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 1. 14:01

사르나트(Sarnath, Sarnātha)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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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에 의하면 그 숲 속에는 두 무리의 사슴이 살았는데 한 무리가 5백이나 되었다. 하루는 살생을 좋아하는 왕이 사냥을 나왔다. 그 때 사슴의 우두머리가 왕에게 말하기를,

활을 마구 쏘시면 우리는 한꺼번에 죽게 되고 그러면 다 썩고 말아 임금님의 반찬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한 마리씩 자진해서 희생을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생명을 연장할 수 있고 임금님도 매일 싱싱한 사슴고기를 잡수실 수 있습니다.”

왕이 듣고 보니 그럴듯한 말이기에 이를 허락하였다. 용감한 사슴들이 희생정신으로 그렇게 한동안 숲 속은 평화롭게 지나갔다. 그러다 한 암사슴이 죽을 차례가 되었는데 마침 사슴은 새끼를 잉태하고 있었다. 암사슴은 우두머리에게 새끼를 낳을 동안만이라도 순서를 바꿔 달라고 하였으나 매정하게 거절당하였다. 그러자 이 암사슴은 이웃 사슴무리에 가서 똑 같이 말하였다. 사정을 들은 이웃 우두머리는 어미 사슴의 모성애에 감동하여 자신이 대신 희생하기로 하고 임금에게 가서 대신 죽으러 왔노라고 말하였다. 임금이 이 말을 듣고는 생각하기를,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씨로구나. 너야말로 사슴의 모양을 한 참 사람이고 나는 인간의 탈을 쓴 사슴이구나.” 하고는 크게 뉘우친 다음, 왕은 다시는 사슴을 희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렇게 하여 두 마리 사슴의 희생정신으로 사슴나라에는 평화가 찾아 들었다고 한다.

그 녹야원(鹿野園)

어찌 녹야원(鹿野園)이 멀다 하리오

혜초의 시 구절이다.

혜초보다 무려 3백여 년 전에 법현도 바라나시와 녹야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다시 간지스를 따라 서쪽으로 가시국(迦尸國)의 파라날성(바라나시)에 이르렀다. 이 성의 10리 정도되는 곳에 녹원정사가 있다. 이 원에는 원래 벽지불(?支佛)이 주하고 계셨으며 항상 들 사슴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중략) 세존께서 성도하시자 후인들이 이곳에 정사를 세웠다.

6년의 고행 끝에 위없는 깨달음을 얻은 고타마 붓다는 한동안 보드가야에 머물며 자신이 얻은 깨달음의 실체를 확인하고는 그 요체를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지 말지 망설였다. 그러나 혼자만이 깨달은 것을 자족해야 하는, ‘독각(獨覺- 프라티에카 붓다) 은 의미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 고타마 붓다는 마침내 무명(無明)에 빠져 있는 중생들에게 빛을 나누어주자고 마음을 정했다. 그리고 그 첫 상대자로 그와 같이 오랫동안 고행을 함께 하였던 다섯 비구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천안통(天眼通)으로 그들이 아직도 미욱한 고행을 하고 있는 것을 알아내고는 보드가야를 출발하여 그들을 찾아 바라나시로 향하였다.

한편 구도를 위한 처절한 고행을 감내하던 고타마 사문을 마치 스승처럼 존경하며 함께 수행하던 콘단나(Kondanna) 등의 다섯 수행자들은 고타마가 고행을 포기하고 어떤 여인에게서 우유죽을 얻어 마시는 것을 보고는 실망하고 그의 곁을 떠나 녹야원에서 독자적으로 수행을 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타락했다고 생각했던 옛 도반(道伴)인 고타마 사문이 자신들을 찾아온다는 것을 전해 듣고는 장시간 의논 끝에 옛 친구가 와도 일어나 인사하거나 말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그것은 일종의 모욕적인 무시였다. 그러나 250km나 되는 먼 길을 걸어서 찾아 온 옛 도반의 당당한 태도와 달라진 분위기에 그들은 일어나서 인사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이어서 앉을 자리를 권하였다고 한다.

붓다가 된 고타마는 이들에게, 이후 45년이나 계속된 설법자로서의 일생의, 첫 말문을 열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의혹과 미망 속에서 살고 있는 중생들의 삶은 고통-[]일 뿐이다. 이 괴로움은 부질없는 집착-[]에서 생긴다. 이런 허망한 집착을 극복한 상태가 열반-[]인데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덟 가지 실천적 생활태도인 팔정도(八正度)를 실천해야 한다-[]

옛 도반들의 수행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깨달음과 극심한 고행은 별개의 것이라고 지적한다.

삶을 고통이외의 다른 것으로 생각하는 환상에 젖어 살아가는 사람의 나날은 욕망과 집착에 사로잡혀 근심과 슬픔만을 더할 뿐 참된 자유를 찾을 수는 없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 극단적인 고행 위주의 수행만으로도 자유를 찾을 수는 없다. 다만 치우치거나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는 중도(中道)의 도()’를 통해서 만 대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위의 설법은 바로 사성제(四聖帝)‘중도법(中道法)’라고 부르는 것으로 ‘12인연법(十二因緣法)’과 더불어 불교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 이론이다.

이에 처음에는 수긍하지 않았던 다섯 비구들은 고타마 사문의 자신 있는 태도와 명쾌한 논리 그리고 온 몸에서 풍겨 나오는 상서로운 기운에 감화되어 마음의 빗장을 풀고 주의 깊게 듣고는 수행방법을 바꾸기로 마음을 먹게 되어 그들 역시 후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초전법륜지(初轉法輪地)라는 수식어가 앞서는 사르나트,

이 유서깊은 성적(聖跡)은 바라나시에서 북쪽으로 약 8km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지난날 부처님의 행적을 따라 답사했던 법현의 기록으로 짐작해 본다면,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은 후에 보드가야를 떠나 라지기르, 나란다, 파트나, 바라나시의 순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이곳 사르나트로 왔다.

바라나시에서 사르나트로 가는 길은 이른 아침 자전거 릭샤(人力車)가 격에 맞는다. 어슴 새벽부터 저녁 늦도록 언제나 사람들이 북적대는 바라나시 역사를 떠나 철교 하나를 건너면, '인환의 거리' 바라나시를 빠져나오면, 전혀 다른 세계가 된다. 노변에 늘어선 해묵은 가로수가 싱그럽고, 촉촉해진 마당을 비질하는 농가의 아낙들이 푸근하다. 노변 구멍가게에서 흘러나오는 라가(raga)의 선율, 시타르(sitar)와 타불라(tabula)의 경쾌한 어울림은, 늦가을 날씨처럼 알싸한 사르나트의 아침을 더욱 상쾌하게 만든다.







가는 길에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유적은 차우칸디 스투파(Chaukhandi stupa, 迎佛塔)이다. 초전법륜지 조금 못미처 길 왼편에 있으며, 대개는 일단 유적지로 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들르게 되는 곳이다. 이 스투파는 부처님이 다섯 비구를 재회한 사건을 기념하여 굽타왕조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당시에는 높이 3백여 척에 달하는 웅장한 규모였다고 한다. 현재의 팔각 기둥 형태로 올려진 건물은 1588년 무갈 제국의 악바르(Akbar) 황제가 세운 것으로, 부왕 후마윤(Humayun)의 방문을 기리는 것이라 한다. 계단을 따라 탑 위로 오르면 사르나트 마을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 스투파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초전법륜지가 있다. 입구 오른편에 단층 석조 건물의 사르나트 고고학 박물관이 있으며, 이곳에는 유적지에서 발굴된 수많은 불교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박물관은 특히 초전법륜상으로 유명한 곳이다. 설법인을 맺은 결가부좌의 이 불상은 굽타왕조 시대의 불상 가운데서 최고 걸작의 하나인 동시에 인도 조각 예술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힌다. 회백색 사암에 새겨진 심원한 표정이 오묘하다. 그 외에도 연화대 관음보살 입상, 미륵보살 입상, 자타카 이야기를 새긴 부조 등 많은 불교 걸작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갤러리 입구에 버티고 선 아쇼카 왕 석주 머리 부분의 사자 장식 또한 이 박물관의 명물이다. 온화하면서도 위엄어린 이 석사자 상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생생하다. 아쇼카 왕 당시의 간소함이 차츰 화려한 꾸밈으로 바뀌면서, 이에 따라 정신적인 긴장감도 사라져 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유적지 안으로 들어서면, 우선 다메크(Dhamekh) 스투파로 눈길이 간다. 오른편 먼발치에 당당한 자태로 우뚝 솟은 이 거대한 스투파는 오늘날 사르나트의 상징처럼 초전법륜지를 지키고 서 있다. 이 스투파는 부처님이 다섯 비구에게 처음으로 설법한 곳을 기념하여 아쇼카 왕이 조성한 것이라고 하나 그 내력은 확실치 않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굽타왕조 시대에 증축된 것으로, 기단부 외벽을 장식하고 있는 기하학적 문양이 특히 인상적이다.


유적지 입구 정면 가까이에 있는 다르마라지카(Dharmarajika) 스투파 터는 뒷전이고, 입구에서부터 눈길이 자꾸 다메크 스투파로 가는 것은, 보이는 물상에 대한 우선을 물리치지 못하는 답사자의 한계다. 지금의 다르마라지카 스투파 터는 둥그렇게 적벽돌을 쌓고 그 안에 붉은 흙을 채운 품이 흡사 씨름장 같지만, 현장이 이곳을 찾았을 때는 이 터에 백척이 넘는 웅대한 스투파가 있었으며, 그 앞에는 칠십여 척 높이의 석주가 서 있었다고 하니 실로 격세지감이 있다. 터만 남은 이 다르마라지카 스투파는 부처님의 사리를 담고 있었으니, 의미로 친다면 다메크 스투파에 결코 밑가지 않는다 할 것이다.


유적지 한 가운데 있는 사원 터는 서기 2세기 경의 것으로 입구가 동쪽으로 향해 있으며, 이곳으로 향하는 길 양편으로는 여러 기의 작은 스투파들이 있다. 이 사원의 벽은 아랫 부분에 석재를, 그리고 윗 부분에는 적벽돌을 사용하여 쌓아 올려 독특한 양식을 보이고 있으며, 내부의 벽에는 불상을 안치했던 흔적도 있다.

이 사원의 서쪽에 있는 아쇼카 왕 석주도 의미 깊은 유적이다. 원래는 부처님이 다섯 비구들에게 처음으로 법을 설했던 곳에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로서는 그 정확한 위치를 가늠할 수 없다고 한다. 비록 머리 부분은 박물관에서 맡겨 두고 부러진 몸 몇 토막을 겨우 유지하고 섰지만, 회백색 사암의 매끈한 표면은 서늘한 생기를 내뿜는 듯하다. 석주 표면에 브라흐미 문자로 새겨진 '파화합(破和合)'에 관한 아쇼카 왕의 금계(禁戒)는 당시 승단의 분열 조짐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쇼카 왕 석주를 지나 유적지 북쪽에 있는 세 곳 승원터를 둘러본 후에, 이곳 아이들이 파는 야채 한 광주리를 사 들고 사슴 동산으로 가면, 사르나트 유적지의 답사는 대개 끝나는 셈이다. 돌아나오는 길에 이 주변에 있는 스리랑카 사원을 비롯한 동남아 제국의 사원들을 둘러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사슴 동산 뒷편에는 최근에 조성된 한국절이 있다.

붓다가 처음 설법을 행한 Dhamekh Stupa

Archaeological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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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