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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1.01 무굴제국 (Mughul)
- 2012.01.01 카주라호 (Khajurāho)
- 2012.01.01 사르나트(Sarnath, Sarnātha)
- 2011.12.30 sun rise, Sunset over the Ganges
무굴제국 (Mughul)
16세기 전반에서 19세기 중엽까지 인도 지역을 통치한 이슬람 왕조(1526∼1857)이다. 무굴제국의 시조 바부르는 중앙아시아를 전전한 후 카불을 점령하고, 이 곳을 근거지로 하여 1526년 인도에 침입, 델리 왕조인 로디조(1451~1526)의 이브라힘왕을 델리 북방의 파니파트전투에서 격파하고, 델리를 탈취하여 여기에 무굴제국을 창시하였다. 이때 바부르는 화약과 대포를 이용하여 10배의 상대군을 격파하였다. 바부르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인 제2대 후마윤은 벵골 ·비하르 지방에서 일어난 아프간계(系) 수르 왕조의 셰르 샤에게 패하여, 1540년 페르시아로 도망하였다가 1555년 재차 델리를 점령하고 일시 중단되었던 무굴 왕조를 부활시켰다. 그 뒤를 이은 왕이 13세에 즉위한 M.악바르 황제이다. 그는 북인도에 지배력을 확보하게 되자 그 세력을 인도의 다른 지방까지 확대하여, 라자스탄 지방에 독립국으로 있던 라지푸트족의 왕(라자)들을 동맹세력으로 끌어들였다. 또한 1573년 서방의 구자라트 지방에 진격하여 그곳을 지배하고 있던 이슬람 왕조를 타도하였다. 동방으로는 1576년 벵골 지방까지 그의 지배하에 넣었다.
1580년대에는 인도 북서부지방의 펀자브에서 아프가니스탄의 카불까지도 군대를 파견하여 인더스강 하류 신드 지방까지 정복하였다. 1590년대에는 남하정책으로 데칸 지방의 이슬람 여러 왕조에도 세력을 뻗어나갔다. 행정면에서도 악바르 황제는, 이슬람교도나 힌두교도 등 종파를 가리지 않고 능력에 따라 중용하여 각 지방의 토지측량이나 지세(地稅) 결정 등의 실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따라서 무굴제국의 행정 ·사법 ·지방행정 등의 지배체제는 악바르 황제 시대에 거의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악바르 황제의 사후 자항기르, 샤 자한, 아우랑제브로 이어져 이 시기는 무굴제국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특히 제6대 아우랑제브는 데칸의 이슬람 여러 왕조를 정복하여 최대의 판도를 실현하였다. 그러나 그의 만년인 1674년 힌두교도들이 데칸지방에 마라타왕국을 세워, 무굴제국의 강력한 적대세력으로 등장하였다. 1707년 아우랑제브가 데칸고원의 원정 도중 죽자 제위(帝位) 계승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나 무굴의 중앙 권력은 급속히 쇠퇴해졌다. 18세기 말에 이르자, 약화된 무굴의 중앙권력은 데칸지방에서 델리 주변까지 세력을 확장한 마라타동맹에 의하여 좌우되어, 무굴 황제의 지배력은 약화되었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쳐 영국의 식민지 지배세력은 마라타 ·마이소르 등 강력한 봉건세력을 멸망시키고, 인도에서의 식민지 지배영역을 확대하여 갔으나, 명목상으로만 존속한 무굴 황제의 지위는 그대로 남겨 두고 식민지 지배의 도구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1857년, 북인도를 중심으로 ‘세포이의 반란’이 일어나자, 각 주둔지에서 반란을 일으킨 인도의 병사들이 델리에 집결하여, 무굴 황제 바하두르 샤 2세를 추대하여 새로 정권을 수립하였다. 2년에 걸친 이 반란이 영국군의 무력으로 진압되자, 그들은 탄압정책을 한층 강화하여, 그때까지 명목상으로만 남겨 두었던 무굴 황제의 지위를 폐함으로써 무굴제국은 멸망하였다.
무굴제국의 역사를 역대 왕들의 흔적을 통해 살펴보면 먼저
바부르 (Babur, 1526 -1530)
1526년에 바부르가 인도로 침략할 당시에 로디(Lodi)왕조가 아그라와 델리를 통치하고 있을때였으며 로디왕조는 아그라와 델리 그리고 펀잡의 일부를 포함하는 거대한 제국의 주인으로서 군림하고 있을때였다. 그러나 로디왕조는 바부르에 의해 패배당했으며 1526년 4월 21일의 파니팟트(Panipat)의 세번째 전투에서 로디는 사망했다. 이 유명한 전투이후에 바부르는 그의 아들 후마윤(Humayun)과 크와자 키타칸(Khwaja Kitakhan)의 지휘아래 아그라를 점령하기위해 서둘러 그의 군대를 파견했다. 동시에 바부르 자신은 델리를 점령하기위해 델리로 진군했으며 1526년 5월 10일에 로디의 궁전에 입성했다. 그의 아들 후마윤은 아그라에서 바부르를 맞이하였으며 그에게 유명한 다이아몬드인 코히누르(kohinoor)를 바쳤다.
아그라에서 초창기 바부르가 머무는 동안에는 그는 인도에 머물 마음이 없었으나 그의 마음은 얼마지나지 않아서 바뀌었으며 결국 인도에 머무르기로 결정했다. 인도에서의 무굴 제국은 그의 통치기간동안 조용할 날이 없었으며 그는 전투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러나 그의 생애 마지막 4년간만을 단지 아그라에서 보낼수가 있었다. 바부르의 통치기간당시에 아그라는 길이로는 2마일정도였으며 넓이로는 반마일에 이르는 작은 도시에 불과하였다. 4년이라는 짧은 기간안에 그는 아그라에 "구이에 아프간(Gui-e-Afghan)"으로 일컬어지는 아름다운 정원을 건축했으며 후에 이 정원은 "아람박(Aaram Bagh)"이라고 불리어졌다. 이 정원은 야무나강둑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도심으로부터 3킬로정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바부르는 정원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람박 또한 그러한 이유로 만들어진 건축물이다. 이 정원안에는 화려한 건축물과 욕탕과 사원등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이정원은 자신이 죽은후에라도 이곳에서 쉬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그런 정원이었으며 이런연고로 바부르의 사후에 그의 시신은 한동안 아람박에 매장되었다가 후에 카불(Kabul)로 옮겨졌으며 그곳에서 그는 잠들고 있다.
후마윤 (Humayun,1530 - 1556)
바부르의 죽음 이후에 그의 아들 후마윤은 확실한 자신의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었으며 1530년에 왕좌를 물려받았다. 이때에 후마윤은 경험면에서 그리고 행정적인 면에서 그의 능력으로 제국을 다스리기에는 어려운때였다. 그는 유명한 아프간 지배자인 세르사 수리(Shershah Suri) 에 의해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힘을 결집해서 1539년에 후마윤을 공격했으며 결국 후마윤은 인도를 떠나야 할 상황으로 몰렸으며 아프카니스탄의 카불에 도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편으로 약 15년간의 인도에서의 생활기간동안 후마윤은 하미다 바노(Hamida Bano)와 결혼을 했으며 후에 그녀는 위대한 무굴의 황제인 악바르를 낳게 된다. 후마윤은 카불의 지배자의 힘을 빌어서 아프간으로부터 그의 왕좌를 다시 얻으려는 노력을 했다. 후마윤은 카불왕의 도움으로 아프간을 공격했고 시르힌드에서 그들을 패배시킬수가 있었고 아그라를 포함한 자신의 제국을 재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불과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후에 후마윤은 델리에서 사고를 당하게 된다. 그는 책을 상당히 좋아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자신소유의 아름다운 도서관을 갖고 있기도 할정도였다. 하루는 그가 그의 도서관의 계단을 오르는 중에 불행하게도 미끄러지는 바람에 1556년에 그의 생을 마치게 된다. 그의 무덤은 후에 그의 아들과 부인에 의해 델리에 지어졌으며 무덤안에는 수많은 예술작품들이 함께 묻혀진것으로 알려진다.
악바르 (Akbar the Great, 1556 - 1605)
잘라우딘 모하메드 악바르(Jalauddin Mohammad Akbar) 는 1542년 10월15일에 아마르콧트(Amarkot)성에서 태어났다. 악바르는 야무나 강둑의 서쪽편을 따라 도시를 확장했으며 도시의 방어와 장식을 위해 6개의 높은 성문과 성주위를 흐르는 도랑을 만들었으며 하루만에 성곽이 봉쇄되도록 만들었다. 악바르는 단지 14세의 나이에 왕족의 확실한 계승자로 낙인을 받았으며 그는 1556년에 그의 스승이자 장군 바이람 칸(Bairam Khan)의 도움으로 칼란누르(Kalanoor)에서 왕위를 계승했다.
바이람칸의 도움으로 악바르는 그 유명한 빠니팟트의 5섯번째 전투에서 아프간을 패배시켰으며 1558년에 악바르는 처음으로 아그라에 도착하였다. 아그라는 바부르와 후마윤에 의해 이미 무굴제국의 정권아래 들어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역사적인 도시는 정치적인 세력과 문화적인 성숙도 그리고 건축적인 영화에 있지는 못했다. 그러나 악바르를 비롯하여 그의 연이은 계승자인 자항기르와 샤자한에 의한 통치기간동안에 비로서 아그라의 진가를 갖추게 되었으며 무굴제국의 수도로서의 역할을 시작하였다.
1566년에 악바르는 오래된 바달가르(Badalgarh) 성을 부수고 아그라에 새로운 성을 건축하기 시작하였으며 아그라성은 예술과 건축의 아름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악바르는 무굴제국의 수도로서의 아그라에 대한 이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수많은 쓰러져가는 건물들을 재건축하기 시작했다. 악바르는 유능한 행정가였으며 많은 교육을 받지는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능력있는 사람들과 유능한 관료들의 도음으로 그는 행정전반을 잘 처리해 나갔다. 또한 악바르는 무슬림통치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힌두인들의 존재가치 또한 인정했으며 이웃하고 있는 라자스탄의 라지푸트들과의 혼인관계에 대한 허용을 선포했으며 그뿐아니라 자신이 직접 라자스탄의 지배계급의 공주인 조다 바이(Jodha Bai)라는 여인과 결혼하기까지 하였다. 또한 악바르는 자신의 관료를 무슬림뿐만이 아니라 힌두인들에게서도 기용하였으며 거기에는 어떤 계급과 신앙의 차별이 없이 오로지 국가의 이익만을 고려할 뿐이었다.
그는 행정부 전반에 걸친 행정개혁을 단행했으며 이로인해 그의 9명의 행정관료들(9개의 보석으로 불리기도 한다)의 도움으로 악바르는 인도에 매우 효율적인 행정시스템을 도입했으며 그 자신이 인도의 위대한 왕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1568년에 악바르는 칫토르가르(Chittorgarh)를 공격해서 점령했으며 그곳에서 승리의 표시로 그성의 높은 성문을 운반해서 아그라에 보존시키기도 하였으며 지금도 그 성문을 볼수가 있다고 한다. 그때까지 악바르는 아들이 없어서 고민하고 있었고 그의 관료중의 한사람이 악바르에게 유명한 수피 성자 쉐이크 살림 씨스띠(Sheikh Salim Chisti)를 소개해 줬고 이 때가 1569년의 일이었다. 그 성자는 악바르가 사는 아그라로부터 37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 있는 파테푸르 씨크리(Fathepur sikri)에 살고 있었다. 악바르는 걸어서 그 성자에게 가서 그를 영접했으며 그 유명한 성자는 악바르에게 아들의 축복을 내려주었으며 이와 같이 해서 악바르는 아들을 얻게 되었다. 악바르는 그때 그 성자와 함께 살기로 마음먹고 1569년에 제국의 수도를 파테푸르 씨크리로 선포하였으며 새로운 도읍지로서의 건설을 명령하였다. 많은 건축물들이 새로운 수도에 지어졌으며 그는 구자랏트(Gujarat)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높은 문을 건축했으며 그것의 이름을 불란드 다르와자(Bland Darwaza) 또는 승리의 문이라고 지었다. 1575년에서 1586년까지 악바르는 파테푸르 씨크리에서 인도를 지배하였으며 유명한 성자 살림의 사망후에 그는 파테푸르 씨크리에 그 성자를 기리기 위해 하얀색의 아름다운 대리석으로 무덤을 만들었다. 그 성자는 죽기전에 악바르에게 파테푸르 씨크리를 떠나서 아그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조언했다고 알려진다. 그래서 그 성자의 건의에 따라서, 그리고 심각한 마실물의 부족으로 인하여 악바르는 1586년에 아그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악바르는 "디네 라이"(Din e Lahi) 라고 불리는 새로운 종교를 널리 전파했으며 그 당시의 모든 종교가 가지고 있는 좋은 가르침을 거의 포함하고 있었다. 또한 악바르는 마음과 정신이 하나된 통일인도에 대한 전망을 주시하고 있었으며 두개의 주류 공동체인 힌두인들과 무슬림인들 사이의 문화적 융합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구상하기도 했으며 그것을 위하여 "술라이 쿨(Sulha-I-kul)"이라는 정책을 선포하기도 했다. 따라서 악바르 통치하의 아그라는 문화적 통합의 중심지가 될수가 있었다. 50년간의 위대한 통치후에 악바르는 1605년 10월 25에서 26일로 넘어가는 밤사이에 사망했으며 그의 무덤은 시칸드라에 마련되었다. 이 무덤은 이미 악바르 자신에 의해 그의 생애동안에 지어진 것이며 그의 사망후에 그의 아들 자항기르에 의해 완성되었다.
자항기르 (Jahangir, 1605 - 1628)
자항기르는 1569년 8월에 파테푸르 씨크리에서 태어났으며 악바르는 그의 아들의 이름을 수피성자의 이름을 따서 술탄 무하마드 살림(Sultan Muhammad Salim) 으로 이름을 지었다. 악바르는 그를 애정으로 쉐쿠 바바(Shekhoo Baba)라는 이름으로 부르곤 하였다. 어린왕자 시절의 살림은 파테푸르 씨크리에서 1573년에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페르시아어와 터키, 아라비아어, 힌디 그리고 역사와 지리 수학등을 배웠다. 따라서 그는 훌륭한 힌디, 아라비아, 터키, 페르시아어의 학자가 되었으며 악바르의 사망후에 1605년 11월 3일에 아그라에서 왕좌를 물려받았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왕관을 머리에 취했다. 자항기르는 쉐르 아프간(Sher Afghan)을 살해했으며 나중에 누르마하이(Noor Mahai)와 결혼을 했으며 그는 그녀를 누르이 자항(Noor-I-Jahan) 혹은 세상의 빛이라고 불렀다. 그는 이후로 여인과 술에 빠졌으며 따라서 그의 통치기간동안 전적으로 누르이자항이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고 그는 단지 명목상의 황제에 불과했다. 그의 부인인 누르자항은 당대의 풍속의 유행에 대단히 민감했으며 또한 그녀는 미술을 장려했고 자신의 부모들에 대하여는 상당한 집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죽고난후에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를 기념하기 위해 아름다운 건축물을 야무나 강둑 동쪽편에 지었으며 이름을 잇트마드우드 다울라라고 지었다. 그건물은 아름다운 하얀대리석의 무덤이며 훌륭한 상감세공작품과 여성의 우아함등이 어우러져 있다.
샤자한 (Shahjahan, 1628 - 1658)
샤자한의 어린시절이름은 꾸람(Khurram)이었으며 1592년 라호르(Lahor)의 꾸람에서 태어났다 . 유능한 장군으로서 수많은 유명한 전투에서 이름을 날리던 어린 왕자 꾸람은 인도의 미래의 황제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꾸람은 자신의 다른 모든 형제들을 죽이고 나서 모하밧트 칸(Mohavat Khan)과 누르자항의 오빠이자 꾸람의 장인인 아사프 칸(Asaf Khan)의 도음으로 1628년 2월에 인도의 제황이 되었다. 이후에 아사프칸은 수상이 되었고 모하밧트칸은 7000의 군사와 7000의 기마병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샤자한은 거대한 건물과 웅장한 건축물 그리고 궁전 ,기념비등을 건설하는것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그라를 빛나고 찬란한 도시로 만들었다. 그는 1612년 4월에 아르주만드 바노(Arjumand Bano)와 결혼했으며 그녀는 샤자한으로 하여금 사랑의 덫에 걸리도록 하기에 충분했으며 샤자한은 그녀가 죽은후에 그녀를 기념하기 위한 크고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어주겠다고 뭄타즈마할에게 약속을 하였다. 그래서 뭄타즈가 1631년에 죽었을 때 그는 상당한 충격에 빠졌으며 얼마후에 그는 그녀에게 약속했던 그리고 그녀를 기리기 위해 하얀대리석의 꿈으로 불려지는 타즈마할을 건축했으며 그것은 세계7대불가사의로 불리게 되었다. 샤잔은 오늘날의 델리로 알려진 지역인 샤자하나바드를 조성했으며 이것만이 아니고 그는 레드포트, 마스지드 그리고 타테 타우스로 불려지는 아름다운 공작왕좌등을 만들었다. 그 탁테타우스는 상당한 양과 가치의 금으로 만들어졌으며 이왕좌의 아름다운 공작상은 밝은 보석으로 만들어졌다. 왕좌의 천장 역시 금과 귀금속, 그리고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져 있으며 에머랄드색의 많은 기둥들로 받쳐지고 있다. 또한 왕좌로 오르는 계단은 은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 놀라운 물건은 1736년에 나디르에 의해 페르시아로 옮겨져갔으며 나중에 페르시아에서 녹여졌다고 한다. 샤자한은 그의 노년기를 혐오와 심한 고통속에 보내게 되었다. 그것에 관한 이유는 많이 있을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인생의 중반에 그의 사랑하는 부인을 잃었다는 것이고 두번째로 인생의 기간동안 병속에 지냈다는 것이고 세번째로는 그는 그의 막내아들에 의해 아그라의 성에 갇혔다는 것과 샤자한의 나머지 아들들이 모두 자신의 막내아들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사실이 그 이유들일 수 있다. 오로지 그의 사랑하는 딸인 자하나라 베굼(Jahanara Begum)만이 아버지와 함께 보냈으며 심지어는 아그라성에 함께 갇히기도 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괴로워하는 늙은 아버지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소원이 자신의 사랑과 함께 그옆에 묻히는 것이라고 표현했으며 이후에 그는 1666년 1월 31에 하늘로의 영원한 항해에 나서게 되었다. 그의 잔인한 아들인 아우랑제브는 아버지의 장례식에조차 참석할수 없었으며 위대한 샤자한은 시종들에 의해 옮겨져 뭄따즈옆에 묻혔고 아우랑제브는 한달가량뒤에 아그라에 와서 그의 아버지 기념비 근처의 대리석 울타리 설치의 형식적인 절차를 수행했을 뿐이었다. 후에 샤자한의 딸인 자하나라역시 1681년 즉 아버지가 죽고난후 15년후에 젊은 나이에 아버지의 뒤를 따르게 되었고 그녀는 델리의 니자무딘의 한 장소에 묻혔다.
뭄따즈 마할 (Mumtaj Mahal 1592 - 1631)
뭄따즈 마할이라는 이름은 샤자한의 사랑하는 아내에게 주워졌던 이름으로서 실제의 그녀의 이름은 아르주마나드 바노 베굼(Arjumanad Bano Begum)이며 왕자인 꾸람과 결혼한 여인이었다. 이 꾸람왕자가 나중에 무굴제국의 5번째 황제인 샤자한이다. 결혼당시의 그녀의 나이는 19살 이었으며 그녀의 아버지는 야민우다울라 아사프 칸으로서 그는 자항기르 관료로서 낮은 직위에서 일하던 사람이었고 누루자한의 오빠였다. 샤자한은 그녀의 독특한 매력과 진실로 인해 그녀에게 크나큰 사랑을 느꼈으며 자신의 사랑을 주었다. 뭄따즈는 샤자한의 통치기간동안 행정분야에 있어서 주요한 역할을 했으며 주요한 자문역을 맡기도 했다. 이 아름답고 정신적으로 기민한 여인인 뭄따즈는 샤자한과 18년 동안 결혼 생활을 보냈으며 이 기간동안 많은 행정적인 문제점들을 해결했고 침착하게도 그 일들을 훌륭히 잘해내었다. 그녀는 또한 사회 복지 활동에도 적극적이었으며 많은 수의 억눌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훌륭한 안식처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뭄따즈는 14명의 아이들을 나았으며 부르한푸르(Burhanpur)에서 14째의 해산에서 심각한 병을 얻었으며 이때의 샤자한은 칸자한(Khan jahan)과의 전투에 참가하고 있을 때이다. 모든 노력이 뭄따즈를 살리기 위하여 시도되었지만 실패에 그쳐졌고 마침내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을 생각해서 자신의 딸인 자하나라에게 샤자한을 잘 보필할 것을 책임지워줬다. 그리고 그녀의 죽임이 가까이 옴에 따라 그녀에게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어떻게 하면 당신이 믿을 수 있도록 하는지 물었고 그때의 뭄따즈는 그에게 결혼을 하지 말것과 아이들을 잘 돌보길 부탁했다. 그녀는 1631년 6월 17일에 사망했으며 그때의 나이 39살 이었다. 뭄따즈의 죽음과 동시에 온 제국이 수의를 입었고 숭고한 여인의 죽음을 애통해 하였다. 샤자한은 그가 뭄따즈와 약속한 것들을 지켰으며 자식들에게는 사랑과 애정을 나눠 주었으며 뭄따즈가 죽고난 후 바로 타즈 마할을 건축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나라의 축제 기간동안에는 샤자한은 뭄따즈의 무덤에 와서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곤 했으며 그의 수염은 회색빛으로 자라났으며 그의 심신은 매우 약해졌다. 샤자한은 뭄따즈를 잊으려고 무척이나 많은 노력을 했으나 소용이 없었으며 매주 금요일에는 뭄따즈의 무덤을 찾아가곤 했었다고 전해진다.
아우랑제브 (Aurangzeb, 1658 - 1707)
무히우딘 무하마드 아우랑제브(Muhiuddin Muhammad Aurangzeb)는 1618년 11월3일에 우짜인(Ujjain)근처 도하드(Dohad)에서 태어났다. 그는 학업에 매우 열중했으며 후에 페르시아어와 아라비아어, 경전코란의 학자가 되었으며 1634년에 그는 1만명의 수장인 만사브다르(Mansabdar)가 되었으며 오차(Orcha)지역에 대한 공격이 맡겨졌다. 그리고 데칸(Deccan)의 수베다르(Subedar)로 임명되어서 1636년부터 8년간을 머물게 되었다. 1637년 5월 18에 그는 딜라스 바노베굼(Dilras Bano Begum)이라는 페르시아의 공주와 결혼을 했으며 1644년에 그는 수베다르직에서 사임을 했으나 후에 그는 다시 구자랏트의 수베다르(일종의 총독의 직위)가 되었다.
그는 더욱이 1648년~1652년까지 물탄의 수베다르로서 임했으며 1649년, 1652년에 두번씩이나 칸다하르를 정복하기 위해서 파견되었으나 두번다 실패를 했으며 이런한 일로 샤자한은 그의 아들을 직위에서 물러나게 했으며 다시 그를 데칸의 수베다르로 임명하였으며 그곳에서 그는 1652년에서 1658년까지 머물게 되었다. 아우랑제브는 1655년부터 1706년까지 거의 51년의 기간동안 통치를 했으며 악바르처럼 관대하지도 않았고 건축물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는 확고한 수니 무슬림 신자였으며 종교적 문제에 관하여서는 매우 엄격한 입장을 취했다. 또한 건축물 조성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반대의 입장에 있었으며 그것을 위한 지출은 절대적으로 낭비라고 믿었다. 그는 거의 아무것도 아그라를 꾸미기 위해 한 것이 없으며 오히려 더욱 쇠퇴하게 만들었다. 또한 종교적 감정에 있어서 너무나 비판적이어서 아그라의 기존의 기념비등에 대해서도 그러한 생각을 했으며 특히 건축물등에서 사진이나 새, 혹은 어떤 살아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어디에서든지 간에 그는 그것들을 부수는 것은 물론이고 철거해 버렸다. 또한 그는 힌두이즘과 다른 종교에 대하여서도 무척이나 배타적이 었던 사람으로 일컬어 진다. 아우랑제브는 자지야(Jazia)라고 부르는 종교세를 부과하고 증가시켰으며 마투라(Mathura)와 바라나시(Varanasi) 그리고 다른 지역의 유명한 신전들을 파괴했으며 그 잔해물들로 회교사원을 건축했다. 그는 힌두인들에게 무슬림으로 개종할 것을 강요했으며 시크교(Sikh)의 구루(Guru)인 태그바하두루(Teg Bahaduru)와 구루 고빈드씽(Gobind Singh) 두아들을 자신이 보는 앞에서 산채로 매장을 해버렸다. 그는 힘으로써라도 이슬람이 전파되길 바랬으며 이런 혹독한 종교정책의 결과로서 그의 지배기간동안에 제트족과 마라타 그리고 모든 시크교인들이 그의 지배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었다. 힌두인들은 실제로 무굴제국의 등뼈와도 같은 중추적인 역할을 점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지원과 협조 없이는 악바르대제라 하더라도 인도에 대한 지배를 계속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그 당시까지 무굴제국은 힌두인들을 믿었고 존중했던 것이며 인도에서 적절히 통치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우랑제부부터 힌두인들을 억압하기 시작했고 따라서 무굴제국은 무너져가기 시작했다. 아우랑제부는 결코 그의 주변 사람들을 그리고 심지어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들 조차도 믿거나 신뢰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왕이 되도록 많은 힘이 되어준 그의 여동생 로샤나라(Roshan ara) 조차도 역시 그로부터 어떤 호의도 얻을 수 없었다. 그의 딸인 제분니사(Zebun Nissa) 역시 다를 바가 없었다. 한동안의 긴 전제정치 후에 그는 1707년 3월 3일에 남쪽 지방인 아흐마드나가르(Ahmad Nagar)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그때의 나이가 90살 이었다. 그는 평범한 무덤에 묻혔으며 그의 죽음은 제국의 수도인 아그라의 많은 불행을 몰고왔다. 정치적인 불안들이 아그라로 하여금 젯과 마라타 심지어는 이국의 침입자들의 위협에 노출되도록 만들었으며 아그라의 성은 그들에 의해 몇번씩이나 약탈되었다. 이러한 연고로 18세기 말엽에 아그라는 위대한 무굴제국 기간동안의 영광과 찬란함을 잃어버리게 되고 말았다.
한편, 무굴제국은 영지(領地)를 직할지와 봉토(封土)로 구분하여 통치하였다. 봉토는 관료나 군인들에게 봉록으로 주는 토지였으나, 관할지를 자주 바꾸어 같은 토지를 오랫동안 지배할 수 없게 하였다. 직할지와 봉토의 비율은 약 1:3으로 봉토가 훨씬 많았다. 무굴령은 악바르 시대에는 12주(州)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17세기 중엽에는 정복지의 증대에 따라 22주가 되었다.
각주에는 주장관과 주 재정장관 등이 배치되어 각각 군사와 행정을 담당하였다. 주 밑에는 현(縣) ·군(郡)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실제의 행정상 중요한 단위는 군이었다. 군은 획일적인 행정단위라기보다는 소재지에 자연적으로 형성되었던 지역단위로서, 무굴제국은 종래의 사회관계를 지배의 말단조직으로서 그대로 이용하였다.
무굴제국의 관위제도(官位制度)는 만사브제(制)이다. 이 제도는 악바르시대에 정비되었는데, 만사브는 10단위에서 1만 단위까지 33의 위계(位階)로 나누어 있었다. 1600년경 만사브 보유자수는 1,600명 정도였으며, 그들이 무굴 중앙정부 권력의 지배자집단을 이루었다. 특히 만사브 1,000 이상의 고위 위계 보유자는 137명이었는데, 만사브 5,000 이상의 위계는 거의 황족에 국한되었다. 이 만사브제의 기본원리는, 모든 관료는 맨처음 만사브수(數) 10의 위계가 주어지고, 그 후 능력과 공적에 따라 순차적으로 높은 지위의 위계가 주어졌다. 또 만사브수에 맞추어 그에 딸리는 코끼리나 말의 수, 병사의 수효가 정해졌으며, 봉록도 만사브수에 따라 정해졌다.
무굴제국 최대의 재원(財源)은 토지로부터 징수하는 지세(地稅)였다. 이 지세는 하라주라 하였고, 이것을 바치는 농민은 라이야트라 불렸다. 라이야트 농민의 자기 경작지에 대한 권리는, 최근의 여러 연구에 의하면, 농민이 자기 경작지를 상속할 수 있었고, 또 저당 ·매매도 할 수 있었던 점 등으로 보아 강력한 사적(私的)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무굴 왕조는 본래 시아파(派) 이슬람교를 신봉하여 종교적으로 매우 관용적이었으며, 악바르 황제는 특히 힌두교의 신앙 ·습관 등을 보호하였다. 그러나 그 후의 황제는 점차 수니파 이슬람교로 기울어졌으며, 아우랑제브 황제에 이르러서는 거의 광신적인 이슬람교 신앙을 가져 힌두교를 심하게 압박하였다. 이 시대의 피정복민이었던 힌두교도 민중 사이에서는, 엄격한 카스트제도에서 벗어나 신을 열렬히 숭배하는 바크티파의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으며, 펀자브 지방에서는 카스트제도를 부정하는 시크교의 세력이 확대되어갔다.
아우랑제브 황제를 제외한 역대의 무굴 황제는 모두 그의 통치시대에 장려한 건축물을 건립하였다. 무굴시대 초기에 악바르가 건립한 건축은 페르시아 양식과 인도 재래의 형식을 합친 모티프를 지닌 힘찬 것으로 황제의 호방한 성격을 나타내는데, 악바르의 도성(都城) 파테푸르 시크리와 아그라의 성 등이 대표적이다. 샤자한 황제는 그보다 화려한 외형과 정교하고 치밀한 장식을 중요시하였다. 아그라의 타지마할묘(廟)나 델리성의 황제접견소(알현소) 등은 이 시대의 대표적 건축이다. 아우랑제브 황제가 죽은 뒤 궁정 문화의 중심은, 그때까지의 델리보다도 라크나우와 하이데라바드의 태수(太守) 궁정으로 옮겨가 이 지역에 궁전 ·사원 등이 건립되었다.
무굴시대의 그림은 주로 미니어처(細密畵:장식이나 서적의 삽화로 그린 정밀한 채색화)였으나, 페르시아의 전통에 인도 재래의 수법을 가미한 무굴파(派)나 라지푸트 토후국(土侯國)의 궁정에서 번성하였던 라지푸트파의 그림이 성행하였다.
http://www.mtcha.com.ne.kr/world-term/indo/term18-muguljegug.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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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주라호 (Khajurāho)
옛 이름은 카르주라바하카(Kharjjūravāhaka).
델리에서 약 400km 떨어진 곳에 있다.
인도 중부 마디야프라데슈주(州) 북단(쟌시 동남동 약 175km)에 있는 유적.
현재 20개 이상의 힌두교 및 자이나교의 사원이 있는 순례지로 유명한 관광지이다.인구 5000여 명밖에 안되는 작은 촌락으로 전락한 이 도시는 10세기께만 해도 인도에서 세력이 강대하고 경제적으로도 아주 부유했다
10∼11세기 카주라호를 기반으로 한 찬델라 왕조 세력은 북인도 대부분을 지배했다. 한때 마드야 프라데시주 전역에 걸쳐 폭넓은 지역을 다스릴 만큼 나름대로 커다란 세력을 형성했다.
찬델라 왕조시대에는 이 지방의 주도였으며, 파라슈바나트 사원(자이나교), 차툴부자 사원(힌두교) 등을 비롯하여 약 30개의 사원이 건립되었다.
카주라호는 인도의 중세기인 950년부터 1050년 사이에 달의 신 찬드라의 자손이 세웠다는 찬델라 왕조의 초기 수도로 정착되면서 사원들이
집중적으로 건축되었다.
왕조의 전성기에는 80여개의 사원들이 있었지만,
후에 이슬람 무굴 제국의 아우랑제브에 의해 대부분 파괴되고 현재는 동서남군을 통틀어 20여개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카주라호 사원은 1986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카주라호 사원들은 대부분 황갈색이나 분홍빛을 띤 사암으로 지어져 있다. 사암은 카주라호에서 20여 km 떨어진 켄강 부근에서 캐 온 것이라고 한다.
사암은 대리석처럼 정교한 조각이 가능하므로 원하는 형태의 모습으로 사원을 짓는데 용이했을 것이다.
사암의 또다른 특징은 물기를 쉽게 흡수한다는 점인데, 다시말하면 비가 억수처럼 내려도 부딪히는 대신 물기를 흡수함으로서 마찰을 피하게 되는 것이다. 천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비바람에 시달려 왔는데도 원래의 모습이 비교적 원형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는 점은 사암의 커다란 장점이었다.
그러나 가장 오래된 서군(西群)의 차우사트 요기니(Chausath Yogini Mandir)사원은(9세기 말) 화강암을 사용하여 형식도 다른 사원과 전혀 다르다.
사원의 이름이 '64'라는 숫자의 의미로 사원에 세워진 사당의 갯수를 의미한다.
거친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사원은 카주라호 초기 건축물로, 시바-사가르 연못 남서쪽, 화강암 광맥이 드러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사원은 5.4미터의 우뚝솟은 연단위에 가로 31.4미터, 세로 18.3미터의 사각형모양에 64개의 사당이 만들어진 독특한 기획과 디자인을 지니고 있다. 64개의 사당 중 현재는 35개가 남아 있다.
조그만한 출입구를 통해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방으로 되어 있는 사당는, 몇겹의 곡선으로 만들어진 시카라(sikhara) 형태로 단순한 지붕을 얹었다. 입구를 향해 뒤쪽 벽에 있는 사당는 가장 크고 메인 성소로 되어 있다.
투박한 외형과 그대로 드러난 울퉁불퉁한 돌재질을 지닌 단순한 외관의 조형에서는 자연의 강인함과 우뚝솟은 연단과 두개로 나눠진 장하(벽) 등의 건축양식의 골격을 드러낸다.
사원은 도시를 중심으로 서쪽, 동쪽, 남쪽 세 그룹으로 흩어져 있지만 사원의 핵심은 서쪽에 있는 사원군이다. 전성기 시절에는 무려 85개나 되는 사원이 이곳을 가득 메웠지만 지금은 22개밖에 남지 않았다.
석공들의 심심함(?)이 빚어낸 작품들이 사원의 운명을 갈랐다. ‘엽기 조각’이 있는 서부 사원군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비싼 몸값(입장료)을 받으며 수많은 사람의 철저한 보호를 받는 반면, 그렇지 않은 동부 사원군은 입장료도 없이 거의 버려지다시피 했으니..
누가 보더라도 ‘발바닥에 헤나를 그리는 여자’의 조각이 아름다운 동부 사원군의 인물상들 또한 서부 사원군 못지않게 아름다운데 말이다.
사원들은 하나같이 시바나 비슈누 등 힌두신들을 숭배하기 위해 지어졌으며,
스리야를 본존으로 모시는 치트라그프타사찰, 자이나 교의 파르슈바나타, 아디나타, 간타이 등의 사찰 외에는 모두 시바 사원 또는 비쉬누 사원이다.
당시 이곳의 장인들 조각솜씨를 모두 동원하여 지어진 듯 거대하면서도 섬세하고 장중하면서도 여성스러운 멋이 곳곳에 깃들어져 있었다. 사원의 외벽은 하나같이 시바와 비슈누신, 요정들과 아름다운 여인들 그리고 동물들의 모습이 섬세하게 조각되어있어 사원이라기 보다 하나의 거대한 조각작품을 연상시킨다.
처마끝을 여러 층으로 높이 쌓아올린 지붕이 특징이며, 붉은 사암(砂岩)으로 된 벽면에는 중세 인도의 부조를 대표하는 많은 상(像), 병사·여인상, 관능의 극치를 표현한 조상(彫像) 등이 새겨 있다.
서부사원군
라크슈마나(Lakshmana Mandir), 비슈바나타, 치트라그프타, 데비 쟈가담비, 칸다리야 마하데바(Kandariya Mahadev Mandir)(가장 웅대함),
락쉬마나 사원(Lakshmana Mandir)은 925년에서 950년 사이에 건축되었고 서부 사원군 중 보존상태가 가장 좋은 사원 중 하나로 비쉬누 신에게 봉헌된 사원으로 가장 큰 볼거리는 춤추는 요정인 압사라(Apsara)로 실제 춤을 추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섬세하게 조각돼 있다.
칸다리야 마하데브 사원(Kandariya Mahadev Mandir)은 카주라호를 대표하는 사원으로 다양한 성행위를 묘사한 미투나(Mithuna)상들이 벽면 가득 조각돼 있다.
1025~50년경 건립 되었으며 사원의 높이는 31m로 내부에 226개, 외부에 646개의 조각상이 있다. 미투나 외에 쉬바`바라하`꾸마리 등의 신들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다.
두 사원의 조각에서 뚜렷한 세대차이를 느낄 수 있다
락슈마나 사원의 에로틱한 조각들 중 여인들의 모습은 매우 과장되고 풍만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반해 마하데브 사원의 조각들은 매우 날씬하고 보다 세련된 모습과 자세를 묘사하고 있었다.
마하트마 간디가 “카주라호의 모든 사원을 부숴버리고 싶다”라는 말을 했을 정도로 사원의 벽면에는 이곳이 종교 사원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 만큼의 적나라한 모두 80여가지의 남녀교합상이 조각돼 있다.
카주라호는 에로틱한 조각들로 유명해진 곳이지만 신화`생활`역사에 관한 조각들도 많으며 전체적으로 사원들의 보존 상태가 좋고 조각상들은 아름답고 섬세하게 조각돼 예술성도 갖추고 있는 유적지이다.
카주라호의 사원과 조각은 인도 예술만의 독창성과 신성을 지니고 있다. 유연하고 풍만한 젊은 육체를 매끈하고 부드러운 사암과 대리석에 정확히 재현해놓은 것은 전형적인 인도의 조형예술이 지니고 있는 가장 중요한 장점이기도 하다. 동적이면서 영감이 넘치는 인도의 조형예술에는 또한 아름다운 육체의 재현이라는 힌두교 신앙이 반영되어 있다.
1000년 전 찬델라 왕조는 무슨 이유로 사원 외부 장식을 낯 뜨거운 조각상으로 가득 채웠을까? 명확한 답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4세기 경 밧샤야에 의해 쓰여진 인도의 성교지침서인 카마수트라(Kamasutra)에 묘사된 성행위의 자세를 조각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 당시 북인도에서 강하게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불교에 대항하여 힌두교도들을 사원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사원에 감각적인 조각들을 해 놓았다는 이야기도....
천둥과 번개의 신이 처녀기 때문에 남녀 교합상으로 외벽을 장식하면 신들이 낯이 부끄러워 사원을 부수지 못한다고 주장,
요가를 수행하는 명상가들에게 교육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얘기도 있다. 수행자들은 야한 모습을 보고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평상심과 금욕적인 성찰을 위해 미투나 상을 이용했다는 이야기다.
탄트리즘 종교 사상을 강조하는 힌두교 정신에서 비롯됐다는 설을 취하면 그 근거는,
사원은 신과 인간이 만나는 성스러운 장소다. 이런 곳을 인간의 성적 행위를 표현한 조각상으로 가득 메운 것은 단순히 인간의 잠재된 욕망을 표현하기 위함이 아니다.
힌두교라는 종교와 연결된 미투나 상
단순히 쾌락적 욕구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인간과 신, 욕망 끝에 오는 허무주의, 허무주의를 딛고 일어선 새로운 희망, 고통과 한계 상황에서 벗어난 해탈의 의미를 모두 담은 것이다.
남녀 교합상이 이성적 사랑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와 아주 깊은 관계, 그 이상을 맺고 있다.
진정한 힌두교도 들에게 있어 세속(世俗)은 신성한 것이며, 소멸(消滅)역시 불멸의 구원에 이르는 열쇠가 된다. 요컨대 '사랑이 곧 신'이다. 그리고 항상 추구하기는 하지만, 상상이 불가능한 신과 인간의 결합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은 오직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수면'이나, 성교를 나누며 서로 절정에 도달했을 때의 모든 '소멸'의 순간에서만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은 가장 아름답고, 가장 만족스러우며, 가장 완벽하고, 가장 해탈에 가까운 것이다. 이와같이 힌두교에서 세속적인 인간의 쾌락을 묘사한 예술은 힌두교 사원의 정신성을 능가한다.
모든 것을 포용하는 힌두교의 정신.
즉, 카주라호의 조각상들은 성적인 에너지를 이용해 절정의 상태에서 자아의식과 우주의식이 하나가 되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탄트리즘을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단순히 성적인 쾌락을 위한 조각이 아닌 모든 것을 포용하고자 하는 힌두교의 정신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미투나는 인도인들에게 성행위에 관한 교본이 되기도 했다. 평생 한 명의 반려자만 맞이할 수 있는 힌두교의 교리에 따라 평생 서로가 즐겁게 사는 방법을 연구해야 했고 성행위도 그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인도 카스트의 가장 높은 계급인 브라만 들에게는 카주라호가 하나의 정신적 시험무대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조각상을 보고 흥분하거나 주의가 산만해지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는 진실로 헌신적인 힌두 교도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남녀교합상을 보며 성욕을 절제하는 정신적인 수양을 하였으며, 요가의 일종인 카르마 요가는 조각상을 보며 마음을 차분하게 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성행위의 묘사는 '둘이 곧 하나'인 감각적인 행복과 함께 정신적인 행복의 최고형태를 상징하고 있다.
카르마 요가란 이러한 자극적인 장면 앞에서 침착을 유지하는 방법을 수행자들에게 가르쳐주는 요가이다. 마하트마 간디도 만년의 나이에 카르마 요가를 행한 적이 있다. 이처럼 힌두교는 모든 극단을 포용하고 있다.
동부사원군
힌두교 성향이 강한 서부 사원군에 비해 동부 사원군은 자인교 사원들이 주를 이룬다. 크고 보존 상태가 좋은 빠르스바나뜨 사원 (Parsvanath Mandir)이 볼만하다.
동쪽에 자이나 사원을 건립한 이유는 당시의 재무 장관 격을 맡았던 사람이 권력을 가진 자이나 교도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해석하는 주장이 많다. 그때나 지금이나 무소유와 아힘사를 궁극적인 목표로 살아가는 자이나 교도들이 금전과 재물 관리에 능했던가 보다. 이곳에는 파르스바나트, 산티나트, 아디나트 등 3개의 자이나교 사원이 있는데,
외관상으로는 서군의 힌두 사원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으나 조각의 많은 부분에서 차이점을 볼 수 있다. 특히 이곳의 몽골리안 얼굴의 여인상은 묘한 느낌을 갖게 한다.
외벽에는 브라흐마`비쉬누 등의 힌두교 신들이 조각돼 있어 힌두교 사원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자인교 사원이다.
자이나교는 발가벗고 수행하는 것이 특징인 모양인지 모든 불상의 모습을 하고 있는 조각이 하나같이 발가벗겨져 있으며 남성의 성기까지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다.
남부사원군
남군(南群)의 마지막으로 조성된 두라데오,
차투르브자 등의 제 사찰은 10세기 후반~12세기 전반에 건립된 것으로서 규모도 크며 형식도 잘 갖추어졌다.
이 사원은 동 틀 무렵 특히 신비스럽다한다.
사진
http://blog.daum.net/hisblog/8544368
종교는 나약한 인간성을 토대로 시작되었으며, 통치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적절히 도입하면서 번성되는 것이 아닌가. 인도 토속민족의 국가인 찬델라왕조에서 건립한 카주라호 사원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리라.
빈부의 격차도 크고 먹을거리 등이 피폐한 이곳에서 힌두교는 사회를 안정시키는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거대하고 호화스러운 사원을 신분과 관계없이 공유하며 사회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을 원천봉쇄해 버리는 것이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985316
http://www.ozi.co.kr/html/gi_kajuraho.htm
사진
http://blog.daum.net/antiright/12765890
http://ramzy.tistory.com/276
http://blog.ohmynews.com/syung/248935
http://cafe.naver.com/bcny.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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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나트(Sarnath, Sarnātha)
사진
전설에 의하면 그 숲 속에는 두 무리의 사슴이 살았는데 한 무리가 5백이나 되었다. 하루는 살생을 좋아하는 왕이 사냥을 나왔다. 그 때 사슴의 우두머리가 왕에게 말하기를,
“활을 마구 쏘시면 우리는 한꺼번에 죽게 되고 그러면 다 썩고 말아 임금님의 반찬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한 마리씩 자진해서 희생을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생명을 연장할 수 있고 임금님도 매일 싱싱한 사슴고기를 잡수실 수 있습니다.”
왕이 듣고 보니 그럴듯한 말이기에 이를 허락하였다. 용감한 사슴들이 희생정신으로 그렇게 한동안 숲 속은 평화롭게 지나갔다. 그러다 한 암사슴이 죽을 차례가 되었는데 마침 사슴은 새끼를 잉태하고 있었다. 암사슴은 우두머리에게 새끼를 낳을 동안만이라도 순서를 바꿔 달라고 하였으나 매정하게 거절당하였다. 그러자 이 암사슴은 이웃 사슴무리에 가서 똑 같이 말하였다. 사정을 들은 이웃 우두머리는 어미 사슴의 모성애에 감동하여 자신이 대신 희생하기로 하고 임금에게 가서 대신 죽으러 왔노라고 말하였다. 임금이 이 말을 듣고는 생각하기를,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씨로구나. 너야말로 사슴의 모양을 한 참 사람이고 나는 인간의 탈을 쓴 사슴이구나.” 하고는 크게 뉘우친 다음, 왕은 다시는 사슴을 희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렇게 하여 두 마리 사슴의 희생정신으로 사슴나라에는 평화가 찾아 들었다고 한다.
그 녹야원(鹿野園)
“어찌 녹야원(鹿野園)이 멀다 하리오”
혜초의 시 구절이다.
혜초보다 무려 3백여 년 전에 법현도 바라나시와 녹야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다시 간지스를 따라 서쪽으로 가시국(迦尸國)의 파라날성(바라나시)에 이르렀다. 이 성의 10리 정도되는 곳에 녹원정사가 있다. 이 원에는 원래 벽지불(?支佛)이 주하고 계셨으며 항상 들 사슴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중략) 세존께서 성도하시자 후인들이 이곳에 정사를 세웠다.』
6년의 고행 끝에 ‘위없는 깨달음’을 얻은 고타마 붓다는 한동안 보드가야에 머물며 자신이 얻은 깨달음의 실체를 확인하고는 그 요체를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지 말지 망설였다. 그러나 혼자만이 깨달은 것을 자족해야 하는, ‘독각(獨覺- 프라티에카 붓다) 은 의미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 고타마 붓다는 마침내 무명(無明)에 빠져 있는 중생들에게 빛을 나누어주자고 마음을 정했다. 그리고 그 첫 상대자로 그와 같이 오랫동안 고행을 함께 하였던 다섯 비구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천안통(天眼通)으로 그들이 아직도 미욱한 고행을 하고 있는 것을 알아내고는 보드가야를 출발하여 그들을 찾아 바라나시로 향하였다.
한편 구도를 위한 처절한 고행을 감내하던 고타마 사문을 마치 스승처럼 존경하며 함께 수행하던 콘단나(Kondanna) 등의 다섯 수행자들은 고타마가 고행을 포기하고 어떤 여인에게서 우유죽을 얻어 마시는 것을 보고는 실망하고 그의 곁을 떠나 녹야원에서 독자적으로 수행을 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타락했다고 생각했던 옛 도반(道伴)인 고타마 사문이 자신들을 찾아온다는 것을 전해 듣고는 장시간 의논 끝에 옛 친구가 와도 일어나 인사하거나 말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그것은 일종의 모욕적인 무시였다. 그러나 250km나 되는 먼 길을 걸어서 찾아 온 옛 도반의 당당한 태도와 달라진 분위기에 그들은 일어나서 인사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이어서 앉을 자리를 권하였다고 한다.
붓다가 된 고타마는 이들에게, 이후 45년이나 계속된 설법자로서의 일생의, 첫 말문을 열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의혹과 미망 속에서 살고 있는 중생들의 삶은 고통-[苦]일 뿐이다. 이 괴로움은 부질없는 집착-[集]에서 생긴다. 이런 허망한 집착을 극복한 상태가 열반-[滅]인데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덟 가지 실천적 생활태도인 팔정도(八正度)를 실천해야 한다-[道]
옛 도반들의 수행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깨달음과 극심한 고행은 별개의 것이라고 지적한다.
삶을 고통이외의 다른 것으로 생각하는 환상에 젖어 살아가는 사람의 나날은 욕망과 집착에 사로잡혀 근심과 슬픔만을 더할 뿐 참된 자유를 찾을 수는 없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 극단적인 고행 위주의 수행만으로도 자유를 찾을 수는 없다. 다만 치우치거나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는 ‘중도(中道)의 도(道)’를 통해서 만 ‘대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위의 설법은 바로 ‘사성제(四聖帝)‘와 ‘중도법(中道法)’라고 부르는 것으로 ‘12인연법(十二因緣法)’과 더불어 불교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 이론이다.
이에 처음에는 수긍하지 않았던 다섯 비구들은 고타마 사문의 자신 있는 태도와 명쾌한 논리 그리고 온 몸에서 풍겨 나오는 상서로운 기운에 감화되어 마음의 빗장을 풀고 주의 깊게 듣고는 수행방법을 바꾸기로 마음을 먹게 되어 그들 역시 후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초전법륜지(初轉法輪地)라는 수식어가 앞서는 사르나트,
이 유서깊은 성적(聖跡)은 바라나시에서 북쪽으로 약 8km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지난날 부처님의 행적을 따라 답사했던 법현의 기록으로 짐작해 본다면,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은 후에 보드가야를 떠나 라지기르, 나란다, 파트나, 바라나시의 순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이곳 사르나트로 왔다.
바라나시에서 사르나트로 가는 길은 이른 아침 자전거 릭샤(人力車)가 격에 맞는다. 어슴 새벽부터 저녁 늦도록 언제나 사람들이 북적대는 바라나시 역사를 떠나 철교 하나를 건너면, '인환의 거리' 바라나시를 빠져나오면, 전혀 다른 세계가 된다. 노변에 늘어선 해묵은 가로수가 싱그럽고, 촉촉해진 마당을 비질하는 농가의 아낙들이 푸근하다. 노변 구멍가게에서 흘러나오는 라가(raga)의 선율, 시타르(sitar)와 타불라(tabula)의 경쾌한 어울림은, 늦가을 날씨처럼 알싸한 사르나트의 아침을 더욱 상쾌하게 만든다.
가는 길에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유적은 차우칸디 스투파(Chaukhandi stupa, 迎佛塔)이다. 초전법륜지 조금 못미처 길 왼편에 있으며, 대개는 일단 유적지로 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들르게 되는 곳이다. 이 스투파는 부처님이 다섯 비구를 재회한 사건을 기념하여 굽타왕조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당시에는 높이 3백여 척에 달하는 웅장한 규모였다고 한다. 현재의 팔각 기둥 형태로 올려진 건물은 1588년 무갈 제국의 악바르(Akbar) 황제가 세운 것으로, 부왕 후마윤(Humayun)의 방문을 기리는 것이라 한다. 계단을 따라 탑 위로 오르면 사르나트 마을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 스투파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초전법륜지가 있다. 입구 오른편에 단층 석조 건물의 사르나트 고고학 박물관이 있으며, 이곳에는 유적지에서 발굴된 수많은 불교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박물관은 특히 초전법륜상으로 유명한 곳이다. 설법인을 맺은 결가부좌의 이 불상은 굽타왕조 시대의 불상 가운데서 최고 걸작의 하나인 동시에 인도 조각 예술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힌다. 회백색 사암에 새겨진 심원한 표정이 오묘하다. 그 외에도 연화대 관음보살 입상, 미륵보살 입상, 자타카 이야기를 새긴 부조 등 많은 불교 걸작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갤러리 입구에 버티고 선 아쇼카 왕 석주 머리 부분의 사자 장식 또한 이 박물관의 명물이다. 온화하면서도 위엄어린 이 석사자 상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생생하다. 아쇼카 왕 당시의 간소함이 차츰 화려한 꾸밈으로 바뀌면서, 이에 따라 정신적인 긴장감도 사라져 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유적지 안으로 들어서면, 우선 다메크(Dhamekh) 스투파로 눈길이 간다. 오른편 먼발치에 당당한 자태로 우뚝 솟은 이 거대한 스투파는 오늘날 사르나트의 상징처럼 초전법륜지를 지키고 서 있다. 이 스투파는 부처님이 다섯 비구에게 처음으로 설법한 곳을 기념하여 아쇼카 왕이 조성한 것이라고 하나 그 내력은 확실치 않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굽타왕조 시대에 증축된 것으로, 기단부 외벽을 장식하고 있는 기하학적 문양이 특히 인상적이다.
유적지 입구 정면 가까이에 있는 다르마라지카(Dharmarajika) 스투파 터는 뒷전이고, 입구에서부터 눈길이 자꾸 다메크 스투파로 가는 것은, 보이는 물상에 대한 우선을 물리치지 못하는 답사자의 한계다. 지금의 다르마라지카 스투파 터는 둥그렇게 적벽돌을 쌓고 그 안에 붉은 흙을 채운 품이 흡사 씨름장 같지만, 현장이 이곳을 찾았을 때는 이 터에 백척이 넘는 웅대한 스투파가 있었으며, 그 앞에는 칠십여 척 높이의 석주가 서 있었다고 하니 실로 격세지감이 있다. 터만 남은 이 다르마라지카 스투파는 부처님의 사리를 담고 있었으니, 의미로 친다면 다메크 스투파에 결코 밑가지 않는다 할 것이다.
유적지 한 가운데 있는 사원 터는 서기 2세기 경의 것으로 입구가 동쪽으로 향해 있으며, 이곳으로 향하는 길 양편으로는 여러 기의 작은 스투파들이 있다. 이 사원의 벽은 아랫 부분에 석재를, 그리고 윗 부분에는 적벽돌을 사용하여 쌓아 올려 독특한 양식을 보이고 있으며, 내부의 벽에는 불상을 안치했던 흔적도 있다.
이 사원의 서쪽에 있는 아쇼카 왕 석주도 의미 깊은 유적이다. 원래는 부처님이 다섯 비구들에게 처음으로 법을 설했던 곳에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로서는 그 정확한 위치를 가늠할 수 없다고 한다. 비록 머리 부분은 박물관에서 맡겨 두고 부러진 몸 몇 토막을 겨우 유지하고 섰지만, 회백색 사암의 매끈한 표면은 서늘한 생기를 내뿜는 듯하다. 석주 표면에 브라흐미 문자로 새겨진 '파화합(破和合)'에 관한 아쇼카 왕의 금계(禁戒)는 당시 승단의 분열 조짐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쇼카 왕 석주를 지나 유적지 북쪽에 있는 세 곳 승원터를 둘러본 후에, 이곳 아이들이 파는 야채 한 광주리를 사 들고 사슴 동산으로 가면, 사르나트 유적지의 답사는 대개 끝나는 셈이다. 돌아나오는 길에 이 주변에 있는 스리랑카 사원을 비롯한 동남아 제국의 사원들을 둘러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사슴 동산 뒷편에는 최근에 조성된 한국절이 있다.
붓다가 처음 설법을 행한 Dhamekh Stupa
Archaeological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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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트의 곳곳은 많은 순례자巡禮者와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찾아온 온갖 환자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고, 빨래터로 유명한 도비 가트에서는 빨래 감을 물에 적셔 어깨 너머로 돌에 매 친다. 돌 하나에 한 사람의 직장이다.화장터로 유명한 마니까르니까 가트에서는 두 곳에서 회색의 무거운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머리를 삭발한 상주는 장작더미 옆에서 우두커니 타는 시체를 바라 보고 있다.
업(業)을 만들었던 온갖 행위를 완전한 무(無)로 돌리기 위해서는 살아있을 때의 그것도
갠지스강으로 가던 Baransi의 저녁풍경..
. 이들은 윤회輪廻를 믿는다. 이들에게 있어 시간은 1회성이 아니라 돌고 도는 것. 그러므로 한 생명의 끝은 다른 시간의 시작을 의미한다. 사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끝없는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 완전한 소멸(消滅)로 이르는 것. 이것을 해탈이라 하며, 이 갠지스 강에서 화장을 하고 그 뼈를 강물에 띄움으로서 해탈에 이르게 된다고 믿는다..
구석에는 먼지가 나든 말든. 빵빵거리는 경적警笛소리가 시끄럽던 말든 냄새나고 때에 저린 천을 두르고 신성하고 행복한 죽음을 맛보기 위해 흙바닥에서 기다리며 잠을 자는 사람.......싸늘한 밤 공기에 뼈속까지 추위가 저려온다. 그래도 릭샤와 사람들은 이 복잡한 거리를 부딪히지 않고 잘도 빠져 나간다. 그야말로 混沌의 極致다. 무질서속에 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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