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병대와 대통령 부인
1928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허버트 후버는 미국의 장래를 한껏 밝게 내다보고 있었다. "지금 미국은 역사상 어느 나라보다도 빈곤의 완전한 정복을 가까이 바라보고 있다"고 그는 유세에서 말하곤 했다. 대공황은 그의 취임 7개월 후에 터졌다.
후버의 재임중 미국인의 총소득은 절반 이하로 떨어지고 수출입은 3분의 1 이하가 됐다. 공식적인 실업률은 25%를 기록했지만 실질실업률은 40% 이상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후버는 낙관론을 버리지 않아야 위기를 넘길 수 있다고 믿었고, 근본적인 실패를 고집스럽게 부인함으로써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기만 했다.
후버의 고답적인 태도를 대표적으로 보여준 것이 '연금 부대'의 격퇴다. 1932년 대통령선거전을 앞둔 여름 제1차 세계 대전 참전병사 2만여 명이 워싱턴에 몰려들었다. 1945년부터 지급받기로 예정돼 있는 연금을 앞당겨 달라고 청원하며 대로상에 캠프를 친 그들을 연금 부대(Bonus Army)라 한다. 후버는 군대를 동원해 이들을 쫓아냈는데 과잉 작전으로 적지 않은 사상자를 냈다고 한다.
얼마 후 새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연금 부대가 다시 찾아왔을 때 루스벨트는 부인 엘리너를 그 캠프로 보냈다. 엘리너는 시위자들에게 커피를 권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노래를 부르며 그들의 마음을 달래줬다. "후버는 기병대를 보내줬고 루스벨트는 마누라를 보내줬다"는 것이 두 대통령의 차이로 국민들의 마음에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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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처한 개인의 대응 자세는 위기를 인식하는 방법에 따라 달라진다. 근본적 위기라면 인생관을 바꿔야 한다. 일시적 위기로 인식한다면 당분간 하고 싶은 일 참고 하기 싫은 일 하며 지내면 된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는 근본적 위기란 것을 아예 인식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위기든 요령만 잘 피우면 넘길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서양 사회를 풍미한 테일러리즘은 세상의 어떤 문제에든지 기술적 해결책이 있다고 믿는 능률 지상주의였다. 개인의 요령 지상주의와 같이 가치관의 반성을 마비시키는 풍조였다. 홉스봄이 "극단의 시대"라 부른 20세기의 극단성이 가치관의 경직 현상에서 나온 것이라면, 인간 지성의 오만을 단적으로 드러낸 사회진화론과 테일러리즘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대공황을 맞은 미국 대통령 허버트 후버는 대표적인 테일러리스트 정치가였다. 사실 그를 '정치가'로 분류하는 것도 망설이는 이들이 있다. 엔지니어 출신인 그는 하딩과 쿨리지 행정부에서 통상부 장관을 지냈지만 공직 선거는 1927년의 대통령선거가 처음이었고, 대통령으로서도 정치가보다 행정가로서의 면모만 보였다는 것이다.
후버가 연금부대에 기병대를 보내고 루스벨트가 엘리너를 보낸 차이가 어디에 있었는가? 단순한 요령의 차이가 아니다. 후버는 닥쳐 있는 위기 인식의 주체로서 서민들의 입장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고 루스벨트는 인정한 것이다. 위기 극복은 정부가 알아서 할 일이니 백성들은 앉아서 그 결과를 받아들이기나 하라고 후버는 윽박지른 반면 루스벨트는 정부와 국민이 함께 고통을 받아들이며 새로운 장래를 함께 그려나가자고 청한 것이다.
루스벨트가 역사상 위대한 정치가의 하나로 꼽히는 것은 국가와 사회의 구조를 개편한다는 거대한 정치적 과제를 수행했기 때문이다. "일장공성 만골고(一將功成萬骨枯)"란 시구가 있거니와 루스벨트의 성공 뒤에도 가려진 '백골고(百骨枯)'가 있었다. 대공황 이전의 긴 호황기 속에 자라나 미국 경제를 주름잡고 있던 '도둑 귀족(robber barons)'들의 위세가 크게 물러선 것이다. 후버 시대까지 미국의 주인 행세를 하던 대기업가 집단이 순순히 뒷전으로 물러난 것은 위기를 인식하고 그에 대한 자기네 책임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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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202160316§ion=01
맥아더의 보너스군인들 진압 작전...
1932년 7월28일 미명. 맥아더 육군참모총장이 부관 아이젠하워 대령을 불러 진격 명령을 내렸다. 선봉은 조지 패튼 소령이 지휘하는 기병대. 탱크 6대의 지원을 받은 기병대는 목표물을 향해 내달렸다. 상대방은 독일군도 일본군도 아닌 퇴역 미군.
미군끼리 다투는 사태가 발생한 원인은 딱 한 가지다. 돈. 1차 대전 참전용사들의 참전수당 선지급 요구가 발단이다.
1924년 마련된 참전수당의 기준은 하루 1달러(미국 내 근무자)와 1달러25센트(유럽전선 파견자). 지급 총액이 50달러 이하인 경우는 바로 지급됐지만 그 이상인 경우는 1945년으로 미뤘다.
지불 총액의 25%를 더 내주고 연 4%의 이자를 쳐준다는 조건과 함께. 문제는 대공황. 생계가 어려워지자 참전용사들은 지급시기를 앞당겨달라며 워싱턴으로 모여들었다. 유럽원정군을 빗대어 보너스원정대(Bonus Expeditionary Force)라는 이름을 스스로 붙인 퇴역군인들과 그 가족들의 행렬은 ‘보너스 아미’로 불렸다. 포토맥 강변에 천막을 치고 농성하던 2만여명의 보너스 아미가 의사당으로 행진한다는 계획을 세우자 후버 대통령은 군을 동원했다.
맥아더는 보너스 아미가 ‘평화주의자와 그 동침 상대인 공산주의자 집단’이라며 철저하게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최루탄과 총검이 동원된 진압작전으로 퇴역군인 2명이 죽고 100여명이 다쳤다. 불타는 천막촌에 뿌려진 최루가스로 10개월짜리 아기 2명도 질식사했다.
보너스 아미는 전국으로 흩어졌지만 정치와 정책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 공황으로 바닥을 기던 후버 대통령의 지지도가 더욱 떨어지고 결국은 루스벨트에게 백악관까지 내줬다. 퇴역군인연금제도 도입과 제대군인우대법(1944년)도 보너스 아미 사건에 대한 반성이 낳은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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