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26. 12:24

스리랑카를 지배했던 고대 왕조의 도시, 하늘에 떠있는 성, 시기리야. 광활한 밀림 평원 속에 갑자기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 그리고 그 위에 지은 궁전.

이 기묘한 성채는 5세기께, 싱할라왕조의 카샤파 1세란 왕이 지었다.

시기리야란 이름은 사자 바위란 뜻. 사자의 모습을 한 저 높은 절벽 위에 왕은 굳이 궁전을 올려세웠다. 해발 370미터밖에 되지 않지만 사방이 낭떠러지이고, 주변에 아무런 높은 봉우리가 없어 그야말로 전망대 같은 궁전이 탄생했다.

바위벽 중간에 움푹 패인 공간, 그 안에 그림 속 여인 22명이 남아있다. 한때 그림은 500여명에 이르렀지만 지워지고, 이들만이 남았다고 한다. 1500년 전 그림인데 얼마 전에 그린 듯 생생한 것, 이게 시기리야 프레스코화의 미스터리다.

지금껏 생생하게 남아있을 수 있는 까닭은 그림을 그리는 단계가 무척 복잡하고 과학적이었기 때문이라고.

먼저, 바위벽에 그림판을 만든다.

바위 표면에 섬유질을 섞은 점토를 바르고, 그 위에 석회와 모래를 섞어 다시 바른다.

그리고 그 위에 또다시 꿀을 섞은 석회로 매끈하게 덮는다. 이런 3단계를 거쳐야 그림판이 완성된다.

그 다음에는 물감을 만들 차례. 각종 식물과 꽃, , 나무 즙을 섞어 안료를 만든다. 이런 정성 덕분에 그림은 1500년 세월을 살아남아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추앙받고 있다.

원래 이 바위산을 오르는 계단은 모두 대나무였다고 한다.

지금의 철제 계단은 식민지 시절 영국인들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카샤파 왕이

이 황당할 정도로 확실한 요새, 시기리야로 그가 나라를 이끌고 들어갔던 것은 그 개인의 욕망과 불안과 공포 때문이었다. 어찌보면 광기와도 같은.

전설같은 역사에 따르면 카샤파 왕은 다투세나 왕의 장남으로, 그 밑에 배다른 동생인 목갈라나 왕자가 있었다고 한다.

장남 카사퍄는 어머니가 평민이었고, 목갈리나는 어머니가 왕족이었다. 출신 성분이 동생에 뒤지기 때문에 카샤파는 왕위를 동생이 물려받을지 모른다는 불안에 살아야 했다. 그래서 그는 결심하고 만다. 권력을 위해서는 늘 골육상쟁이 벌어지는 법. 그는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다.

깜짝 놀란 동생 목갈리나는 바다 건너 인도로 도망친다. 이제 확실한 왕이 되었건만, 그럼에도 카샤파의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언제 동생이 돌아와 자신을 공격할지 모른다는 새로운 공포가 그를 휘감았다.

그래서 그는 저 시기리야의 사자산 위로 올라갔다. 난공불락의 성을 만들어 왕의 자리를 지키려는 것이었다. 사자산은 원래 수도승들이 도를 닦던 곳. 그 천혜의 요새는 그래서 갑자기 왕가의 보금자리가 된다.

그러나 운명이란 자기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가 걱정했던 대로 망명했던 동생은 10여년 뒤 마침내 세력을 규합해 형에게 복수를 하러 쳐들어온다. 요새에 있기만 해도 버틸 수 있었겠지만 카샤파는 분노에 불타 직접 동생을 물리치러 전장에 나선다. 그리고 전세가 위기에 빠져 홀로 도망치는 신세가 된다. 자신을 죽이러 오는 동생의 군대를 앞에 두고 왕은 단검으로 스스로 목을 찔러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카샤파가 죽고 난 뒤 시기리야 요새는 다시 왕실에서 수도승의 수도처로 되돌아갔다. 허망하고 부질없는 운명의 요새였다. 그 역사는 겨우 20년을 채우지 못했을 정도로 짧았다. 그리고 점점 잊혀진 곳이 되어버렸다. 오랜 세월 밀림 속에서 방치되었던 사자의 요새는 훗날 영국인들에게 발견되며 비로소 그 존재가 다시 세상에 알려졌다.

시기리야는 천륜을 거스르고 왕위에 오른 왕의 집착과 광기의 소산이다. 영원불멸의 요새, 절대 함락되지 않는 건축을 꿈꿨지만 그 어떤 건축보다도 빨리 수명을 다한 건축이었다. 건축에서 영원이란 없다는 것을 지금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듯한 그런 곳이다.

출처: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siapacific/519589.html









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