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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03 1933년 '여자 안중근' 조선女人 남자현
- 2014.09.03 1950년 12월 흥남부두
- 2014.09.03 맥아더의 오판 - 진격과 후퇴
- 2014.09.03 1945 철수하는 일본인들
http://m.nocutnews.co.kr/news/4031248
조선女人 남자현 "총독은 내가 처단하겠다"
2014-05-27 10:39CBS노컷뉴스 임기상 선임기자
[임기상의 역사산책 34]'여자 안중근' 남자현, 조선독립을 위해 총을 들다
◈ 61세의 여인 '남자현', 만주국의 실세 '부토 노부유시' 처단에 나서다
일제가 조선에 이어 만주를 침공한 후 2년 후인 1933년 2월 27일 오후 3시 45분.
하얼빈의 도의정양가 거리에 '삐이이익~' 바람을 가르는 호각소리가 들렸다.
급박하게 뛰어가는 발소리 뒤로 일제 경찰 10여 명이 추격하고 있었다.
골목을 돌아서자 반대편에서 5, 6명의 경찰이 나타나 총을 발사했다.
권총을 든 남루한 행색의 인물이 쓰러졌다.
모자를 벗기니 나이 든 여자였다.
쌍꺼풀 없는 강인한 얼굴의 조선 여인 남자현이다.
그녀의 품에선 비수 하나가 숨겨져 있었고, 옷 속에는 피 묻은 군복을 껴입고 있었다.
그 옷은 오래 전 남편이 의병운동을 하다 전사할 때 입었던 것을 그대로 걸친 것이다.
"야~ 거지할멈~ 남자현, 61세…당신 맞지?"
그해 1월 초.
남자현은 부하 정춘봉과 상의해 만주의 일제 최고 실세 '부토 노부유시' 전권대사를 사살하기로 했다.
두달 후 3월 1일에 신경에서 열리는 만주국 수립 1주년 행사 때 권총과 폭탄을 이용해 노부유시 일당을 몰살하기로 했다.
남자현이 단호히 말했다.
"이 일은 내가 처리한다. 나 이제 죽어도 아무런 여한이 없는 나이이니 두려움이 없다. 노부유시를 처단한 뒤 내 몸을 하얼빈 허공에 어육으로 날리리라"
그러나 미리 접선한 중국인들로부터 권총과 폭탄이 든 과일상자를 받으러 갔다가 정보를 탐지한 일본 경찰에게 검거된 것이다.
◈ "사이토 조선총독을 사살하겠다"
남자현이 하얼빈에서 붙잡히기 7년전인 1926년 4월 만주의 길림.
남자현은 박청산, 이청수, 김문거 등과 함께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사이토는 어떤 인물인가?
그는 이른바 '문화통치'를 내세우면서 '교육시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역사와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들어라. 민족 혼과 민족 문화를 잃게 하고, 조상의 무위, 무능, 악행을 들춰내어 가르쳐라. 그리고는 일본 인물, 일본 문화를 가르치면 동화의 효과가 클 것이다"
한 마디로 조선인의 정신을 노예화한다는 시책이다.
남자현은 이 자를 처단해 조선의 독립 의지를 만방에 알리기로 하고, 박청산, 이청수와 함께 경성으로 잠입했다.
권총과 폭탄은 동지 김문거로부터 미리 전달받았다.
이들이 거사 시기를 엿보던 시기인 1926년 4월 26일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승하했다.
세 사람은 사이토 총독을 비롯한 총독부 고관들이 조문을 하기 위해 빈소가 차려진 창덕궁을 찾을 것으로 보고 기회를 노렸다.
4월 27일 남자현이 창덕궁 일대를 답사하던 중 갑자기 호각소리와 함께 구둣발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일본 경찰들이 혜화동 일대에 깔리고 가가호호 수색을 하고 있었다.
세 사람은 서둘러 인근 교회 건물로 숨어 들었다.
어찌된 일일까?
알고 보니 남자현 팀외에도 사이토 총독의 목숨을 노리는 인물이 있었다.
일본인 가게에서 일하던 송학선이란 청년이 칼을 품고 창덕궁 입구에서 기다리다
조문을 하고 나오는 일본인 3명에게 휘두른 것이다.
그는 추격하던 조선인 순사마저 찌르고 도주하다 일본 경찰과 격투를 벌인 끝에 붙잡혔다.
이 사건으로 경성이 발칵 뒤집혀 총독 경호도 강화되고, 검거 작업이 대대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거사 실행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세 사람은 만주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뿔뿔히 흩어졌다.
조선총독 암살에 실패한 남자현은 이번에는 만주를 무대로 일본 고관을 처단하려다 결국 검거된 것이다.
◈ 고문과 단식 투쟁…"너희 일본놈들이 주는 밥은 먹지 않는다"
남자현은 하얼빈 주재 일본영사관에 설치된 감옥으로 끌려갔다.
거기에서 잔혹한 고문과 추궁에 시달리면서 봄과 여름을 보냈다.
8월 6일부터 그녀는 단식 투쟁에 들어갔다.
밥이 들어오면 냅다 던지면서 "이제 너희들이 주는 밥은 먹지 않는다"고 외쳤다.
이후 11일이 지나자 남자현은 사경을 헤매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일본 경찰은 서둘러 병보석으로 석방했다.
아들 김성삼과 손자 김시련이 서둘러 달려왔다.
임종 직전 남자현은 아들과 손주에게 감춰둔 행낭을 갖고 오라고 했다.
거기에서 249원 80전을 꺼냈다.
"이 돈 중에서 200원은 조선이 독립하는 날 정부에 독립축하금으로 바쳐라. 그리고 손자 시련을 대학까지 공부시켜서 내 뜻을 알게 하라. 남은 돈 49원 80전의 절반은 손자의 학자금으로 쓰고, 나머지는 친정에 있는 종손을 찾아 공부시켜라"
그녀는 다음날 낮, 풀려난 후 닷새만에 순국했다.
남자현의 유언은 다 지켜졌다.
손자인 김시련은 하얼빈 농대를 졸업하고 교직에 몸을 담았다.
아들 김성삼은 외가 집에서 어머니의 친정오빠의 손자이자 종손인 남재각을 찾아 만주로 데려와 사범학교에 보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3.1절 기념식에서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이승만과 김구 등 독립투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남자현의 유언대로 독립축하금 200원을 임시정부 요인 조용원에게 전달했다.
◈ 뒤늦게 나온 순국 기사…조선인들의 가슴을 뛰게 하다
일본의 보도통제가 풀리자, 순국 5일 후 국내 신문들은 일제히 '부토 모살범'이란 제목으로 그녀의 순국을 알렸다.
1933년 8월 27일자 조선중앙일보는 이렇게 보도했다.
"30년간 만주를 유일한 무대로 조선OO운동에 종사하던 남자현(여자)은 감옥에 구금됐다가 단식 9일 만인(기간이 이틀 줄어 있다) 지난 17일 보석 출옥했다. 연일 단식을 계속한 결과 22일 상오(하오 12시반경)에 당지 조선여관에서 영면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누구보다도 남자현의 고향인 경북 영양군민들의 아픔과 충격이 컸다.
그녀가 1895년 1차 의병투쟁에서 남편을 잃고 혼자서 유복자와 시어머니를 모시던 일이며, 이로 인해 효부상을 받았던 일이며, 아들이 24살로 장성하고 3.1운동이 발생하자 모든 것을 떨치고 나라를 찾는다고 만주로 떠난 일을 풍문으로 다 들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인 1946년 8월 22일에 남자현 의사를 기리는 추념회가 열렸다.
이어 1962년 3월 1일 서울운동장에서 윤보선 대통령은 남자현에게 독립유공자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수여했다.
모두 58명이 복장을 받았으며, 여자로는 남자현이 유일했다.
고향의 생가에는 추모각과 추모비가 세워졌다.
남자현 의사의 일생을 추적해 <나는 조선의 총구다> (세창미디어)란 제목의 저서를 펴낸 이상국 시인은 "왜 이토록 역사는 남자현을 지워버렸는가"라는 글을 통해 이렇게 평가했다.
"그녀의 삶이 던져주는 강렬한 메시지는 마흔이 된 나이에 문득 '아녀자'의 질곡을 벗어버리고, 죽음을 불사한 투쟁에 뛰어든 것에 있다. 저 흑백사진 속의 남자현이 그토록 뚫어지게 우리를 바라보는 이유는, 시대를 관통하는 진실을 전하려는 그녀의 의욕이 아닐까? 그녀가 죽은 이후에도 얼마나 많은 지식인들과 리더들이 변절하고 말을 바꿨던가…
그녀는 식민지의 여성으로서 가장 자기초월적인 생을 걸었다"
https://ko.wikipedia.org/wiki/%EB%82%A8%EC%9E%90%ED%9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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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구출하라"… 빅토리호
2014-05-15 10:47CBS노컷뉴스 임기상 선임기자
[임기상의 역사산책 28]지옥 같은 흥남부두에서 내린 지시 "다 태워라"
◈ 청천강 전선에 이어 함경도에서도 유엔군 후퇴하다
청천강 전선에서 중공군의 기습 공격을 받은 유엔군이 38선으로 후퇴했다.
이어 원산마저 점령당하자 함경도에 흩어져 있던 미 10군단과 국군 1군단은 고립됐다.
결국 도쿄에 있던 맥아더 사령부는 전면 철수를 지시했다.
이를 위해 흥남 앞바다에 항공모함 7척과 전함 1척, 순양함 2척, 구축함 7척, 로켓함 3척이 배치됐다.
이들이 퍼부어대는 엄청난 화망이 쫓아오는 중공군의 접근을 막았다.
이때 발사한 포탄이 인천상륙작전 때보다 70% 더 많았다.
12월 12일 미 해병1사단을 시작으로 철수작전이 시작됐다.
작전에 가장 큰 어려움은 접근하는 중공군이 아니었다.
바로 피난민 문제였다.
평양철수 때도 그랬지만 여기서도 20만 명에 달하는 피난민들이 몰려와 배에 태워달라고 애원했다.
알몬드 10군단장은 처음에는 3천 명 정도 철수시킨다는 방침을 세웠지만, 큰 반발에 부딪혔다.
10군단의 민사부 고문으로 있던 현봉학 박사가 피난민을 구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 미군 수뇌부를 설득했다.
이어 국군 수뇌부도 "우리도 배를 타지 않고 피난민을 엄호하면서 걸어서 후퇴하겠다"고 버텼다.
결국 알몬드 장군이 방침을 바꿨다.
모두 구출하라"
피난민들의 전면 철수가 결정되자, 남한과 일본에서 수송선과 상륙정이 징발되어 흥남 앞바다로 모였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징발된 것이 아니고, 화물을 싣고 왔다가 자진해서 합류한 것이다.
"우리 앞에 홀연히 배 하나가 나타났다.
그냥 배가 아니라 내게는 갑판의 끝이 하늘에 닿아 있는 듯 했던 너무도 커다란 배였다.
사람들이 그리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보았다.
그때 하늘로 솟은 그 배의 높은 난간에서 홀연히 풀어져 내려오던 사다리를…
사람들이 그 사다리를 타고 배에 오르기 시작했다.
아~아~ 성서에 나오는 야곱이 보았다는, 하늘로 오르는 통로.
천사들이 오르내리던 사다리가 그것보다 황홀했을까?"
(공지영 장편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에서)
건조한 지 5년이 된 7,800t급 미국 국적의 화물선이었다.
일본 요코하마에서 해병대 항공단에 공급할 제트연료 10만톤을 싣고 흥남에 내려놓을 계획이었다.
레너드 나루 선장은 쌍안경으로 부두를 살펴보다 깜짝 놀랐다.
북한 피난민들이 부두에 떼를 지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수레로 나르거나 들것, 혹은 끌고 다닐 수 있는 것은 모두 갖고 나왔습니다.
그들의 옆에는 놀란 병아리처럼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그 뒤에는 그들을 죽이려는 적군이 있었고, 앞에는 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라루 선장은 지금은 제트연료를 하역할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선원 10명에게 지시를 내렸다.
"사람을 태우십시요.
타고자 하는 사람 모두를요.
전부 다 태우세요"
◈ 정원 12명의 화물선에 피난민 14,000명이 승선하다
차고 강한 바람이 불더니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로버트 러니 상급선원의 회고다.
"그들은 마치 지옥의 구덩이에서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를 발견한 사람들 같았다.
피난민들은 사다리를 타고 배로 기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보따리를 이고 아이를 업고 있었다.
갑판에 올라오면 차례 차례 지하 5층으로 내려갔다.
그러면 뚜껑을 닫았다.
이어 지하 4층으로, 이어 3층으로…
거기에는 화장실도 없고, 불빛도, 먹을 것도, 물도 없었다"
승선은 밤새도록 진행되어 다음 날 동이 트고 정오가 될 때까지 계속됐다.
군함은 계속 포를 쏘아대고 함재기는 연신 날라와 흥남 외곽 저지선 건너편을 폭격했다.
배는 남쪽으로 사흘간 항해했다.
피난민들은 어둠 속에서 물 한 잔 못 마시고 버텼다.
그 와중에 아기 5명이 차례차례 태어났다.
산모들을 위해 선원실 세 개를 비우고 잠자리를 마련했다.
거제도에 도착했을 때 피난민 사망자는 한 명도 없었고, 머릿수는 5명이 늘었다.
배가 도착하자 거제도 주민들이 일제히 몰려와 준비한 물과 주먹밥을 나눠 주었다.
전쟁이 끝나고 수도원 수사가 된 라루 선장은 이렇게 신앙고백을 했다.
"저는 때때로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그 작은 배가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을 태우고 어떻게 한 사람도 잃지 않고 그 많은 위험을 극복했는지를…
그해 크리스마스에 한국의 검은 바다 위에서 하나님의 손길이 제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는 메시지가 저에게 전해옵니다"
이렇게 해서 약 9만 8,000명의 북한 주민들이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 수도원 수사가 된 레너드 라루 선장
14,000명의 생명을 구한 라루 선장은 이 사건을 계기로 고통받고 있는 한국인을 위해 기도하겠다며 '마리너스'라는 이름으로 베네딕토회 수사가 되었다.
그는 평생을 미국 뉴저지의 뉴턴 수도원 성물가게에서 일하다 2001년 서거했다.
지금은 왜관수도원의 수사들이 이 곳에 파견되어 수도활동을 하고 있다.
젊은 선장은 한국인들을 구했고, 젊은 한국인들은 문을 닫을 뻔 했던 선장의 수도원을 살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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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nocutnews.co.kr/news/list?c1=262&t2=1343&page=6
[임기상의 역사산책 27]"정신없이 후퇴했다" VS "지쳐서 못 쫒아갔다"
맥아더의 오판이 부른 참사…청천강 전선 붕괴되다
2014-05-13 11:20CBS노컷뉴스 임기상 선임기자
http://m.nocutnews.co.kr/news/4022815
◈ 가장 먼저 압록강에 도착한 국군 6사단 7연대, 포위망에 걸리다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전세를 뒤집은 유엔군은 평양 마저 쉽게 점령하자 자만에 빠졌다.
이미 중공의 주은래 총리가 38선을 넘으면 참전하겠다고 경고했으나 이를 무시했다.
미 육군은 한국에 투입한 2사단을 유럽에 배치할 궁리를 하고 있었고, 미 8군의 워커 사령관은 탄약 공급을 줄여 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이런 분위기에 휩싸여 모든 부대가 제각기 중국과와의 국경을 향해 레이스를 펼쳤다.
그 선두는 국군 6사단이었다.
마침내 7연대가 1950년 10월 26일 오후 2시 15분에 압록강에 진출했다.
만세를 부른 국군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낼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았다.
이때 사단본부에서 연락이 왔다.
"포위됐으니 무조건 철수하라"
이 시간에 뒤를 따르던 제 2연대가 퇴로를 차단당한 후 순식간에 무너져버렸다.
포위망에 갇힌 7연대는 형체도 없이 조각 조각난 후 제각기 뿔뿔이 흩어졌다.
국군 6사단이 위기에 봉착한 순간, 그 왼쪽에서 북진하고 있던 국군 1사단도 맹공격을 받고 전진을 멈췄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8군사령부는 제 1기병사단에게 국군을 추월해 선두에 서라고 지시했다.
중공군은 이미 우측의 한국군을 관통한 후 우회해 1기병사단의 퇴로를 차단한 상태였다.
기병사단은 서둘러 철수했으나 가장 앞에 행군하던 3대대는 포위망에 갇혔다.
결국 3대대 구출을 포기하고 청천강 남쪽으로 철수했다.
미 육군 역사상 대대 전체를 포기하고 철수한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이것이 이른바 중공군의 '1차 전역'이다.
어떻게 해서 이런 참사가 발생한 건가?
◈ 자만에 빠진 미국 수뇌부, 중국의 참전 의지와 실력을 얕보다
중공군의 공세가 시작되기 열흘 전의 하와이 서쪽에 있는 웨이크섬.
군 통수권자인 트루먼 대통령이 휘하의 사령관을 만나러 멀리 워싱턴에서 날아왔다.
기이한 회담이다.
그만큼 전쟁 영웅 맥아더의 위상은 하늘을 찔렀다.
의례적인 덕담을 나눈 다음 트루먼이 맥아더에게 물었다.
"중국이 개입할 가능성은 얼마나 된다고 보십니까?"
"가능성은 아주 적습니다.
압록강을 넘을 수 있는 병력은 5~6만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공군도 없습니다.
중국이 남하해 평양으로 진격한다면 우리 공군의 폭격으로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할 겁니다"
이 시각에 만주에서는 유엔군을 박살내기 위해 선발대 25만명이 압록강변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 대일전과 내전에서 단련된 중공군, 명장의 지휘 아래 압록강을 건너다
1950년 10월 19일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했다.
바로 이날 밤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이들은 청천강 북쪽 산악지대에 조직적으로 흩어져 미군과 한국군이 깊숙히 진격해 자루 안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이들을 지휘하는 장군은 일본군과 장개석 군대와 전투를 치루면서 용맹을 떨친 중공군의 최고 전략가인 펑더화이였다.
그가 마오 주석으로부터 받은 지침은 하나였다.
"허약한 국군을 섬멸한 후 우회해 미 8군의 퇴로를 차단한 다음 포위 공격을 한다"
◈ 1950년 11월 말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공세> VS 중공군의 <2차 전역>
첫 전투에서 한국군 8사단과 미군 제1기병사단에게 궤멸적 타격을 가한 중공군은 일주일만에 홀연히 사라졌다.
이들은 북한을 떠난 것이 아니었다.
산속 깊숙히 들어가 유엔군이 더 큰 덫에 걸려들기만을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 미끼를 맥아더 사령부가 덥석 물고 말았다.
당시 30만 명에 달하는 중공군이 들키지 않고 한반도에 들어와 대략 18만 명이 청천강 북쪽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동쪽에서는 12만 명이 개마고원으로 진군하는 미 10군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밤마다 조용히 이동하는 거대한 중공군은 '그림자가 없는 유령'으로 불렸다.
중공군이 사라지자 맥아더는 대통령에게 밝힌 자기의 판단이 옳다고 믿었다.
맥아더는 장병들에게 '크리스마스까지는 고향에 돌아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순간에 펑더화이는 유엔군이 공격해 들어오면 깊숙히 유인한 후 국군을 먼저 격멸하고 미군의 후방에 파고 들어 타격을 입히기로 했다.
이어 공세를 강화해 유엔군을 평양-원산 선까지 밀어버린다는 대담한 계획을 세웠다.
드디어 11월 24일 오전 10시 청천강 북쪽에서 유엔군이 공세를 시작했다.
자루 입구를 지나 그 안으로 유엔군이 꾸역 꾸역 밀고 들어왔다.
다음날 대규모의 중공군이 사방팔방에서 공격을 개시하며 자루의 끈을 묶어 버렸다.
이번에도 주 목표는 가장 오른쪽에서 북진하는 국군 2군단이었다.
2군단은 배후가 봉쇄되자 일거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 틈을 타서 중공군은 미 8군의 퇴로인 덕천과 맹산 일대로 파고 들어 8군 전체가 위기에 빠졌다.
◈ 미 제2사단, 군우리의 '죽음의 계곡'에서 전멸하다
결국 유엔군 지휘부는 공세 나흘만인 11월 28일 철수명령을 내렸다.
청천강 상류에 있던 미 제2사단도 남쪽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카이저 사단장은 정찰대를 남쪽 순천으로 이어지는 길로 보내 상황을 보고하도록 했다.
양쪽 산 위에 포진해 있던 중공군은 정찰대를 그대로 보냈다.
2사단 본진이 오기만을 기다린 것이다.
덫이 놓인 것을 전혀 모른 채 9연대, 사단본부, 포병과 지원부대, 38연대, 국군 3연대, 국군 23연대가 들어왔다.
이들이 험준한 계곡으로 이어진 '죽음의 계곡'에 들어서자 10Km에 걸쳐 중공군의 집중적인 사격과 수류탄 공격이 이어졌다.
미군 사단 하나가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누구 하나 적에게 총을 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황 상태에 빠진 2사단 장병들은 충격 때문에 제 정신이 아니었다.
이 전투로 미 2사단은 3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모든 장비를 잃어 부대가 사라져버렸다.
그나마 이 정도 피해로 그친 것은 중공군에게 중화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 무질서한 퇴각...중공군 "적군이 사라졌다"
2사단이 궤멸되자 유엔군 전체가 두려움에 휩싸였다.
적에 대한 두려움은 그 어떤 바이러스보다 치명적이다.
지휘관들까지 정신이 나갔다.
전열을 수습해 지형상 폭이 좁은 평양-양덕-원산을 잇는 저지선을 만들었어야 했다.
'퇴각 명령'이 떨어지자 모든 전선에서 무질서한 후퇴가 진행됐다.
다들 평양도 버리고 임진강 남쪽으로 달려갔다.
불과 20일만에 200km 떨어진 38선까지 단숨에 뛰어갔다.
그 뒤를 쫒는 중공군은 적군을 만나지 못했다.
차량이 없어 기동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중공군은 당연히 유엔군이 평양-원산을 잇는 선에서 저항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적군은 사라져 버렸다.
추격을 하고 싶어도 중공군은 너무 지쳐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이렇게 해서 통일의 꿈은 멀어져갔다.
그러나 동부전선인 함경도에서 다른 양상의 전투가 벌어지고, 맥아더 대신 새로운 지휘관이 부임하면서 전쟁의 모습은 바뀌게 된다.
The Battle of Chosin, 血战长津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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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유순했던 조선인들이 포악해졌을까?"…반성 없는 日本
2014-05-07 14:14CBS노컷뉴스 임기상 선임기자
[임기상의 역사산책24]패전 직후에 고관대작들은 재산 빼돌리기에 '혈안'
http://m.nocutnews.co.kr/news/4019564
◈ 8.15 패전 후 혼란에 빠진 조선의 일본인들
1945년 8월 15일 천황의 항복방송이 나오자 조선에 사는 일본인들은 충격에 빠졌다.
이들 앞에는 모든 특권 박탈과 함께 본토 귀환과 정착이라는 고달픈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부산지방교통국장 다나베 다몬에게 희안한 지시가 떨어졌다.
당장 일본 본토로 갈 수 있는 배를 확보하라는 상부의 명령이다.
알고 보니 아베 조선총독 부인 일행이 탈 배가 시급히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틀 후 '사모님' 일행과 짐을 실은 배가 부산 앞바다를 출발했다.
그러나 이 배는 얼마 못가서 목도 앞바다에서 멈춰선 후 점차 기울기 시작했다.
배도 낡았지만 조선에서 약탈한 귀중품을 너무 많이 실어 가라앉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짐을 절반 정도 버리고 간신히 부산으로 돌아와 쉬쉬하면서 경성으로 몰래 잠입했다.
이렇게 조선총독 부부를 시작으로 한반도를 호령하던 모든 고관대작들은 재산 빼돌리기 광풍에 휘말렸다.
◈ 아래 것들을 버려둔 채 대일본제국의 지도자들 가족 데리고 일제히 도주
군경 상층부를 비롯한 고위 관료와 대기업 간부들이 제일 먼저 탈주에 나섰다.
가장 발빠르게 움직인 것은 소련군이 침공해 들어온 만주와 북조선의 일본군 수뇌부였다.
이들은 재빨리 열차를 동원해 가족들을 피신시켰다.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처럼 100만명에 달하는 일본 민간인들에게는 대피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이들 민간인들은 소련에 끌려가거나 재산을 다 빼앗긴 채 걸어서 거지꼴로 북조선을 거쳐 남쪽으로 내려왔다.
남은 일본인들은 대부분 부녀자와 아이들이었다.
남편은 군대에 끌려가 소식이 두절됐기에 여자들이 짐과 아이를 끌고 하염없는 귀향길에 나선 것이다.
일본에 도착한 여자들은 제일 먼저 이재민 병원에 수용돼 성병 치료와 강제 낙태수술을 받았다.
이들이 당한 고초를 일본 정부가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천황 사진과 신사의 위패를 불태워라"
일본이 항복하자 전국적으로 경찰서와 주재소,행정관서가 습격을 받았고, 특히 '왜적 우상의 복마전'인 신사가 집중적인 공격 대상이 되었다.
다급해진 총독부는 전국 관공서에 걸어둔 천황 사진과 신사의 위패를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자기들이 가장 신성시하는 분과 성소를 '불경한' 조선인들이 파괴하는 것을 두 눈 뜨고 보기 싫었던 것이다.
조선인 군중들이 몰려다니자 일본인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다들 조선인들을 집단으로 보는 건 처음 겪는 일이고, 자기들에게 무슨 죄가 있는지를 전혀 모르기 때문이었다.
모두들 물었다.
"왜 유순했던 조선인들이 이렇게 포악한 행동을 할까?"
조선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원래 살던 조선인들을 변두리로 몰아내고, 도시 중심가에 일본인촌을 만들었다.
그 안에는 철도역과 학교, 병원, 관공서, 백화점 등 없는 게 없었다.
해방이 되자 처지가 역전됐다.
직장과 집에서 쫒겨난 일본인들은 집단수용소에서 거지꼴로 살면서 소련군 집의 식모나 목욕탕 때밀이, 행상으로 전락해버렸다.
천신만고 끝에 일본으로 돌아간 그들은 거기서도 차별대우를 받게 되자, 조선에 대해 이를 갈게 된다.
조선에 대한 침략과 수탈은 잊어먹고 패전 후 당한 고통만 곰씹고 있는 셈이다.
◈ 너무나 달랐던 소련군과 미군
소련군의 행색을 처음 본 일본인들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당시 한 일본인의 목격담이다.
"마차를 앞세운 긴 행렬이 이어졌다. 이들은 만도린처럼 생긴 장총을 어깨에 걸어 축 늘어뜨린 것이 마치 '유목민' 같았다. 후미에는 산양이나 닭까지 매달고 왔다. 마차 위에는 부뚜막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개고기는 역시 누렁이가 최고라며, 길에 나다니는 개만 보이면 어김없이 총을 쏘아 잡으며 행군을 계속했다"
이들은 무기와 탄약을 제외하고는 모두 현지에서 조달했다.
소련군은 북조선에 들어오자마자 모든 일본인을 억류했다.
한편으로는 폭행과 약탈을 하고, 한편으로는 공장을 뜯어가고, 일본군과 기술자들은 죄다 시베리아로 끌고 갔다.
당연히 첫 타겟은 남편없이 혼자 사는 일본인 부녀자였다.
이때부터 일본인들의 집단 대탈주가 시작된다.
미군은 달랐다,
춘천에 주둔한 500~600명 규모의 미군을 본 일본인들은 크게 놀랐다.
모두 최신식 무기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골에 주둔하면서도 침구와 식량, 심지어는 본국에서 보낸 생수까지 휴대하고 있었다.
다들 한숨을 쉬었다.
"이런 나라를 상대로 4년간 전쟁을 벌였다니...."
◈ 혼란에 빠진 만주군...일본인 장교들을 처단하다
일본이 패망하자 그 꼭두각시 나라 '만주국'의 부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일본인 장교들이 살해되거나 무장해제된 후 연금되었다.
어느 부대나 장교는 일본인이었고, 하사관 이하는 모두 중국인이었다.
이들 중국인 장병들이 작당해서 일본계 장교를 곳곳에서 사살했다.
만주국 군인들은 각기 국부군이나 공산당에 들어가 서로 총부리를 겨눈다.
◈ 해방의 혼란 통에 흩어지는 귀중한 문화재들
갑자기 일본이 패망하자 망연자실한 건 조선의 문화재를 약탈했던 일본인들이었다.
어떤 자들은 금붙이 패물과 약탈한 문화재를 어떻게 하든지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광분했다.
그러나 미 군정청이 갖고 나갈 수 있는 짐을 두 손에 들 수 있는 짐과 현금 1,000엔으로 제한하자 절망에 빠졌다.
그래서 총독 부인이 비밀리에 배를 구한 것이고, 대구의 오구라 같은 악명높은 수집가들은 알짜만 묶어 밀항선을 타고 도주했다.
나머지 문화재는 친한 한국인에게 헐값으로 팔려 나갔다.
위 사진은 조선철도 전무였던 시미즈가 갖고 있던 것인데, 숨겨서 갖고 나가려다 여의치 않자 한국인 친구에게 맡긴 문화재이다.
이 백자항아리는 골동가를 흘러 다니다 정치인 장택상의 컬렉션에 들어갔다.
그러다 우연히 이 보물을 본 김활란 이화여대 총장이 사들여 이화여대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군산의 대지주였던 미야자키가 갖고 있던 연적의 행방은 찾을 길이 없다.
위의 사진에 나오는 간송미술관 연적과 거의 모양은 같지만 약간 특징이 다른 걸작이었다고 한다.
미와자키가 일본으로 갈 때 모 골동품 주인에게 넘어갔다가 여러 사람 손을 거쳐 흘러다니다가 소식이 끊겼다.
이들 문화재 말고도 수많은 보물들이 한국인에 의해 일본으로 넘어가거나, 미군 소장품으로 들어간 뒤 태평양을 넘고 말았다.
이렇게 패전과 함께 110만명에 달하는 일본인 군인과 민간인들이 그들이 원래 살던 고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들은 정작 고국에서 '식민지 사람들을 착취해 호사를 누린 대륙 침략의 첨병'이란 비난을 받고 살았다.
그들은 아직도 '식민자' 또는 '지배자'가 아니라 '패전의 피해자'란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결국 일본제국의 '사생아' 집단으로 전락한 셈이다.
최근 '조선을 떠나며'(역사비평 간)란 저서를 통해 조선의 일본인을 분석한 역사학자 이연식 씨는 "일본인들이 패전 후 느낀 공포는 그 곳이 엄연히 조선인의 땅이란 사실을 간과했기 때문에 증폭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패전 후 맞이한 재앙이 일본의 조선 지배에서 비롯된 것인데도 대다수 귀환자들은 패전이란 직접적인 계기에만 매몰됐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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