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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29 영원한 금기(禁忌)는 없었다. ‘친일’
- 2015.07.29 1948년 12월12일 유엔 총회 195호 결의안
- 2015.07.29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가...
- 2015.07.29 오보로 시작한 1945년 찬탁과 반탁
[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
(5) 친일파 논쟁
1907년 5월 구성된 친일파 이완용 내각. 이완용과 내각 대신들은 그해 6월 헤이그 특사사건이 발생하자 고종 황제에게 “물러나라”고 협박했다.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고 제국주의의 통치와 전쟁에 협력한 사람들을 정치무대에 다시 서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은 국민들에게 화사첨족(畵蛇添足)임에도
해방 70년 동안 한국 사회의 가장 뜨거운 이슈 중 하나는 ‘친일파’ 문제이다. 1945년부터 시작돼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논쟁이 계속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인 1947년 우익과 중도파 정치인들로 구성되었던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민족반역자, 부일협력자, 전범,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을 제정했고, 대한민국은 헌법에 근거해 1948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조직했다.
미 군정도 1946년 소위 ‘추수폭동’이 부일 경력을 가진 경찰의 쌀수집으로 인해 일어났다는 점을 인정할 정도로 친일잔재 척결은 광복 후 한국 사회가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돼 압송되고 있는 경성방직 사장 김연수(가운데)와 ‘3·1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인 최린.
하지만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고, 친일파 척결의 상징이었던 김구마저도 ‘빨갱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안두희의 총탄에 쓰러졌다.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했던 인사들이 다시 정부의 요직에 올랐다. 일본 왕에게 충성했던 경찰과 군인들이 다시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역사학이나 정치학이 아닌 문학 전공의 선구적인 연구자 임종국이 1966년 <친일문학론>을 출간할 때까지 ‘친일’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금기시되었다.
■ 영원한 금기(禁忌)는 없었다.
<해방전후사…> 통해 수면 위로
1980년 서울의 봄이 오자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통해 친일파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자연스럽게 1989년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6권으로 마무리될 때까지 친일파 문제는 핵심적인 논의의 하나가 되었다. 너무나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와 함께 친일잔재의 척결이 사회 전반에 걸쳐 사회적 담론으로 자리 잡았다.
<실록 친일파>(1991)에서부터 <친일파, 그 인간과 논리>(1991), <친일파 죄상기> <친일파 99인> <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이상 1993) 등 저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물론 부작용도 없지 않았다.
친일단체에 이름을 올렸다는 이유만으로 친일파 명단에 오르는 경우가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반민특위에서 규정한 바와 같이 친일파로 규정할 수 있는 철저한 기준이 마련될 필요성도 제기됐다.
그러나 친일잔재 척결문제는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명제였다.
어떤 사회보다도 식민지 시기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강했던 한국 사회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했다는 것은 ‘범죄행위’였다.
2012년 선거에서 대통령 후보 개인의 문제보다 박정희의 친일문제가 더 많이 회자됐다는 것을 보더라도 친일문제가 갖고 있는 사회적 폭발력을 알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2002년 발간된 ‘친일’을 옹호한 <친일파를 위한 변명>은 사회적으로 큰 충격.
법원이 이 책을 ‘청소년 유해도서’로 판시하면서, 책은 더 유명세를 탔다. 마치 최근 <제국의 위안부>를 언론과 법원이 베스트셀러로 만들어준 것과 유사한 상황이 이미 10년 전에 발생했던 것이다.
학계에서의 논쟁은 더욱 심각했다.
2001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파 인명사전> 출간 선언에
2002년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서양사)는 한 학회에서 과거사 문제에 대한 한국 사회의 ‘집착’을 비판했다.
안병직은 이후 ‘과거사 규명, 무엇이 문제인가’(2005)라는 제하의 글을 발표하면서 한국 사회의 친일파에 대한 ‘강박관념’을 비판했다.
그는 한국 사회의 강박관념이 식민지 시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가리고 있으며, 과거사 법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과거사 청산 방식이라고 주장했다. 또 친일잔재 청산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식민지의 회색지대>(2003)를 출간한 윤해동 한양대 교수(한국사)는
‘과연 친일파라는 모호하고 임의적인 대상을 깨끗이 청산해버릴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친일파 청산이란 ‘정신적 위안을 얻기 위한 도덕적 정언명령’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친일과 반일이라는 두 가지 대립된 틀로만 식민지 조선인들을 이해할 수 없으며, 다수의 회색지대가 존재했던 현실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동요하면서 협력하고 저항하는 양면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 사실 규명과 정의를 세우는 문제
안병직과 윤해동의 주장은 역사학계와 민족문제연구소로부터
소위 ‘식민지근대화론’이라고 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 이데올로기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
<친일파 인명사전>을 주도한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의 기준을 ‘자발성’과 ‘고위직’에 한정했기 때문에 ‘지원제’를 가장해 강제로 동원된 대학생들, 강제로 이루어진 창씨개명의 경우 친일로 규정하지 않았다는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식민지 시대를 반일과 친일의 이분법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당시의 시대상을 객관적으로 분석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은 이후 식민지 시기 연구의 발전에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친일파 옹호와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
식민지 시대의 ‘개발’과 ‘근대’가 곧 식민지에 대한 수탈과 함께 ‘카이로 선언’에서 규정한 제국주의적 침략과 팽창을 동반한다는 역사적 사실을 망각한 채 강조된다면, 제국 일본의 식민지 정당화를 위한 논리와 다를 것이 없다.
둘째로 이 논쟁이 정치화되었다는 사실이다. 노무현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특별법’은 친일파 논쟁의 한 축이 되었다. 해방 직후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60년간 해결되지 못하면서, 과거사 문제는 남남갈등의 한 이슈가 된 것이다. 한국 사회의 주류는 비주류에 의한 청산작업을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친일파 척결을 주장하는 그룹은 ‘좌빨’로 규정되었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제때 해결되지 못했을 때 이데올로기와 관계없이 민족적·국가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라는 본래의 성격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당사자 대부분이 사망한 상황에서 친일파 문제는 더 이상 처벌의 문제가 아니다.
학계에서는 사실 규명의 문제이며, 사회적으로는 정의를 세우는 문제이다. 더 중요하게는 친일파나 식민지근대화론 문제가 한·일 간 감정싸움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에 친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민족을 팔고 은사금을 받은 사람들, 탐욕과 폭력에 근거한 ‘제국주의 전쟁’에 협력한 사람들의 죄상을 밝히는 것이 더 중요한 임무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인류 보편적인 공감대를 얻어낼 수 있다. ‘매국’과 ‘전쟁범죄’의 진상을 밝히지 못할 때, 또 다른 매국과 전쟁범죄는 아무런 죄의식 없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 조선·동아일보 1985년 서로 “친일” 이전투구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친일파 논쟁은 1985년 4월1일 동아일보 창간 65주년 기념호가 발단이 됐다. 동아일보는 3면에 실린 ‘동아일보, 민족혼 일깨운 탄생’이란 조용만 칼럼을 통해 “총독부 당국은 신중히 고려한 끝에 민족진영 측으로 동아일보를 허가하고, 다음으로 실업신문을 내겠다고 하는 대정실업친목회 측에 조선일보를 허가하고 끝으로 신일본주의를 표방하는 국민협의회 측에 시사신문을 허가하였다”고 보도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조선일보를 ‘실업신문을 위장한 친일신문’으로 규정했다. 심지어 조선일보의 사장이 상업은행장이었기 때문에 민중들이 친일신문임을 알고 주식을 사지 않아 경영난에 허덕이다가 기회주의 신문으로 전락했다고 주장했다.
같은 해 4월12일자에서는 동아일보가 일본 제국에 저항하는 ‘국가의 적’으로 규정되었다는 기사(7면)를 게재하면서 조선일보가 일본에 협력한 일간지였음을 암시하는 내용을 포함했다. 당시 일본의 우익단체에서 발행한 신문에 “불온한 동아일보가 조선일보와의 합판을 강력하게 거부하고 총독부의 시책에 항거하고 있다”는 내용이 보도되었다며 동아일보가 민족지였음을 조선일보에 비교해 강조했다.
이틀 후 조선일보의 반격이 시작됐다.
논설고문 선우휘는 ‘동아일보 사장에게 드린다’는 글을 통해 동아일보의 친일적 성격을 지적했다.
“오늘날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창간 후 조선일보가 재빨리 옳은 주장과 바른 기사를 써서 사흘이 멀다 하며 압수와 정간을 당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을 동아일보는 무엇이라고 설명하겠습니까? (중략) 논쟁이 격화되면 궁극적으로 인촌(김성수) 선생까지 욕보이는 결과가 된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이에 동아일보는 다시 4월17일 사고를 통해 “우리는 양지가 65년 전의 기록 시비로 더 이상 지면을 소비하고 자제를 잃을 경우 역사에 흠을 남기고 사회적 안정을 해칠 것을 걱정합니다’라고 하면서 논쟁에서 한발 물러섰지만, 조선일보는 4월19일 ‘우리의 입장: 동아일보의 본보 비방에 붙여’를 통해 동아일보의 초대 사장 박영효의 친일 논란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가 반박하지 않음으로써 이전투구의 논쟁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이상 정운현, <임종국 평전> 참조)
친일을 둘러싼 두 신문의 논쟁은 판매부수를 늘리기 위한 이전투구에 지나지 않았다.
1980년대 들어 조선일보 구독자가 급증하자, 위기의식을 느낀 동아일보가 조선일보의 전력을 비난하고 나온 것이다.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 아닌가? 친일 문제가 한국에서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를 잘 보여주는 해프닝이었다.
그래도 4·19 혁명 25주년에 실린 다음과 같은 조선일보의 마지막 기사 중 일부는 명문(名文)이라 할 것이다.
“우리 민족의 현대사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과 관계없이 항용 특정계파의 일방적 자기미화의 논리로 잘못 기술되곤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친일 및 부일 세력과 항일투쟁 세력을 역사적 가치에 따라 명확히 구분하지 못한 채 일제하의 친일이 해방 후의 지배세력으로, 그리고 반민족적 반민주적 세력이 민족세력으로 둔갑하는 오류를 반복한 데서 비롯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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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
(4) 유일 합법정부 논쟁
1948년 12월12일 유엔 총회 195호 결의안은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에서 선거를 통해 수립된 유일한 정부라고 승인했다.
그러나 승인된 대한민국은 오직 유엔임시위원단의 감시 아래에 선거가 실시되었던 지역에만 국한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지역(that part)’이라는 표현은 바로 그 점을 의미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유엔 총회의 승인안은 크게 세 가지 부분
첫째로 대한민국 정부는 ‘유엔임시위원단이 관찰하고 협의할 수 있었고, 한국인의 대다수가 살고 있는 한국의 그 지역’에서 통제와 관할권을 갖는 합법적 정부.
둘째로 이 정부는 ‘한국의 그 지역에서 유권자들의 자유의지가 표현되었다고 일컬어지고 임시위원단이 관찰한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다’.
마지막으로 대한민국 정부는 한국에서 오직 그러한 정부.
유엔이 결의안을 통해 대한민국 정부를 합법정부로 승인했다는 소식을 전한 경향신문 1948년 12월14일자 기사.
▲ 한국 정부의 관할권 문제
먼저 문제가 된 것은 제주도였다. 제주도는 1948년 5월10일에 선거가 실시되지 않았다. 4·3항쟁 때문이었다. 1949년에 가서야 유엔한국위원단의 감시 아래 선거가 실시된 이후에야 정식으로 대한민국 영토가 되었다.
1950년 인천 상륙작전 이후 한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했을 때 누가 38선 이북 지역을 관할하는가가 문제가 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북 5도에 도지사를 임명했다.
그러나 유엔군과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은 한국 정부가 임명한 도지사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국제법적으로 대한민국은 그 지역에 관할권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전후 수복지구도 문제가 됐다.
서해5도와 강원도의 일부 지역이었다.
한국 정부는 이 지역에 대한 관할권이 없었기 때문에 1954년 총선거에서 이 지역의 주민들에게는 투표권이 부여되지 않았다.
유엔군과 한국 정부와의 협약에 의해 정전협정 후 1년이 지나서야 관할권이 이양되었다.
2000년 이전까지 모든 교과서는 유엔의 승인을 근거로 ‘대한민국은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정의했다. 이것이 곧 한반도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뒷받침하는 근거였다.
1991년 문제가 발생했다.
9월17일 오후 3시30분 46차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과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159개 회원국의 만장일치로 유엔에 가입한 것이다.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했던 대한민국 정부의 주장에 금이 간 것이다.
남북한은 원래 유엔에 개별적으로 가입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고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었기 때문에 남한과 북한이 각각 다른 국가로서 가입할 경우 통일의 원칙에서 어긋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암묵적 원칙을 먼저 깬 것은 남한 정부였다.
1973년 6·23 선언을 통해서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6·23 선언에서 ‘북한이 우리와 함께 국제기구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으며(제4조), ‘북한과 함께 유엔에 가입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제5조)라고 북한에 제안했다.
1991년 12월31일 ‘남과 북은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제1조)고 전제한 남북기본합의서에 합의했다.
1991년 12월13일 제5차 남북 고위급회담 제3차 본회의에서 남측의 정원식 총리(오른쪽)와 북측의 연형묵 총리(왼쪽)가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에 공식서명한 뒤 악수하고 있다.
1991년 일본과 북한의 수교 협상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국제법적 지위에 대한 논쟁이 다시 재현되었다. 일본이 북한 정부를 법적으로 어떻게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일본은 이미 ‘국제연합 총회에서 채택된 결의 제195호(III)를 상기’한다는 조건에서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한 바 있다.
도대체 유엔의 결의안을 다시 상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일협정에서 일본은 대한민국 정부를 ‘그 지역’에서만 관할권을 갖는 정부로 규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북한 정부와도 수교협상을 진행한 것이다.
만약 1965년 한일협정에서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 전체에서 유일 합법정부로 규정했다면, 일본은 북한 정부와 수교를 할 수 없다. 북한의 유엔 가입도 마찬가지다. 유엔의 승인이 한반도 전체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면, 북한 정부는 불법 단체가 되며, 이는 북한 정부가 유엔의 성원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 유엔 승인안, 헌법 3조와 충돌
민주화 이후 역사학자들은 유엔의 승인안에 기초해서 대한민국 정부의 국제법적 지위에 대한 규정을 수정했다.
그 결과는 2003년부터 ‘근현대사’ 검정교과서에 반영되었다. ‘대한민국은 1948년 총선거가 실시된 38선 이남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것이었다. 이는 대한민국 헌법 3조(‘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부속도서로 한다’)와 충돌하는 것이었지만, 이후 10여년간 정부의 승인 아래 모든 역사 교과서들은 대한민국 정부가 ‘1948년 5월10일 선거가 이루어진 지역(또는 38선 이남)에서 수립된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서술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2013년 갑자기 교육부가 검정을 통과한 한국사 교과서에 대해 수정권고안을 냈다.
교육부는 ‘당시 유엔 결의문은 합법적인 정부로 한반도에서는 유일하게 대한민국뿐임을 명기’하고 있기 때문에 ‘38도선 이남’이란 표현을 삭제하라고 권고했다.
교육부의 수정권고안이 나오자마자 뉴라이트 학자들 사이에서 교육부의 입장을 옹호하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의 국제법적 관할권을 선거가 이루어진 지역, 곧 38선 이남으로 한정한 것은 유엔 결의안을 ‘의도적으로’ 왜곡한 것이며, 원문에는 ‘한국에서’(in Korea)라고 표기되어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유엔의 대한민국 정부 승인안을 둘러싼 논쟁은 이후 다시 재개되지 않았다. 승인안의 영문 표현을 보면 대한민국의 관할권이 ‘선거가 이루어진 지역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승인안의 내용을 왜곡하면서까지 논쟁을 하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가 암묵적으로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유엔 승인안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유독 유엔과 많은 관계를 맺고 있다. 한국전쟁 시기 창설된 유엔군은 지금까지도 존재하고 있으며, 유엔은 유엔한국재건단(UNKRA)과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을 조직, 전후 한국의 재건을 도왔다. 1980년대까지 유엔의 생일인 10월24일이 공식 휴일(유엔데이)이었다.
■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과 합법성은 유엔의 승인에서만 찾아야 하는가?
한국이 이렇게 유엔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미국의 정책과 관련이 있다. 필리핀이나 일본과는 달리 유엔을 통해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던 것이다. 북한이 남침하도록 빌미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진 1950년 1월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의 연설에서도 미국의 방위선에서 한국이 제외되었지만, ‘국제기구를 통해 수립된 국가는 국제기구를 통해 지키겠다’는 원칙이 천명되었다. 미국으로서는 소련과의 합의를 통해 정부를 수립하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유엔을 통해 그 절차적 합법성을 인정받고자 한 것이었다.
게다가 1948년 상황에서 유엔은 세계를 대표할 수 있는 기구가 아니었다. 1960년대 이후 개발도상국들이 대거 가입하면서 유엔은 명실상부한 유일한 세계정부가 되었다.
현대 국가의 정통성은 신화나 외부로부터의 인정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서 내려오고 알에서 태어나고 두꺼비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먼 옛날의 일이다. 외부의 인정만으로도 정통성을 얻고자 했던 것은 만주사변 이후 일본이 만주국의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했을 때에나 있을 법한 일이었다.
정통성과 합법성은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동의에 의해 나와야 한다.
선거를 하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또한 구성원들이 그 국가 아래에서의 삶에 만족해야만 한다. 그래서 민주주의와 경제번영이 중요한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국가의 정통성은 확정되어 있지 않다. 국가가 구성원들의 행복을 책임질 수 있는가에 따라 정통성이 있다가도 없을 수 있고, 없다가도 있을 수 있다. 더 이상 사실을 왜곡하면서까지 진행되는 구시대적 논쟁이 없었으면 한다.
■만약 북한에서 급변사태가 발생하면 어떻게 될까?
한국 정부는 당분간 관할권을 갖지 못한다. 유엔 승인안의 국제법적 효력이 계속되는 한 유엔의 권위 아래에 다국적 국가로 구성된 기구가 수립될 가능성이 크다. 급변사태가 발생하면 북한에 가서 부동산 투자를 해야겠다는 것은 꿈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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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좌우파 문학 논쟁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4202205255&code=210100
ㆍ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가…
1945년부터 1950년까지 이뤄진 문학 논쟁의 핵심은 민족문학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있었다. 문학이 문화를 주도하던 당시 이 과제는 결국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가의 문제와 분리되기 어려웠다. 이런 측면에서 계급문학을 주장하든 순수문학을 표방하든 문학 논쟁은 새로운 국가와 사회의 건설이라는 정치 과정과 긴밀히 결합될 수밖에 없었다.
1945년 광복에 담긴 의미가 새로운 국가, 새로운 사회의 건설
이 건설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1945년에서 1948년까지의 이른바 ‘해방 공간’ 3년 동안 진행된 미군정, 대한민국 건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성립, 분단 시대의 개막은 현대사의 구조적인 조건을 형성했다.
광복에서 한국전쟁 발발에 이르는 5년이 결코 긴 시간은 아니다. 하지만 이 기간에 현대 국가가 등장했고, 시민사회는 분출하고 폭발했다.
이 열정과 폭풍의 시대의 한가운데 놓인 것은 이념 논쟁이었다.
새로운 국가와 사회 건설에서 우파와 좌파는 서로 다른 기획을 제시했고, 공론장에서 치열하게 격돌했다.
이러한 이념 논쟁에서의 문학 논쟁 의의
첫째, 당시 문학은 시민사회와 문화를 주도했다.
둘째, 문학 논쟁은 우리 사회 모더니티 이해의 중요한 출발점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1949년 스물여덟 살을 맞이한 시인 김수영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진에는/ 안경이 걸려 있고/ 내가 떳떳이 내다볼 수 없는 현실처럼/ 그의 눈은 깊이 파지어서 (…) 나는 모든 사람을 피하여/ 그의 얼굴을 숨어 보는 버릇이 있소”(시 ‘아버지의 사진’)라고 고백했다. 이 진술에는 아버지로 상징되는 전통에의 애착과 그 전통으로부터 결별하려는 의지라는 애증병존의 자의식이 담겨 있다.
꿈에도 그리던 광복을 이뤘는데, 그렇다면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 임화 대 김동리의 문학 논쟁
일제강점기에 ‘카프(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를 주도한 시인 임화는 해방 이후 대중적 참여를 통한 민족문학의 수립을 주창했다(왼쪽 사진). 우파 쪽 문학이론의 선봉에 섰던 소설가 김동리는 휴머니즘에 바탕을 둔 순수문학이 민족문학이라고 역설했다(오른쪽).
논쟁은 본디 두 차원에서 진행된다. 하나는 서로의 견해와 주장을 비판하고 반비판하는 직접적인 논쟁이라면, 다른 하나는 서로 다른 논리와 세계관이 충돌하고 경쟁하는 포괄적인 논쟁이다. 후자의 의미로 논쟁을 이해할 때 광복 직후 좌우파 문학 논쟁을 주도한 이들은 임화, 이원조, 한효, 김동리, 조연현, 조지훈이었다.
먼저 포문을 연 이들은 좌파 쪽 이론가들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카프(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를 주도했던 임화는 계급성·당파성보다 대중성·민족성을 중시했다. 그가 겨냥한 것은 광범위한 대중적 참여를 통한 민족문학의 수립에 있었다. 이육사의 동생인 이원조는 이런 좌파적 민족문학론을 인민민주주의 민족문학론으로 개념화했다.
인민민주주의 민족문학론은 무산계급을 중심으로 지식인·농민·소시민이 결합해 민족의 해방, 국가의 완전독립, 토지 문제의 평민적 해결을 추구하는 온건좌파 문학론이었다.
반면 한효는 민족성보다는 계급성을 중시했다. 그는 예술을 이데올로기로 이해하고, 이데올로기는 당파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광범위한 계급연합을 추구한 인민민주주의 민족문학론에 맞서 무산계급 단일독재를 주장한 한효의 견해는 급진좌파 문학론이었다.
좌파 문학계 안에서 이러한 이론적 차이는 문학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당시 남로당 노선과 북로당 노선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우파 쪽 문학이론의 선봉에 섰던 이는 소설가 김동리였다.
김동리는 인간성 옹호의 휴머니즘에 바탕을 둔 순수문학이 민족문학이라고 주장했다. 그에게 민족문학이란 자신에게 부여된 운명을 발견하고 그 극복을 위해 노력하는 ‘생(生)의 구경적 형식’ 탐구였다.
문학평론가 조연현과 청록파 시인 조지훈은 문학이 정치에 예속되는 것을 비판하고, 문학과 정치의 분리를 강조했다. 특히 조지훈은 본래의 가치와 사명에 주력하는 문학의 역할을 주목했다.
우파 문학이론이 순수문학을 부각시켰다고 해서 정치성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나라 만들기가 치열하게 모색됐던 당시에 문학은 처음부터 정치와 분리되기 어려웠다.
문학이론은 다양한 문학운동 조직들과 긴밀히 결합됐고,
이 조직들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을 의식하고 있었다.
좌파의 대표 조직인 조선문학가동맹 창립대회에 소련 총영사가, 우파의 대표 조직인 조선문필가협회 창립대회에 미군정관이 참석한 사실은 당시 문학의 정치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좌익들이 1947년 5월1일 서울 남산에서 군중집회를 열고 있다.
우익들이 1947년 8월15일 광주 중앙공립국민학교에서 해방 2주년 기념식을 주최하고 있다.
■ 문학 논쟁의 현재적 의미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을 고비로 문학계 헤게모니는 점차 우파에게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좌파 문학이론을 주도했던 임화·이원조·이태준은 이미 월북한 상태였다.
정부 수립을 전후한 시기부터 한국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주목할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1947~1948년에 진행된 김동리와 김동석의 논쟁이었고,
다른 하나는 문학평론가 백철로 대표되는 중간파의 활동이었다.
문학평론가 김동석은 김동리의 순수문학론이 광복이 이뤄진 상황에선 존재할 근거가 부재하다는 점을 비판하고, 인민의 생활 묘사에 주력하는 리얼리즘 문학론을 제시했다. 이에 김동리는 생활을 넘어서 삶의 본질적 의미를 추구하는 고전으로서의 민족문학론으로 맞섰다. 평론과 대담으로 이어진 두 사람의 논쟁은 당시 좌파와 우파의 논리를 반복한 채 감정적 대응으로 진행된 아쉬움을 남겼다.
중도적인 백철은 좌파의 조급함과 우파의 완고함을 모두 비판했다.
그는 중간파적 문학이론을 작가가 놓인 현실을 주목하는 ‘신현실주의파’라고 명명하고, 좌우파와 구별되는 새로운 리얼리즘과 윤리를 부각시켰다.
정부 수립 이후 우파가 문단 헤게모니를 장악한 상황에서 이러한 백철의 논리는 영향력이 크지 않았지만, 당시 중간파 작가들인 염상섭·계용묵·황순원 등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는 유용한 문제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복 직후 문학 논쟁에
국문학자 김윤식이 날카롭게 지적하듯
해방 공간은 ‘역사를 선택할 수 있는 참으로 희귀한 공간’이었고, 이러한 시대적 특징은 문학의 이념적 대결을 격화시킨 셈이었다.
70년이 지난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광복 시기에 이뤄진 문학 논쟁에는 낡음과 새로움이 공존한다. 먼저 그 낡음은 광복 이후 그동안 누적된 역사의 무게로부터 비롯된다. 민족문학에서의 ‘민족’은 이제 세계화의 진전과 다문화사회의 도래를 맞이해 새롭게 재구성돼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한편 그 새로움은 문학으로 대표되는 예술의 본래적 의미에서 비롯된다. 민족문학에서의 ‘문학’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현실의 재현인가, 아니면 이상의 추구인가. 문학으로 대표되는 문화가 가져야 할 궁극적인 의미는 개인 및 사회의 존재 이유에 대한 질문과 해명에 있다. 새로운 역사를 쓰기 위한 유토피아적 기획들이 치열하게 경쟁했던 광복 직후 문학 논쟁은 우리 문화가 가야 할 방향에 대해 여전히 작지 않은 메시지를 안겨준다.
▲ 광복 직후 가장 주목받은 작가는 이태준과 황순원이다.
이태준, ‘해방 전후’서 좌파로의 변모 과정 담아
황순원, ‘목넘이 마을의 개’에서 이념논쟁 성찰
이태준은 일제강점기에 9인회를 이끌던 순수문학의 대표 소설가이자 문장론의 고전인 <문장강화>의 저자였다. 광복이 되자 그는 좌파로 변신해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해방 전후>(1946)는 이태준의 자전적 중편소설이다.
주인공 현의 행적은 순수문학을 지향했던 소시민적 소설가에서 이념문학을 추구하는 좌파 소설가로 변모해가는 작가 내면의식의 변화를 담고 있다. 일제강점기 말기와 해방 직후 지식사회의 현실과 풍경을 생생하게 돌아볼 수 있는 작품이다. 1946년 월북한 그는 불행한 말년을 보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광복 당시 고향인 평안남도에 머물러 있던 황순원은 1946년 월남했다. 광복 직후 황순원은 중도적 입장을 견지했다. 좌파 문학조직인 조선문학가동맹 기관지 ‘문학’에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그가 평생 추구한 것은 존재의 의미에 대한 근본적 탐구였다.
<목넘이 마을의 개>(1948)는 한 산골 마을을 배경으로 한 황순원의 단편소설이다. 버려진 개 신둥이의 강인한 생명력과 그 새끼들을 돌보는 간난이 할아버지의 배려는 생명의 고귀함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잘 보여준다.
오랫동안 전승된 겨레의 이야기를 소설화해 이념논쟁으로 뜨거웠던 광복 직후 현실을 우회적으로 성찰하려는 황순원의 문제의식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태준(왼쪽)·황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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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찬탁과 반탁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4072226155&code=210100
1945년 12월27일자 동아일보의 1면 톱기사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란 제목의 1945년 12월27일자 동아일보 1면 톱기사. 정용욱 서울대 교수는 ‘신탁통치 파동과 미군정’이란 글에서 동아일보는 3상회의 결정이 나오기 전 왜곡된 보도를 했고, 미군정은 오보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 지적했다.
모스크바에서 만난 미국, 소련, 영국의 외상들이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에 합의했는데, 특히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동아일보의 오보였다
■ ‘3상’ 결정안, 신탁통치안 아니다
결정안이 곧 신탁통치안은 아니었다.
전체 4항 중 3항에 신탁통치와 관련된 내용이 있지만, 1항과 2항은 한국인들의 대표를 구성원으로 하는 단체를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미군과 소련군이 공동위원회를 설립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신탁통치안도 미소공동위원회와 한국인들이 구성한 단체 사이의 협의를 통해 구체적인 사항을 정하도록 규정하였다.
전체 4항 중 미국이 주장한 신탁통치안은 3항에만 포함돼 있었고, 1항과 2항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소련의 주장이 수용된 것이었다. 말하자면 미국이 찬탁이고, 소련이 반탁이었던 것이다.
▲ ‘3상회의’ 결정의 본질
유럽 확보가 급한 미·소, 신탁이든 독립이든 한국에서 빨리 발을 빼야 했다
미국은 왜 한국에 신탁통치를 실시하려고 했는가? 소련은 왜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이른 시간 내에 한국에 독립정부를 세우고자 했는가? 방식은 다르지만, 미국과 소련은 한국에서 가능한 한 빨리 손을 빼고 싶었다. 미국과 소련의 우선적 관심은 한반도가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미국과 소련은 고민에 빠졌다. 과거 유럽과 일본에 의해 분할돼 있었던 세계를 미국과 소련이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세계대전을 통해 유일하게 본토가 피해를 보지 않은 국가였고, 소련은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냉전 체제 아래에서 공산권의 큰 형님 역할을 해야 했다. 문제는 미국과 소련이 자유세계와 공산세계의 컨트롤타워였다고 하더라도 그 힘이 제한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제국을 이끌어본 경험도 없었다. 식민지가 없었던 소련은 차치하더라도 미국은 1945년 이전 유일한 식민지인 필리핀마저도 직접 통치할 힘이 없어 신탁통치를 실시했다.
대외정책에서 우선순위를 정해야 했다. 냉전정책의 창시자인 케난은 미국이 세계대전을 일으킬 능력을 갖추고 있는 영국과 독일, 그리고 일본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자원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 지역에 집중한 뒤 이들과 함께 세계를 경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1947년 제출된 미 군부의 문서에서 미국이 원조해야 하는 16개 국가 중 한국의 순위는 13위였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한 한 빨리 주한미군을 철수시켜 미국 정부의 재정을 아껴야 했다. 소련의 우선순위는 동유럽이었다. 소련은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을 통해 독일에 의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모두 서부전선이었다. 영화 <에너미 엣 더 게이트>의 스탈린그라드는 2차 대전 최고의 격전지였다. 소련으로서는 동유럽이라는 완충지대가 필요했다. 게다가 한반도는 공산주의자들이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하는 대로 두어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미국과 소련의 이러한 핵심적인 정책 목표를 읽지 못해 자기들끼리 이전투구에 빠졌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한국인들의 몫이 됐다.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았던 당시 정치인들의 실수를 지금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1980년대 이후
신탁통치안의 성격에 대한 분석이 시작된 이래 ‘역사비평’은 기존의 찬반탁 논쟁의 해석을 뒤집었다. 그 시작은 동아일보의 오보를 밝히는 것이었다. 특히 정용욱은 ‘신탁통치 파동과 미군정’이라는 글을 통해 동아일보의 보도가 3상회의 결정이 나오기도 전에 왜곡된 보도를 했고, 미군정은 이러한 오보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점을 밝혔다.
여하튼 1945년 12월27일자 동아일보의 1면 톱기사 이후 10일간 한반도는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동아일보의 보도가 나간 지 3일 후 동아일보 사장이자, 한국민주당의 수석총무였던 송진우가 자택에서 암살당했다. 그가 신탁통치안을 지지한다는 소문이 난 직후 과거 자신의 경호원이었던 사람들에게 암살된 것이다.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튿날인 12월31일 임시정부는 포교령인 국자 1호, 국자 2호를 발표했다. 신탁통치안을 반대하기 위한 총파업을 통해 정권을 접수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나라 전체가 마비되었다.
화가 난 미군정 사령관은 1946년 1월1일 김구를 소환했고, 총파업은 하루 만에 끝났다.
1월3일 또 하나의 소동이 벌어졌다.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좌익은 동대문운동장에서 ‘3상회의 결정에 대한 총체적 지지’ 결정을 내렸다. 신탁통치 반대 모임으로 알고 나갔던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틀 후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 박헌영은 이 결정에 대해 해명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가졌다. 기자회견은 좌익세력에게 독(毒)이 되었다. 박헌영이 소련의 일국 신탁통치를 찬성하고 있으며, 한국이 소비에트 연방의 하나로 편입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고 보도된 것이다.
박헌영 본인과 소련 타스 통신이 반박했음에도, 보도 내용은 사실로 각인되었다. 이제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에 나라를 팔아넘기려는 매판 세력이 되었다.
신탁통치가 보도된 지 열흘이 지나면서 정치권은 잠시 이성을 되찾기도 했다.
1월8일 4개 주요 정당 지도자들이 시내 모처에서 회합을 가졌다. 우파의 한국민주당과 국민당, 좌파의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당의 대표가 모였다. 이들은 합의문을 발표했다.
첫째로 모스크바 3상회의의 조선 문제에 대한 결정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신탁통치안은 추후에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둘째로 정치적 테러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송진우의 암살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합의는 이틀도 지나지 않아 무효가 되었다.
정치인들에게 합리적 선택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반탁운동을 주도하던 우파에서 합의를 깼다. 신탁통치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3상회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후 반탁운동은 곧 소련을 반대하는 운동이며, 이는 곧 반공운동이 되었다. 3상 결정을 지지하는 좌파는 신탁통치를 원하는 소련의 비밀 지령을 받았다고 규정되었다.
반탁운동 진영은 3상 결정을 찬성하는 좌파를 찬탁(신탁통치 찬성) 진영이라고 불렀다.
반탁운동은 민족주의 애국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찬반탁 논쟁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고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명제가 되었다.
왜냐하면 반탁운동 세력이 대한민국의 수립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우익 중에서도 3상 결정을 지지한 인사들은 남한에서 활동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야당을 이끌었던 유진산이나 이철승도 모두 반탁 청년단체 출신이었으며, 사회 원로들도 마찬가지였다. 남북분단은 좌우익 분단이 아니라 찬반탁 분단이었다.
1980년대까지 30년이 넘도록 찬반탁 논쟁에 대한 반탁운동 세력의 해석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좌익은 물론 우익의 민족주의자들 중 일부도 3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했는데, 이들이 신탁통치를 찬성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따라서 ‘찬탁’이라는 용어 자체가 잘못된 것이고, 그렇다면 찬반탁 논쟁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성립될 수 없었다.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은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었으며, 찬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세력은 국내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내용은 역사 교과서에도 반영되었다.
오히려 과거 반탁운동의 정통성에 반하여 반탁운동이 분단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정치운동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만약 3상 결정에 대해 국내 정치세력들이 모두 동의했다면 분단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반탁운동은 일본의 식민지 정책과 전쟁 정책에 협력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정치적으로 민족주의자로 포장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좌익이 갖고 있던 해방정국의 주도권을 돌려놓고자 한 정치적 시도였다고 분석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이완범은 좌익의 3상 결정 지지가 소련의 비밀 지령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좌익의 음모 또한 무시할 수 없다고 반박했고, 이영훈은 1945년 10월부터 5도행정국을 만들고, 1946년 2월에는 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고 소위 민주개혁을 한 북한이 남한보다 먼저 분단 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3상 결정의 내용을 곧 신탁통치안으로 볼 수 없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누구도 반박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1945년 12월28일의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안은 한국 사회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한국 사회의 정치적 대립구도를 재편했다는 사실이다. 해방이 된 한국 사회에서 민족운동을 한 세력과 일본 제국주의와 그들의 전쟁을 지지한 세력 사이의 대립구도가 3상 결정으로 인해 좌우익 간의 대립으로 재편된 것이다.
1946년 2월 38선 이남에서 민주의원(우익)과 민전(좌익)의 수립은 그 출발점이었다. 3상 결정을 둘러싼 논쟁, 즉 소위 찬반탁 논쟁은 1980년대 이후의 연구를 통해 그 실체와 성격이 어느 정도 밝혀졌다. 수정주의 역사학의 가장 큰 성과였다. 그러나 논쟁을 통해 만들어진 좌우 대립의 정치구도는 분단으로 이어져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미 국무부에서 파견된 윌버 장군이 1947년 3월13일 김구 반탁독립투쟁위원장(오른쪽)을 만나 대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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