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2. 29. 22:35

제2차 세계대전 때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개최된 회담. 1차는 1943년 11월 22일에서 26일까지, 2차는 1943년 12월 2일에서 7일까지 열렸다.


제2차 세계대전이 추축국측에 불리하게 진행되면서, 연합군이 이탈리아에 상륙하여 드디어 1943년 9월 이탈리아가 항복하였다. 그리하여 세계 지도자들은 세계대전의 수행과 전후 처리 문제를 사전 협의하기 위해 두 차례의 회담을 하였다.


첫 회담은 1943년 11월 22일에서 26일까지 미국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 영국 처칠(Winston Churchill) 수상, 중화민국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세 연합국 수뇌가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세계전쟁에 대한 대응 문제로 모임을 가진 것이다. 당시 가장 중요한 핵심 사안으로는 대일전(對日戰)에 서로 협력할 것을 협의하였고, 일본이 패전했을 경우를 가정하고 일본의 영토 처리에 대하여 연합국의 기본방침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방침은 <카이로선언>으로서 발표되었다. 군사문제에 있어서는 처칠과 루스벨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대해서 숙의하였고, 장제스와 함께 1914년 이래 일본이 점령한 모든 영토를 탈환한다고 합의하였다.


루스벨트 대통령과 장제스 총통이 미국·영국·중국 3개국군에 의한 미얀마에서의 신작전을 펴자는 제안을 하였으나, 처칠 수상은 영국군 상륙용 선박을 앤다만 제도(Andaman Islands)에 파견하는 것에 반대하여 결정하지 못하였다. 또한 루스벨트 대통령은 북부 프랑스에 대한 반격을 절대적으로 우선하려 하였던 것에 반하여, 영국 처칠 수상은 이탈리아와 동부 지중해에도 병력의 4할을 투입하자고 제안하여, 서로 의견이 달라 이 역시 합의점을 찾지 못하였다. 결국 주로 일본에 대응하는 문제에 대해서 합의하였고, 특히 한국 독립문제가 처음 언급된 회담으로 특징된다.


카이로 회담 결과 발표한 <카이로 선언(Cairo Declaration)>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3국은 일본에 대한 장래의 군사행동을 협정하였다.

②3국은 야만적인 일본에 가차없는 압력을 가할 것을 결의하였다.

③3국은 일본의 침략을 저지, 응징하나 모두 영토확장의 의사는 없다.

④제1차 세계대전 후 일본이 탈취한 태평양 여러 섬을 박탈하고, 또한 만주·타이완·펑후제도 등을 중화민국에 반환하고, 일본이 약취한 모든 지역에서 일본세력을 축출한다.

⑤<특별조항> 한국의 미래에 대하여 언급하고 독립을 보장하는 국제적 합의를 하였다. “현재 한국민이 노예상태 아래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적절한 절차에 따라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줄 것이다.”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



[출처] 카이로회담 [Cairo Conference ] |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100.nhn?docid=15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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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