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환 [閔泳煥, 1861.7.2~1905.11]
한말의 문신·
예조판서, 병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일본의 내정간섭을 비판하다 이미 대세가 기운 것을 보고 자결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중장(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본관 여흥이고 자는 문약(文若)이며. 호는 계정(桂庭)으로 겸호(謙鎬)의 아들이자 명성황후의 조카이며 백부(伯父)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태호(泰鎬)에게 입양하였다. 1877년(고종 14)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고, 이듬해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그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그 뒤 정자(正字) 수찬 등을 거쳐 1881년 동부승지(同副承旨), 1882년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그 해 생부 겸호가 임오군란으로 살해되자, 벼슬을 버리고 3년간 거상(居喪)하였다.
이조참의에 임명되었으며, 세 차례에 걸쳐 사직상소를 올렸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일단 관계(官界)로 돌아와, 약관의 나이로 도승지,홍문관부제학·이조참판,한성우윤(漢城右尹) 등을 지냈다. 1887년 상리국총판(商理局總辦),친군전영사(親軍前營使)를 거쳐 예조판서가 되었다. 1888년, 1889년 두 차례에 걸쳐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1893년 형조판서·한성부윤을 지냈으며, 1894년 내무부독판사(督辦事) 및 형조판서를 다시 역임하였다.
1895년 주미전권공사(駐美全權公使)에 임명되었으나, 을미사변이 일어나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부임하지 못하고 사직하였다. 이듬해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戴冠式)에 참석하였는데, 이 때 일본 미국 영국 등지를 두루 거치면서 서구문명을 처음으로 접하였다. 귀국 후 의정부찬정(贊政) 군부대신을 지낸 다음, 1897년(광무 1) 또다시 영국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6개국 특명전권공사로 겸직 발령을 받고 외유하였다.
이 때 영국 여왕 빅토리아의 즉위 60주년 축하식에도 참석하였다. 잦은 해외여행으로 새 문물에 일찍 눈을 떠, 개화사상을 실천하고자 유럽제도를 모방하여 정치제도를 개혁하고, 민권신장(民權伸張)을 꾀할 것을 상주하였다. 군제(軍制)의 개편만이 채택되어 원수부(元帥府)를 설치, 육군을 통할하게 하였다. 1896년 독립협회를 적극 후원, 시정(時政)의 개혁을 시도하다가 민씨일파에게 미움을 사 파직되기도 하였다. 그 후 다시 기용되어 참정대신(參政大臣) 등을 지내고, 훈1등(勳一等)과 태극장(太極章)을 받았다.
친일적인 대신들과 대립, 일본의 내정간섭을 성토하다가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의 한직(閑職)으로 밀려났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병세(趙秉世)와 함께, 백관(百官)을 인솔하여 대궐에 나아가 이를 반대하였다. 일본 헌병들의 강제 해산으로 실패, 다시 백목전도가(白木廛都家: 육의전)에 모여 상소를 논의하던 중, 이미 대세가 기울어짐을 보고 집에 돌아가 가족들을 만나본 뒤 조용히 자결하였다.
1883년 9월 미국에 도착한 조선의 첫 외교사절 보빙사 일행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앞줄 왼쪽부터 부사 홍영식, 정사 민영익, 종사 관 서광범, 미국인 로웰. 뒷줄 왼쪽부터 무관 현흥택 최경석, 수행원 유길준 고영철 변수.
1896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축하절사로 참석하였을 때 러시아 수도에서 찍은 사진. 우측상단에 민영환이 직접 쓴 칠언절구가 적혀있다. 해석하면 "이 얼굴 한 농부에 지나지 않는데 / 경이 되고 장이 됨은 곧 무슨 일이던가 / 관직을 더럽혀 家聲을 실추시켰으니 / 감히 밝은 조정에서 백관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이다. © 고려대박물관 도록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8796
리시아 황제 대관식
민영환은 자결해서 충정공이 되었지만 체포되어 심문 받은 전봉준은 중앙 탐관오리의 대표적 인물로 민영환, 민영준(민영휘), 고영근을 들었다
1896년 6월 민영환은 대한제국 특사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戴冠式)에 참석했다. 품 속엔 “차관 300만엔을 빌려 달라”는 고종 친서가 들어 있었다. 당시 조선은 곤궁하기 짝이 없었다. 조선 왕실은 1882년 임오군란 때 일본에서 17만엔을 빌려 쓴 이후 10여 년간 일본한테 수백만엔을 빚진 상태였다. 1896년 2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조선 왕실은 일본 대신 러시아에 기대보려 했다.
러시아는 “조선의 경제 상태를 먼저 확인한 뒤 결정하자”면서 차관 요구를 거절했다. 1899년에도 러시아는 “조선 내 광산 개발권을 받는 대신 500만 루블의 차관을 주자”는 마티닌 주한 대사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베리아에 금과 광물이 많은데 구태여 조선까지 가 채굴할 이유가 없다고 한 것이다.
민영환의 장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