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 10. 05:08
△ 부산 순시에 나선 순종황제
순종황제는 이등박문을 대동하고 경성을 출발, 대구·부산·마산 등을 순시했다.
도로 주변에 서있는 시민들과 일장기의 모습이 보인다.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의 이명화 박사는
“순종의 서도 순시를 촬영한 사진은 공개된 바 있지만 남도 순시는 이 사진이 처음인 것으로 안다”
고 말했다. (1909. 1. 7)
나랏님이 구중궁궐 속에 쳐 박혀 국사를 잊고 있지는 않았지만 침략군의 호위(?)를 받으며
팔도를 순시한다는 것이 허울뿐인 있으나 마나지.
△ 일본군이 조선인을 짐꾼으로 부리며 여유롭게 웃고 가는 모습.
강제로 징병된 학도병
△ 출전하는 학도병
일본은 전쟁 장기화로 물자와 군인들이 부족해지자 학병제를 실시했다.
이 사진은 ‘10월 27일 입단 장도중’이라고 학도병 이름이 기록된 기념사진.
장도를 기원하는 사람들의 글이 담긴 일장기를 들고 있는 모습에는 아직 학생티가 남아 있다.(1944)
일제, 백두산 우리민족의 정수리에 쇠말뚝 박다
‘한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쇠말뚝을 박고, 그 앞에 마련한 제단에서 무속인을
포함한 일본인들이 천황(텐노)의 시조신이자 일본인의 조상신으로 알려진
‘아마테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다.(1943)
윤봉길 선생 의거 직후의 국내 미공개 사진
윤봉길 의사가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의거 직후 모자를 쓴 채
일본 헌병에 연행되는 모습(X자 표시가 있는 사람이 尹의사).-김상기 충남대 교수 제공-
△ 일본도로 처형하는 일본군인 일본 군인이 중국인 옷을 입은 사람의 목을 자르고 있다.
독립군은 신분 위장을 위해 중국인 복장을 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복장으로만 보면
중국인과의 구별이 쉽지 않다. 국민대 국사학과의 장석흥 교수는 “사진의 각도가 다른
것으로 미뤄, 3명 이상이 동시에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며 “피해자가 독립군이라고
무조건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 잔악한 처형의 순간...
칼로 목을 칠 때 몸이 넘어가지 않도록 팔을 뒤로 묶어 목을 내리치는 순간을 포착한 사진이다.
(Arrested prisoner is being executed by a sword. The Japanese soldiers are pulling back the cord
that bound the victim so that the body will stand upright when the sword hit the victim's neck.
This photo was taken at the exact moment of the head being cut off.)
광대뼈 등의 외부 윤각이 많이 닮았다고 해서 박정희(다카기 마사오)라는 주장도 일부 있었으나
그렇게 믿을 만한 근거는 부족하다.
그러나 다카기 소위가 일본 본토의 마쓰야마 제 14연대에 처음 배속되었다가 곧 만주 제8연대의
소대장으로 임명되고, 이어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활동하던 영안지방의 보병 제8군단에 배속되어
열성적으로 항일부대를 토벌한 공로를 인정받아 소위로 임관한지 1년만에 중위로 진급했다는 것은
역사의 비극 중에 비극이다. 항일독립군 토벌작전에 110회나 참가했다는 박정희가 앗아간 목은 몇이나
될까? 나는 위의 사진이 박정희라고는 믿지 않지만 그가 직접 자른 독립군의 목의 수효가 최소한
10명은 넘을 거라는 생각에 의문을 갖지 않는다.
이 장면은 사진작가이자 종군기자였던 마가렛 버크 화이트(Margaret Bourke-White, 1904-1971, 미국 )가
1952년 한국 전쟁 때 촬영한 것으로 한홍구 교수는 [한겨레21/한홍구의 역사이야기] 우리는 무덤 위에 서있다
(2001년04월10일 제354호, or 대한민국사)에서 "한국전쟁 기간 중 생포된 게릴라의 잘린 목을 보며 웃는 남한 병사"
라는 설명을 달고 있다.
우리가 우리 내부의 이성을 잃은 광기를 다스리지 못하면서 일본의 만행만을 규탄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일본제국주의가 한국인, 중국인, 나아가 전세계를 상대로 반인류적인 만행을 저지른 것이나
우리가 같은 민족의 목을 잘라 들고 희희낙락거리는 만행에서의 차이점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 이완용의 여편네의 모습??
△ 호사는 친일부역자들이 누리고
▽ 수난은 죄없는 민초들의 몫이다.
△ 일본군이 조선인을 짐꾼으로 부리며 여유롭게 웃고 가는 모습.
1951년 6월 부산, 이기붕이 국방장관에 취임했을 때 그의 집에 초대된 미국인들의 기쁨조로
특별히 초대된 이화여대생들이 문밖에서 노래를 불러 주고 있다. 오른쪽부터 무초 주한 미국대사,
이기붕의 부인 박마리아, 콜트 장군의 모습이다. 지금은 전쟁중이라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맹목적인 반일반미도 경계해야 하지만 뻔히 두 눈을 뜨고도 아무 생각없이 친일이 친미로 그냥
이어져 내려간다면 우리는 역사를 상실한 국민이 될 것이다. 원조보수를 자처하는 한나라당 등이
친일진상규명법에 반기를 드는 것은 그들이 친일후손이 아니고는 이해할 방법이 없다.
보수라는 정체성의 대의를 외세에 의한 침탈이나 그 지배를 배격하고 민족자아의 창달을 널리
주창하는 걸로 인식한다면 친일잔재청산을 거부하는 보수그룹은 사기꾼집단에 불과하다는
결론이 난다. 보수를 빙자하여 자신의 존재조차 스스로 부정하는 수구꼴통인 것이다.
박영효 태극기 보다 앞선 최초의 태극기일까??
'박영효 태극기'보다 최소 2개월 여 앞선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기 사진이 발견됐다.
1882년 7월 미국 해군성 항해국이 출간한 '해상 국가들의 깃발(Flags of Maritime Nation)'이라는
제목의 책에 태극무늬와 4괘(卦) 등 현재 태극기 형태를 갖춘 태극기 사진이 실려 있는 것으로 26일 밝혀졌다.
일제강점기에 99%의 우리민족은 죽음에 이르는 수난을 당하고 극소수의 친일부역자만은
개같은 영화를 누렸다. 국권은 회복했으되 친일의 무리들을 단죄하지도 못했고 이제는
그 굴절된 역사만이라도 바로 잡자는 노력도 친일파 후손들의 벽에 부딪혀 난관에 봉착했다.
나는 위에 적시한 낡은 사진들이 합성했거나 조작된 증거가 아니라면 친일진상규명법에 반대하는
한나라당 등 친일파들의 무리를 개, 돼지보다 못한 매국노요, 인류의 공적이라고 규정한다. (The End)
1952년 한국 전쟁 때 촬영한 것으로 한홍구 교수는 [한겨레21/한홍구의 역사이야기] 우리는 무덤 위에 서있다
(2001년04월10일 제354호, or 대한민국사)에서 "한국전쟁 기간 중 생포된 게릴라의 잘린 목을 보며 웃는 남한 병사"
라는 설명을 달고 있다.
우리가 우리 내부의 이성을 잃은 광기를 다스리지 못하면서 일본의 만행만을 규탄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일본제국주의가 한국인, 중국인, 나아가 전세계를 상대로 반인류적인 만행을 저지른 것이나
우리가 같은 민족의 목을 잘라 들고 희희낙락거리는 만행에서의 차이점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 이완용의 여편네의 모습??
△ 호사는 친일부역자들이 누리고
▽ 수난은 죄없는 민초들의 몫이다.
△ 일본군이 조선인을 짐꾼으로 부리며 여유롭게 웃고 가는 모습.
1951년 6월 부산, 이기붕이 국방장관에 취임했을 때 그의 집에 초대된 미국인들의 기쁨조로
특별히 초대된 이화여대생들이 문밖에서 노래를 불러 주고 있다. 오른쪽부터 무초 주한 미국대사,
이기붕의 부인 박마리아, 콜트 장군의 모습이다. 지금은 전쟁중이라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맹목적인 반일반미도 경계해야 하지만 뻔히 두 눈을 뜨고도 아무 생각없이 친일이 친미로 그냥
이어져 내려간다면 우리는 역사를 상실한 국민이 될 것이다. 원조보수를 자처하는 한나라당 등이
친일진상규명법에 반기를 드는 것은 그들이 친일후손이 아니고는 이해할 방법이 없다.
보수라는 정체성의 대의를 외세에 의한 침탈이나 그 지배를 배격하고 민족자아의 창달을 널리
주창하는 걸로 인식한다면 친일잔재청산을 거부하는 보수그룹은 사기꾼집단에 불과하다는
결론이 난다. 보수를 빙자하여 자신의 존재조차 스스로 부정하는 수구꼴통인 것이다.
박영효 태극기 보다 앞선 최초의 태극기일까??
'박영효 태극기'보다 최소 2개월 여 앞선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기 사진이 발견됐다.
1882년 7월 미국 해군성 항해국이 출간한 '해상 국가들의 깃발(Flags of Maritime Nation)'이라는
제목의 책에 태극무늬와 4괘(卦) 등 현재 태극기 형태를 갖춘 태극기 사진이 실려 있는 것으로 26일 밝혀졌다.
일제강점기에 99%의 우리민족은 죽음에 이르는 수난을 당하고 극소수의 친일부역자만은
개같은 영화를 누렸다. 국권은 회복했으되 친일의 무리들을 단죄하지도 못했고 이제는
그 굴절된 역사만이라도 바로 잡자는 노력도 친일파 후손들의 벽에 부딪혀 난관에 봉착했다.
나는 위에 적시한 낡은 사진들이 합성했거나 조작된 증거가 아니라면 친일진상규명법에 반대하는
한나라당 등 친일파들의 무리를 개, 돼지보다 못한 매국노요, 인류의 공적이라고 규정한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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