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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1.08 식민지의 시작
- 2010.01.08 PMC·-Private Military Company
- 2010.01.07 興味로운 實驗-邪惡한 實驗
- 2009.12.31 2010년에는
신의 아들이 신의 이름을 빌어 다스리던 나라도
누가 신의 아들이냐를 왈가왈부하던 그들도
인구밀도가 한계에 접근하면 모두 새로운 질서와 원리를 모색하고, 공통된 당면 과제의 하나는 새로운 땅의 확보다.
새로운 영토가 확보되면. 농민 1인당 식량 생산량 증가하고 상품의 종류가 늘어나고 상공업과 서비스업 등 직종과 종사자가 많아진다. 새로운 직종들을 바탕으로 도시가 발전했고, 이에 따라 상품 유통량은 더욱 늘어났다.
도시는 작은 정치 조직에서 시작 독자성을 꿈꾼다.
15세기의 유럽은 훨씬 불안정한 상태였다.
유럽 주민의 3분의 1 이상을 죽인 것으로 추정되는 14세기 후반의 흑사병은 인구의 지각 변동을 가져왔다. 오랫동안 유럽 질서의 본산이던 교황청의 권위와 권력은 쇠퇴해 갔고, 수십만 내지 수백만 인구 규모의 작은 정치 조직들이 유럽 전역에 할거했다. 그리고 전성기에 이른 오스만제국이 기독교 세계를 동쪽으로부터 압박하고 있었다.
15세기 말 이후 대항해 활동은 생존을 위한 발버둥이었다.
동방에서 전해 받은 모든 기술을 활용해 함대를 조직했으나 터키 함대로부터 지중해 제해권을 빼앗아올 수 없었기 때문에 대서양으로 나갔다.
항해의 목적은 두 가지였다. 큰 목적은 이슬람 세력에 막혀 있던 동방교역의 새 길을 뚫는 것이었고, 작은 목적은 뭐든 닥치는 대로 약탈해 오는 것이었다.
항해 활동을 통해 늘어난 유럽의 부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집중되었다.
빈부의 극심한 격차가 온갖 새로운 활동을 위한 동력이 되었고, 급격한 변화를 억제하는 중앙 정부가 유럽에는 없었다. 작은 규모의 국가들은 날로 격화되는 경쟁의 주체로서 변화를 억제하기보다 오히려 촉진하는 역할을 맡았다.
기술의 전면적 발전 가운데 시대적 필요에 부합해 날이 갈수록 집중적으로 발전한 것이 산업 기술과 군사 기술이었다.
생산력 발전이 전쟁의 대형화를 불러오고 전쟁의 대형화가 대량 생산 기술의 발전을 촉진하는 피드백 현상이 일어났다. '부국강병'이란 이름이 붙은 이 피드백 현상 속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유럽의 '산업혁명'
각 사회는 각자의 조건에 따라 적합한 진로를 모색하고 있었다. 유럽 한 모퉁이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된 것도 그런 모색의 한 갈래였다. 그런데 산업혁명은 다른 지역에서 모색된 진로들보다 강한 공격성을 보였다. 대량 생산 체제의 확장에 필요한 급격한 시장 확대가 외부를 향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업화에 따른 1인당 생산량의 증대가 급속한 인구 증가를 가능하게 해주었기 때문에 다른 진로들에 대해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다.
산업혁명이 궤도에 오르자 인접한 지역에서는 그 뒤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따르지 않으면 약육강식의 경쟁을 견뎌낼 수 없었다. 영국에서 시작해 서유럽을 거쳐 중부유럽으로 산업혁명은 마치 암세포가 번지듯이 퍼져나갔다. 19세기 중엽까지 산업화를 이룩한 유럽 국가들은 근대화의 선진국으로서 국제 무대의 열강이 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미국, 러시아와 일본이 그 대열의 꽁무니에 붙었다.
19세기 말까지의 산업화는 지역적 착취-피착취 관계를 형성했다.
피착취 지역을 식민지로 확보하는 산업화 선진국들 사이의 경쟁이 제국주의로 나타났다. 산업화의 확장이 자발적 경쟁보다 무력에 의한 강제로 진행되는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식민지가 된 사회들에게는 산업화의 종속적 위치가 강요되었다.
제국주의 시대의 '세계 체제'였다.
자발적 경쟁을 통해 산업화를 받아들인 나라들은 산업화를 근대화의 중심축으로 채택하면서도 그 이전에 각자 나름대로 모색해 온 근대화의 고유한 의미를 얼마간 병행시킬 수 있었다. 전통이 통째로 무너지지 않고 점진적 변화를 겪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식민지가 된 피착취 지역의 사회에서는 전통이 근대화의 장애물로만 여겨져 파괴 대상이 되었다. 그 보존 가치를 통치국이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사회에 적합한 길을 찾을 기회를 잃고 산업화 구조 속의 불리한 위치만을 떠맡게 되었다. 그것이 식민지의 불행이었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00107191910&Section=04&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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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C·-Private Military Company
PMC란 이름 그대로 세계 각국에서 군대를 지원해서 병참수송과 요인경호, 실제전투지휘까지 정규군대가 해야할 일의 상당수를 맡아서 직접 수행하는 민간군수기업을 뜻한다.
현재 미국 영국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의 수백 개 PMC가 전 세계 50여 개국에서 활동 중이다. 이들은 요인 등의 경호 업무를 넘어 전투에 참여할 뿐 아니라 군수물자 수송, 군사훈련 지도 등 한 국가의 정규군 못지않은 온갖 활동에 손을 뻗치고 있다.
PMC가 급속히 발전하게 된 것은 냉전 이후 전 세계적으로 군축이 이루어지면서 군 업무 능력이 떨어지게 됐고 소규모 분쟁이 유행처럼 번진 반면 정부 기능의 아웃소싱 바람으로 군사업무를 PMC에 맡기는 사례가 늘었기 때문이다.
특히 PMC가 정치 외교적 문제를 덜 일으키는 데다 의회와 여론의 감시를 받지 않아 국내 정치적 부담도 적고 비용 절감 효과까지 있어 각국 정부가 PMC 사업을 키우게 됐다.
PMC는 1973년 미국이 징병제를 철폐하면서 탄생했고 1991년 PMC 인력 1만여 명이 참전한 걸프전을 계기로 급성장했다.
예전에는 경호와 물자 수송 등이 PMC의 고유한 업무로 경호업체라는 표현에 걸맞았다. 그러나 걸프전을 계기로 영역이 확장돼 현재는 아프리카 지역 대부분의 군사훈련이 PMC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라크전 당시에는 스텔스 전투기와 B-2 전폭기, 탱크 등의 배치에도 PMC가 간여했다.
PMC 직원들은 대부분 특수부대 전역자이지만 연봉은 특수 임무의 경우 10만 달러에 이르며 정규군 복무 때보다 2, 3배 높다. 일당은 평균 400∼600달러(약 36만∼54만 원)다.
제3세계의 특수부대 요원들에게도 PMC는 매력적인 직장이다. 7월에는 칠레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추종하던 전직 칠레 장교 1000여 명을 블랙워터USA가 모집해 이라크에 배치한 것으로 밝혀져 논란이 일었다.
부시 정부 이후 이라크전에서는
병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이라크의 현실상 이들 경험많은 퇴역군인으로 구성된 민간군사기업의 도움이 없이는 작전 수행이 힘들다는 이유로
"군사기업이 직접 전투도 대행한다"는 새로운 방식이 공공연하게 적용되었다.
이라크전에서 가장 부각되고 있는 "블랙워터"만 해도 요인경호와 물자호송차량의 경호는 물론이고, 나자프 등의 보병전투에서 상대적으로 경험이 부족한 미군병사들과 함께 실전에 투입되고 있다. 사실상 실전에서의 교관인 셈이다.
문제는 이들은 말그대로 용병이기에 교전 당사자가 될 수 없고, 국제적인 전쟁법규에 따른 보호를 받지 못함은 물론이고, 교전수칙에서도 자유롭다.
이라크전 발발 이후 2003년 6월 미군 주도의 임시행정처(CPA) 훈령에 따라 ‘이라크에서 활동하는 민간기업을 이라크 사법기관이 처벌할 수 없다’는 면책권이 부여됐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이라크에서 활동 중인 PMC는 60여 개사 10만여 명에 이른다. 이라크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15만여 명의 3분의 2에 이르며 미군 이외의 연합군 전체보다 많다. ‘PMC가 이라크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실질적 세력’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이 중 전투에 직접 참여하는 인원은 2만 명 선. 5만여 명은 식자재 공급과 요리, 세탁 등을 담당하며 1만5000명은 이라크의 유전 시설을 경비하는 업무를 담당한다. 재건 업무를 담당하는 인원은 한때 7만 명 선이었으나 현재는 1만5000명 정도.
2007년 9월 16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미 대사관 직원이 탄 차량이 공격받자 근처의 민간인들을 무차별 사격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었던 미국 PMC ‘블랙워터USA’ 요원"은 최근 무죄 판결을 받았다.
딕 체니 전 부통령이 CEO로 있던 핼리버튼의 자회사인 '블랙워터'의 창립자는 전 미 해군 특수부대(Navy SEAL) 출신 에릭 프린스 회장인데, 그는 아버지 부시 대통령 시절 백악관에서 근무한 바 있다. '블랙워터'는 아들 부시 대통령 집권기간인 2003년부터 2007년까지 미국 정부로부터 12억달러 규모의 경호 계약을 따내기도 했다.
딕 체니 전 부통령은 재임시절 '블랙워터'가 관여한 알카에다 관계자 암살 프로그램을 의회에 비밀로 하라고 명령한 사실이 지난달 밝혀진 바 있다.
2007년 9월 16일 사건 이후 미국은 '블랙워터'는 이라크에서 철수한 뒤 회사 이름을 '지(Xe) 서비스'로 바꾸었으나, 미국 정부는 이 업체와 이라크에서의 계약을 갱신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밝힌 바 있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블랙워터 직원들이 미 중앙정보국(CIA)과 함께 군사작전에 계속 참여하고 있다는 지적이 잇따라 제기되고 있다. 민간 정보기관인 CIA는 최근 준군사조직으로 역할이 강화돼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예멘 등지에서 무인비행기를 이용한 미사일 공격과 알카에다 지도자 암살 등을 수행하면서 블랙워터 등 사설경호업체에 용역을 주기도 했다고 뉴욕타임스가 전했었다.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지 서비스'는 현재도 국무부와 2억1천700만달러 상당의 2년계약을 맺어 이라크 주재 미국 외교관들에 대해 항공운송 서비스를 제공 중이다. 또 2011년까지 아프가니스탄 주재 미국 외교관에 대한 경호를 위해 이 회사와 2억1천만달러의 계약을 맺었다. 아울러 국무부는 '지 서비스'가 노스 캐롤라이나주의 한 캠프에서 외국 경호부대원들에게 대테러전략 훈련을 제공하는 계약으로 600만달러를 지급했다.
작년 뉴욕 타임스(NYT)는 CIA는 그동안 무인공격기 '프레데터'와 '리퍼'를 사용해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무장세력에 폭격을 가하는 비밀작전 과정에서 '블랙워터 월드와이드'라고 불렸던 보안경호업체와 계약을 맺어 이 회사 직원들이 폭탄 조립 및 적재 등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왔다는 보도를 하자.
CIA는 리언 파네타 국장의 명령에 따라 현재는 회사명이 '지(Xe) 서비스'로 바뀐 이 회사와의 계약을 취소했다고 조지 리틀 CIA 대변인이 밝혔었다.
리틀 대변인은 파네타 CIA 국장이 파키스탄 및 아프가니스탄의 비밀 무인공격기 기지에서 활동 중인 '지 서비스' 직원들이 맡아온 업무를 CIA 직원들이 인수하도록 명령했으며, 이 회사와 CIA가 맺은 모든 계약을 재검토할 것을 지시했다고 말했다.
리틀 대변인은 이에 따라 "현재 시점에서 블랙워터는 이제 경호와 지원 역할 외에 CIA의 어떠한 작전에도 관여하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었다.
그런데 CNN, AP통신과 아프간 현지 신문은
지난해 12월 30일 아프간 채프먼 기지에서 자살폭탄테러로 모두 7명의 CIA 직원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확인됐으며, 이 중 두 명은 블랙워터 직원으로 전직 해군특수부대(Navy SEAL) 출신 제러미 와이즈(35)와 최근 27년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퇴역했으며 오랜 기간 특수작전에 참여했던 오리건주 포틀랜드 출신의 데인 클라크 파레시(46)"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블랙워터 측은 문제의 CIA 요원들이 회사 직원인지 확인을 거부했다.
블랙워터 직원이 테러 희생자에 포함된 것으로 확인돼 CIA는 거짓말을 한 셈이 됐다.
ABC 뉴스 인터넷판은 이번 폭탄테러의 목표물이 된 아프간 동부 코스트주(州)소재 기지는 CIA의 무인공격기 폭격 작전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곳이라고 보도했다.
블랙워터의 계약 사정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와이즈와 파레시가 CIA 기지에서 경호 업무를 맡지 않았다고 말했으나 구체적인 임무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고 ABC 뉴스는 전했다.
조지 리틀 CIA 대변인은 CIA 요원들의 역량을 보완하기 위해 (블랙워터 등) 계약직원들을 활용했다고 인정하면서도 결정권은 항상 CIA 요원들이 갖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미국 의회는 CIA가 약속을 어기고 블랙워터 직원을 고용한 것에 대해 조사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한편 미 정부는 이번 테러에 대한 ‘보복 공격’을 검토하고 있다고 CNN이 전했다. 미 정보기관 관계자는 “적극적이고 성공적인 대테러작전으로 이번 테러에 대해 보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http://news.donga.com/Inter/3/02/20100102/25163402/1&top=1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10030057
http://news.donga.com/Inter/EU/3/0218/20100107/25246881/1
http://www.vop.co.kr/A00000277851.html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rabafrica/243006.html
http://www.vop.co.kr/A00000265017.html
http://news.hankooki.com/lpage/world/201001/h2010010709302722450.htm
http://news.joins.com/article/732/3919732.html
.興味로운 實驗-邪惡한 實驗
카스 선스타인은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라는 저서에서 흥미로운 실험을 소개하고 있다.
서로 다른 크기의 직선을 실험 참가자에게 제시하고 같은 크기를 고르라고 했다. 직선들의 크기는 눈에 띄게 차이를 뒀다. 실수 확률 1%였다.
그러나 미리 짜놓은 각본대로 일정 집단 참가자에게 틀린 선택을 하도록 했더니 이를 본 참여자는 자기의 감각으로 인지한 명백한 증거를 무시하고 이 집단을 따라 크기가 다른 직선을 골랐다. 실수 확률이 36.8%로 급증했다.
그리고 규칙을 바꿔 올바른 선택을 할 때마다 금전적 보상을 했더니 다른 집단의 선택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 선택을 따랐다.
원숭이를 식용으로 하는 중국에서 있었던 이야기라고 한다.
우리 안의 원숭이 가운데 한 원숭이를 주인이 지목하기만 하면 나머지 원숭이들은 자기가 살려고 그 원숭이를 잡아다 주인에게 바친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다른 원숭이들이 살아남는가 하면 결코 아니다. 같은 방법으로 당한다.
사람에게 전기충격을 가하는 실험이 있었다. 실험 주관자는 참여자가 머뭇거리면 “문제가 없으니 충격의 강도를 높여라”라고 재촉했다. 놀랍게도 65%가 비명과 발버둥 소리를 들으면서도 강한 충격단계까지 갔다. 그러나 다른 실험에서 두 사람이 미리 짠 대로 충격을 포기하자 나머지 사람도 충격을 거부했다. 실험 주관자인 전문가의 권위보다 합리적인 사람들의 도덕적 판단에 의존한 것이다.
이는 고립된 개인이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 존재인지 잘 보여준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각자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서는 서로 물고 뜯으며 싸우는 수밖에 없다. 다수도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으면 소용이 없다. 사회적 연대는 불가능하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1061808335&code=990339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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