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6월 5일 무위영 소속 구훈련도감 군병들이 선혜청 도봉소에서 겨와 모래가 섞인 쌀을 급료로 지급하려던 관리들을 구타한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사건은 하급군병과 서울 빈민층의 민씨정권에 대한 투쟁을 촉발하여 대규모 폭동으로 이어졌다.
도봉소 사건이 선혜청 당상 민겸호에게 보고되자 그는 즉시 훈련도감 군병들 가운데 김춘영·유복만·정의길·강명준 등 4명을 주동자로 잡아들여 포도청에 가두었다. 이들이 사형당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훈련도감 하급군병이 많이 살고 있던 왕십리 지역을 중심으로 이들을 구출하기 위한 활동이 시작되었다.
왕십리는 하급군병·빈민들이 주로 거주하는 곳으로, 잡혀간 군병 4명 가운데 3명이 왕십리 거주자였다. 하급군병과 빈민들은 계층적으로 일치했는데 서울의 하급군병은 대부분 서울의 빈민층 가운데서 충당되었을 뿐 아니라 다른 빈민층과 마찬가지로 낮은 급료 때문에 대부분 적은 자본으로 수공업·상업을 하거나 도시근교에 야채를 재배해서 팔거나 막노동에 종사하여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서울의 빈민층은 도성 내의 빈촌이나 교외, 한강 연안 지역의 변두리 마을 등에 촌락을 형성하고 집단적으로 거주했는데 왕십리도 그런 곳 중의 하나였다.
이들 빈민은 민씨 정권 아래 각종 수탈을 받았을 뿐 아니라 개항 이후 영세 수공업의 몰락, 미곡수출로 말미암은 곡가 앙등 등으로 생계에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었다. 더욱이 하급군병들은 5군영의 폐지로 일자리를 잃게 되었을 뿐 아니라 남아 있는 군병들도 별기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처우에 불만을 품었으며 13개월이나 급료가 지불되지 않자 불만은 한층 고조되었다. 결국 군병들의 거주지인 빈민촌락에 통문이 돌려졌다. 통문의 내용은 무위영 소속 훈련도감 군병들은 6월 9일 아침 동별영에 집합하라는 것이었다.
통문에 호응하여 모인 군병들은 먼저 무위대장 이경하와 선혜청 당상 민겸호에게 붙잡아간 사람들을 풀어달라는 등소(等疏)를 올렸다. 등소가 실패로 돌아가자 모인 군병들은 민겸호의 집에 불을 지르고 무력행사에 돌입했다.
동별영 창고를 열어 각종 무기를 꺼내 무장하고 무위영과 장어영의 다른 군병들을 소집했으며, 영세상인·수공업자 등도 군병에 가세했다. 이들은 포도청을 습격해 붙잡혀간 사람들을 구출하고 의금부로 가서 죄수들을 풀어주었으며, 별기군 교련장을 습격하고 경기감영과 일본공사관을 습격했다. 시간이 갈수록 하급군병·빈민 들이 가세해 대규모의 세력을 형성했다.
10일에는 흥인군 이최응의 집을 습격·살해하고, 민비를 공격하기 위해 창덕궁으로 몰려가 민겸호·김보현 등을 살해하고 민비를 찾기 위해 사방을 수색했다. 사태를 수습할 능력을 잃은 고종은 대원군에게 정권을 넘겼다. 대원군은 곧바로 정상적인 급료 지급을 약속하고 별기군을 폐지했으며 5군영 체제를 복구시키는 등 사태 수습에 나섰다.
그후 폭동은 가라앉았으나 군병들은 소규모 부대를 이루어 활동을 계속했다.
대원군 정권이 들어서자 일본과 청국은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즉시 군대를 파견했다. 병력을 이끌고 서울에 온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는 주모자 처벌, 피해보상, 개항 및 통상의 확대, 병력주둔을 비롯한 8개 조항을 요구했다.
대원군은 일본의 이러한 요구에 무력으로 대응할 방침을 세우고 마산포에 상륙중인 청국군에게 일본군을 견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서울에 들어온 청군은 대원군 정권과 일본측을 중재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서 대원군을 청국으로 납치해가는 한편, 군대를 몰아 서울 시내와 궁궐을 장악했다.
대원군 정권이 민씨정권의 폭압과 외세의 침략을 막아줄 것을 기대했던 군병과 서울의 빈민들은 청군에 저항하여 무기를 들고 곳곳에서 소규모 전투를 전개했다. 청군은 대원군 세력을 체포·투옥하여 대원군 정권을 무너뜨리는 한편, 군병의 집단적 거주지인 왕십리와 이태원을 공격하여 저항 세력을 진압했다. 임오군란은 개항 이후 대규모로 전개된 최초의 반봉건·반외세 투쟁이었다.
임오군란때일본공사관원탈출도
남대문 (임오군란 시)을 떠나는 일본군인들.
조선사변(朝鮮事變)이라고 명시된 이 일본자료는 1882년(명치15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일본군제와 개화파 세력
이었던 민씨 정권에 대한 반항으로 일어난 구식 조선군대의 군사반란) 당시 도주하는 일본 군인들을 보여줍니다.
당시 일본 하나부사공사(花房公使)외 28명 일행은 깊은 밤의 폭우 속을 뚫고 일장기를 앞세우고 남대문에
닿았다가 인천으로 피신해 영국함선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위험을 피했으나 6명의 군인을 잃었다고
기술돼 있습니다.
작자, 연대 미상의 실기소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임오군란의 전말을 여섯 단락으로 나누어 실기체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명성황후(明成皇后·1851~1895)가 임오군란(1882년) 당시 궁궐을 탈출해 피신했던 51일간의 행적을 담은 기록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의 피란일기를 30일 대전시 향토사료관이 공개했다.
조선 말기 유학자 박주대의 ≪나암수록≫ 등 7종 46책의 전적. 보물 제1008호.개인소장. 박주대가 한말의 정황을 듣고 본 대로 기록한 것으로, 고종의 즉위, 대원군의 집정, 병인양요, 진주민란, 임오군란, 동학란, 갑오경장, 경술국치, 그리고 파리강화조약 등 국내외의 중요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대진영접과 김창희가 청나라와의 교섭 내용을 일기체로 적은 책. 1책 29장 필사본. 표지 제목은 <영접소일기>이다. 규장각도서.
1881년 임오군란으로 청나라군 3,000명이 머물기 시작하면서 용산은 우리 땅이면서도 아닌 외국군 기지로 고착됩니다.
일제는 용산땅에 병영과 조선군 사령부를 만들었고 해방 뒤에는 미군이 새로운 주둔기지로 용산을 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