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7. 29. 08:16


글의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3312216475&code=210100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은 분단 내인론을 위한 연구를 촉발

식민지 시기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한반도에서의 지주와 소작인 간의 계급적 갈등은 해방 후의 갈등을 예고하는 것이었고, 미군과 소련군이 들어오기 전에도 이미 한반도는 점화만 하면 폭발할 화약통이었다

 

이후 분단에 대한 연구는 주로 내적 요인에 집중되었고,

<남로당 연구>나 서중석의 연구는 국내에서 나온 내인론

이를 전후해 찬반탁 논쟁, 좌우합작운동, 남북협상 등에 대한 연구.

또 금기시되었던 1946년 가을의 소위 9월 총파업과 추수폭동, 4·3 항쟁이 활자화돼 나오기 시작했다.

 

정작 커밍스는 외인론에 기반을 둔 연구자였다.

그는 세계체제론에 기반을 둬 연구를 진행했다. 세계 중심부의 냉전 상황이 한반도에 내재화하였다는 주장이다. 한반도 내부 상황은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미 군정의 통치정책은 그 혁명적 힘을 주저앉혔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1945년 이후 동북아시아의 재편은 그 이전 일본 제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중심부와 주변부의 관계가 미국을 중심으로 부활하는 과정이라는 판단에 근거한 것이었다.

 

분단 외인론은 한국의 모든 역사교과서에서 공통적으로 견지하고 있는 입장이다. 또한 정치적으로 정반대 입장에 서 있는 수정주의와 뉴라이트에서 모두 수용하고 있다.

 

그 본질적인 책임의 당사자가 미국인지, 아니면 소련인지에 대한 차이만 있을 뿐 미·소 간의 냉전이 한반도에 내재화되면서 분단이 형성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물론 평가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수정주의는 분단국가 수립에 기여한 미국과 국내 보수세력을 비판하는 반면, 뉴라이트는 냉전이 내재화되는 것은 필연적과정이었기 때문에 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좌우합작운동이나 남북협상과 같은 정치인들의 노력은 무의미하거나 좌익의 전술에 이용당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내인론과 외인론에 대한 논의는 1980년대 이후 지금까지 답보상태

일부에서는 내인론과 외인론을 복합적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두 원인이 실제로 어떻게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중 어떠한 측면이 더 결정적으로 작동하고 있는가에 대한 분석은 결여돼 있다.

 

분단의 원인에 대한 연구는 먼저 비교사적 연구로

전범국이 분할점령된 유럽과는 달리 왜 아시아에서는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이 분단되었는가? 일본의 패망 이후 아시아의 다른 식민지 국가들은 바로 독립을 얻지 못했던 반면 유독 왜 한국만 곧바로 독립이 되었는가?

 

한국의 독립은 194312월의 카이로 선언을 통해서 처음 제기됐다. ‘적절한 과정을 거쳐(in due course)’라는 조건이 있었지만, 미국은 일국을 분할점령하는 유럽 방식과는 달리 제국을 분할함으로써 일본의 힘을 약화시키는 방식을 아시아에서 추구했다. 한국의 독립과 대만이 중국으로 복귀한 것은 그것을 의미했다. 소련이 일본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은 아시아에서 소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아시아의 상황은 미국이 소련의 참전을 요구하면서 급변했다. 미국은 태평양에서의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스탈린에게 참전을 요구했다. 스탈린은 만주에 대한 이권을 노리면서 일본이 항복하기 일주일 전 참전을 결정했다. 참전하자마자 소련은 만주와 한반도의 북부로 진격했다. 일본의 관동군은 예상과 달리 급격하게 무너졌다. 미국으로서는 소련의 진격을 막아야 했고, 이것이 일반명령 1호로 합의되었다. 한반도보다는 만주와 홋카이도 점령에 더 관심이 있었던 소련은 38선에서 진군을 멈추는 데 합의했다. 한반도의 분할점령은 전쟁을 빨리 끝내고자 했던 미국과 조금이라도 더 이권을 얻어내고자 했던 소련의 잔머리가 만들어낸 합작품이었던 것이다.

 

분단의 시점 문제

 

1945년의 분할점령을 곧 분단으로 보아야 하는가? ‘일반명령 1에 따라 미·소에 의한 분할점령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임시적인 조치였다. 일반명령에서는 다른 지역에서의 분할, 특히 중국·만주와 인도차이나 지역(16도선)의 분할을 규정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지역들이 모두 분단된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만 아직까지 분단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데 대한 원인을 분석

이는 분단의 원인과 해법을 동시에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분단을 극복한 다른 나라에서 외적 요인이 중요하게 작동했다면, 분단을 극복하지 못한 한국에서는 분명 외적 요인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가 한반도에서 작동하고 있다. 남북갈등뿐만 아니라 남남갈등조차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전쟁범죄자들이 제대로 처리되었던 지역과 그러지 못했던 지역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전범들이 처리된 지역에는 극우가 존재하지 않는다.

극우가 없으면 극좌도 공존이 불가능하다. 좌와 우, 중도만이 있다.

그러나 전범이 부활한 지역에서는 극우와 극좌가 적대적으로 공존하고 있다. 진정한 좌우나 중도가 힘을 얻기 어려운 구도다.

 

중국의 존재도 한국의 분단 문제를 고찰하는 데 있어서 또 다른 중요한 시사점들을 제공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미관계와는 달리 완벽한 공조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는 북·중관계 역시 분단 문제 고찰의 핵심적 내용이다.

 

지금도 한반도의 분단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국제적인 역학관계는 내부와 외부의 요인들이 서로 결합하고 있기에 70년 전과 마찬가지로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그러나 이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에 아직도, 그리고 앞으로도 연구와 논쟁은 계속되어야 한다.

 

카이로 회담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필요.

카이로 선언의 적절한 과정을 거쳐가 그것이 신탁통치를 의미하는 것인지,

38선은 언제 확정되었는지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은,

첫째로 다른 나라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없음에도, 한국은 길지 않은 선언문 속에 직접 언급되었다는 점,

둘째로 일본이 탐욕으로 차지한 영토에 대해서는 본래의 위치로 회복시킨다는 점이었다.

 

한국에 대한 언급은 장개석이 한반도에서 자신과 가까운 임시정부가 주도하는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의도와 관련이 있다. 또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식민지 시기에 계속해온 독립운동의 결과이기도 했다.

 

1945년의 시점에서 두 번째 내용은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국가들의 미래를 규정했다.

원래의 위치로 복귀시킨다는 것은 독립이 아니라 과거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복귀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 영국과 미국이 과거 식민지 지역으로 복귀했다.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이 그들의 식민지를 유지했던 것과 같은 논리였다. 이로 인해 1945년 이후 한국을 제외한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는 옛 제국주의 국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또 다른 독립전쟁이 계속됐다. 베트남 전쟁도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1945년 9월2일 도쿄만에 정박한 미 군함 미주리호에서 우메즈 요시지로 일본군 참모총장이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장제스 중화민국 총통,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 총리(왼쪽부터)는 1943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회담을 갖고 ‘카이로 선언’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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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
2015. 2. 12. 13:33

[김주성의 사진 공작소] 


각종 선거에 앞서 정치인들은 단일화를 하곤 한다. 선거에 이기기 위한 목적이지만 아름답지 못한 그 모습에 씁쓸한 뒷말을 남기곤 한다. 


http://www.hankookilbo.com/mv/c498ce51cec04ec7b13878c1194c6f24



1. 깨져서 지고 


2. 합쳤다 깨지고


3. 합쳐서 이기고


4. 합쳐도 지고


5. 아름답지 못해 지고 
























Posted by qlstnfp
2014. 9. 6. 08:53

http://m.nocutnews.co.kr/news/4038877

http://m.nocutnews.co.kr/news/4040302


"우리 친일 사학자들이 독립유공자를 심사하겠습니다"

2014-06-10 11:56CBS노컷뉴스 임기상 선임기자

[임기상의 역사산책 41]친일파 신석호, 변신에 변신을 거듭해 영화 누리다


조선을 열등민족으로 깍아내리고, 단군조선도 말살한 이마니시 류 등 일본인 학자들 틈에 이병도와 신석호 등 친일사학자 

같은 시기에 중국에서는 신채호, 박은식 선생 등 민족사학자들이 한 손에는 총을, 한 손에는 붓을 들고 우리 역사를 치열하게 쓰고 있지 않았을까? 

◈ 친일파 신석호, 이병도와 함께 독립유공자 심사에 나서다 

<장면 1> 

1948년 정부가 수립된 후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인물은 단 2명이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시영뿐이었다. 

이승만이 쫒겨나고 5.16 쿠데타가 발생한 직후인 1962년, 군사정권은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 독립유공자 선정과 표창에 나섰다. 

공적조사위원회에 참석한 김승학, 김학규, 김홍일, 오광선 등 평생을 조국 해방에 바친 독립운동가들은 깜짝 놀랐다. 

천하가 다 아는 대표적인 친일 사학자 이병도와 신석호가 떡하니 심사위원실에 앉아 있는 게 아닌가? 

분노한 어느 독립운동가가 일갈했다. 

"임자들이 독립운동에 대해 뭐 암마?" 

두 사람은 얼굴만 붉히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웃기는 것은 그 망신을 당하고도 두 사람은 계속 공적심사위원회에 기웃거렸다는 사실이다. 

다음 해에는 신석호가, 1968년에는 두 사람 다 참석하고, 1980년에는 신석호가 끈질기게 끼어들었다. 

1982년부터는 이름이 사라졌다. 

그 전해에 신석호는 사망하고, 이병도는 나이가 들어 기력이 떨어져서 불참했다고 한다. 

<장면 2> 

2004년 9월 국사편찬위원회는 친일사학자 신석호의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지' 발간 계획을 취소했다. 

위원회는 "과거사 규명 논란 등 어수선한 세상에 신석호가 '친일 논쟁'에 휘말릴 우려가 있어 논의 끝에 발간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세상이 바뀌고 있는 걸 신석호의 지인과 제자들만 모르고 있었다. 

<장면 3> 

2005년 3월 28일 고려대 총학생회 산하 일제청산위원회는 '민족 고대'를 더럽힌 학내 친일잔재 명단을 발표했다. 

학생들은 기자회견에서 "일제에 편승해 매국 매족했던 이들이 해방 후에도 호의호식하며 기득권을 누려온 역사는 충격이 아닐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보성전문학교 교장, 고려대 총장, 교우회장에 이르기까지 민족을 배신한 자들의 면면을 찾았다. 앞으로 연구 조사를 통해 대학 내 (친일) 인적 잔재와 학문적 잔재를 청산하겠다"고 강조했다. 

제자들이 민족의 혼을 좀먹은 스승들을 내치는 장면이다. 

선정된 친일파에는 신석호와 이병도를 비롯해 고원훈, 김성수, 선우순, 유진오, 이각종, 장덕수, 조용만, 최재서가 선정됐다. 

제자들이 발표한 스승 신석호의 죄상은 다음과 같다.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 수사관 등으로 활약하며 일제의 역사왜곡, 식민사관 구축에 동참, 협력했음. 
(특징) 해방 후에도 국사편찬사업에 주도적으로 참여" 

◈ 신석호, 졸업과 동시에 곧바로 조선사편수회에 합류하다 

3.1운동 직후 민족주의 사학자인 박은식 선생이 중국에서 저술한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가 국내에 유입되자 일본총독부는 당황했다. 

이에 따라 부랴부랴 준비작업을 거쳐 1925년 조선사편수회를 발족했다. 

총독부가 노린 것은 한국인이 독립할 능력이 없는 민족이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 한국사 전체를 재조직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한반도 남쪽은 일본의 식민지, 북쪽은 중국의 식민지로 출발했다는 허구를 도입했다. 

처음에는 일본인 학자들로만 출발한 조선사편수회에 경성제국대학을 갓 졸업한 식민사학자들이 한명씩 두명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바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5명, 최남선. 이능화. 이병도. 신석호. 홍희 등이 그들이다. 

신석호도 1929년 경성제국대학 사학과를 졸업하자마자 선배 이병도를 따라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갔다. 

거기서 열심히 충성을 다한 결과로 촉탁에서 시작해 1930년 수사관보, 1937년 수사관으로 착실히 승진했다. 

황국사관 학자들과 식민사학자들은 드디어 1938년 <조선사> 총 35권을 완간했다. 

이 방대한 저서의 골자는 간단하다. 

"조선사는 주체성이 없어 주변 민족의 지배와 간섭, 침략에 의해 전개되어왔다. 조선은 일본의 지배를 받아야 타율성에서 벗어나 발전한다" 

일제의 패망과 함께 이 역사관은 용도폐기되고, 조선사편수회에 가담한 친일파는 다 처단됐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다. 

◈ 신석호, 반민특위가 무산되자 재빨리 국사학계 접수하다 

신석호는 해방 후에도 건재를 과시했다. 

임시 중등국사교원 양성소를 만들어 교사를 양성했다. 

역사를 왜곡한 장본인이 새 국가의 인재를 키운 셈이다. 

이어 국사편찬위원회 사무국장으로 취임해 열심히 식민사관을 교과서에 반영하고, 틈틈히 독립운동사도 저술했다. 

국사편찬위원회 기록을 보면, 신석호는 자기 재임 기간을 '1929.4~1965. 1.21'로 적어 놓았다. 

그가 보기에는 국사편찬위원회는 조선사편수회의 연장인 셈이다

여기서 그쳤으면 좋았는데 신석호는 너무 멀리 나갔다. 

이승만 정권 때는 이승만을 찬양하고, 박정희 시대에는 그를 칭송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민족주의자로 둔갑했다. 

해서는 안될 독립운동사 기술과 독립유공자 심사는 물론, 애국지사들의 기념사업회에 발을 담그기 시작했다. 

1954년에 민충정공(민영환) 기념사업회 이사로 임명돼 신도비문까지 지었다. 

다음 해에는 애국가 작사가 조사위원으로, 1958년에는 독립기념사업회 위원으로 취임한다. 

1961년에는 이준 열사 사인조사위원회 위원으로, 1963년에는 동학기념사업회 부회장으로 등극한다. 

동시에 이병도는 서울대 교수로, 신석호는 고려대 교수로 역할을 분담해 사학계를 주름잡고 다녔다. 

◈ 이제야 실상이 드러나는 식민사관과 친일 사학자의 욕된 인생 

신석호가 죽은 지 20년이 넘어서야 그의 친일행각과 해방 후 행적이 공개적으로 논의되는 것은 우리 현대사의 또다른 비극이다 

조선사편수회 출신의 친일 사학자들이 뿌린 식민사학의 망령은 아직도 한반도를 배회하고 있다. 

그들이 반민특위 해체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오랫동안 한국사를 지배해왔기 때문이다. 

신석호와 이병도를 사랑하는 제자로 여겼던 황국사학자 쓰다 소키치나 이케우치 히로시가 해방 후 그들의 활약상을 봤다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역시 "한민족의 민족성은 강자에는 굴종하고 약자에 대해서는 그 반대이며, 거기서 노예적 근성이 보인다"고 흐뭇하게 웃지 않을까?




스에마끼 야스카즈가 누구인가? 

그는 "고대부터 한반도는 중국과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황국사관의 선봉장이었다. 

그는 대표작 <임나흥망사>에서 "일본의 한반도 영유(임나)는 그 자체만으로도 일본의 자랑이며, 구한말 일본에 의한 조선 병합은 고대의 복현이다"라고 주장하고 다녔다. 

이런 인물을 김원룡은 하늘처럼 떠받들며 충성을 다했다. 

경성제대에서 스에마끼 야스카즈로부터 일제 식민사학을 전수한 김원룡은 그런 사관에 입각해 '원삼국시대설' 등 해괴한 학설을 주장하고 다녔다. 

이런 인물이 '고고학계의 태두'라고 불리며 서울대 고고미술과 교수, 대학원장을 지내고 역사학회 회장, 한국고고학연구회 회장을 역임한다. 


일제는 1927년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한국인은 독립할 능력이 없는 민족"이라고 끊임없이 세뇌시켜왔다. 

그리고 일제의 이같은 세뇌작업은 문창극을 통해 다시 한반도에서 부활하고 있다. 

지하에 있는 친일사학자의 정신적 기둥 '쓰다 소키치'가 들으면 "드디어 우리가 해냈다"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쓰다 소키치나 스에마끼 야스카즈 등 황국사학을 신봉한 일본인 학자들이 전파한 식민사관의 핵심은 3가지다. 

1.'일선동조론'으로, 일본 민족의 조상과 한민족의 조상은 애초에 하나였으니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부당하다. 
2.'만선사관'으로 한반도는 대륙에서 실패한 정치 세력이 옮겨 자리잡은 곳으로 만주와 하나로 묶어야만 역사나 문화가 체계화된다. 
3.'정체성론'으로 한반도는 발전이 정체돼 있었고, 일본 때문에 고대적인 것에서 근대적인 것으로 도약했다. 

문창극의 주장은 정확하게 세번째 논리와 일치한다. 

일제가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한반도에 남겨놓고 떠난 '식민사관의 망령'이 이제 대한민국 '일인지하 만인지상' 권력자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 




Posted by qlstnfp
2014. 9. 6. 08:25

http://m.nocutnews.co.kr/news/list?c1=262&t2=1343&page=5


http://m.nocutnews.co.kr/news/4037313


"우리 친일경찰을 처단한다고? '반민특위'를 때려부셔라~"

2014-06-06 06:00CBS노컷뉴스 임기상 선임기자


[임기상의 역사산책 39]무장경찰이 난입해 무법천지가 된 특위 사무실


◈ "여기 있는 놈들 다 빨갱이다"…아수라장이 된 반민특위 사무실

1949년 6월 6일 아침 남대문로에 있는 반민특위 사무실. 

윤기병 중부경찰서장이 지휘하는 경찰관 40명이 일제히 사무실로 난입했다. 

건물 주변은 기마경찰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윤기병은 장탄한 권총을 휘두르면서 소리 질렀다. 

"여기 있는 놈들 모조리 끌고 가라" 

총을 든 경찰관들은 닥치는대로 특위 직원들을 붙잡아 두둘겨 패면서 쓰리쿼터에 실었다. 

여기 저기서 주먹과 발길질이 날라오면서 욕설을 해댔다. 

"여기 있는 놈들 대부분이 빨갱이들이야~ 여긴 빨갱이 소굴이라구" 

모두 35명이 끌려 가고 통신기기와 호신용 무기, 서류 전체를 압수해갔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이 호통을 쳤다. 

"이놈들아~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국법을 수행 중인 국가요원들에게 이러고도 너희들이 무사할 것 같으냐?" 

윤기병이 이죽거렸다. 

"최운하 과장과 조응선 주임을 진작 내주셨으면 이렇게까지 했겠습니까? 지금이라도 내놓으시면 조용히 물러나겠습니다" 

며칠 전 반민특위가 체포한 악질 친일경찰 최운하와 조응선을 풀어달라는 얘기다. 

경찰은 거칠 것이 없었다. 

급하게 달려온 권승렬 검찰총장 겸 특별검찰관은 권총까지 뺏기고 밀려났다. 

중부서로 붙잡혀간 특위 직원들 35명은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이중 22명이 심하게 두둘겨 맞아 입원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였다. 

악질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해 법에 의해 설치된 반민특위가 왜 이 모양이 되었을까? 

◈ 드디어 반민특위 발족, 악질 친일파들 속속 체포되다 

제헌의회가 구성되자 이승만 정부의 반발을 무시하고 반민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반민족행위자의 범주와 처벌 규정, 특위의 구성과 활동, 특별재판부 구성을 담고 있었다. 

이 법에 따라 구성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는 1948년 10월 12일 저명한 독립운동가이자 국회의원인 김상덕을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김상덕 위원장은 와세다 대학을 다니다 2.8독립선언을 주도해 1년간 옥고를 치른 후 중국으로 망명해 일제 타도의 선봉에 섰던 독립투사다. 

그는 경북 고령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학교를 다녔고, 중국에서 독립투쟁을 벌이다 남한에서 돌아온 후 납북돼 북한에서 여생을 보내게 된다. 

반민특위는 국민의 성원을 업고 의욕적으로 출발했다. 

반민특위가 가장 먼저 검거한 친일파는 화신재벌 총수 박흥식이었다. 

그는 조선비행기 공장을 세워 일제의 침략전쟁에 기여한 인물로, 해외도피를 기도하다 체포되었다. 

이어 만주에서 일본 헌병의 앞잡이로 무려 250여 명의 독립투사를 붙잡아 17명을 처형한 악질 친일파 이종형을 잡아들였다. 

그는 마포형무소에 수감된 후에도 "내가 감옥에 들어온 건 빨갱이를 잡는데 앞장서서 사방에 적을 만든 탓"이라고 고래고래 악을 쓰기도 했다. 

이어 3.1운동 당시 33인의 한 사람이었다가 변절한 최린, 친일 변호사 이승우, 평안북도 특고과장을 지내면서 많은 독립투사를 잡아들인 악질 경찰 이성근, 고종황제의 당질로 매국 활동을 한 이기용을 구속했다. 

이기용은 자택 응접실에 일왕 히로히토의 사진을 걸어놓고, 일본 왕실로부터 받은 훈장 30여개를 진열해놓아 조사관들을 놀라게 했다. 

◈친일경찰 검거하자 이승만과 경찰의 수뇌부, 반격에 나서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25일 드디어 악질 중의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을 체포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전국 도처에서 독립운동가를 무차별적으로 체포해 여러 명을 고문해서 죽인 친일경찰의 상징이었다. 

노덕술은 수배 중에도 번호판을 단 경찰 지프에 경호원까지 태우고 서울 시내를 활보하고 다녔다. 

노덕술이 체포되자 이승만은 노기충천하여 김상덕 등 특위위원들을 경무대로 불러 그를 석방하라고 강요했다. 

특위위원들은 단호히 거부했다. 

국내에 지지기반이 약한 이승만은 어떻게 해서든지 친일파를 보호해 장기집권의 무기로 써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반민특위와 정부 사이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일제 경찰 출신들이 발빠르게 움직였다. 

먼저 반민특위 요인들을 암살하려는 음모가 진행됐다. 

서울시경 수사과장 최난수와 사찰과 차석 홍택희는 테러리스트 백민태를 불러 국회의원 3명을 납치해 38도선상의 어느 지점으로 끌고 오면 그 다음은 경찰이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겁을 먹은 백민태가 검찰에 자수하면서 이 음모는 무산됐다. 

친일경찰들은 급기야 법을 깡그리 무시하고 "실력으로 반민특위 특경대를 해산시키자"며 준비에 들어갔다. 

습격 전날 밤 시경국장 김태선에게 계획을 전해들은 내무차관 장경근은 "앞으로 발생할 모든 사태의 책임은 내가 진다. 웃어른께서도 말씀이 계셨다"며 이승만의 사전 양해가 있음을 암시했다. 

이렇게 해서 친일경찰들은 1949년 6월 6일 백주대낮에 국가기관인 반민특위를 습격한 것이다. 

◈ 반민특위의 무력화, 소장파 의원들의 구속, 백범 암살…무산된 친일파 처단 

물리력을 빼앗긴 김상덕 위원장과 특위 위원들은 사퇴서를 제출하고 자리를 떠났다. 

이런 와중에 반민특위를 국회에서 지지해주던 김약수 부회장 등 소장파 의원들이 '남로당의 프락치'라는 혐의로 대거 구속되었다. 

이어 반민특위의 정신적 기둥인 백범 김구마저 암살당하면서 '친일파 처단'은 물 건너가버리고 대한민국은 '친일파의 천국'으로 전락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김상덕은 북한 내무서원들에 의해 이북으로 끌려갔다. 

그 뒤의 소식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2006년 9월 3일 북한을 방문한 독립운동가 유족들에 의해 평양 룡궁동에 있는 재북인사묘역에 묻혀 있다는 사실만 확인되었다.

한반도 남쪽이 친일파들의 수중에 떨어지자 독립운동가들의 존재는 까마득히 지워졌다. 

1945년 해방이 되고 1962년 독립유공자 표창이 제대로 실시되기까지 17년동안 건국공로훈장을 받은 인물은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시영 단 두 명뿐이었다. 

이승만 혼자 받으면 비난을 받을 것 같으니까 이시영을 끼워 넣었다는 해석이 정설이다. 

이것이 독립을 되찾은 대한민국의 실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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