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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29 왜 유신을 재평가?
- 2015.07.29 1971년 4월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
- 2015.07.29 베트남전 파병
- 2015.07.29 박정희의 민족적 민주주의
[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
(17) 유신체제 논쟁
■ ‘유신 체제’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유신에 대한 첫 논쟁은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박정희 정부는 1972년 10월17일 유신체제를 선포하기 하루 전 미국 정부에 이를 통고했다. 원래 선포문에는 강대국이 약소국을 희생시키고 흥정의 제물을 삼는 이기적 행태를 비난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이에 대해 항의했고, 결국 여러 차례의 수정을 거듭해 6개 문단이 삭제되고 4개 문단이 수정된 채 발표(홍석률, <분단의 히스테리>)됐다.
미국으로서는 유신과 같은 극단적인 체제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미 1년 전인 1971년 12월 박정희 정부에 의해 비상사태 선포가 이루어지자, 미국과 중국 사이의 데탕트, 남북한의 적십자 회담이 이뤄지는 상황에서 비상사태 선포가 불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던 미국으로서는 동맹국에서 민주주의 체제의 위기가 달갑지 않았다.
미국 언론이 독재정부를 지지한다고 비판할 수 있고, 의회가 동맹국에 대한 원조를 승인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2년 12월27일 서울 중앙청 중앙홀에서 열린 유신헌법 공포식. 유신헌법은 대통령의 종신집권을 가능케 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그해 11월21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91.5%의 찬성률로 통과됐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러나 미국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한국의 전투부대가 베트남에 있는 상황에서 존슨 대통령이 약속했던 주한미군의 감축이 없을 것이라는 공약을 파기했기 때문이었다. 1969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박정희와 만났던 닉슨은 주한미군 감축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지만, 1970년 사전 협의 없이 주한미군 1개 사단(제7사단)의 감축을 통보했다. 1952년과 1961년 독재자에게 압력을 가했던 미국으로서도 섭섭해 하는 한국 정부에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두 번째 논란은
1974년초부터 장준하와 백기완이 유신헌법 반대 및 개헌을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살기등등한 유신의 권력 앞에서 1년여간 침묵했던 시민사회가 움직인 것이다.
유신 정부는 1974년 1월8일 오후 5시를 기해 긴급조치 1호를 발표했다.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거나 ‘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했으며, 이를 위반한 자에 대해서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이 가능하며, 15년 이하의 징역, 15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부과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긴급조치 1호로 장준하와 백기완이 구속됐으며, 일주일 후 두 사람에게 최고형인 징역 15년이 선고됐다.
그러나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는 끊이지 않았고, 야당이 주도하는 개헌청원운동으로 이어졌다. 1974년 김영삼은 야당 총재로 당선되면서 독재에 반대하는 선명 야당노선을 내세웠다. 유신헌법에 대한 논란이 커지자 유신정부는 정면돌파를 선언했다. 1975년 1월 유신헌법에 대한 신임투표를 제안한 것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이 대선 당시 중간평가를 받겠다고 한 적이 있었지만,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신헌법에 대한 신임투표는 같은 해 2월12일에 있었다. 투표율 80%에 찬성 73%, 반대 25%의 결과가 나와 유신헌법에 대한 재신임이 이뤄졌다. 당시 한국사회가 철저하게 통제돼 있었던 사회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낮은 투표율과 25%의 반대라는 결과는 역설적으로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가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공유돼 있었음을 의미한다.
■ 경제성장과 개발독재라는 차원에서 유신체제가 필요했는가
이후 유신에 대한 논쟁은 학문 영역에서 이뤄졌다.
필요했다는 주장은
1960년대의 경공업 중심에서 중화학공업 중심의 경제구조 개편이 필요한 상황과 주한미군 감축과 데탕트로 인한 위협이라는 상황에 근거(김일영)하고 있다.
반면 필요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유신은 개인적 장기집권욕에 의해 만들어진 체제였으며, 만약 민주주의 체제에서 경제성장이 이뤄졌다면 더 바람직했을 것이라는 주장(한완상, 임혁백)이다.
이러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적 견해는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했다. 유신 시대에도 정부·여당을 제외하고 옹호하는 사람이 없었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짓밟고 집권해 ‘유신 아류’라고 비판받았던 신군부마저도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민주화와 함께 사회적 공감대에 균열이 발생했다.
한국이 러시아보다 일본의 식민지가 돼 다행이었다는 글을 써 논란이 되었던 한승조 교수는 “독재체제가 있었기에 한국이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단기간에 면모를 일신할 수 있었다”고 주장(경향신문 1989년 10월25일자)했고, 조갑제는 ‘월간조선’ 1993년 11월호에 ‘박정희와 김영삼의 화해’라는 기사를 통해 “민주화 이전에 있었던 산업화의 업적을 인정해야 한다”는 글을 게재했다.
독재잔재를 청산하고, 독재시대의 과거사를 정리해야 하는 시점에서 왜 유신을 재평가하자는 논의가 시작됐을까.
민주화 이후 냉전시대에 기득권을 유지했던 그룹들의 위기감이 그 한 원인이었다면, 민주화 세력이 주도하는 정권이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정부 운영에 실패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또 신자유주의 시대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면서 맞이했던 경제위기 역시 고성장시대를 구가했던 유신시대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개발독재의 유산이 경제위기의 한 원인이 됐는데도 개발독재가 그 해결책으로 대두된 것이다.
2012년 8월 홍사덕 전 의원은 “우리나라가 와이셔츠와 가발을 만들고 쥐와 다람쥐까지 잡아 팔아서 1971년까지 수출 10억달러를 달성했지만, 100억달러는 중화학공업 육성 없이는 불가능했다”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유신을 한 게 아니라 수출 100억달러를 넘기기 위해 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의 피요트르 황제는 사람도 많이 죽인 폭군이고, 전쟁하려고 교회 종을 녹여 철을 만들고 그랬던 인물이지만 러시아 사람들은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다”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진보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은 홍 전 의원 발언에 강력 반발했다.
유신체제는 비정상적인 체제이며, 정권 연장을 위한 개인적인 권력욕에서 나온 것이지, 불가피한 결정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위기감을 느낀 박정희 정부의 기득권 세력들이 공모한 결과가 유신체제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유신에 대한 논쟁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유와 평등이라는 근대정신의 잣대가 아닌 경제성장으로 평가하는 식민지근대화론의 인식과 유신을 평가하는 인식이 같은 맥락에 있다는 점, 산업화와 민주화는 지속적으로 동시에 추진돼야 한다는 점을 인식한다면, 유신에 대한 논쟁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경제개발계획이 추진됐던 1962년부터 1992년까지의 평균 경제성장률을 보면 민주화가 된 1987년부터의 경제성장률이 가장 높았던 점 역시 고려돼야 할 것이다.
1972년은 격동의 한 해였다.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으로 한 해를 열었다면, 한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릴 즈음 7·4 공동성명이 전격 발표됐다. 또 남북 간의 대화를 위해 민주주의를 포기한다는 ‘10월 유신’이 선포됐다.
▲ 사채 동결 ‘8·3조치’
1972년 8월3일 당시 태완선 경제기획원 장관(가운데)이 사채동결 긴급 재정명령(8·3조치)에 관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72년의 중심에는 ‘8·3 조치’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박정희 정부는 한국전쟁 때에만 있었던 긴급명령을 발동해 모든 사채를 동결시켰다. 자본주의의 기본인 사적 소유권의 원칙을 무너뜨리는 혁명적 조치였다. 왜 이런 조치가 필요했을까.
1960년대 말 부실 기업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차관에 대한 지불보증제가 실시되면서 기업들은 무분별하게 차관을 들여왔다. 그런데 도입된 차관들은 수출을 위해서만 사용되지 않았고, 1968년부터 기업의 부동산 투자 등에 사용됐다. 부동산 투자로는 즉각 이익을 낼 수 없었기 때문에 기업들은 사채에 손을 댔다. 정부가 장악하고 있었던 은행의 문턱은 높았고, 기업의 건전성은 악화됐다.
청와대에 부실기업을 정리하기 위한 특별 기구를 설치했지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기업의 사채를 동결시켰다.
시장논리대로 하자는 주장도 있었지만, 결국 모든 부실기업에 면죄부를 주는 방식으로 문제를 처리한 것이다. 게다가 자기 회사에 위장으로 사채를 주고 더 높은 금리를 취해 이득을 보았던 부도덕한 기업가들에게도 면죄부를 줬다.
▲1960년대 후반 베트남에서 젊은이들의 피를 대가로 거둬들인 그 많던 외화는 어디로 간 것인가.
‘8·3조치’로 구제된 기업가들이 ‘올바른 기업가 정신’을 발휘했다면 1970년대 후반의 외환위기와 1980년대 초반 외채위기가 발생했을까.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한국사회에서 왜 정상적인 시장논리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을까.
경제성장의 신화에 갇혀 있는 박정희 정부 시기뿐 아니라 한국 재벌의 성장과정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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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
(16) 조국근대화론 대 대중경제론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507202237195&code=210100&med_id=khan
1960~1970년대의 산업화라는 시대정신이 일대 격돌한
1971년 4월27일에 치러진 제7대 대통령 선거.
선거가 선거다우려면 인물과 비전의 구도가 제대로 잡혀야 한다. 1971년 대선은 광복 70년 동안 가장 선거다운 선거로 기록될 만하다. 대선에서 경쟁한 두 인물은 박정희와 김대중이었다.
박정희는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잡고 1963년과 1967년 대선에서 승리한 후 3선개헌을 통해 세 번째 집권을 노린 후보였다.
그에겐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 1960년대 경제발전이라는 성취가 있었다.
김대중은 대선후보 선출에서 김영삼·이철승을 꺾은 ‘40대 기수’의 대표 주자이자 야당의 새 정치를 상징하는 후보였다. 그에겐 4월혁명, 6·3항쟁, 3선개헌 반대투쟁으로 이어진 1960년대 민주화운동이라는 자산이 있었다.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1971년 4월25일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연설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신민당 김대중 후보가 1971년 4월8일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연설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조국근대화론 대 대중경제론
과거나 현재나 선거를 이끄는 결정적 프레임은 경제다.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와 김대중은 산업화의 경제 프레임으로 ‘조국근대화’와 ‘대중경제’를 각각 내세웠다.
조국근대화론과 대중경제론에 대한 비교 연구로는 김일영(전 성균관대 교수·정치학)의 <조국근대화론 대 대중경제론>(2006)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조국근대화론과 대중경제론 모두 ‘내포적 공업화론’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다고 지적한다.
두 담론은 자립경제, 국가 주도성, 중공업 발전을 공통분모로 두고 있었다. 하지만 차이점 또한 작지 않았다.
조국근대화론의 핵심은 수출증대·외자의존을 수단으로 세계시장 지향의 발전과 ‘발전국가’로 일컬어지는 국가 주도의 발전을 모색하는 데 있었다.
김일영
조국근대화론의 국가 주도성에 담긴 특징은 ①중점적으로 육성할 전략산업을 선택하고, ②외국자본·직접투자를 포함한 국내외 가용 자원을 총동원하며, ③동원된 자원을 전략산업 부문에 편중 배분하고, ④선택과 집중의 경제정책을 추진하며, ⑤금융기관을 국가의 통제 아래에 두고, ⑥성과에 따른 자원의 배분을 모색하는 데 있었다.
한마디로 조국근대화론은 국가 주도의 경제적 불균형발전을 통해 성장을 이루고, ‘낙수효과’를 통해 그 성장의 과실을 사회적으로 나눠 갖자는 발전전략이었다.
대중경제론에 대한 주목할 만한 연구로는
류동민(충남대 교수·경제학)의 <김대중 경제사상에 관한 검토>(2010)
대중경제론이 지향한 모델은 국가에 의한 경제의 계획적 운용을 중시하는 한국적 혼합경제 체제이며,
목표는 파행성을 극복한 자립경제의 실현에 있었다.
류동민에 따르면,
대중경제론은 ①축적원천으로 국가자본 및 중소기업 강조와 외국자본의 철저한 국가 관리를, ②투자 주체로는 국영기업의 과도기적 창설 및 민간 불하와 민족적 중소기업 육성을, ③노동정책으로는 노동자의 경영 참가 중시를, ④무역정책으로는 수입대체 모색 등을 내걸었다.
박정희 정부의 경제를 ‘특권경제’로 비판한
대중경제론은 진보 경제학자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1971년 대선이 갖는 의의 중 하나는 이런 상이한 경제 패러다임이 경쟁한 선거였다는 데 있다.
수출지향 대 수입대체, 불균형발전 대 균형발전, 대기업 중심 대 중소기업 중심, 산업평화 대 노동자 참여 등은 조국근대화론 대 대중경제론의 핵심 쟁점이었다.
1971년의 대선은 우리 현대사에서 제대로 치러진 최초의 정책선거였던 셈이다.
치열했던 선거과정은 박정희의 승리로 끝났다. 박정희는 총투표의 51.2%를 얻은 반면, 김대중은 43.6%를 획득했다. 95만표 차이였다.
당시 정치·경제적 환경을 고려할 때 김대중은 나름대로 선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어 5월에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인 공화당은 총 204석 중 113석을 차지한 반면, 야당인 신민당은 종전의 44석에서 89석으로 의석수를 두 배 이상으로 늘렸다.
정치사회 안에서 박정희가 주도한 산업화세력과 김대중·김영삼이 주도한 민주화세력 간의 경쟁은 이렇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 조국근대화론의 성취와 한계
1971년 대선에서 승리한 박정희는 경제성장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박정희 시대 고도성장의 원동력은 무엇보다 국가의 역할과 풍부한 노동력에 있었다. 박정희 정부는 국가가 시장을 창출하고 선도한, 앞서 말한 발전국가의 전형적인 사례로 평가돼 왔다.
금융정책과 노동정책은 박정희 정부 경제정책의 양대 축을 이뤘다.
금융정책의 경우 정부가 만성적인 자본 부족을 겪고 있는 대기업들에 대규모 외국자본 배분은 물론 일반금리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저리의 자본을 지속적으로 공급해 재벌 대기업 성장의 후견인 역할을 떠맡았다.
노동정책의 경우에는 노동조합법·노동쟁의조정법 같은 입법에서 노동운동의 직접적 탄압에 이르기까지 억압적 노동정책 및 노동통제를 통해 산업 평화와 저임금 유지를 도모했다. 양질의 풍부한 노동력 또한 중요했다. 수출지향 공업화의 특징을 절대적 잉여가치 생산방식에 기반을 둔 ‘원시적 테일러화’에서 찾을 수 있다면,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은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핵심적인 원천이었다.
요약하면,
박정희 시대 경제발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분업의 재편과정에서 냉전체제와 농지개혁이라는 역사적 조건 아래 국가의 효율적 경제정책과 양질의 풍부한 노동력을 결합시켜 고도성장을 일궈낸, 미국 사회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말한 ‘초대에 의한 반(半)주변적 발전’의 사례를 이뤘다.
조국근대화론의 성취는 통계 지표로 확인된다.
1961년 87달러에 불과했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979년 1579달러로 증가해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게 했다. 중화학공업화가 진행된 1970년대에는 2차산업이 1차산업을 능가했고, 중공업의 비중이 경공업을 추월하는 선진국형 산업구조를 갖췄다. 급속한 경제성장이 아파트·텔레비전 등으로 상징되는 근대적 생활양식을 보급함으로써 사회는 본격적인 ‘모더니티 모험’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조국근대화론의 한계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대외 종속의 심화, 대기업에로의 경제력 집중, 농업 부문의 희생, 재벌의 성장과 함께 공고화된 정경유착 등은 조국근대화론에 내재된 대표적인 그늘이었다.
자원 및 인구, 특히 협소한 내수시장을 고려할 때 조국근대화론이 제시한 수출지향 산업화가 불가피했다 하더라도 그 불가피성이 ‘모더니티의 그늘’을 모두 정당화할 수는 없었다.
대선 직전인 1970년 11월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의 분신과 대선 직후인 1971년 8월 광주단지(현 성남시) 주민 폭동은 이런 그늘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 ‘대중경제론’의 변화
DJ, 대통령 당선 후 민주주의·시장경제 ‘병행발전론’으로…
외환위기 극복 주력
1971년 대선에서 본격 선보인 ‘대중경제론’은 정치가 김대중의 대표 담론이었다.
대중경제론은 1980년대에 ‘대중참여경제론’으로,
1997년 대통령 당선 이후에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론’으로 변모해 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변화된 것과 변화되지 않은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중경제론의 변화를 연구한 류동민 교수에 따르면
대중경제론이 국가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했다면,
대중참여경제론은 시장의 효율적 기능을 부각시켰고,
병행발전론은 말 그대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중시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사회세력 간의 ‘균형’과 ‘참여’를 강조한 기조는 거의 변화되지 않았다.
대중경제론의 최종 정착지인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론은
산업화세력의 발전국가론에 맞서 김대중과 민주화세력이 제시한 국가 비전이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국제통화기금(IMF)이 강제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추진하면서도, 한편으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제정하고 ‘생산적 복지’를 모색했던 김대중 정부의 정책 방향은 외환위기라는 주어진 조건 아래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추구하려는 김대중의 의지가 반영돼 있었다.
“혹자는 나를 ‘신자유주의자’라고 비판했다. (중략) 그러나 1997년 IMF 체제 이후 우리의 선택은 시장경제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중략) ‘생산적 복지’는 사후적인 복지, 시혜적인 복지의 한계를 보완하는 것에서 시작했지만, 과다 복지가 가져온 유럽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은 것이기도 했다”는 김대중의 회고는 민주화세력이 놓인 현실과 추구한 이상 간의 거리를 생각하게 한다. 진보세력이 실현가능하고 지속가능한 대안을 제시하려면 김대중 정부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론을 어떻게 진화시킬 것인가에서 출발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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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베트남전 파병 논쟁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507142205275&code=210100&med_id=khan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에 대한 평가는 전투병 파병이 시작된 1965년부터 현재까지 한국 사회에서 뜨거운 논란이 이뤄지는 이슈다.
현재의 논란은 전쟁특수를 통한 경제적 이득과 참전으로 인한 한국군과 베트남 민간인들의 피해를 둘러싸고 진행되고 있지만,
파병 당시에는 베트남 파병이 한국 안보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의 문제였다.
■ 파병 당시엔 논쟁 확산되지 않아
냉전의 최전선에 위치해 있고, 불과 10여년 전까지도 한국전쟁이라는 전면전이 진행됐으며, 정전협정으로 전면전은 중단됐지만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한국의 상황에서 전투병의 파병이 가져올 안보적 효과가 논란의 초점이었던 것이다.
한쪽에서는 베트남 파병이 안보 공백을 가져올 것이며, 스스로의 안보를 지키지 못해 외국군이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파병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정부와 여당은 한반도에서 주한미군의 역할과 규모에 변동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관점에서 파병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만약 한국이 전투부대를 파병하지 않는다면, 주한미군의 일부 또는 전부가 베트남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북한의 도발을 막는 억지력으로서 미군의 역할과 규모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 점을 강조했는데, 실상 파병 시점에서 한국군 파병은 사회적으로 큰 논란을 불러오지는 않았다. 일본에서 반전운동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한국전쟁 때 도와줬던 미국에 보은해야 한다는 것과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였다.
여기에 더해 1964년부터 한일협정 반대시위로 인해 위수령이 선포될 정도로 사회적 논란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베트남 파병을 둘러싼 논쟁은 사회적으로 확산되지 않았다.
반대 의견이 너무 나오지 않아서일까? 반대 의견이 강해야만 파병을 요구한 미국에 무언가 더 큰 요구를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국회에서 가장 큰 목소리로 반대한 사람은 5·16 쿠데타 당시 박정희의 옆에 서 있었던 차지철이다. 그는 남베트남 정부가 외국군의 지원을 받아들일 태세가 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파병에 반대했으며, 정규군 대신 의용군을 파병할 것을 주장했다(경향신문 1965년 1월16·19일자). 상임위 표결에서는 찬성표를 던졌지만.
1965년 1월 1차 전투부대 파병 당시 국회 표결에서 야당은 상호방위조약의 개정을 미국이 약속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권했고, 2차 증파 논의에서 ‘반대’를 당론으로 정했지만, 야당의 중진인 김준연과 조윤형은 찬성표를 던졌다. 여당인 공화당의 당론은 찬성이었지만, 공화당 박종태 의원은 가장 강력하게 파병을 반대했다.
그는 “자유 진영 가운데도 영국·프랑스 등 많은 나라들이 월남 파병을 반대하고 있으며, 월남 파병으로 결정적인 손실을 입고 있으면서도 자체의 강력한 국력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미국의 입장과 중립국 등 국제여론을 중시해야 할 한국의 입장은 다르다”고 주장했다(경향신문 1965년 8월7일자).
베트남전 파병을 둘러싼 찬반 양론을 다룬 경향신문 1965년 1월16일자 기사.
■ 장준하 국회 질의로 파병 쟁점화
베트남 파병이 다시 도마에 오른 것은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이 정전협상을 제안했고, 철군을 공약으로 내건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에 당선된 시점에
장준하가 1968년과 1969년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베트남에 있는 한국군 문제에 대해 질의했다.
미국의 베트남 정책이 변화하는 시점에서 한국군을 어떻게 할 것인가?
베트남에서 다치고 죽은 사람들에 대한 보상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이후 1985년 리영희의 <베트남 전쟁>이 출간될 때까지, 그리고 1987년 민주화가 이루어지기까지 베트남 파병은 한국 사회에서 잊혀졌다.
1990년 김민웅이 미국 자료에 근거해 월간지 ‘말’에 쓴 민간인 학살에 대한 문제제기, 1992년 9월26일 고엽제 피해자들이 정부의 대책 마련을 주장하면서 고속도로에서 벌인 시위, 1993년 드라마로 방영된 <머나먼 쏭바강>으로 인해 베트남 파병 문제는 다시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베트남 파병과 관련해 전쟁특수 문제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지만, 전쟁기간 발생했던 민간인 학살에 대한 논쟁은 뜨겁게 계속되고 있다.
연구자들은
당시 미국 자료와 베트남 현지 증언을 통해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광범위하게 일어났음을 주장하는 반면,
참전 군인들은 자신들이 죽인 것은 민간인이 아니라 베트콩이었으며, 북한군이 한국군으로 변장해 민간인들을 죽인 경우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논쟁은 폭력적인 사태로 번지기도 했다. 2000년 구수정과 고경태 기자의 민간인 학살 보도에 반발하는 참전군인들이 한겨레신문사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민간인 학살을 언급한 교과서 대표필자의 학교에 보수단체 회원들이 몰려가 소란을 피우기도 했다.
베트남전에 파병된 맹호부대 장병들이 1967년 1월 베트콩 소탕작전을 벌이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베트남 파병에 대한 논의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베트남 파병을 결정했던 원래의 목적, 즉 한·미동맹과 안보를 위한 목적은 달성되었는가?
1970년대 한국군의 현대화 작업이 긍정적인 답변의 근거가 된다면,
1968년 청와대 습격사건과 울진·삼척 사건으로 대표되는 남북 간 안보위기, 1971년 주한미군 1개 사단 철수,그리고 1970년대 한·미관계의 악화는 부정적 답변의 근거가 될 것이다.
파병의 군사적 효과에 대해서도 논쟁이 필요하다.
이세호 사령관은 실전 경험, 현대전의 최신 전술과 전투장비, 외국군과의 연합작전 능력 등을 들어 군사적으로 큰 도움이 됐다고 주장했지만, 일부 야전 소대장의 평가는 다르다.
베트남전쟁은 전쟁이 아니라 ‘공비 토벌’이었으며, 막대한 물량 지원하에 일방적으로 벌인 전투는 전력 증강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전쟁특수와 유신 선포, 고엽제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전쟁특수가 그렇게 컸다면 왜 1960년대 후반 외환위기와 부실기업 위기가 발생했을까?
그럼에도 전쟁특수가 없었다면 1973년의 중화학공업화 선언이 가능했을까? 베트남 파병을 통한 물적 토대의 구축이 없었다면, 유신체제 선포가 가능했을까?
미군과 호주군의 고엽제 환자를 위한 기금은 마련됐는데, 한국에서는 참전군인과 고엽제 환자들에 대한 조사와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베트남에 파병됐던 한국군은 1973년 모두 귀환했지만, 그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과 평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쟁특수에 대한 기억과 기대는 지금도 해외파병을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과 파병에 대한 객관적 연구와 그 평가를 둘러싼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 한국 사회의 미래를 위해.
▲ ‘같고도 다른’
미국 주도의 분단 후… 한국은 ‘남침 전면전’,
남베트남은 ‘내부 시민전쟁’
베트남전쟁과 한국전쟁은 표면적으로는 비슷한 성격의 전쟁으로 보인다. 북쪽의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으로부터 자유를 지키기 위한 남쪽의 저항. 그러나 베트남전쟁은 한국전쟁과 기본적 성격부터 달랐다. 한국전쟁은 북한의 침략에 의한 전쟁이었지만, 베트남전쟁은 남베트남 정부에 반대하는 남베트남 베트콩들의 전쟁이었다. 북베트남의 지원이 없었다면 베트콩이 20년이 넘도록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지만, 전쟁의 본질은 시민전쟁이었다. 그러나 두 전쟁은 서로 연결돼 있었다. 17도선을 중심으로 베트남이 분단된 것은 1954년의 제네바회담이었고, 이 회담은 본래 한국에서 정전협정 직후 평화협정안을 만들어내기 위해 열린 고위급 정치회담이었다.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대신 베트남 분단을 결정해 베트남전쟁의 기원이 됐다.
베트남의 분단 자체도 1953년 7월 한국의 정전협정과 인과관계가 있다.
한반도에서 전면전이 중단되자 중국의 지원이 북베트남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로 인해 1954년 초 북베트남 공산당은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에 승리했고, 프랑스는 베트남에서의 철수를 결정했다. 베트남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미국은 제네바회담을 제안했고, 결과적으로 베트남 분단을 결정했다.
미국은 베트남전쟁에서 한국전쟁의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미국이 본격적인 개입을 결정한 것은 중국이 핵무기 실험에 성공한 1964년이었고, 전쟁 기간 중 북베트남 폭격을 계속했지만, 지상군이 17도선을 넘지 못했다.
한국전쟁 때 북진이 중국군을 초래했고, 이것이 미군에 재앙이 되었던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베트남전쟁은 1975년 남베트남 정부의 패망으로 끝났지만, 한국전쟁은 정전체제가 계속되고 있다. 베트남과 달리 남한이 북한을 압도하고 있음에도 전쟁은 끝나지 않고 있다. 언제 이 전쟁을 끝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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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민족적 민주주의 논쟁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507072209035&code=210100&med_id=khan
박정희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물리적 시간에서 박정희 시대는 1979년에 끝났지만, 사회적 시간에서 박정희 시대는 현재진행형이다.
발전국가, 권위주의, 군사문화 등 박정희 시대를 이룬 구성물은 우리 사회에 여전히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담론의 측면에서
첫번째로 만나는 박정희 시대의 뜨거운 쟁점은 ‘민족적 민주주의’였다.
“시체여! 너는 오래전에 이미 죽었다. 죽어서 썩어가고 있었다. 넋 없는 시체여! 반민족적 비민주적 민족적 민주주의여!”
1964년 5월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에서 당시 서울대 학생이었던 시인 김지하가 쓴 장례식 조사(弔詞)인 ‘곡(哭) 민족적 민주주의’의 첫 부분이다.
1964년 5월20일 서울대 학생들이 문리대(현재 동숭동 마로니에 공원)에서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이 주창한 ‘민족적 민주주의’의 장례식을 거행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비서구사회에서 민족주의, 민주주의, 발전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독립국을 이끌었던 3대 이념이었다.
‘민족적 민주주의’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결합시킨 말이다.
그런데 학생들이 주도했던 1960년 4월 혁명의 핵심 이념을
1964년 당시 대학생들은 왜 민족적 민주주의의 장례식을 치러야 했을까.
민족적 민주주의 논쟁은 1960년대의 박정희 시대를 이해하는 중요한 한 통로를 제공한다.
■ 논쟁의 진행 과정
민족적 민주주의를 본격적으로 제시한 이는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그는 1963년 10월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 후보에 대항해 민족적 민주주의를 주창했다.
정치학자 강정인(서강대 교수·정치학)에 따르면,
박정희는 서구식 민주주의를 우리 실정에 맞게 수정·변형한 ‘행정적 민주주의’(군정 단계), ‘민족적 민주주의’(제3공화국), ‘한국적 민주주의’(유신체제)로 이어지는 담론을 제시했다.
군정에서 민정으로 가는
1963년 대선은 민족적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일대 격돌한 선거였다.
역사학자 오제연(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에 따르면,
박정희와 김종필이 제시한 민족적 민주주의가 자주와 자립 지향의 강력한 민족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였다면,
윤보선과 야당이 제시한 자유민주주의는 순수한 자유민주주의였다.
박정희는 자유민주주의를 불투명하고 이질적인 민주주의라고 비판한 반면, 윤보선은 민족적 민주주의에 대해 민족적 이념을 망각한 가식의 민주주의라고 비판했다.
선거 과정이 치열해지면서 서로에 대한 비판 수위도 높아졌다.
박정희와 김종필은 윤보선을 ‘민족 이념이 결핍된 사대주의자’로 공격했고, 윤보선과 야당은 박정희를 ‘중립주의자·반미주의자·공산주의자’라고 반격했다.
박정희·윤보선·김종필(왼쪽부터)
주목할 것은 당시 여론의 흐름이었다.
논쟁이 진행되면서 박정희는 민족적 민주주의자로 인식됐고, 민족주의에 호감을 갖고 있던 적지 않은 이들은 박정희를 지지하게 됐다.
1960년대 초반이라는 당대의 관점에서 볼 때 민족주의는 대체로 진보적 사상으로 받아들여졌다. 20세기 전반의 식민지 경험을 돌아볼 때 민족주의는 강렬한 유토피아적 에너지를 갖고 있던 이념이었다.
민족적 민주주의가 시험대에 오른 것은
박정희 정부의 한일협정 체결 과정에서였다.
특히 학생운동을 주도한 대학생들은 한일협정 체결 추진에 반대했고, 나아가 민족적 민주주의를 비판했다.
1964년 5월20일 서울대생을 포함한 3000명의 대학생들은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 앞서 말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거행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반정부운동으로 바뀌었고, 6월3일 1만여명의 대학생들이 박정희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자 정부는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6·3항쟁은 이렇게 일어났다.
1965년 한일협정 체결 이후 민족적 민주주의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967년 대선에서 박정희는 다시 한 번 민족적 민주주의를 언급했다. 하지만 이때의 민족적 민주주의는 경제개발에 따른 자립을 중시하는 언설로 나타났다.
1960년대를 통틀어 볼 때, 민족적 민주주의는 조국 근대화, 새역사 창조, 민족중흥, 자립경제 등의 의미를 담은 ‘산업화 민족주의’에 가까운 것이었다. 민주화보다 산업화가 당시의 시대정신이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67년 대선 이후 민족적 민주주의는 다시 부상하지 않았다.
■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긴장
역사적으로 근대 사회에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는 내적인 긴장관계를 가진다.
그것은 민족주의에 담긴 특징, 즉 대외적 민족자결을 부각시키는 이념이자 대내적 체제유지를 위한 헤게모니 장치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민족주의는, 한편에서 세계적 차원에서 진행되는 국가 간 경쟁을 고려할 때 유용한 담론의 의미를 갖지만, 다른 한편에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권위주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박정희 정부의 민족적 민주주의는 당시 국민들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민족적 민주주의를 앞세운 1963년과 1967년 두 번의 대선에서 박정희 후보가 당선된 사실을 돌아볼 때, 민족적 민주주의는 그 나름의 헤게모니를 발휘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서구사회에서 민족주의의 대중적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던 까닭은 물질적 생활에서 서구에 대한 모방이 성공적일수록 정신적 문화에 대한 보존의 욕구는 되레 강화된다는 점에 있었다.
단일 민족으로서의 오랜 역사와 일제 강점기의 민족해방 투쟁에 대한 기억은 민족주의에 배타적인 의미를 부여하게 했다. 이 민족주의가 1960년대에 발전주의와 결합해 경제성장을 위한 산업화 민족주의로 나타났다면, 민주주의와 결합해서는 민족적 민주주의로 담론화된 셈이었다.
민족적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두 이념에서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라기보다 민족주의였고, 광복을 이룬 지 20년이 채 되지 않은 1960년대 초반의 상황은 이 민족주의에 유리한 시대적 환경을 제공했다.
문제는 담론과 현실의 긴장에 있었다.
민족주의를 적극적으로 표방했음에도 한일협정 체결을 목격하면서 대중들은 박정희 정부의 민족주의에 대해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다.
1967년 대선에서 박정희 후보가 윤보선 후보에게 승리한 것은 민족적 민주주의에 있었다기보다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가시적인 성과에 있었다.
민족적 민주주의는 3선 개헌을 거쳐 10월 유신에서 한국적 민주주의로 변질됐으며, 결국 절차적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반민주주의의 공고화로 귀결됐다.
▲ 박정희 정권 비판자에서 박근혜 지지자로… 김지하의 아이러니
1960~70년대 시인 김지하의 삶은 박정희 시대의 민주화운동을 상징한다. 1959년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한 그는 1960년 4월 혁명 후 학생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1964년 5월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 거행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에서는 ‘곡(哭) 민족적 민주주의’를 작성했고,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되자 지명수배자가 돼 은신생활을 하기도 했다.
김지하가 시인으로 알려진 것은
1969년 시 전문지 ‘시인’에 문학평론가 김현의 소개로 <녹두꽃> 등 5편이 ‘지하’라는 필명으로 게재된 이후였다. 1970년대에 들어 그는 주목할 만한 시를 계속 발표했다. 특히 1970년 월간지 ‘사상계’ 4월호에 <오적>을 발표함으로써 큰 관심을 모았다.
“시(詩)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 내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 / 볼기를 맞은 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 / 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 / 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겄다”로 시작하는, 특권층의 권력형 비리와 부패상을 판소리 가락으로 비판한 <오적>은 그의 시적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준 작품이었다.
<오적>이 1970년 6월1일 신민당 기관지인 ‘민주전선’에 다시 게재되자, 경찰이 신민당사를 수색해 ‘민주전선’ 10만부를 압수함으로써 <오적>은 필화사건을 넘어 정치적 사건으로 커졌다.
또 6월26일 일본 ‘슈칸아사히(週刊朝日)’에 소개돼 김지하라는 이름은 일본에서도 상당한 관심을 모았다. 이 해에 그는 ‘시인’ 6·7월호에 시인 김수영이 구사한 풍자의 의의와 한계를 밝히는 평론 ‘풍자냐 자살이냐’를 발표하기도 했다.
1970년 <오적>으로 구속된 이후 그는 1974년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1980년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1980년대 이후 그는 민중시인·민주투사에서 생명사상가로 전환했다. 1991년 5월 조선일보에 기고한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로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2012년 12월 대선에선 박근혜 후보를 지지해 역사의 아이러니를 생각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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