 겪었습니다.

돈의문은 태조 때 처음 세워졌으나 태종 13년(1413년)에 풍수설을 받아들여 이 문을 폐쇄하고, 새로 문을 내고 이름을 서전문(西箭門)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문은 경희궁의 서쪽에 있었다고 합니다.
뒤 세종 4년(1422년)에 도성을 새로 고칠 때 다시 서전문을 헐어 버리고, 지금의 서대문 마루턱에 새 문을 세웠는데 이름을 다시 돈의문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세종 이후의 돈의문을 새로 지은 문이라고 하여 새문, 혹은 신문(新門) 부르게 되었고, 지금의 '신문로'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처럼 파란만장한 돈의문은 1915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철거되어 지금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되어 단지 사진으로만 그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Little North Gate in Seoul, circa 1890

서북문인 창의문(彰義門).

창의문(彰義門)은 고양군, 양주군 방면으로 통하는 문이었으며,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태종 16년(1416년)에 이 길을 통행하면 왕조에 불리하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문을 닫아 두었다가, 중종 원년(1506년)에 다시 열었다고 합니다.

인조반정(1623년) 때는 세검정에서 모의했던 반정군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 안으로 들어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앉혔다고 전합니다.
이런 사연으로 창의문의 서쪽 벽에는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Water Gate, Seoul

홍지문(弘智門)과 오간수문(五間水門)의 모습입니다.


홍지문을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 하였으며, 이 문은 인왕산 뒤편 끝자락에 있는 탕춘대성의 성문입니다. 이 문루와 함께 설치되었던 오간수문은 1921년 8월의 홍수로 붕괴되었던 것을 1977년 무지개 모양의 다리인 홍예교(虹霓橋)로 복원하였습니다. 이곳은 세검정 홍제천을 끼고 있으며, 주위에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이 있습니다.

사진에는 홍지문을 중심으로 오간수문과 한양 도성과 연결된 탕춘대성(蕩春臺城)이 보이고 짐을 실은 말들도 보입니다. 이 당시 산 능선에는 나무가 그다지 없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땔감으로 쓰기 위해 나무를 베어낸 탓입니다. 이 당시엔 취사와 난방을 땔감으로 나무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주거지역 가까이 있는 산들 대부분이 이처럼 천둥벌거숭이였습니다.

1921년 8월 홍수로 오간수문이 무너졌는데, 이 일도 이 같은 산림벌채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South Gate, Seoul

이제는 불타버린 숭례문(남대문)의 옛 모습입니다. 자세히 보면 세로로 쓴 '숭례문(崇禮門)'이라 쓴 현판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 옆면 2칸 크기로 지은 우진각지붕의 누각형 2층 건물입니다. <지봉유설>의 기록에는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고도 합니다.

이 성문은 조선시대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방화로 불타기전에는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었으며, 태조 4년(1395년)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년)에 완성하였습니다. 그 후 세종 29년(1447년)에 고쳐 지었고, 성종 10년(1479년)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일제에 헐리기 전 서소문 뒤편의 모습. 소의문으로도 불린 서소문은 옛날 서울 도성의 서남쪽, 즉 남대문과 서대문 사이에 자리했던 사소문 중의 하나였다. 조선조 태조5년(1396) 도성을 축조하면서 함께 지어져 처음엔 소덕문이라 불렸다. 한동안 문루가 없어졌다 영조때 다시 모습을 되찾았지만, 1914년 일제가 도시계획 명분으로 헐어내 지금은 아픈 역사만 남아 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2&aid=0000178785

영은문: Old Chinese Embassy Arch


영은문(迎恩門)은 중국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모화관(慕華館) 앞에 세웠던 문입니다. 당시 조선은 새 임금이 즉위하여 중국사신이 조칙을 가지고 오면 임금이 친히 모화관까지 나오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이 모화관은 1407년(태종 7년)에 송도의 영빈관을 모방하여 서대문 밖에 모화루를 세웠다가 1430년(세종 12년)에 모화관(慕華館)으로 개칭하였고, 그 앞에 홍살문을 세웠습니다. 1537년(중종 32년)에 김안로 등 3정승이 권하여 모화관의 홍살문을 개축하여 청기와를 입히고 영조문(迎詔門)이라는 액자를 걸었습니다.


1539년 명나라 사신 설정총이 칙사가 올 때에는 조(詔)·칙(勅)과 상사(賞賜)를 가지고 오는데 영조문이라 함은 마땅하지 않다고 하여 영은문(迎恩門)이라 써서 걸도록 하여 이에 따라 이름을 고쳤습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인 1606년(선조 39년)에 영은문을 재건한 뒤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와서 액자를 다시 써서 걸었는데, 그 액자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습니다. 청일전쟁 후인 1896년에 모화관은 사대사상의 상징물이라 하여 독립관(獨立館)이라 고쳐 부르고, 이때 영은문을 헐어버리고 대신에 독립문을 세웠습니다.



독립문: Independence Gate and the pillars of the old welcoming gate for Chinese embassies, circa 1898


독립문(獨立門)은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1896년(건양 1년)명나라와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였던 영은문(迎恩門)을 무너뜨리고, 그 터에 전 국민을 상대로 모금운동을 하여 세웠습니다. 독립문은 당시 동일 공사관에 근무하던 스위스 기사가 (일설에는 러시아인 사바틴(士巴津)이) 설계했으며, 공역은 건축기사 심의석이 담당하였고, 노역은 주로 중국인 노무자들을 고용하였습니다. 1896년에 공사를 시작해 1897년에 완공되었으며, 높이는 14.28m, 폭이 11.48m, 두께가 6.25m입니다. 약 1,850개의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모델로 삼아서 만들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 독립문의 현판 글씨는 이완용이 썼다고 하며, 현판 바로 아래에는 대한제국 황실의 문양인 오얏꽃무늬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구조는 중앙에 홍예문이 있고, 왼쪽 내부에서 정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습니다. 문 앞에는 옛날 영은문의 주초였던 두 돌기둥이 남아 있습니다. 1979년 성산대로를 개설하면서 원래 독립문이 있던 자리에서 북서쪽으로 70m 떨어진 곳인 서대문독립공원 내로 영은문의 두 돌기둥과 함께 이전하여 복원하였고, 예전 자리에는 '독립문지'라는 표지판을 묻어놓았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독립문 꼭대기에 탑의 상륜부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찰주 모양의 기다란 설치물을 볼 수 있는 데, 무슨 목적으로 그렇게 하였는지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Queen Min's Gravesite


명성황후가 건청궁에서 일제에 의해 시해당한 후 묻힌 능의 모습을 담은 사진입니다.

1895년 10월 8일 한밤중에 일본 낭인(浪人)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건청궁의 한 건물인 곤녕합에서 명성황후를 찾아내어 찔러 죽이고, 그 시신을 건청궁 동쪽 녹원(鹿園)으로 끌고 가 석유를 끼얹어 태워버렸습니다.

날이 밝은 나서
궁궐을 순시하던 우범선이 우연히 타다 남은 유골을 발견하여 옆에 있는 향원정 연못에 넣으려고 했으나, 훈련대 참위 윤석우(尹錫禹)가 혹시 황후의 시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이를 수습하여 멀리 떨어진 오운각 서봉(西峰) 밑에 매장했습니다. 나중에 명성황후의 장례를 치르려고 유해를 수습할 때, 뼈에 재와 모래가 뒤섞여 신체 부위가 판명되지 않아 고양군에 사는 환관을 불러 그의 말을 들으면서 석회를 바르고 비단옷을 수십 벌 입혀 구부리고 포개고 묶어서 관에 넣었다고 합니다.

명성황후의 시신은 우여곡절 끝에 1897년 11월 22일 한성부 동부 인창방(仁昌坊) 청량리(현 숭인원 자리)에 처음 장사지냈으며, 1919년 1월 16일에 이장하여 현재 위치인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릉(洪陵)에 고종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러니까 위의 사진에 보이는 명성황후릉은 홍릉으로 이장되기 전의 모습입니다.


숭인원(崇仁園)영친왕의 아들 이진(李晉)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조선 고종의 계비인 순헌황귀비 엄씨의 무덤인 영휘원(永徽園)과 함께 있습니다. 이진은 1살의 어린 나이로 의문의 죽음을 당하여 순종의 명으로 이곳에 묻혔습니다.


수어장대(守禦將臺)

이 사진은 아마도 1890년대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며, 건물 안팎으로 일반인들이 여기저기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아 이미 군사 시설로서의 역할은 상실된 것으로 보입니다.

수어장대
는 남한산성의 주봉인 청량산(497.9m) 정상에 자리 잡고 있으며, 남한산성에 설치됐던 장대(將臺) 가운데 으뜸 자리를 차지합니다. 장대는 군사지휘 및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어진 건물로 동서남북 사방에 설치했습니다. 이 가운데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네 곳 장대 가운데서도 서장대에 해당하며, 현재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장대입니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에서 가장 넓은 시야가 열린 위치에 자리 잡고 있어 남한산성 전체 군사의 통솔에 유리한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 네 곳의 장대가 있었는데, 중간에 있어야 할 중장대(中將臺)는 처음부터 설치하지 않아 서장대가 그 중심역할을 함께 맡았습니다. 이처럼 지형적 특수성 때문에 남한산성의 서장대는 남한산성 내의 중심 지휘소로서의 수어청 지휘소가 설치되어 '수어장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습니다.

이 건물은 남한산성 성안에 현존하는 건물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을 지녔으며, 선조 28년 남한산성 축성 당시 동남북의 3개 장대와 함께 만들어졌습니다. 처음에는 단층누각으로 축조하고 '서장대'라 부르던 것을 1751년(영조 27년)에 유수 이기진(李箕鎭)이 누각을 증축해 2층으로 만들어 상루와 하대가 훨훨 나는 듯한 위용을 자랑하게 됐습니다.

2층 누각 안쪽에는 '무망루(無忘樓)', 바깥쪽에는 '수어장대(守禦將臺)'라는 편액을 내걸었습니다. 무망루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효종이 청나라에 대한 복수로 북쪽 땅을 정벌하려던 계획을 추진하던 중 실천에 옮기기 전에 죽은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입니다

수어장대 (사진 출처: 야후 블로그 <바람이 가는 곳>)

수어장대의 아래층은 정면 5칸, 옆면 3칸이며, 위층은 정면 3칸, 옆면 2칸인 팔작지붕양식의 2층 누각입니다. 2층은 1층 오른쪽 뒤편에 있는 사다리를 통해 올라갈 수 있도록 했으며, 현재 2층은 사방에 판문을 달았고 판문에는 태극무늬를 그려넣어 모펫의 사진과는 다소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Old Pyeng Yang Wall and Chilsung Gate, circa 1890


평양성 칠성문(七星門)

칠성문은 평양성 내성의 북쪽 벽이 뻗어나간 을밀대와 만수대 사이의 낮은 지대에 있습니다.

이 성문은 평양성 내성의 북문에 해당하며, 평양성의 보통문과 함께 의주 방면으로 통하는 성문 역할을 했습니다. 성문 양쪽에 연결되어 있는 성벽과 함께 조선시대의 축성법과 소규모의 성문 건축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옹성의 축성 방식은 고구려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현재의 성문는 조선 숙종 대에, 문루는 영조 대에 개수한 것이라고 합니다.


Pyeng Yang Street Scene inside the Great East Gate

평양성 대동문(大同門) 안쪽의 풍경.

대동문은 조선 중기에 지어진 평양성의 동문.

전체 높이 19m, 석축 높이 6.5m인 2층 누각으로 되어 있습니다. 축대는 화강암으로 정교하게 쌓았으며, 가운데에 무지개문을 내서 사람들이 출입하도록 했습니다. 대동문을 지나 배를 타고 대동강을 건너야 한양으로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Peony Point Overlooking the Taitong River, Pyeng Yang
평양 대동강변의 모습입니다.

평양성은 내성(內城), 중성(中城), 외성(外城), 북성(北城) 등 4개의 성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사진에서 보이는 성곽은 북성 부분에 해당합니다.

오른쪽 아래에 보이는 문은 전금문(轉錦門)이며, 누각은 득월루(得月樓)입니다. 그 위쪽으로 보이는 대동강 가에 서 있는 누각이 유명한 부벽루(浮碧樓)이며, 대동강 오른쪽으로 조금 보이는 섬은 능라도입니다. 그리고 부벽루와 전금문 왼쪽으로 집들이 보이는 곳이 영명사(永明寺)란 절입니다. 을밀대(乙密臺)는 이 사진에선 보이지 않으나 영명사 왼편 서북쪽 언덕 위에 있습니다.

- A Buddhist temple in the Diamond mountains

신계사

신계사는 일제 강점기에 유점사의 말사에 속했으나, 오래전부터 장안사, 표훈사, 유점사와 더불어 금강산 4대 사찰로 꼽히던 명찰이었습니다.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대웅전을 비롯해 절이 비교적 온전했다고 합니다만, 전쟁 통에 전소되고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습니다.


신계사 삼층석탑 (사진출처: 이태호)

학고재에서 펴내고 유홍준이 엮은 <금강산>이란 책에서 위의 사진과 똑같은 탑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신계사는 외금강 지역에 있었던 절입니다.

신계사터 삼층석탑은 정양사 삼층석탑, 장연사터 삼층석탑과 더불어 금강산에 남아 있는 '3고탑(古塔)'으로, 상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와 상륜부를 얹은 일반형 석탑입니다. 상층기단 면석에는 천인상과 팔부신중이 조각되어 있고, 1층 몸돌 네 면에 모두 문짝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양식으로 미루어 볼 때 이 탑을 세운 연대는 통일신라 말로 짐작됩니다.


- 일제시대의 수표교와 수표석

수표교가 처음 놓인 시기는 1420년(세종 2년)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다리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말 시장 앞에 있다고 하여 마전교(馬廛橋)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1441년(세종 23년) 비가 올 때 수량을 측정하기 위해 다리 서쪽에 나무로 만든 수표(水標)를 세웠고, 이 이후로 다리 옆에 수표가 있다고 하여 수표교(水標橋)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성종 무렵에 이 수표를 돌로 바꾸어 개천 수위를 측정하게 하였습니다.


다리 위에 한 아이가 쪼그려 앉아 사진 찍는 것을 신기하게 지켜보는 듯 하며, 그 바로 왼쪽에 지붕 일부가 보이는 게 있습니다. 이것은 수표교 옆에 있었던 수표석(水標石)입니다.


수표교에 원래부터 난간석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수표교에 지금처럼 난간석이 설치된 것은 고종 19년(1882년) 경으로 추정하고 있으니, 만일 이 사진이 1882년 이전에 촬영된 것이라면 ... 모펫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해가 1890년이니, 이 사진은 모펫이 우리나라에 오기 전에 찍은 사진이란 말이 되기도 합니다.


- 1950년대 옛 장통교의 모습

모펫이 소장했던 처음 사진 속의 다리가 수표교라면, 수표교 너머로 멀리 보이는 다리는 장통교(長通橋
)로 추정됩니다.

이 다리는
<경조오부 · 북한산성부도>에는 장추교(長楸橋), <슈션전도>에는 장차골다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부 장통방에 있다고 하여 장통교라 하였으며, 줄여서 장교라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장통교는 개천 준설과 함께 몇 차례 개축 되었는데, 그 증거로 다리 서쪽 기둥에 '신미개조(辛未改造)'와 '기해개조(己亥改造)'의 8자가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