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3. 6. 15:54


초로의 촌부가 “저 산이 없었으면 우리는 진작에 굶어 죽었다”고 했듯이, 가진 것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산은 ‘목숨을 부지할 최후의 보루’와도 같은 것이었다. 산은 땔감을 제공해줄 뿐 아니라 각종 과실과 약초, 동물 등 먹거리를 통해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을 먹여살린 것이다.


조선왕조는 초기부터 여민공리(與民共利) 원칙 아래 산을 권력자가 독점하지 못하고 누구나 들어가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조선 후기에는 서민들이 권력자가 산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송계(松契)를 결성하기도 했다.

일제는 임야조사사업을 통해 촌락의 수많은 임야들이 사적 소유지로 재규정하고

‘산림녹화’라는 명분으로 임야 소유자들조차 출입이 제한했다. 그러면서도 일제는 새로 소유자가 된 사람들에게 각종 세금을 거둬들였다. 산림녹화는 명분이었고, 각종 세금을 거둬들여 지방행정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정책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사적 소유권 제도가 확립되면서 마을 사람들이 그 임야에 들어가 풀을 뜯고, 열매를 딸 수 있는 권리까지도 모조리 사라졌다는 점이다. 상당수 촌락공용지는 면(面)이 소유한 재산으로 변했고, 그때까지 행정 말단조직에 불과했던 면은 지역의 ‘공적 경제’를 책임지는 조직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들이 유지해온 공동체적 자치의 전통은 법적 보호의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결국 그런 전통 자체가 파괴되는 신호탄이 되었다. 말하자면 일제의 임야정책은 산림녹화의 탈을 쓰고 당시 촌락에 면면이 이어져오던 공동체적 자치성을 붕괴시킨 근대의 폭력이다.

http://kr.news.yahoo.com/service/news/shellview.htm?articleid=2010030518202848040&linkid=42&newssetid=432&nav=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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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