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앞에서 칼 빼든 이완용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중앙 SUNDAY 제216호 | 20110430 입력
서울 광화문 앞 훈련원에서 훈련 중인 대한제국 군인들. 이완용과 군부대신 이병무는 이토의 지시에 따라 군대 해산을 주도했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망국의 몇 가지 풍경
⑥고종 퇴위
통감 이토는 참정대신 이완용을 불러 “이(헤이그 밀사)는 조약 위반으로 일본은 한국에 대해 선전(宣戰)할 권리가 있다”고 협박했다. 주인의 질책을 들은 이완용과 내각 대신들은 곧바로 고종에게 달려가 따졌다. 일본외교문서 1907년 7월 7일자 등에 따르면 고종은 ‘짐은 이 사건과 아무 관계도 없고 모두 헤이그에 있는 자들이 밀서를 위조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대신들에게 사태 수습책을 강구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특유의 이중 처신이 통할 때는 이미 아니었다. 1907년 5월 차악(次惡)이었던 박제순 내각이 최악인 이완용 내각으로 교체된 터였다.
일진회의 송병준이 혹시라도 친일 경쟁에서 이완용에게 밀릴세라 적극적으로 나섰다. 흑룡회에서 편찬한 일한합방비사(日韓合邦秘史는 송병준이 일진회 고문 우치다(內田), 일진회 회장 이용구와 입을 맞추고 어전회의에 나갔다고 전한다. 송병준은 고종의 면전에다 ‘일본으로 건너가 일황(日皇)에게 사과하든지 대한문에 나가 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세미치(長谷川好道)에게 항복하든지 선택하라’고 윽박질렀다. 고종을 도울 열강은 한 나라도 존재하지 않았다. 44년의 왕 노릇이 끝나게 되는 7월 18일. 고종은 우왕좌왕했다. 중추원 고문 박제순을 임시 궁내부 대신 서리로 삼았다가 곧바로 해임하고 총리 이완용에게 겸임시켰다.
1 우치다 료헤이와 송병준(오른쪽). 일본의 침략주의 단체 흑룡회의 우치다는 일진회를 통해 조선 강점에 깊숙이 개입했다. 2 일진회 고문 우치다(왼쪽)와 다케다 한시(가운데), 일진회 회장 이용구.
일본외교문서 대한매일신보 매천야록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고종실록 등을 토대로 재구성해 본 7월 18일
오후는 급박했다.
이날 오후 3시 이완용 등 내각 대신들은 회의를 하고, 오후 4시에 입궐해 고종에게 사태 수습책을 건의했다. 수습책이란 다름 아닌 왕위에서 물러나라는 통보였다. 다급해진 고종은 통감의 의견을 듣겠다며 시간을 끌었다. 5시에 이토를 만나 밀사 사건을 변명하면서 양위(讓位)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이토는 ‘한국 황실의 중대 문제에 간섭할 수 없으며, 내각 대신들과 상의한 일도 없다’고 천연덕스레 답하고 떠났다. 7시에는 서울에 온 외무대신 하야시(林董)에게 매달렸으나 소용 없었다.
내각 대신들은 8시쯤 다시 고종을 찾아가 양위를 요구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이완용이 칼을 빼어들고 고함을 지르며, ‘폐하께서는 지금이 어떤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라고 협박하자 폐하를 모시는 무감(武監), 액례(掖隷)들이 흥분해 고종의 말 한마디만 있으면 갈기갈기 찢어버리려 하고 있었으나 고종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묵묵히 앉아 있었다”고 전한다.
밤 11시 고종은 원로 대신들의 의견을 들어보겠다면서 신기선(申箕善)·민영휘(閔泳徽)·민영소(閔泳韶)를 불렀다. 이듬해(1908) 사망하는 신기선은 논외로 치더라도 민영휘·민영소는 1910년 일제로부터 자작의 작위와 막대한 은사금을 챙기는 인물들이니 이완용과 다를 것이 없었다. 사면초가에 몰린 고종은 새벽 1시 “짐은 지금 군국(軍國)의 대사를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하게 한다”고 물러섰다. 양위가 아니라 황태자 대리청정을 시킨 다음 기회를 봐서 복귀하려는 의도였다. 황태자는 두 번이나 대리청정을 사양하는 상소를 올리고, 고종은 ‘부모의 뜻을 따르는 것이 효도’라고 타일렀지만 대리청정은 이토나 이완용 내각이 바라는 답이 아니었다.
순종실록 즉위년 7월 19일자는 “(순종이) 명을 받아 대리청정하고 이어서 선위(禪位)받았다”고 모호하게 기술하고 있다. 통감부문서 7월 19일자는 이완용이 이토에게 보낸 ‘황태자 집무대리 조칙 통고건’인데, 19일에도 고종의 뜻이 양위가 아니라 대리청정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같은 날 오후 7시15분의 통감부문서 ‘황제 양위건’은 다르다. 법부대신 조중응이 통감 이토에게 와서 ‘양위의 건은 짐의 충심에서 나온 것으로 결코 남의 권고 또는 협박에 의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고종이 ‘본뜻을 오해하여 함부로 분개하거나 폭동을 일삼는 자는 통감에게 의뢰하여 제지하고 기회를 봐서 적절히 진압할 것을 위임한다’라는 칙명까지 내렸다고 전하고 있다. 고종이 자발적으로 양위를 결심했으며, 반대 봉기가 일어나면 이토에게 진압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인데, 물론 조중응의 조작일 것이다.
일본외교문서 명치(明治) 40년(1907) 7월 20일조는 ‘오전 8시에 황태자 대리식을 거행했다’고 적고 있어서 고종은 여전히 황태자 대리청정을 고집했음을 알 수 있다. 일제와 친일 내각이 억지로 양위식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고종과 황태자가 모두 불참한 가운데 이완용·임선준·고영희·이병무·이재곤·조중응·송병준 등 이른바 ‘정미(丁未:1907) 칠적(七賊)’과 여타 친일파 등이 참석한 식이 열려 고종의 44년 치세가 강제로 막을 내렸다.
영국인 베델이 발행하던 대한매일신보 1907년 7월 18일자 호외는 내각 대신들이 고종에게 ‘직접 일본에 가서 일본 황제에게 사과하라’고 요구했지만 고종이 거부했다는 궁중 소식 등을 전하면서 밀사 이준이 ‘흥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서 자결해 만국 사신들 앞에서 피를 뿌려 만국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헤이그에서 병사한 이준이 국내엔 자결한 것으로 전해지게 된 유래다.
황태자 대리청정 소식이 전해지자 종로 각지에 시민들이 모여 통곡하거나 친일 내각을 성토하고, 친일파들에게 훈장을 준 표훈원(表勳院)에 투석했으며, 한국군 일부가 경무청(警務廳)에 발포하고 시민들이 밤 11시쯤 일진회 기관지인 국민신보사(國民新報社)를 습격했다고 각종 기록들은 전하고 있다. 법부대신 조중응이 항의하는 군중에 대한 진압권을 이토에게 넘긴 것처럼 총리대신 이완용도 이토에게 “각 조약국에도 일체를 성명하라”면서 열강들에게 황태자 대리청정 사실을 통보하라고 권유했다.
통감부는 각국 공사관에 ‘한국인 폭도들’이 난입하면 보호해 주겠다고 통보했다. 이에 러시아 총영사(Georger de Plan<00E7>on)는 7월 20일 통감부 총무장관 쓰루하라(鶴原定吉)에게 ‘러시아 공사관은 어떤 위험은 느끼지 않지만 만일 폭도들이 침입하려는 징후가 보이면 방지하는 적절한 대책을 취해주면 고맙겠다’고 회보했다. 미국 총영사(Thomas Sammons)도 “한국 황제 폐하께서…진압에 필요한 조치를 취할 권한을 통감에게 위임했음을 알리는 귀하의 통첩을 접수했다”고 회보했으며, 청국 총영사는 ‘필요하다면 우리 총영사관에 군 경비대를 보내주기 바란다’고까지 통보했다.
이런 여세를 몰아 7월 24일 통감 이토, 하세가와 주차군 사령관, 하야시 외무대신은 총리대신 이완용과 이른바 제3차 한일협약을 체결했다. 제1조는 “한국 정부는 시정 개선에 관해 통감의 지도를 받는다”고 규정하고, “한국 정부는 법령의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친다(2조)”고 규정해 통감을 사실상의 총독으로 격상시켰다. 또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 관리로 임명한다(5조)”고 규정했다.
이완용은 이토와 ‘협약 실행에 관한 각서’도 작성했는데 크게 재판권과 군대 해산에 관한 두 가지 사항이었다. 최고법원인 ‘대심원(大審院) 원장 및 검사총장과 전옥(典獄:형무소장)은 일본인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또한 “육군 1대대를 존치시켜 황궁 수비를 맡게 하고 기타는 해산한다”라고 경호대대를 제외한 군대 해산을 명문화했다. 이완용 친일 내각은 대한제국이 살아나면 자신들은 죽는다고 생각했다. 이완용과 군부대신 이병무(李炳武:합방 후 자작 수여)가 군대 해산을 주도했다. 을사늑약은 외부대신이 체결하고 군대 해산은 군부대신이 주도하는 형국이었다.
군대 해산 D데이는 8월 1일이었다. 하세가와의 지시를 받은 이병무는 아침 8시까지 일본군 사령관 관저인 대관정(大觀亭)으로 시위대 각 대장들을 불러 10시에 훈련원에서 해산식을 한다고 통보했다. 서소문에 주둔했던 시위대 제1연대 1대대는 교관인 구리하라(栗原) 대위가 인솔해 해산식에 인솔하려 하자 대대장 박성환이 항의해 자결했다. 격분한 병사들은 영외로 뛰어나가 일본군을 향해 사격했다. 남대문 안에 있던 2연대 1대대도 이 소식을 듣고 동조 사격을 가했다. 일본군은 기관총 등의 중화기로 진압에 나섰고 결국 시위대 병사들은 진압당하고 말았다. 해산식에 참여한 병사들에게는 군모와 견장을 회수하고 계급에 따라 80~25원의 소위 은사금을 지급했다.
군대까지 강제 해산을 당함으로써 대한제국은 일본에 저항할 마지막 수단을 상실했다. 500년 제국은 그렇게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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