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5. 6. 14:03

왕후 민씨가 처참하게 시해된 뒤 궁중에 연금되어 아내를 살해한 일본 세력에 둘러싸여 있던 임금은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언더우드를 비롯해 선교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선교사들은 교대로 고종의 곁을 지켰다. 존스(G. H. Jones) 선교사는 고종의 통역으로, 언더우드는 이후 7주일 동안 입궐 숙직한다.


또한 언더우드 부인은 독살의 공포 속에 수라간에서 만들어진 일체의 음식을 거절하는 임금의 식사를 돕기 위해 손수 음식을 만들었으며, 자물쇠가 달린 안전 통에 그것을 넣은 후 남편을 통해 들여보내기도 했다. 이런 일들로 인해 “선교사들이 임금의 생명을 구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1895년 11월 28일 춘생문(경복궁의 북동쪽에 있었던 문으로 봄春에 날生 자를 썼다고 합니다. 동쪽에 있는 문이기에 동쪽은 곧 봄을 상징하여 붙은 이름이라한다. 1930년경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사건이 일어났다.


춘생문 사건은 고종이 직접 기획한 것이었다.

그는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저항했다.

눈 앞에서 딴 깡통 연유와 날달걀 외에는 일절 먹지 않음으로써 독살을 피했고, 밤마다 미국 선교사들을 궁으로 불러 자신의 침실을 불침번으로 지키게 함으로써 암살을 피했다.

10년 전 승은을 입었다가 중전 민씨가 궐 밖으로 쫓아냈던 엄 상궁을 불러들여 신변을 돌보게 했다.

그리고 밀지를 내려 친미파와 친로파 성향의 인사들, 곧 종친 이재순과 이범진을 비롯한 대관들과 임최수를 비롯한 시종신(侍從臣)들과 참령 이도철 등의 장교들로 하여금 쿠데타적 군사작전을 벌이게 하여 대궐의 동북문인 춘생문을 통해 왕궁을 탈출하여 서양인들의 도움을 받아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 시도한 것이다.



1895년 고종이 군부협판(軍部協辦) 이도철에게 해원(解寃ㆍ분풀이)하고자 ‘칙령(勅令) 솔병내호(率兵來護) 궁성주토흉역(宮城誅討凶逆) 대조선(大朝鮮) 대군주(大君主) 함(啣) 이재광(李載胱)’라는 밀지(密旨)를 내렸다.


이에 이도철은 1985년 10월 12일 시종(侍從) 임최수 등과 800여명의 친위대와 함께 춘생문을 통해 군인들이 궁으로 잠입 정동에 있는 미국대사관으로 고종을 옮기려했으나 문을 열어주기로 했던 이진호가 변심하여 어윤중에게 밀고를 하여 실패하게 된다.


당시 친일세력의 극심한 감시망 속에서 공공연하게 병력을 동원하는 일이 일체 불가능했다. 그런 상황에서 사건 관련자들은 거병하기 위해 그 무렵 세 차례 간택을 거쳐서 왕후로 확정된 안동 김씨 처녀의 존재를 거사에 이용했다.


당시 안동 김씨 처녀의 집이 동소문 밖에 있었던 모양인데,

그들은 자신들이 새 왕후를 궁으로 모시고 가서 가례를 올릴 준비를 하는 행사인원들인 것처럼 가장하느라 복장에까지 신경을 써서 특별히 융복(戎服)까지 차려입었다. 철릭과 주립(朱笠)으로 된 군복인 융복은 본래 무신이 입는 것이지만, 문신이라도 전시에 임금을 호종할 때는 입게 되어 있는바, 특별히 왕후 봉영 행사를 위한 차림으로 보이게끔 복장까지 연출한 것이다.

그토록 치밀하게 사전 준비를 한 뒤 동별영에 가서 『동소문(혜화문) 밖에 가서 왕후를 봉영(奉迎)해 대궐로 모셔간다』는 명분을 내걸고 군사를 내라고 함으로써 수월하게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구한말의 지사 정교가 쓴 『대한계년사』에 나오는 「춘생문사건」의 전말에 관한 기술 속에 들어 있었다.


…십일일 밤에 임최수 등 삼십여 인은 훈련원(흥인문 안 지난 날의 연병장)에서 몰래 모인 뒤, 임최수가 동소문(즉 혜화문) 밖에서 왕후를 봉영해 온다고 선언하자 이도철과 이민굉이 융복을 차려입고 앞장섰다. (중략) 그들은 동별영에 이르러 이도철이 검을 휘두르며 중대실에 들어가서, 친위 제1 대대 중대장 남만리와 제2 대대 중대장 이규홍에게 칙령을 전하고 급히 군사를 내라 함에 따라 남만리가 영내의 군사를 내었다… (고종 32년 을미조)


그러나 그런 수단을 써서 8백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경복궁의 춘생문으로 들어가려던 무력 거사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핵심 주모자들은 체포돼 「역모를 했다」는 죄목으로 목숨을 잃었고,

결국은 그 불똥이 죄 없는 안동 김씨 처녀에게까지 미쳤다.

「역적들이 동병(動兵)의 이유로 내세웠던 왕후」로서 그녀의 존재 역시 껄끄럽게 되어 즉시 입궐하여 곤위에 오르는 것이 영영 멀어진 것이다.


당시 춘생문사건의 주동자들은 엄연히 임금이 내린 비밀칙령, 곧 『나를 궁궐에서 구출하라』는 밀칙(密勅)에 따라 거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하여 체포되자 임금은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인 양 시치미를 뗐고, 그들은 임금을 사건에 전혀 관련시키지 않고 의연하게 죽었다.


주동자였던 전(前) 시종(侍從) 임최수는 신문을 받을 때 『올해 8월20일(주:민후 시해일) 이래 국가에 일이 생긴 때를 맞아 창의(倡義)한다는 이름 아래 내가 밀지(密旨)를 위조(僞造)하여』 동지들과 거사한 것이라고 공술(供述)하고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당시 사건의 내막을 전부 파악하고 있었던 임최수의 동지인 정교(鄭喬)가 지은 『대한계년사』에 따르면, 「임최수가 실제로 임금의 비밀 칙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이 이에 이르자 자신이 위조했다고 진술한 것은, 사실대로 말하면 임금에게 이롭지 못하게 됨을 두려워해서였다」는 것이다.


후에 고종은 충절을 생각하여 이도철에게 충민공(忠愍公)의 시호(諡號)를 내리고 장충단에 제사를 모시도록 했다.


그런데 춘생문사건은 선교사들의 정치개입이라는 엉뚱한 방향으로 불통이 튀었다. 일본이 자국 내의 언론들을 통해 “이 사건의 주모자”는 언더우드이며, 알렌을 비롯한 다른 선교사들도 이 일을 부추겼다고 날조 공박했다.

을미사변으로 세계 각국의 집중 포화를 맞으며 궁지에 몰려 있던 일본이 자신들의 위상을 재정립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 방향으로 끌고 갔던 것이다. 즉 선교사들의 친왕적 태도를 불쾌하게 여겼던 일본이 이것을 악용하여 “선교사들이 선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치에 적극 개입 한다”고 중상모략 했던 것이다.


한편 일본은 이 춘생문사건을 빌미삼고 외교적 차원에서 미국 정부에 압박을 가했다.

선교사들이 한국 정부의 일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사실 을미사변 이후 선교사들의 현저한 친왕적 태도는 미국 공사관의 방조와 협력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춘생문사건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러한 활동은 미국 정부에 국제관계상 새로운 부담 기제로 작용하게 되었다.


이에 미국 국무성은 주한 공사 실(J. H. Sill)에게 여러 차례의 훈령을 보내 선교사들을 진정시키도록 했다.

그리고 1896년 1월 11일에는 드디어 선교사들이 현지의 정치적 상황에 개입하는 것을 엄금한다는 내용을 포함한 훈령을 하달했다.

만일 그들이 미국 정부의 보호를 받으려면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이건, 교회에서 설교하는 일이건, 또는 병자를 돌보아주는 일이건 간에 선교사업에만 자신의 임무를 엄격히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한국에 간 것은 선교사업 위해서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선교사들이 선교의 목적으로 어떤 나라에 입국하였으면 선교업무에만 열중해야지 현지의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정교분리의 입장이 천명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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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