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의 조선 왕후 시해 작전
을미년(1895년) 10월 7일. 아름다운 가을 밤, 조선의 왕후 민씨의 생애 마지막 밤이었던 그 밤에 경복궁 안에서는 흔쾌한 야간 파티가 벌어졌다.
왕후 민씨가 민영준(閔泳駿)의 궁내부(宮內府) 대신 내정을 축하하는 자리다.
같은 시각, 서울 남산자락 일본인 거주 지역인 진고개에서도 질펀한 연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지금의 충무로 2~3가 파성관(巴城館)이었다. 일본인 검객들과 낭인패들 그리고 서울에서 발간되던 일본어 신문 ‘한성신보(漢城新報)’ 기자들이 파성관의 위·아래층을 모두 채우다시피 성황을 이뤘다. 연회치고는 분위기가 색달라서, 술을 마실수록 치솟는 것은 흥겨운 취기가 아니라 매서운 살기였다.
‘여우사냥’.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조선 왕후 시해 작전의 실행 명령을 이미 내린 뒤였다. 연회는 출정식이었다. 후일 사가들은 그들을 가리켜 ‘파성관 부대’의 구성원들이라고 불렀다.
10월 8일 새벽, 아직 날이 밝기도 전의 어둠 속에서 두 연회의 주최자는 경복궁의 높은 담장 안에서 맞부딪쳤다. 흥청거리는 연회 뒤 평온한 잠에 빠져들었던 조선 궁중은 칼을 빼들고 들이닥친 살기등등한 일본인들에게 처참하게 유린되었다. 소름끼치는 긴 비명이 궁 안에 울려퍼졌고, 석유를 뿌려 시신을 불태우는 역겨운 냄새가 공기 중에 낮게 깔렸다.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Id=40521&logId=2389557


명성황후
1851(철종 2)∼1895(고종 32). 조선 제26대 왕 고종의 비. 흔히 민비(閔妃)로 불린다. 본관은 여흥(驪興).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치록(致祿)의 딸이다. 여덟살의 어린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혈혈단신으로 자랐다. 소녀시절부터 집안일을 돌보는 틈틈이 ≪춘추 春秋≫를 읽을 정도로 총명하였다.
흥선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의 천거로 왕비로 간택되어 1866년(고종 3) 한살 아래인 고종의 비로 입궁하였다.
명성황후가 왕비로 간택된 것은 외척에 의해 국정이 농단된 3대(순조·헌종·철종) 60여 년간의 세도정치의 폐단을 종식시키기 위해 외척이 적은 민부대부인(閔府大夫人)의 집안에서 왕비를 들이고자 한 흥선대원군의 배려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희망과는 달리, 수완이 능란한 명성황후는 입궁한 지 몇 년이 지나자 왕실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해서 일생을 두고 시아버지와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 명성황후가 대원군과 사이가 갈라진 것은 궁녀 이씨의 몸에서 태어난 왕자 완화군(完和君)에 대한 대원군의 편애와 세자책립공작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민씨를 중심으로 한 노론(老論) 세력과 새로 들어온 남인(南人)과 일부 북인(北人)을 중심으로 한 세력간의 정치적 갈등이 있었다. 명성황후는 갖은 방법으로 흥선대원군을 정계에서 물러나도록 공작하였다.
마침내 대원군의 정적(政敵 : 趙成夏를 중심으로 한 趙大妃 세력, 趙斗淳·李裕元 등 노대신 세력, 金炳國을 중심으로 한 안동김씨 세력, 대원군의 장자 載冕과 형 李最應 세력 및 崔益鉉 등 유림세력)과 결탁하고, 최익현의 대원군 규탄 상소를 계기로 흥선대원군을 하야시키는데 성공해서 양주(楊州) 곧은골〔直谷〕에 은퇴시켰다.
대원군의 실각 후 명성황후는 민씨 척족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고 고종을 움직여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고 일련의 개화 시책을 추진하도록 하였다. 1882년 민씨 정부의 정책에 불평을 품어 온 위정척사파와 대원군 세력이 봉량미(俸糧米) 문제로 폭동을 일으킨 구군인(舊軍人)의 세력을 업고 쿠데타를 감행하였다.
명성황후는 재빨리 궁중을 탈출해 충주목(忠州牧) 민응식(閔應植)의 집에 피신하였다. 이곳에서 비밀리에 국왕과 연락하는 한편, 청국에 군사적 개입을 요청하였다.
출동한 청국군은 일시적으로 정권을 장악했던 흥선대원군을 청국으로 납치하였다. 다시 집권한 명성황후와 민씨 세력은 이 때부터 친청사대(親淸事大)로 흐르게 되어 개화파(開化派)와 대립하게 되었다.
1884년 급진개화파의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개화당 정부에 잠시 정권을 빼앗겼으나 청국 세력의 도움으로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때부터 명성황후는 외교적 국면에 매우 민첩하게 대응하는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1885년에 거문도 사건(巨文島事件)이 일어났을 때 묄렌도르프(Mllendorf,P.G.)를 일본에 파견해 영국과 사태 수습을 협상하게 하였다. 한편으로는 러시아와도 접촉하게 하였고, 또한 청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흥선대원군의 환국을 묵인하여 유연성 있게 대처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조선의 정국이 얽혔을 때 적극적인 침략 공세를 펴게 된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명성황후의 세력을 거세하려고 하였다. 명성황후는 일본의 야심을 간파하고 일본이 배후에 있는 개화 세력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에 진주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조선 정계에 적극적으로 압력을 가하였다.
사세가 불리해진 명성황후는 친러정책을 내세웠다. 삼국간섭(三國干涉)으로 일본의 대륙침략의 기세가 꺾이게 되자, 조선 정계의 친러경향은 더욱 굳어졌다. 이에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정책에 정면으로 대결하는 명성황후와 척족 및 친러세력을 일소하고자 하였다.
1895년 8월, 일본 군대와 정치낭인(政治浪人)들이 일부 친일 정객과 짜고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왕궁을 습격해 명성황후를 시해한 뒤 정권을 탈취하는 을미사변의 만행을 저질렀다. 명성황후는 나이 45세로 살해되어 시체가 불살라지는 불행한 최후를 마쳤다.
당시 정부는 친일정책을 펴 폐비조칙(廢妃詔勅)을 내렸다. 10월 10일 복위되어 태원전(泰元殿)에 빈전을 설치하고, 숭릉(崇陵) 우강(右崗)에 능호를 숙릉(肅陵)이라 하여 국장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1897년 명성황후(明成皇后)로 추존되고 난 뒤 11월 양주 천장산(天藏山) 아래 국장되어 홍릉(洪陵)이라 하였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2월 미금시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었다.
국립민속박물관(관장 신광섭)은 러시아 최대 민속박물관인 표트르 대제 인류학·민족지학 박물관과 2일 문화 교류 협정을 체결하는 자리에서 명성황후 국장(國葬) 때 모습으로 추정되는 사진을 처음 공개했다. 민속박물관 측은 “1897년 조선에 머물렀던 러시아 기자 세르게이 시로먀트니코프가 찍은 사진”이라며 “그 시기 치러진 국장은 명성황후 국장이 유일하다”고 설명했다. 데니스 삼소노프 표트르 대제 박물관 연구원은 “처음엔 ‘조선의 시장’으로 알려졌던 사진이지만 광화문과 육조거리가 선명하게 보이고, 흰 갓을 쓴 사람들이 운집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국장 사진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에스더 기자,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1900년 이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朝鮮半島の本当の歴史(The true history of Korea Peninsula) (0) | 2009.01.29 |
---|---|
Scenes at Seoul, from 1899 (0) | 2009.01.29 |
한국 최초 보험 `소보험증서` (0) | 2009.01.13 |
태극기 창안자는 (0) | 2009.01.05 |
박영효 (0) | 2009.0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