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태자:::::::한국:::::대구 가톨릭대학교 독어독문학과 졸업:::::독일:::::마르부르크 필립스 주립대학교/ 비교종교학/비교문화학 전공(석사학위 취득):::::예나 프리드리히 쉴러 주립대학교/ 비교종교학 전공(박사학위취득):::::저서:::::천국과 지옥. 아시아 필름에 나타난 종교성. 종교학적인 분석과 해석 (독일인 교수/박사들과의 공저):::::종교학적으로 분석한 기 개념이 서구 기독교의 믿음체계와 전통적인 반투 아프 리카에 나타난 종교성과 그 관계성 연구:::::한국 기독교에 나타난 샤먼적인 요소들 연구:::::'중세의 뒷골목 풍경'( ‚이랑’ 출판사 에서 2011년 11월 출간)
http://hook.hani.co.kr/archives/45460에서 배껴 쓴 글
WC의 기원은 1589 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인 죤 헤릴톤이 오물을 씻어내는 용기를 고안했다. 하마터면 이런 발명이 쓰임새 없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 했는데 참 다행스럽게도 3년 후에 영국여왕이 이 발명을 알았던 것이다. 그녀는 이 시설을 당장에 영국왕실에 설치 시켰다. 약 200년 후에는 시계공인 알렉산더 커밍스가 이 모델을 개량했고, 1877 년경에는 이 모델이 더욱 더 개량되어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WC (water closet)의 기본 골조로 자리잡았다.
이때부터 호텔에서는 WC의 번호를 ‘00’ 아니면 ‘0’ 으로 붙였다. 이유는 1, 2, 3으로 나가는 일반 객실과 확연한 구분 짓기 위해서였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0’ 및 ‘00’번을 보면 즉시 화장실이란 것을 알아 차렸던 것이다.
***** 그럼 1500년 전부터의 중세유럽의 WC가 아닌 변소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먹고 똥누는 곳을 변소, 정낭, 뒷간 등 여러 가지로 표현 하듯이 당시인들 도 마찬가지였다. 말하자면 ‚비밀스런 곳’ ‚똥 갈기는 곳’ 등등의 여러 이름이 있다. 한마디로 뭉친 단어는 다름 아닌 ‚똥 누는 작은 공간’이다. 위의 그림을 보면 한 남자가 땅에 깐 엉덩이를 대고 무언가를 열심히 행하고 있는 모습이다. 여인들은 창을 통해서 호기심에 찬 눈으로 이 남자를 주시하고 있다. 다름이 아니라 똥누는 모습이다. 당시의 중세유럽인들의 변소는 우리의 옛 모습처럼 이렇게 허술했고 시골에선 똥을 밭에다 그냥 누는 경우가 허다했다.
***** 그럼 용변을 보고 나서 뒤처리는 어떻게 하였을까? 로마인들은 손이나 막대기를 이용했는데 중세의기록을 보면 프랑스의 루드빅히 14세(1638-1715)는 똥누고 난 뒤 양털로 뒷마무리를 했고, 귀족들은 아주 호화품의 천 종류를 사용했다. 반면에 낮은 층들이 사용한 것은 마른풀, 낙엽들, 이끼, 마조각, 짚, 족엽 등이었다. 시대가 흘러 신문이 발간되기 시작하자 찢은 신문지가 점차적으로 그 대용물로 자리를 잡았다. 사실 이런 것은 불과 몇 십 년 전 우리네의 모습과 너무 유사하다. 화장지가 나오기 전에는 우리도 찢은 신문지를 변소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사용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어쩜 전연 상상 못할 사실 인지도 모른다.
***** 다음은 요강 얘기다. 얼마 전까지도 우리 역시 밤에 이 요강을 사용했는데 이들 역시 요강 사용했던 시절이 있었다. 밤새 채운 요강을 아침에 창문을 통해서(그림참조) 바깥으로 부어 버리곤 했다. 이런 식으로 아침에 오줌을 창 밖으로 쏟다가 요강을 떨어뜨리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이때 지나가던 행인들이 그날 재수 없으면 이 요강에 맞아 다치기까지 했다.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났던 시기는 특히 13세기 이후였다. 그러다 보니 당시의 거리가 얼마나 지저분했겠는가? 늘 오물이 뒤덮였던 거리였다 보니 당시인들은 굽 높은 신발을 신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얘기다. 당시의 이런 거리를 황제 프리드리히 3세가 전해주는 생생한 기록이 있다. 1483년 회의 때문에 그가 로이팅엔을 방문했을 때다. 그가 타고 가던 말이 그만 이런 거리의 오물에 빠졌다는 것이다. 1500년경의 뉘른베르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시청의 변소간에서는 늘 구린내가 진동을 했었는데 그 이유가 오물구덩이를 7년간 쳐 내지 않았기 때문 이었다. 공중 변소는 상상도 못할 당시였다. 길거리에서 그냥 똥오줌을 누어도 별 상관이 없던 시대였다. 뿐만 아니라 말, 돼지 등의 오물, 개, 양 닭의 오물도 함께 너 부러져 있었으니 당시 거리를 뒤덮고 있었던 오물의 악취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우리가 중세인의 서민생활상을 그린 그림을 보면 대개는 칙칙하고 어두웠던 분위기를 자아냈던 것도 이런 이유에 포함 시킬 수 있다. 이 오물 때문에 이런 저런 황당한 일이 생기자 중세 말에는 시에서 아예 공포를 했다. 각 집에서 나온 오물은 각자가 적절한 장소에서 처리하라는 규정이었다.
***** 城을 지닌 귀족들은 서민들 보다는 여러 가지로 훨씬 나은 형편이었다. 중세기의 변소간 중 오스트리아 빈의 예를 보자. 대개는 성안 정원에 구덩이를 2-8미터의 깊이로 파고선 그 위에다 두 개의 나무 판때기를 놓았으니 우리의 정낭/변소 비슷한 것으로 상상 하면 되겠다. 이 변소간이 차면 사람들은 이 오물을 분해하여 다른 용도에 쓰기도 했다. 당시의 구두장이나 제혁 공들이 변소 배수구 지역에 많이 모여 살았다. 그 이유는 이들이 이 오줌을 가죽용 암모니아로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13세기부터는 변소도 벽을 적당히 친 공간으로 변모했다. 그 중 하나를 소개해 보면, 물론 이것은 서민용이 아니라 대개는 귀족의 대 저택의 끝이나 성의 외곽에다가 설치했는데 냄새와 위생 때문 이었다. 그림에서 보듯이 이 시설물은 언뜻 보면 꼭 발콘 같은 모습이나, 사실은 저택이나 성의 한 귀퉁이에다 설치했던 변소다. 이런 변소에서 본 배설물이 거리로 직접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고, 좀 나은 경우는 정원 쪽으로 떨어지게 만든 경우다. 점차적으로 시설이 발달되자 변소 안에다 길고 큰 나무통을 밑으로 달아 배설물이 땅속 지하로 빠지게 하는 방법이었다. 이렇게 채워진 변기통은 일 년에 한번 ‚저급’ 직업인들이 비웠다.
***** 발콘 모양인 이 변소가 사실은 城의 방어벽과 비슷하게 생겼다. 그렇다 보니 이런 변소에서 일어난 사건들도 더러 있었다. 적들이 이곳이 방어벽인줄 알고 침입하기도 했다. 사람이 똥 안 누고는 살 수 없지 않는가? 이것을 적들이 간파했던 것이다. 성에 사는 귀족들이 이런 변소에 똥 누러 오는 시간을 기다렸다가 공격을 하곤 했다. 역사 속에 나타난 변소와 연관된 죽음들을 보자. 1076년 제후 고트프리드가 살해 당했다. 그가 이런 변소에서 똥 누고 있는데 적들이 밑에서 그의 둔부를 찔렀던 사건이었다.
1437년에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1세의 기이한 경우다. 공교롭게도 바로 3일 전에 바같으로 빠져나가는 길을 벽으로 막아 버리고 난 뒤 일어 난 사건 이었다. 이 후 음모자들이 제임스 1세를 죽이려고 성안으로 들이 닥쳤다. 왕이 피해서 도망 간 곳이 하필이면 며칠 전 바같으로 나간 길을 막아버렸던 변소간 이었다. 여기서 그는 덜덜 떨면서 변소간에 앉아 있다가 다시 똥통 속에 빠졌다. 똥이 목까지 찬 똥통 속에서 그는 자그마치 이틀 간이나 견디다가 결국은 죽었다. 왕이 변소 똥통에서 죽어간 것은 역사 속에 단지 한번 있었던 아주 기이한 사건이다.
이번엔 한 사람이 아니고 여러 명이 죽었던 기록이다. 독일 귀족들 100 여명이 옛 독일제후회의 모임 때문에 1183년 에어푸르트에 있는 한 城의 강당에 모였다. 한참 회의가 진행 되고 있던 그때 유감스럽게도 하필이면 이 城의 강당마루가 무너 내려져 앉았던 것이다. 건물이 너무 오래되어서 그렇게 내려져 앉을 수도 있다고 치자. 문제는 무너진 강당 바로 아래가 변소 똥통이었다는 것이다. 당시에 100명 이상의 높으신 귀족들이 회의 중 이 통 똥에 빠져서 죽었다. 이렇게 똥통에서 대량으로 사람이 죽어 나간 사건 역시 역사기록엔 처음 이었다.
***** ‚움직이는 똥통’으로 장사하던 시대도 있었다. 오늘날로 치면 간이변소가 되겠지만, 오늘 날의 간이 변소는 돈 내고 들어가선 스스로 해결하고 나오면 된다. 당시는 달랐다. 사람이 직접 똥통을 들고 다녔던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길거리에는 ‚이동변소 장수’들이 자주 다녔다. 이들은 커다란 통을 끌고 다니면서 갑자기 대소변 볼 손님을 찾아 다녔던 것이다. 오늘날 장사치들이 목마른 이들에게 음료수를 팔러 다니는 모습과 유사하다.
1800년도 프랑크푸르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여긴 남자들이 아닌 여인네들이 이런 ‚영업’을 하였다. 특이한 복장을 했던 이 여인들이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에서 급하게 용무 볼 손님이 오길 기다린 경우도 있었지만, 때로는 급하게 똥오줌을 해결 할 이들은 자기에게 오라고 외치는 호객행위까지 했다. 이렇게 갑작스러이 용변이나 대변을 해결하기 위한 손님(?)이 오면 이들은 오픈 된 길거리에서 똥통을 들이대진 않았다. 나름대로의 가리개(?)가 있었다. 마스크를 낀 이 여인들이 뚜껑이 달린 통 두 개를 어깨에다 걸치고 그 위에 아주 큰 망토를 늘 걸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망토가 변보는 대소변 보는 손님을 가려주는 방패막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다 돈벌이 수단이었다 보니 공짜는 아니고. 대변/소변 본 손님은 돈을 당연히 내야 했다. 이렇게 손님을 받았던 여인들은 배설물 냄새를 줄이기 위해서 대개는 짚이나 나뭇잎 등을 섞고선 뚜껑을 닫았다고 한다.
***** 인간의 생활양식이 거듭 발전을 하자 구질구질 했던 변소의 모습도 함께 달라졌다. 19세기엔 앉아서 용변을 누는 것이 나오자 진기한 구경거리로 시골에서 올라온 이들은 이런 변소를 구경하기 몰려 들기까지 했다. 두 가지를 짚어보면서 이 글을 마무리 해보자; 한가지는 중세의 이 변소 얘기가 40년 전의 우리의 모습과 너무 닮은 점이다. 구체적으로 보자. 중세인들이 어깨에 똥통을 메고 거리에서 똥눌 손님을 찾았던 모습이나, 40년 전 우리의 시골이나 도시 변두리에서 똥 푸던 이들이 ‚똥치소’라고 외쳐댔던 모습과 참 유사하다고 느껴진다. 우리가 자주 하는 말이 있는데, 서양이 200년 걸린 것을 우리는 40년 만에 해 치웠다는 말이다. 이런 변소문화를 통해서도 200년을 축소시킨 40년을 살짝 엿 볼 수 있다.
다른 한 가지는 위대한 자연을 언급하고 싶다. 인류사 이래로 인간이 쏟아 놓았던 배설물이 지금까지 썩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고 가정해보면? 지구는 오물 냄새로 진동 할 터인데…… 위대한 자연은 이 오물들을 스스로 다 정화 시켜 놓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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