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4년 태어나 1921년 세상을 떠난 장지연
장지연〈사진·앞줄 왼쪽·1906년 휘문의숙장 시절 모습. 그의 옆은 황성신문 사장을 지낸 언론인 유근(柳瑾)>
http://playculture.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2/11/2009121100588.html
지난 4월5일 열린 국무회의는 위암 장지연을 비롯한 19인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 (건국훈장 국민장 - 1962년 서훈) 취소를 의결했다.
당시 시대 흐름 인종주의.사회진화론에 심취한 지식인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항일 논설로 널리 알려진 위암에 대한 서훈 취소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 당하자 사흘 뒤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하는데, 일본(정확하게는 이토 히로부미)이 약속을 어긴 데 대한 비판이다. 주요 내용은 ‘동양 삼국 안녕 주선’과 ‘독립 방략 권장’ 약속을 왜 깼느냐,
전문(全文)은 이렇다.
“지난날 이토 후작이 한국에 오니 어리석은 우리 국민이 말하기를, 평소 동양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주선한 인물이라 오늘날 반드시 우리나라의 독립을 굳게 세울 방략을 권하리라 하여 관민이 크게 환영하였더니, 세상에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 많도다.
천만 꿈밖에 5조약이 어디로 제출되었는가. 조약은 비단 우리 대한뿐 아니라 동양삼국의 분열조짐을 만들어 내는데 후작의 처음 의도가 어디에 있었던가.
그것은 그렇다 해도 우리 대황제 폐하의 성의(聖意)가 강경하여 거절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니 조약이 성립되지 않은 줄 이토 후작 스스로도 잘 알 것이다.
슬프도다. 개돼지만도 못한 정부의 대신들이 영리를 바라고 위협에 겁먹어 놀랍게도 매국의 도적을 지어 4000년 강토와 500년 사직을 바치고 2000만 국민을 노예로 만드니 저들 외부대신 박제순과 여러 대신은 깊이 책망할 가치도 없다.
명색이 참정대신으로 정부의 수석인 대신은, 단지 부(否)자로써 책임을 궁색하게 면하여 명예를 구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가. 청음 김상헌의 서류를 찢는 통곡도 동계 정온의 할복도 못하고 살아서 세상에 서니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상 폐하와 2000만 동포를 대하리요.
분하도다! 우리 2000만,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기자 이래 4000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이 일로 1906년 2월까지 64일 동안 감옥 생활을 한다.
장지연은 그해 7월 7일치 <황성신문>에서 논설을 통해 “한국과 일본이 함께 독립을 유지하며 서로 지팡이가 되니 일본 또한 영원히 보전된다.”고 한.중.일 삼국 동맹을 긍정하는 논리를 펼친다.
장지연은 대한자강회를 조직했다가 해산되자 러시아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로 1908년 망명을.
망명 생활 또한 뜻처럼 되지 않자 1909년 10월 진주로 와서 우리나라 최초 지역일간지 <경남일보> 주필을.
그러다 경술국치를 당한 다음 매천 황현의 절명시(絶命詩)를 싣는다.(전체는 네 편인데 첫째와 셋째만 옮깁니다. )
난리를 겪다 보니 머리 온통 허예졌네
몇 번이나 목숨 끊으려도 이루지 못했으나
오늘에는 반드시 이루어야 하고 보니
가물대는 촛불이 아득히 하늘에 비치네.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무궁화 한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구나
가을 등불에 책 덮고 지난 날 생각하니
세상에 글 아는 이 노릇 어렵고 어렵구나
러일전쟁이 한창인 때인 1904년 장지연은 5월 6일치 <황성신문> 2면 논설에서 ‘백인종에 맞서려면 황인종은 일본 중심으로 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지 않았으면 그럭저럭 좋았으련만, 장지연은
1914년 만들어진 발기취지가 “위로는 일본 천황의 통치를 보필하며 아래로는 백성의 복을 도모”였으며 친일 승려 이회광이 주도한 불교진흥회라는 친일 단체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간사를 맡는다.
1915년 새해 첫날부터 일제 식민 통치를 아름답게 꾸미는 글을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싣기 시작한다.
제목은 ‘조선 풍속의 변천’.
“조선총독부가 시정 5주년 기념으로 물산공진회를 마련했는데 이는 조선총독부가 혁구쇄신(革舊刷新)하여 쓸모없는 것을 없애고 농공실업을 장려하여 진보한 성적을 모두 수집하여 진열한 것이다.”
1915년 4월 3일치 매일신보.
“신무는 영웅의 신명한 자질로 동정서벌하여 해내를 평정하고 나라를 세워 자손에게 전해주었으니 지금에 이르도록 2576년간을 123대 동안 황통이 길이 이어지고 있다. 이른바 만세일계란 것이 이것이다. 어찌 세계 만국에 없는 바가 아니겠는가.”
같은해 4월 21일치 <매일신보>
만필소어(17)-신구학(기)에서 “(아시아를 제패한 전술로 보더라도) 일본을 동양의 독일이라 일컬어도 지나치지 않다.”,
1915년 7월 13일.
“동양 대국(大局)은 오직 일본과 지나(=중국) 두 나라일 뿐이다. 보거순치 관계로 어찌 떨어질 수 있겠는가. 반드시 서로 제휴하여 친선을 한 연후에 외부를 막을 수 있는 술책”이 생긴다는 글입니다.
1915년 12월 26일.
“만약 집정자로 하여금 허락하게 한다 하더라도 조선인의 집회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며 “동종동족이 서로 원한을 맺어 서로 원수가 되어 망국의 지경이 되어서도 후회하지 않으니, 어찌 너무나 어리석고 바보 같은 짓이 아니랴. 이로 인해 전 조선인의 습관이 되어 마침내는 단체성이 없는 인종이 되고 말았다”.
1916년 6월 8일.
“금일 동양의 평화를 유지코저 할진대 유일의 자위책은 즉 미국의 ‘몬로’주의를 차용하여 아세아몬로주의를 실행”할 필요가 있으며 “지리상 관계던지 종족상 관계던지 동주동종의 민족된 자가 마땅히 민족주의를 채용하여 일대 범아세아주의를 발달함에 노력할지니 즉 아세아몬로주의가 이것이라.”
1916년 9월 16일 만록-지리관계(5)에서 “일본은 세계 열강 사이에서 웅비하는 동양의 패왕이므로 일본을 중심으로 동양인이 서로 제휴해 장벽을 없애고 동제공장하여 동양의 평화를 보전”해야 한다.
1917년 6월 8일 조선 순종이 동생인 영친왕 이은의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과 일본 황실과 결혼하기로 내정된 데 대해 고맙다는 뜻을 나타낸다는 명분으로 일본 천황을 만나러 가도록 한 일을 노래한 ‘봉송이왕전하동상(奉送李王殿下東上)’-
동상(동쪽 위에 있는 일본)으로 이왕(순종) 전하를 보내며-에서 ‘이왕(李王) 동상(東上)’은 “이왕 전하 동해를 건너시니/ 관민이 길을 쓸고 전송했네/ 오늘 같은 성대한 일은 예전에 드물었으니/ 일선융화의 서광이 빛나리라”.
1918년 1월 1일치 신년호
‘대정6년 시사’라는 제목으로 장지연이 썼다는 한시가 24편 실렸습니다. 일본 천황 대정=大正=다이쇼의 한 해 전 치적을 찬양하는 글들.
‘군함 축파(築波=쓰쿠바) 침몰’(1917년 1월 14일 요코스카에서 침몰) 제목에서 “한 소리 폭음에 불꽃 치솟더니/ 거함이 정박 중에 침몰하더라/ 위문하는 문관이 성지(聖旨=천황의 뜻)를 전하니/ 조원들 높은 은총에 사례하였네”.
‘내지(內地=일본 본토) 대수(大水)’ 제목에서는 “전에 없던 호우 폭풍 많아/ 홍수 지나가자 곳곳에 재해 입었네/ 하사금 내리심은 구휼하는 은전이라/ 조선 인민도 한 가지로 파도 같은 그 은혜에 젖었네”.
1918년 3월 21일.
“오늘날 동양의 지위는 지나, 일선 두 나라가 있을 뿐이다. 이 두 나라가 서로 함께 나아가 순치보거지세를 만든 연후에야 국방을 보전하고 민족을 보전”할 수 있다.
이밖에도 연세대 사학과 교수 김도형이 2000년 6월 발표한 논문 ‘장지연의 변법론과 그 변화’(<한국사 연구> 109집)에 따르면, 장지연은 ‘황인종과 백인종’ 전쟁에 대해 <매일신보> 1915년 7월 3일치(‘구주(歐洲) 전쟁의 기인’)와 1918년 3월 19일치(‘황백인종전’)에서 말했습니다. 또 <매일신보> 1916년 6월 8일치 ‘시사소언’에서도 “일본이 마땅히 아시아의 맹주가 돼야 한다.”고 .
딱한 장지연.....
장지연은 자기 한 몸 잘 살기 위해 친일한 여느 친일인사들과는 다른 사람. 실제로 부귀영화를 누리지도 못했.
그이유는 무어랄까 결국 신념이 잘못돼 인생을....
1921년 술에 찌들어 숨을 거둘 때까지.... 당시 시대 흐름 인종주의.사회진화론이 그랬던 탓도 클 것입니다.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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