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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7.29 한국전쟁의 해석
  2. 2015.07.29 맥아더 재평가와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
  3. 2015.07.29 1949년 농지개혁
  4. 2015.07.29 해방전후사 해석 논쟁
2015. 7. 29. 11:08

[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


(9) 한국전쟁 해석 논쟁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506022157495&code=210100&med_id=khan



 

첫째, 분단이 전쟁의 배경을 이뤘지만, 전쟁은 분단을 공고화시켰다. 냉전 분단체제는 산업화와 민주화로 이어진 우리 사회 모더니티의 구조적 조건을 형성했다.

 

둘째, 한국전쟁을 연구 분야로 삼은 역사학자와 사회과학자들 중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 교수(정치학), 캐스린 웨더스비 미국 존스홉킨스대 교수(역사학),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의 연구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1·2>(1981·1990)

 

 

커밍스의 핵심 주장은 일제강점기부터 축적돼 온 계급갈등이 한국전쟁의 기원을 이뤘다

그는 식민지시대 적색농조의 투쟁, 해방 직후 지방인민위원회의 활동, 미국의 대한(對韓) 전략과 이와 연관된 냉전의 구조화 속에서 강화된 지주와 농민 간의 계급투쟁에 한국전쟁이 예비돼 있었다

한마디로 전쟁은 갑자기 시작(start)게 아니라 사회변동의 결과로 도래(come)했다

 

커밍스의 분석은 수정주의

수정주의란 미국 국제정치학계에서 전통주의에 맞서 등장한 학파다.

전통주의가 냉전의 원인 제공자로 소련을 지목했다면, 수정주의는 미국의 책임을 주목했다.

이런 수정주의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커밍스는 다양한 이론적 자원들을 활용해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한 거시적 분석을 시도했다.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과 폴라니의 자본주의론에 기댄 구조적 접근, 미국의 외교정책에서 한국 농민혁명까지의 국제정치학·사회학·역사학 연구들을 아우르는 학제적 접근, 해방 전후 한국의 사회변동을 중국·베트남·일본의 사회변동과 견줘보는 비교적 접근은 커밍스 연구를 풍성하게 한 방법론이자 이론틀이었다.

 

커밍스의 견해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원인보다 기원에 대한 역사구조적 분석을 제시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누가 전쟁을 시작했는가의 질문에 대한 응답보다는 전쟁으로 다가가는 20세기 한국 사회의 예정된 진로에 대한 분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커밍스의 논리와 분석은 사실분석과 가치판단의 측면에서 문제가 있었다.

누가 전쟁을 시작했는가의 물음은 전쟁이 가져온 비극적 참상을 돌아볼 때,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매우 중요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캐스린 웨더스비의 비판

 

누가 한국전쟁을 일으켰는가를 명확히 규명한 것은 웨더스비와 박명림이었다.

 

웨더스비는 우드로 윌슨 센터의 냉전국제사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러시아 모스크바의 대통령문서보관소에 있던 한국전쟁 관련 문서를 분석했다(강규형·캐스린 웨더스비, <소련 문서를 통해 본 6·25전쟁의 기원>, 2010).

 

웨더스비의 핵심 주장은 1950625일 남한에 대한 대규모 군사행동을 김일성이 창안했고, 이는 소련 스탈린의 후원과 중국 마오쩌둥의 승인 아래 이뤄졌다는 데 있다.

이러한 견해는 전쟁을 내전으로 파악한 커밍스의 수정주의적 견해의 문제점을 비판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한국전쟁은 북한·소련·중국이 함께 계획하고 집행한 국제전이었다는 게 웨더스비의 결론.

 

하지만 그의 연구에서 아쉬운 것은 전쟁의 결정 과정만을 주목한 나머지 전쟁의 기원·배경·원인·결과에 대한 포괄적 분석은 결여돼 있었다.

 

이에 박명림은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2>(1996)에서 전쟁에 대한 입체적 분석을 시도했다.

 

박명림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첫째,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그는

식민지 시대 기원론‘625일 기원론을 모두 거부하고 1945분단기원론’.

 

그는 전쟁의 기원을 길게 1945년 해방과 미·소의 분할점령으로부터, 짧게는 1948년 분단정부의 수립으로부터 설정했다.

 

박명림이 특히 중시한 것은

1948년부터 1950년까지의 남북갈등을 함축하는 ‘48년 질서.

그에 따르면 ‘48년 질서속에서 북한의 리더십이 급진 군사주의에 경도돼 소련·중국의 후원 아래 한국전쟁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급진 군사주의는 분단이라는 특수한 구조에 따른 대쌍관계동학의 결과인 동시에 북한 리더십이 독자적으로 채택한 전략이었다는 게 그의 핵심 주장.

 

사실판단의 측면에서 박명림의 견해는 커밍스의 견해가 갖는 한계를 넘어 전쟁에 대한 원근법적 분석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박명림은 역사적 사건에 내재한 구조와 행위의 상호관계를 주목함으로써 한국 현대사의 역사적 사회과학에서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

 

한국전쟁의 기원을 규명하기 위해선 전쟁으로 다가가는 사회구조의 거시적 해명이, 한국전쟁의 발발을 규명하기 위해선 그 구조 아래서 움직이는 리더십과 집합행위자 선택의 미시적 분석이 요구된다.

 

박명림의 연구는 전쟁의 구조적 기원과 행위적 원인을 포괄적이며 미세하게 추적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아 마땅하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2>는 한국전쟁의 국제 논쟁에서 우리 학계의 자존심을 세워준 연구라고 평가할 수 있다.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한국전쟁의 기원과 원인에 대한 연구는 활발하게 이뤄진 반면 전쟁이 가져온 결과는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임혁백 고려대 교수(정치학)<비동시성의 동시성: 한국 근대정치의 다중적 시간>(2014)에서 전쟁의 결과로 반공국가의 건설, 민족의 파괴, 지주계급의 몰락과 해체, 자본가 계급의 창설, 노동자 계급운동의 쇠퇴, 자영화된 농민의 보수화, 미국·일본·주변국들의 동맹으로 이뤄진 동아시아 중추와 부챗살 안보체제의 등장이 진행됐다고 분석했다. 이렇듯 한국전쟁이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은 다층적이며 결정적이었다.

 

동족상잔의 마당에 외세가 겹들어서 우리의 조국은 이제 무서운 살육과 파괴의 수라장으로 화하고 있다.” 북한이 서울을 지배하던 195091일 역사학자 김성칠이 남긴 기록인 <역사 앞에서: 한 사학자의 6·25일기>의 한 구절이다.

 

한국전쟁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1950년대 사회변동이 갖는 일반성과 특수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한국전쟁의 기원과 원인은 물론 결과와 영향에 대한 연구들이 더욱 활성화돼야 할 이유다.

 

한국전쟁 미시사:

박찬승의 마을로 간 한국전쟁

 

주민 증언 통해 밝힌 후방 마을 학살 갈등

 

최근 역사학을 중심으로 보통 사람들이 겪은 마을의 작은 전쟁들에 대한 연구들이 진행돼왔다.

 

박찬승 한양대 교수(역사학)<마을로 간 한국전쟁: 한국전쟁기 마을에서 벌어진 작은 전쟁들>(돌베개·2010·사진)

한국전쟁에 대한 미시사 경향을 대표하는 저작이다. 이 책이 주목하는 것은 한국전쟁 당시 마을에서 벌어진 학살의 갈등 구조다.

 

박찬승에 따르면 당시 마을에는 과거의 양반·평민 간의 신분 갈등과 지주·소작인 간의 계급 갈등, 친족 내부의 갈등, 마을 간의 갈등, 기독교도와 사회주의자 간의 종교·이념 갈등 등 복합적 갈등들이 존재했고 그 배경으로는 남북한 국가권력의 개입과 폭력이 놓여 있었다.

 

박찬승은 10여년간 진도·영암·부여·당진·금산의 마을들을 답사하고 구술을 채록해 연구를 수행했다.

한국전쟁 시기 후방에서 많은 민간인들이 사망했다는 점을 돌아볼 때 이 연구는 전쟁에 담긴 참혹한 비극의 또 다른 측면을 생생히 증거한다.

<마을로 간 한국전쟁>은 북한 신천 지역 학살을 다룬 황석영의 소설 <손님>을 떠올리게 한다.

 

 

<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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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
2015. 7. 29. 11:08




[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


(8) 맥아더 재평가 논쟁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505262151195&code=210100&med_id=khan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가’


 최소한 1990년대 중반 옛 소련 문서가 공개될 때까지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됐다는 정확한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남침론과 북침론(북한과 중국, 옛 소련), 남침유도론(일부 수정주의자)이 제기됐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4년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한국전쟁 관련 문서들을 전달받았다. 

여기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3개월 전 스탈린과 김일성, 박헌영의 대화록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남침할 경우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리고 위장평화 공세 후 남침을 개시할 것이며, 북한이 남침을 시작할 경우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켜 남한 정부가 자체적으로 몰락할 것으로 예측했다. 이들의 예상은 어느 하나도 들어맞은 것이 없었다. 


이 자료는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자료였고, 이후 한국전쟁 발발과 관련된 더 이상의 논쟁은 무의미해졌다.




■ 1951년 봄에 끝났어야 하는 전쟁이 왜 2년간 더 계속되었는가? 

맥아더는 왜 해임되었는가? 

포로교환을 둘러싼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의 공방은 왜 1년6개월이나 계속되었는가?

 미국 정부의 문서를 이용한 해외에서의 연구가 선구적 역할을 했다면, 

한국 연구자들은 미국의 문서뿐만 아니라 한국과 중국, 옛 소련의 문서들도 이용해 한국전쟁의 쟁점들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이렇게 연구가 진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적지 않다. 

특히 인천상륙작전 직후 38선 이북으로의 북진과 중국의 참전, 이 과정에서의 맥아더 장군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한국 사회에서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다. 

2005년 7월 인천 자유공원에 있는 맥아더 동상 철거를 둘러싼 논쟁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 맥아더 장군에 대한 비판은 2005년까지 50여년간 금기 사항 중 하나였다. 


이승만 대통령을 지원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 한국전쟁 발발 직후 유엔군을 이끌고 북한의 남침으로부터 대한민국을 구원, 38선 이북으로의 북진을 통해 멸공 통일에 다가갔던 맥아더의 공헌에 대해 누가 감히 비판의 칼을 들이대겠는가?

1992년 윤금이 사건과 2002년 미선·효순이 사건은 주한미군뿐만 아니라 맥아더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한국전쟁 시기 한반도에 원자탄을 사용하려 했던, ‘미국의 제국주의적 이익을 관철하려고 했던 점령군의 사령관’이라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맥아더 동상 철거와 철거 반대 세력이 인천 자유공원에서 부딪쳤고, 이는 급기야 맥아더 장군에 대해 비판적 글을 썼던 강정구 교수에 대한 친북논란으로 이어졌다. 

당시 천정배 법무부 장관이 대한민국 헌정사상 처음으로 검찰에 대해 수사지휘권을 발동해 검찰총장에게 불구속 수사를 하게 함으로써 김종빈 검찰총장이 이에 반발해 사임하는 상황도 발생했다.



2005년 9월11일 인천 자유공원에서 맥아더 동상 철거를 놓고 통일운동단체와 보수단체 회원들이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명장인가, 명령 무시한 군인인가

논쟁의 핵심은 


첫째로 유엔군의 38선 이북으로의 북진이 올바른 결정이었는가의 문제이다. 


1950년 유엔이 결정한 유엔군의 임무는 38선 이북으로 북한군을 돌려놓는 것이었다. 

맥아더는 북한이 더 이상 침략을 하지 못하도록 북진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북진이 곧 중국군의 개입을 부를 것이고, 이는 곧 또 다른 세계대전을 부를 것이기 때문에 유엔군이 38선을 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유엔군이 38선을 넘은 지 열흘 만에 중국이 참전했다.

둘째로 맥아더의 전술에 대한 평가이다. 


한국 사회에서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최고의 명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맥아더를 몸신으로 모시는 무당도 있다. 


그러나 1978년 미국의 합동참모본부에서 발간한 합동참모본부사 3권 <한국전쟁>(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에서 1990년에 번역)의 평가는 다르다. 


이 책에서 맥아더는 미국의 군 통수권자(트루먼 대통령)나 군 지휘계통에서 상부기관(합동참모본부)의 명령계통을 무시하는 군인으로 그려지고 있다.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취소하지 못하도록 구체적인 계획을 너무 늦게 본국에 보낸 것이 “군의 명령계통을 무시한 첫 번째 사례”였고, 

워싱턴의 결정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 유엔군이 국경선까지 진격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압록강 근처에 대한 폭격을 지시한 것 역시 “합동참모본부 훈령의 범위를 벗어나 왜곡하여 내린 명령의 마지막이 아니었다”.(290쪽)

또 맥아더는 워싱턴에서 결정한 정책들을 벗어나는 성명들을 발표했다. 


트루먼은 “대통령으로서, 군 통수권자로서의 나의 명령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416쪽)으로 간주했다. 

“합동참모본부의 모든 구성원들은 군은 항상 민정당국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종종 피력해왔다. 그들은 이번 경우에 있어서도 모두, 만일 맥아더 장군이 해임되지 않으면 각 계층의 미국 국민이 민정당국은 이미 군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였다고 비난할 것에 관하여 관심을 가졌다.”(426쪽) 이 점은 맥아더 청문회를 통해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

결정적으로 맥아더의 실수는 

중국군의 참전에 대한 오판이었다. 


맥아더는 중국군이 대규모로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고, 일부 후퇴를 통해 방어적 진지를 구축하라는 본부의 지시를 무시하고 전격적인 북진을 지시했다. 

이는 결국 미국에 거대한 재앙이 되었고, 합동참모본부는 플랜 B로 한반도의 포기와 대한민국 망명 임시정부의 수립까지도 고려해야 했다.

중국의 개입으로 인한 재앙은 미국에 트라우마가 되었다. 

베트남 전쟁 시 미국은 북베트남으로 진격할 수 없었다. 중국이 개입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소련과 중국이 갈등을 벌일 때도 미국은 중국에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 1972년까지 미국은 적의 분열을 이용하지 못한 것이다.

2013년 인천상륙작전 63주년을 앞두고 재현되기도 했던 맥아더 동상의 철거를 둘러싼 논쟁은 맥아더에 대한 재평가로부터 시작되었고, 한국 사회 집단지성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다.


 세계적으로 냉전체제가 붕괴되고 남북기본합의서가 나온 지 25년이 되었지만, 한국 사회는 아직도 냉전시대에 살고 있다. 맥아더를 둘러싼 논쟁은 남남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역사적 사실에 대한 명확한 규명이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 반공포로 석방
정전협정 교착 빠지자 미국, 이승만 제거 계획
이승만에 대한 평가 등 비이성적 논쟁의 사례


1953년 6월18일 이승만 대통령은 영천·대구·상무대·논산·마산·부산·부평 등의 수용소에 있던 2만7389명의 반공포로를 전격 석방했다. 
공산군뿐만 아니라 공산군과 타협하려 했던 유엔군에 대응하는 일대 쾌거였다. 국제관계를 해치는 계기가 됐다는 비판과 함께 반공포로 석방에 항의했던 조병옥은 테러를 당했고 결국 수감되었다.

1990년대 이후 미국의 자료들이 공개되면서 반공포로 석방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오기 시작했다. 

정전협정을 통해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중단시키려던 미국의 노력이 반공포로 석방으로 인해 중단될 위기에 처하자 미국 정부는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재가동하였고, 국무부 차관보를 보내 한국 정부가 정전협정에 찬성하도록 설득, 협박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반공포로 석방이 아니었다면 미국이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그러나 미국은 이미 반공포로 석방 2개월 전에 한국 정부에 조약 체결을 제안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원했던 것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마찬가지로 유사시 미군의 자동개입을 보장하는 것이었지만, 미국은 이를 보장하지 않았다. 

결국 반공포로 석방은 한·미관계에서 불신을 조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72년 하비브 당시 주한 미국대사가 본국에 보낸 편지를 보면 한·미관계에서 불신을 일으킨 세 가지 사건 가운데 이 사건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히고 있다.

반공포로 석방을 둘러싼 논쟁은 이승만 대통령과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평가와 관련해 진행됐다. 

사실 이 논쟁은 현재의 역사 관련 논쟁들이 얼마나 비이성적으로 진행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 

한편으로는 한·미동맹의 절대적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한·미동맹에 결정적으로 부정적인 역할을 한 이 사건을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으로 내세우면서 그를 공산주의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항거한 애국 민족주의자로 평가하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실은 모두 무시되고 있고, 
반공포로 석방에 항의한 조병옥에 대한 이야기는 어떤 역사책에도 서술되어 있지 않다.


<박태균 | 서울대 교수·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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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qlstnfp
    2015. 7. 29. 11:08


    [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


    (7) 농지개혁 평가 논쟁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505192154125&code=210100&med_id=khan



    1949년 6월21일 농지개혁법이 공포됐다. 

    1950년 3월10일 개정법이, 3월25일에는 시행령이, 같은 해 4월28일에는 시행규칙이 공포됐다. 전쟁 중이었던 

    1951년 피란 국회에서 

    농림부 관계자는 시행규칙이 공포되기도 전인 1950년 4월15일 이미 농지개혁이 완료되었다고 보고했다. 


    농지개혁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이 현실화된 것이다. 

    수천년 동안 계속되어 온 지주-소작 관계도 청산됐다. 자기 땅을 자기가 경작해서 수확한 쌀을 스스로 소비할 수 있는, 농민의 소망이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근대화와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도 농지개혁은 필수적이었다. 땅에 묶여 있는 자본과 노동력을 산업화 과정으로 전이해야 했다. 


    1980년대 초까지 농지개혁에 대한 평가는 인색했다. 


    북한에서의 토지개혁(1946년)이 지주의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하고 소작인과 빈농에게 무상으로 분배했기 때문에 농민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았던 반면, 

    남한에서의 농지개혁은 유상으로 몰수하고 유상으로 분배했기 때문에 농지개혁 이후에도 농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땅을 분배받은 농민들은 땅값을 상환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수확량의 30%를 5년 동안 국가에 내야 했다. 총 120%만 상환하고 나머지 30%는 국가가 보상하자는 조봉암의 농지개혁안은 기각되었다. 

    여기에 더해 한국전쟁 기간에 ‘임시토지수득세’라는 현물세가 등장해 농민들은 매년 수확량의 50%를 내야 했다. 

    또한 기대와는 달리 농지개혁 이후에 농업생산성도 높아지지 않았다. 

    녹색혁명은 쉽게 일어나지 않았고, 홍수와 가뭄 피해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매년 봄이면 보릿고개에 시달려야 했고, 가을에도 저곡가 정책 때문에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없었다. 정부의 추곡수매에 의지해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야만 했던 것이 농촌의 현실이었다.






    ■ 농지개혁, 실패냐 성공이냐

    농지개혁을 통한 산업자본의 축적도 성공적이지 못했다. 

    국가는 지주에게 수확량의 150%에 달하는 지가증권을 땅값으로 주고 땅을 매입했는데, 계획대로 되었다면 지가증권을 받은 구지주들은 산업자본가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기간에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지가증권의 가치가 떨어지면서 산업자본으로 전환되지 못했다. 

    게다가 농지개혁법에 따르면 분배받은 토지를 다시 매매하는 것을 금지하였지만, 비공개적으로 땅을 축적하거나 명의를 빌려주는 방식으로 지주로서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박현채와 황한식은 농지개혁을 비판적으로 평가한 대표적인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개혁의 주체가 농민이 아닌 지주와 보수적인 정치인들이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소작지 중 20%만이 분배되었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농민들은 더 영세해졌고, 소작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농지개혁의 실패로 농촌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평가는 1980년대 중반 이후 바뀌기 시작했다. 


    1989년에 출간된 <농지개혁사 연구>는 그 출발점이었다. 농지개혁은 한국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대체로 성공적으로 완료되었다는 것이다. 

    보상과 등기는 훨씬 더 시간이 지나 이뤄졌지만, ‘분배 예정지 통지’가 나간 시점을 기준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그 주장이었다. 

    장상환과 김성호의 연구는 그 대표적인 예였다. 

    농지개혁 이전에 이미 농지분배가 이루어졌다는 점도 중요했다. 

    미군정은 일제 총독부 소유의 농지를 신한공사 아래 두었는데, 신한공사는 1947년 이미 농지를 소작인들에게 분배하였다. 또한 정부수립 이후 농지개혁의 실시가 확실해지면서 지주들이 제값을 받기 위해 개혁 이전에 이미 농지를 방매(放賣)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소작지가 분배되었고, 경자유전 원칙이 관철되었다는 것이 장상환의 주장이었다.


     한국의 농지개혁은 북한과는 달리 성공적인 ‘위로부터의 부르주아 개혁’이었다는 것이다.(장상환, ‘토지개혁과 농지개혁’) 


    김성호 역시 ‘농지분배 일람표의 공고’가 완료된 시점(1950년 3월24일)에서 농지개혁이 완료되었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장상환의 주장과 맥을 같이 했다.

    농지개혁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김일영 교수에 의해 정치적 평가로 이어졌다.

     즉, 한국전쟁 직전에 있었던 1950년 5·30선거에서 야당이 패배한 것은 농지개혁의 결과였으며, 이미 전쟁 이전에 농지개혁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전쟁 발발 직후 북한이 남한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했을 때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명백한 ‘부정선거’, ‘관권개입’과 관계없이 1954년 총선에서 자유당이 승리한 것까지도 농지개혁의 결과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이후 경제학계에서는 <농지개혁사 연구>의 주장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였지만, 역사학계에서 다시 이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었다. 

    특히 정병준의 ‘한국 농지개혁의 재검토’는 반론을 제기한 대표적인 사례였다. 


    정병준은 ‘분배 예정지 통지’가 나간 시점을 농지개혁이 완료된 시점으로 봐야 한다는 장상환의 주장이 농민들의 심리적 상태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분배된 시점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농지개혁이 완료되는 시점을 농민들에게 상환증서가, 지주들에게 지가증권 교부가 완료되는 때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 농지개혁 논쟁은 현재진행형

    당시 신문을 보면 전쟁 발발 이후인 1950년 7월 중순에 가서야 상환증서 발급이 완료될 예정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지주들은 농지개혁에 반발해 전업대책과 보상신청서 제출을 의도적으로 지연하고자 했기 때문에 지가증권의 발급이 어려웠고, 당시 한국 정부의 행정 능력을 고려할 때 농지분배 사업을 빨리 끝내기도 어려웠다. 


    이승만 대통령이 농림부 장관에게 전쟁 발발 이후인 1950년 10월의 시점에서 “농지개혁법안의 실시가 시급히 필요하다”, 서울 수복 이후에는 “농지개혁 실시를 연기해야 한다”는 지시를 내린 것 역시 농지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제시되었다. 

    오히려 그는 농지개혁은 정책결정자가 의도했던 바가 아니라 전쟁의 부산물이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농지개혁 논쟁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왜냐하면 사례 연구가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이다. 

    충분한 연구가 진행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치적 해석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즉, 남한에서의 농지개혁 실시라는 사실을 통해 이승만 정부의 농민 친화적 성격을 주장한다거나, 남한 자본주의의 성공이라는 결과, 또는 그 반대로 농촌과 농업의 포기라는 서로 다른 현실을 근거로 농지개혁을 결과론적으로 평가하려는 것이다. 

    농지개혁을 하지 않았던 개발도상국에 비해 농지개혁을 실시했던 한국과 대만이 성공적인 경제성장을 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농지개혁이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농지개혁 평가에서 중요한 점은 개혁 자체가 한국 사회에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가를 실증적으로 규명하는 것이다. 

    애초에 의도했던 대로 지주들이 산업자본가로 성공적으로 변신했는가? 

    농지분배로 받은 대금이 산업자본으로 전환되었는가? 

    농지개혁의 결과로 농업 분야의 근대화가 이루어졌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충분한 사례 연구가 진행되기 전에 이루어지는 성급한 평가는 농지개혁에 대한 논쟁이 마침표를 찍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걸림돌이 될 것이다. 


    농지개혁은 성공과 실패의 여부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개혁을 통해 자본주의적 질서와 산업화가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는가를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장상환의 지적에 주목해야 한다. 

    연구가 다 이루어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성급한 정치적 평가는 현대사 연구의 진전을 가로막고 있다.

    ▲ 임시토지수득세
    한국전쟁 중의 현물세… 세금 낼 사람 사라지자 농민 수확량 절반 거둬


    정부는 ‘임시토지수득세’를 한국전쟁 중인 1951년에 걷기 시작했다. 
    현물세였다. 
    현물세라니, 다시 중세로 되돌아간 건가? 
    한국전쟁이 시작되자, 인플레이션이 심해졌다. 공장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고, 월급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으며, 세금을 낼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세수가 없다고 해서 전쟁 중에 정부가 모든 활동을 중지할 수도 없었다. 

    만만한 게 농민이었다. 
    당시 전체 인구의 7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농민들은 전쟁 중이었지만 집을 떠나기 쉽지 않았다. 생계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피신을 했다가도 다시 돌아와 논으로 가야 했다. 

    바로 이 점이 현물세인 임시토지수득세를 만든 이유였다. 
    당시 재무부 장관이었던 백두진은 “임시토지수득세가 없었다면 경제체제가 붕괴되었을 것”이라고 자평했다. 

    농민들은 농지개혁으로 인한 지가 상환, 그리고 토지수득세로 인해 수확량의 45~60%를 세금으로 내야 했다. 
    자기 땅에서 땀 흘려 얻은 수확을 자기가 갖는다는 기쁨을 누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임시토지수득세는 4·19혁명 직후인 1960년에야 폐지됐지만, 수득세를 내지 못해 연체된 세금은 1962년에 면제됐다. 

    수득세는 현대사에서 전쟁과 정부의 무능이 서민들에게 어떠한 고통을 주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박태균 | 서울대 교수·국사학>











    Posted by qlstnfp
    2015. 7. 29. 11:07


    [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


    (6) 해방전후사 해석 논쟁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505122220025&code=210100&med_id=khan



    1980년대는 우리 사회에서 진보세력이 ‘학문적 시민권’을 획득한 시기였다.

     대학원을 졸업한 소장 연구자들이 기성 진보적 학자들과 함께 사회구성체 논쟁을 벌임으로써 한국전쟁 이후 냉전분단체제 아래서 위축된 진보적 인문·사회과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 가운데 한 축을 이룬 것은 해방 전후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해석이었다. 

    1979년부터 1989년까지 전 6권으로 나온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하 <인식>)은 바로 이러한 연구들이 집약돼 있다. 

    이 시리즈의 필자들로는 

    고(故) 박현채(조선대 교수·경제학), 강만길(고려대 명예교수·역사학), 최장집(고려대 명예교수·정치학) 등 당시 진보를 대표하는 중견 학자들부터 

    박명림(연세대 교수·정치학), 정해구(성공회대 교수·정치학), 이종석(전 통일부 장관) 등 패기만만했던 소장 연구자들을 망라했다.



    고 박현채 조선대 교수·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왼쪽부터)


    ■ <인식> 대 <재인식>의 논쟁

    <인식>에 참여한 학자와 연구자들 사이의 견해가 늘 일치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광복·미군정·정부수립·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사회변동을 분단체제의 형성 과정으로 파악하고, 이 과정 속에 냉전의 구조화라는 국제적 상황은 물론, 좌우합작·농민운동·노동운동 등의 국내적 변동을 ‘민중적·민족적 관점’에서 일관되게 분석하고자 했다.

    민중적·민족적 관점이란 

    지배계급과 외세에 맞서는 ‘민중’과 ‘민족’을 중시하는 진보적 역사관을 함축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해방 8년사(1945~1953) 한국 현대사야말로 세계질서 재편기 국제적 수준의 갈등과, 혁명과 반혁명의 국내적 갈등이 총체적으로 맞물려 돌아간 시기”라는 박명림의 주장은 <인식>에 담긴 새로운 역사인식을 생생히 보여준다. 


    <인식>은 출간되자마자 학계와 시민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87년 6월항쟁으로 열린 민주화 시대의 사회적 분위기와 결합됐기 때문이다. 

    <인식>은 특히 당시 큰 화제를 모은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것으로 보였는데, 

    두 책 모두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대학을 다닌 이들에게 현대사 학습의 필독서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인식>의 역사인식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은 

    2006년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이하 <재인식>)을 통해 이뤄졌다. 

    <재인식>은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 1950년대까지 우리 현대사를 새롭게 해석한 논문들을 모은 책이다. 


    민족주의를 비판해온 탈근대 성향의 박지향(서울대 교수·역사학), 김철(연세대 교수·국문학)이 뉴라이트 학자들이라 할 수 있는 이영훈(서울대 교수·경제학), 고(故) 김일영(성균관대 교수·정치학)과 함께 편집한 저작이다. 

    <재인식>이 큰 관심을 모은 까닭은 책 제목에 담긴 상징성에 있다. 

    다시 말해 <재인식>은 <인식>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을 겨냥했다. 

    <재인식>은 머리말에서 지난 20여년간 학계의 부단한 연구로 <인식>에서 제기된 주장의 잘못이 지적되고 수정되어 왔음에 주목해 그동안 진척된 수준 높은 학술 논문을 선정해 대중에게 알기 쉽게 제시해 주자는 목표를 갖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구체적으로 <재인식>은 

    <인식>에 담긴 민족 지상주의와 민중혁명 필연론이 우리 현대사 해석에 끼친 폐해를 우려하고, 편협하지 않고 균형 잡힌 역사 이해를 요구했다. 

    이러한 우려와 요구는 2006년 당시 진행된 노무현 정부의 과거사 청산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학문적 연구에서 시작됐으나 정치·사회 현실 문제에 직접 개입했다는 점에서 당시 <인식>과 <재인식>을 둘러싼 토론은 학계 안팎에서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영훈 서울대 교수·박지향 서울대 교수·김철 연세대 교수(왼쪽부터)


    ■ <인식>과 <재인식>의 한계

    <재인식>에 대한 비판은 두 방향에서 제시됐다. 


    하나는 <인식>에 가까운 진보적 역사학자들의 비판이었다. 

    당시 ‘역사비평’의 주간을 맡고 있던 임대식(역사학자)은 <재인식>이 뉴라이트와 탈근대의 기묘한 연대라고 지적하고, 이러한 ‘이종 연대’가 개혁이라는 시대정신에 역방향으로 작용한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다른 하나는 상대적으로 젊은 탈근대 역사학자들의 비판이었다. 

    윤해동(한양대 교수·역사학) 등은 

    2006년 <근대를 다시 읽는다>를 펴내 <인식>과 <재인식>을 동시에 비판했다. 

    이들은 <인식>과 <재인식> 모두 철 지난 진영적 대립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했다. 

    <인식>의 민족주의나 민중주의가 현실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낡은 역사인식에 머물러 있다면, <재인식>의 경우 일부 예외적인 글들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 ‘보수우익’의 정치적 이해에 복무하면서 시대착오적인 좌우 대립에 편승하고자 하는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인식>과 <재인식>을 둘러싼 논쟁은 광복 직후 역사적 사실과 집단적 기억에 대한 해석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과연 우리는 광복에서 한국전쟁에 이르는 시기의 역사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그것은 <인식>의 일부 필자들이 주장하듯 제국주의의 지배에 따른 비극적인 분단국가의 형성 과정인가, 아니면 <재인식>의 일부 필자들이 강조하듯 훌륭한 선택으로 평가할 수 있는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서의 대한민국 성립 과정인가. 


    좌파 민족주의 대 뉴라이트의 역사 해석이라 할 수 있는 <인식> 대 <재인식>의 이런 상반된 역사관은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팽팽히 맞서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돌아보면 

    <인식>의 역사관에는 1980년대의 민족해방과 민중해방에 대한 염원이 깃들어 있었다.

     당대의 관점에서 <인식>이 그동안 한쪽으로 편향된 역사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고, 역사적 사실을 새롭게 밝히는 데 기여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현재의 시점에서 <인식>에서 제시된 사실 복원 및 해석은 민중적·민족적 관점을 지나치게 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재인식>의 역사인식에 문제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근대를 다시 읽는다>의 편자들이 적절히 지적하듯이 <재인식>의 논리에는 ‘국가=문명, 민족=야만’이라는 낡은 이분법이 깔려 있고, 

    우익적 ‘대한민국 국가주의’의 강화라는 이념적 목표가 도사리고 있었다.

    <인식>과 <재인식>을 둘러싼 논쟁은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한 걸음 물러서서 생각하면 <인식>과 <재인식>은 역사 해석을 여전히 이념투쟁의 한 수단으로 보려는 정치적 독법(讀法)의 위험을 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느 나라이건 역사 해석에서 하나의 시각만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역사적 사실의 복원과 평가 또한 고정돼 있지 않다.

    요컨대, 역사는 새로운 사실의 발견과 기억의 복원으로 재구성되며 재해석된다. 

    역사 해석이란 본디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하는 현재진행형이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 강제와 경로의존성의 출발점이 된, 광복에서 한국전쟁에 이르는 현대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이제 막 시작됐다고 봐도 좋다. 

    어떤 사실과 기억이 이 시대를 정직하게 반영하는지를 분석하고, 그것이 현재에 어떤 함의를 안겨주는지를 성찰하는 것은 우리 현대사를 연구하는 인문·사회과학자에게는 더없이 중대한 과제다.

    ▲ 조정래의 ‘태백산맥’
    역사책 뺨친 소설… 현대사 시야 넓혀



    1987년 이후 열린 민주화 시대의 해방 전후사에 대한 역사적 이해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텍스트 중 하나는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1989년 전 10권 완간)이다. 

    <태백산맥>은 여순사건이 일어난 1948년부터 빨치산 토벌이 끝나가는 1953년까지 전남 벌교를 중심으로 진행된 비극적인 현대사를 다룬 대하소설이다. 

    <태백산맥>은 ‘혁명의 시대’라는 1980년대의 시대적 분위기가 담겨 있는 작품이다. 
    염상진, 김범우, 하대치, 소화, 외서댁, 들몰댁, 그리고 염상구까지 <태백산맥>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해방 전후를 살아온 민중과 지식인의 전형적 인물들이었기에 그만큼 감동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태백산맥>의 내용 때문에 조정래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발됐지만 2005년 11년 만에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이러한 사실이 보여주듯 <태백산백>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뜨거웠고, 우리 현대사를 새롭게 이해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태백산맥>은 250쇄 정도를 찍었다고 한다. 총 850만권이 팔렸고, 매년 10만권가량 나가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소설 속의 주 무대인 벌교는 1980년대의 추억을 가진 386세대라면 누구나 한번쯤 가보고 싶어 하는 곳으로 꼽힌다.


    <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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