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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06 최능진
- 2014.09.06 동덕여고 교사 이관술
- 2014.09.03 비운의 여성혁명가 주세죽
- 2014.09.03 윤봉길과 여성혁명가 이화림
http://m.nocutnews.co.kr/news/4035836
"친일경찰 퇴진하라"…어느 독립운동가의 최후
2014-06-03 11:37CBS노컷뉴스 임기상 선임기자
[임기상의 역사산책 38]이승만 집권 후 첫 작품은 '독립운동가 최능진 체포'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2월 11일 경북 달성군 가창면에 있는 야산.
조용한 산중에 갑자기 '탕~탕~탕' 총소리가 울렸다.
독립운동가이자 미 군정청 경무부 수사국장을 지낸 52세의 최능진의 심장을 향한 총성이었다.
최능진은 가족들에게 한 장의 유서를 남겼다.
"정치사상은 혈족인 민족을 초월해 있을 수 없다. 아버지의 금일의 운명은 정치적 모략에서 비롯된 것인 바, 너희는 조금도 누구에게 반감을 갖지 말고 또한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생각도 하지 마라"
해방 정국에서 국립경찰의 간부이자 대표적인 민족주의자인 최능진은 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일까?
◈ 안창호 선생과 함께 투옥되다
귀국해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다 1937년 3월 흥사단을 말살하려는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돼 안창호, 조만식 선생 등과 함께 투옥된다.
남쪽으로 향하던 중 그는 부하들로부터 어처구니 없는 소식을 듣는다.
"남조선에서는 아직도 친일 부역 경찰 출신이 그대로 치안을 맡고 있는 모양입네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다른 건 몰라도 북조선에서는 친일파 청산 하나는 확실히 하고 있지 않습네까?"
"내~ 이 놈들을 그냥 두지 안캈어"
1945년 9월 15일 해주에 도착해 남조선 신문을 처음으로 구해 본 최능진은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경찰에 투신한다.
◈ '친일경찰 청산'을 둘러싸고 경찰 수뇌부와 격론을 벌이다
그는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제가 경찰관 강습소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이 곳에 남아 있던 조선총독부 경찰 출신으로부터 사표를 받아낸 일이었습니다"
한달 후 미군정이 오늘의 경찰청인 경무부를 창설하자 수사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최능진은 이 곳에서 이승만과 한민당 일파가 친일파를 경찰의 요직에 앉히는 것을 보고 격분했다.
수없이 많은 독립운동가를 고문하고 죽였던 노덕술이 수도경찰청 수사국장에 취임한 것을 비롯해 이익흥, 최운하, 최연 등 악명 높은 친일경찰들이 속속 중용됐다.
최능진은 경찰 수뇌부에게 친일경찰 퇴진을 주장했다.
돌아온 대답은 어처구니 없는 논리였다.
"경찰은 기술직이라 어쩔 수 없다"( 장택상 수도경찰청장)
조병옥은 '좌익세력의 불순한 파괴적 정치활동'이라고 발표했지만, 현지에 다녀온 최능진은 이를 반박했다.
"좌익도 문제지만, 일제시대의 고등계 형사들이 해방 후에도 버젓이 경찰에 몸담고 있어 일반 양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는 것도 큰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최능진은 경찰 수뇌부의 압력에 밀려 친일경찰이 장악한 경찰을 떠나게 된다.
그는 사퇴 성명을 통해 "조병옥. 장택상 씨가 경찰 행정을 한민당의 책동에 의해 자행해온 것은 사실이다. 일제 주구가 일조일석에 애국자가 되어 민중의 지휘자가 될 수 없다"고 일갈했다.
◈ 이승만에 맞서 5.10 단독선거에 출마하다
그가 집권하면 통일의 길도 멀어지고 독재체제가 굳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그에 맞서 출마하기로 했다.
한편 이승만 세력은 선거구인 동대문 갑구에 무투표 당선을 내심 노리고 있었다.
그러다 최능진이 출마하자 온갖 수단을 동원해 방해공작에 나섰다.
동선거위원회가 계속 트집을 잡아 접수를 연기시키는가 하면 서북청년단원들이 나서서 추천서 가방을 탈취했다.
결국 최능진의 출마는 '정치테러' 끝에 무산된다.
뒤에서 진두지휘한 백성욱은 내무장관에, 하수인인 서북청년단 리더 문봉제는 교통부장관에, 하수인 이성수는 백성욱의 공보비서로 발탁된다.
◈ 체포…전쟁 중 정전과 평화운동…다시 투옥된 후 처형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한 달 보름이 지난 1948년 10월 1일 새벽.
수도경찰청 형사대가 최능진의 자택에서 그를 연행했다.
이른바 '혁명의용군 사건'이었다.
그에게 씌어진 혐의는 서세충(독립운동가), 오동기(광복군 출신으로 14연대장 역임) 등과 함께 쿠데타를 사주해 이승만 정부를 전복한다는 어마어마한 내용이었다.
이 사건은 나중에 악질적인 관동군 헌병 출신인 김창룡 특무대장이 조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던 최능진은 인민군에 의해 석방된다.
그는 중도파 국회의원들과 함께 전쟁을 중단하자는 평화운동을 벌인다.
서울이 수복되자 최능진은 다시 합동수사본부로 연행돼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는다.
죄목은 평화운동을 벌여 적을 이롭게 했다는 것이다
그가 총살된 후 가족들은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물러간 뒤에야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국가는 유가족에게 사과하라"
따라서 국가는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법원은 재심을 수용하라고 권고했다.
최능진의 명예를 국가기관에서 59년만에 회복시켜준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최능진을 억울한 죽음으로 몰고간 김창룡은 비명 횡사한데 이어 죽어서도 갈 곳을 못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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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상의 역사산책 37]학생운동, 파업, 고문과 투옥으로 일관한 투사들
지금의 안국동 교차로 남쪽, 인사동 입구에 있던 동덕학원은 조동식 선생이 설립해 1911년부터 천도교 재단이 재정을 지원해온 사립 여학교였다.
ㄷ자로 지어진 아담한 이층 목조 건물에서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함께 배웠다.
한 학년이 한 학급으로만 이뤄져 학생 수도 적고 재정도 빈약했다.
여고를 맡은 8명의 교사 중 일본인은 일어 선생 하나뿐이고, 나머지는 조선인이었다.
이관술 선생은 재봉과 도화를 가르치던 여선생 박성환, 조선어를 담당하던 이윤재(나중에 신명균으로 바뀐다) 선생과 특히 친했다.
이윤재와 신명균 모두 한글학회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차례로 사망한다.
◈ 광주학생운동, 경성 학원가를 뒤흔들다
전남 나주에서 광주로 기차 통학을 하던 일본인 남학생들이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하자 한국인 학생들이 이들과 집단 싸움을 벌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계기로 광주 전남 일대에서 대규모 학생시위가 벌어졌다.
전국의 거의 모든 고등학교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는 등 술렁이기 시작했다.
동덕여고도 학생들이 동요하기 시작하자 학교 측은 겁을 먹고 휴교를 선언했다.
긴 방학이 끝나자 1930년 1월 15일 개학에 맞춰 이화여고와 근화, 배화, 실천, 정신, 보육, 태화, 동덕 등 경성시내 여학교 학생들이 일제히 운동장으로 뛰쳐 나와 만세와 구호를 외쳤다.
각 학교 교문 모두 긴급 출동한 기마경찰에 의해 봉쇄되었다.
만세운동에 참가한 학생은 159개 학교 54,000명으로 집계됐다.
구속자만 1,642명에 달했다.
동덕여고에서는 학내 시위를 주도하다 퇴학당한 박진홍이 먼저 공장에 들어가 노동운동에 투신한다.
박진홍은 용산제면, 대창직물 등의 공장에 다니며 노동자들을 조직하다가 5개월만에 구속된다.
이관술의 이복 여동생 이순금도 동덕여고를 졸업하자마자 공장으로 향했다.
졸업 후 학원 선생을 하던 이효정은 동대문 밖 종연방직 여성노동자들의 비밀 지도를 맡았다.
이후 이들은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변절하지 않고 파업 주도와 체포, 고문, 옥살이를 거듭하면서 일제를 겨냥한 독립운동을 가열차게 벌인다.
"동덕 때부터 난 문학소녀였고, 사회생활은 그리 오래 하지 못했어요. 10년의 감옥생활을 빼면 이제 겨우 23살입니다"
공장에 다니던 그녀는 '경성학생알에스(RS)사건으로 2년간 수감생활을 한 후 '조선공산당재건운동'에 얽히어 구속되는 등 네번에 걸쳐 10년간 징역을 살았다.
◈ 이관술, 이재유와 손 잡고 조선공산당 재건에 나서다
광주학생운동을 보고 충격을 받은 교사 이관술은 사회주의 운동의 전면에 나서기로 했다.
제자들을 대상으로 두 개의 독서회를 운영하다 1933년 반제동맹 사건으로 구속된다.
출감 후 이관술과 제자 3명은 모두 일제시대의 대표적인 공산주의자인 이재유와 손을 잡고 '경성 트로이카'에 이은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경성재건그룹'을 이끌게 된다.
그러나 일본경찰의 연이은 탄압으로 조직은 거듭 붕괴되고 만다.
일본경찰은 이로써 조선반도에서 공산주의 조직이 다 붕괴됐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관술의 존재를 가볍게 봤다.
이재유와 함께 살다 간신히 피신한 이관술은 제자 박진홍과 여동생 이순금을 만나 조직 재건에 나섰다.
이들은 김삼룡, 정태식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모임 '경성콤그룹'을 결성해 최후의 지하활동을 벌인다.
경성콤그룹은 파벌에 구애받지 않고 전향을 거부한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됐으며, 검거 이후에도 의지를 꺾지 않고 해방을 기다린다.
감옥에 있는 이재유 대신 새 지도자로 박헌영을 영입했다.
1941년 다시 검거 선풍이 일어 경성콤그룹은 백여 명이 연행되어 구속된다.
체포를 면한 지도부는 대부분 활동을 멈추고 일제 패망에 대비한다.
◈ 해방과 좌우대립 그리고 허망한 최후
이효정 할머니를 제외한 동덕의 선생님들과 벗들은 모두 남과 북으로 흩어져 소식이 끊어졌다.
해방 후 남로당 재정부장으로 일하던 이관술은 '조선정판사 사건'에 휘말려 대전교도소에 수감됐다.
그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7월 5일 대전의 산내면에서 자행된 집단처형 때 가장 먼저 총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박진홍은 해방 후 저명한 국문학자인 김태준이 남로당 간부라는 이유로 처형당하자 월북했다.
거기서 그녀는 평양의 최고재판소 판사로 일하다 전쟁 와중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
유일하게 이관술의 여동생인 이순금만 북한 고위직으로 살아남았다고 한다.
박헌영 등 경성콤그룹의 주요 멤버들은 남에서는 '빨갱이'란 이유로, 북에서는 미제 간첩이란 어처구니 없는 죄목으로 거의 대부분 처형당하거나 숙청됐다.
이렇게 해서 일제하 최후의 국내 반일 조직인 경성콤그룹은 남과 북에서 완전히 말살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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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전 북한 부수상의 첫부인 주세죽
[임기상의 역사산책 36]비운의 여성혁명가 주세죽, 소련과 한국서 명예회복
◈ 박헌영·김단야·임원근 출옥하다
정문이 조용히 열리자 20대 중반의 젊은이 3명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조선공산당의 결성과 항일투쟁을 주도해나갈 박헌영·김단야·임원근의 '삼인당'이 기지개를 켜는 순간이었다.
이들은 상하이에서 활동하다 경성에 잠입하던 중 체포돼 1년 10개월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출감한 것이다.
이들을 마중 나온 사람들 중 밝은 얼굴로 하얀색 한복을 들고 앞으로 나온 미모의 여성 2명이 있었다.
한 명은 이미 상해에서 박헌영과 혼례를 치른 주세죽이고, 다른 한명은 임원근의 연인 허정숙이었다.
멀지 않아 김단야에게도 고명자라는 여성이 나타난다.
이 세 여인이 여성 사회주의자 트로이카이다.
이런 전성기는 2년여만에 끝나고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 탄압 사건이 발생하면서 다들 엇갈린 행로를 걷게 된다.
◈ 박헌영·주세죽 부부, 블라디보스톡으로 탈출하다
제일 먼저 박헌영·주세죽 부부가 집에서 체포됐고, 다음날 임원근·허정숙 부부가 연행됐다.
김단야는 재빨리 상하이로 피신했다.
그의 아내 고명자는 사건이 터지기 직전 모스크바에 있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검거를 면했다.
혹독한 고문 끝에 삼인당 3명은 기소되고, 주세죽과 허정숙은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됐다.
박헌영은 재판 도중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 수감 2년여만인 1927년 11월 22일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거기서 이들 부부의 유일한 혈육인 비비안나를 낳는다
아기를 안고 모스크바에 도착한 박헌영 부부는 먼저 도착한 김단야·고명자 부부와 합류한다.
박헌영은 김단야의 추천을 받아 국제레닌대학에 입학하고, 주세죽은 고명자가 다니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들어가 공부에 전념한다.
◈ 박헌영의 체포와 영원한 이별…그리고 '배신'
공부를 마친 박헌영 부부는 아기를 모스크바 근교에 있는 스타소바 육아원에 맡기고 상하이로 떠났다.
이들 부부는 프랑스 조계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후 김단야와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1933년 7월 5일 상하이 공동조계 북경로에서 박헌영이 일경에 의해 체포됐다.
상하이에 남은 주세죽과 김단야는 다시 모스크바로 피신한다.
거기서 두 사람은 박헌영과 고명자를 버리고 결혼을 한다.
3년 후인 1937년 11월 5일 김단야는 일제의 밀정이라는 혐의로 소련 내무인민위원부 요원들에게 체포됐다.
당시 소련을 휩쓸던 스탈린의 '대숙청'에 걸려든 것이다.
김단야는 제대로 변호도 못하고 제1급 범죄자로 선고받은 후 처형당한다.
주세죽의 인생도 나락으로 떨어졌다.
제1급 범죄자의 아내라는 이유로 심문을 받은 후 5년간의 카자흐스탄 유배형을 받고 모스크바를 떠난다.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5년 전에 육아원에 맡긴 딸 뿐이었지만 만나러 갈 수도 없었다.
해방이 되자 이 조직이 조선공산당의 주축 세력이 되어 해방 공간의 주역으로 등장한다.
결국 미군정과 경찰에 쫒기다 평양으로 피신해 김일성 수상 다음 자리인 부수상 겸 외상인 2인자 자리로 올라선다.
1946년 7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박헌영은 육아원에 맡겼던 딸 비비안나와 극적인 해후를 한다.
비비안나는 소련이 자랑하는 무용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훗날 딸에게 주세죽은 물었다.
"아빠가 날 찾지 않더냐?"
"아무 얘기 안 하셨어요"
1949년 8월 박헌영은 주세죽에 대한 기억을 모두 지우고 비서인 윤레나와 결혼식을 올린다.
이 자리에는 아버지의 초청을 받은 딸 비비안나도 참석해 재혼을 축하해줬다.
그러나 5년이 지난 1953년 3월 하순, 박헌영은 미 제국주의 간첩이란 엉뚱한 죄목으로 체포된다.
이 소식을 들은 주세죽은 충격을 받았다.
그녀가 딸을 보러 모스크바의 아파트에 도착한 순간 각혈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키에프로 공연을 떠난 딸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사위의 품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유해는 모스크바 공동묘지에 묻혔다.
고명자, 주세죽, 허정숙
이들은 일제시대 최고의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김단야, 박헌영, 임원근과 결혼하고 인생을 조선 독립에 바쳤다.
이들 6명 가운데 4명이 망명과 한국전쟁 와중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 한국 정부, 박헌영의 첫 부인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하다
한국대사관이 제62주년 8.15 광복절을 맞아 독립운동가이자 북한 초대 부수상 겸 외상을 지낸 박헌영의 첫번째 부인인 주세죽 여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한 것이다.
그녀의 사후 52년만에 평생에 걸쳐 독립운동을 벌인 공적을 대한민국이 인정한 것이다.
그 때까지 주세죽은 대표적인 빨갱이의 전처로, 소련에서는 인민의 적으로 역사의 그늘 속으로 사라진 인물이었다.
이날 훈장은 고인이 된 그녀를 대신해 모스크바에 거주하고 있는 무용가인 딸 박비비안나 씨가 받았다.
박 씨는 훈장을 건네받은 후 "평생 독립운동에 이바지한 어머니에게 뒤늦게나마 훈장을 주셔서 정말 감사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소련 정부도 그보다 18년 전인 1989년 3월 스탈린이 저지른 '박해사건의 희생자'로 처형된 주세죽의 두번째 남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김단야와 주세죽 부부를 사면했다.
한국 정부는 훈장 수여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 정도이면 일제시대의 깨인 여성 선각자 중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무엇이 그녀의 행복을 빼앗아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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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수뇌부 쑥밭…꽃이 휘날리듯 아름다워"
2014-05-28 11:13CBS노컷뉴스 임기상 선임기자
[임기상의 역사산책 35]
1905년 평양에서 태어난 이화림은 독립군인 오빠들의 영향을 받아 일찍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25살에 홀어머니와 작별하고 상해로 넘어온 그녀는 김구 선생이 이끄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여기서 사격과 무술을 배우고, 일본 밀정들을 유인해 살해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 부부로 가장해 식장에 들어간 윤봉길, 폭탄을 던지다
상하이에서 일본군과 중국군이 한바탕 맞붙은 상해사변 직후인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현재의 노신 공원) 입구.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은 이곳에서 상해사변 전승 기념과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 기념식을 열 예정이었다.
이 공원에 말쑥한 스프링 코트를 입고 도시락과 물통을 든 청년이 화사한 양장을 한 여자와 함께 다정하게 들어섰다.
식장 입구에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헤어집시다"
"반드시 성공하세요"
남자는 김구 선생이 지휘하는 한인애국단의 윤봉길 의사로, 약관 24살의 나이였다.
양장을 한 여인은 김구 선생의 비서인 27살의 '항일전사' 이화림이었다.
오전 11시 40분 축하식 중 일본 국가가 거의 끝날 무렵, 갑자기 폭음소리가 잇따라 들렸다.
"쾅~ 쾅~"
식장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도시락과 물통에 담긴 폭탄은 시라카와 대장과 카와바다 일본거류민단장을 죽여버리고, 노무라 중장의 두 눈을 날려 버리고, 우에다 중장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무라이 총영사와 토모노 거류민단 서기장은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갔다.
시게미츠 주중공사는 절름발이가 되어 평생 지팡이에 의지하고 살았다.
식장 밖에서 초조하게 거사를 기다리던 이화림은 단상이 박살나는 모습을 보자 탄식 소리가 절로 나왔다.
"정말 꽃이 휘날리듯 아름다운 모습이구나~"
회고록에는 "마치 추풍낙엽이 지듯이 일본놈들이 우수수 떨어졌다"고 묘사했다.
◈ 이화림, 이봉창에 이어 윤봉길 의사의 순국 소식 듣고 오열하다
윤봉길과 이화림은 전날 부부로 가장하고 홍커우 공원을 미리 답사했다.
원래는 둘이 같이 식장에 들어가기로 했으나, 김구 선생이 이화림이 일본어에 능통하지 않기 때문에 같이 체포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들어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두 명 다 희생시킬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위 선서식에서 윤봉길 의사는 "나는 적성(赤誠)으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의지를 밝혔다.
그리고는 맹세한 그대로 적들을 도륙하고, 기개를 잃지 않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이 철권으로 일본을 즉각 타도하려고 상해에 왔다"는 짧은 유언이었다.
상해임시정부 건물 안에 있던 이화림은 윤봉길의 순국 소식을 듣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뇌리 속에 웃으며 일본으로 떠난 이봉창 의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다리 사이에 찬 특제 '훈도시'는 이화림이 밤을 새워 만든 것이었다.
이봉창은 그 속에 수류탄 2개를 숨긴 채 일본으로 향했다.
윤봉길의 거사가 있기 3달 전인 1932년 1월 8일 일본의 수도 도쿄의 고지마치 구 사쿠라다몬.
31살의 조선 청년 이봉창은 일왕 일행이 나타나자 힘차게 수류탄 2개를 잇따라 던졌다.
그러나 거리가 먼데다 일렬로 지나가는 마차 행렬 중 일왕이 탄 마차를 식별하지 못해 기수와 근위병에게 부상을 입혔을 뿐 표적을 놓쳐버렸다.
일본의 심장 일왕이 테러를 당하자 일본 열도가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을 받은 중국인들과 모든 언론매체들이 흥분했다.
모든 신문들이 "조선인 리봉창, 일왕을 요격했으나 불행히 명중 못했음"이란 제목의 기사를 쏟아냈다.
열받은 일본당국은 군경을 동원해 중국 신문사를 습격했다.
체포된 이봉창은 일본 경찰의 심문에 일체 불응한 채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그 소식을 들은 이화림은 눈물을 흘리며 지인들에게 이봉창의 얼굴을 묘사했다.
"그 청년은 적동색 얼굴빛, 짙은 눈썹 아래 정기 넘치는 두 눈, 툭 삐어져 나온 높은 관골, 우뚝한 코마루, 갸름하면서 선이 굵은 생김새는 퍼그나 패기 있고 당차보였습니다"
◈ 투사 이화림, 김구 선생의 슬하를 떠나 무장항일투쟁에 뛰어들다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거사를 도운 이화림은 테러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조선인 혁명가들이 운집한 광저우로 근거지를 옮겼다.
1932년 가을 그녀는 의열단의 추천을 받고 중산대학에 입학해 의학 공부에 매진했다.
규모는 100~300명 정도이지만, 대원들의 지적, 군사적 소양과 항일투쟁 경력으로 볼 때 중국내 한인 무장단체로는 최정예였다.
부녀대는 일본군 진지 앞까지 접근해서 선전공작을 벌였다.
조선의용대는 본격적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기 위해 팔로군 129사단이 주둔하고 있는 화북지방의 태항산으로 이동했다.
이화림은 부녀대 부대장 자격으로 조선인 간부들도 양성하고, 틈만 나면 총을 들고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시간이 나면 대원들을 이끌고 돌미나리를 캐어 김치를 담궜다.
이때 우리 민요 '도라지' 가락에 가사를 바꿔 만든 '미나리 타령'을 합창했다.
"미나리, 미나리, 돌미나리
태항산 기슭의 돌미나리
한두 뿌리만 뜯어도
대바구니가 철철 넘치누나
에헤야~ 데헤야~ 좋구나
어여라~ 뜯어라 지화자자 캐거라
이것도 우리의 혁명이란다"
조선의용대가 1943년 연안으로 이동한 직후에 조선의용대장 무정 장군이 이화림을 불렀다.
"우리 혁명사업에는 전문 훈련을 받은 의사들이 필요합니다.
항일전쟁이 끝나면 우리 앞에는 더 간고하고 복잡한 혁명과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동지는 의학 공부를 중도에 폐하지 말고 잘 배운 다음 우리 부대로 돌아오세요"
이화림은 총을 내려 놓고 의과대에 입학해 공부를 하다 해방이 된 후에는 새 중국의 의료보건사업에 몰두했다.
노년에는 연변자치주와 대련시에서 조선인 대표로 활동하고, 수중의 재산을 틈틈히 아동문학 작가들을 위해 기부했다.
그녀는 1999년 2월 10일 95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임종 전에 유언을 남겨 자기의 전 재산 5만원을 대련시 조선족학교에 기증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한국의 이윤옥 시인은 시 한 수를 헌정했다.
"화려한 불빛 속 상하이의 밤
서러운 이방인 삼삼오오 모여 이룬 숲
서둘러 국권회복의 길 암중모색 중
일본 사쿠라다몬으로 떠나는
이봉창 가슴에 안겨준 폭탄
불발로 품은 뜻 히로히토 화들짝 놀라
그날 밤 이불에 오줌 지렸을게다
석달 뒤 상하이 홍구공원
물샐 틈 없는 수비 뚫고
단번에 날린 윤봉길의 도시락 폭탄도
여장부 이화림이 도운 거사였다네
태항산 거친 산림 속 마다치 않고
조선의용대 끌어안고 부르던 노래
아리랑 피 끓는 함성 속에
절절이 묻어나던 조국해방의 염원
돌미나리 민들레 수양버들 잎사귀로
배 채우며 쟁취한 광복
고국은 그 이름 잊었어도
그 이름 천추에 길이 길이 남으리~~"
항일전쟁이 끝나면 우리 앞에는 더 간고하고 복잡한 혁명과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동지는 의학 공부를 중도에 폐하지 말고 잘 배운 다음 우리 부대로 돌아오세요"
이화림은 총을 내려 놓고 의과대에 입학해 공부를 하다 해방이 된 후에는 새 중국의 의료보건사업에 몰두했다.
노년에는 연변자치주와 대련시에서 조선인 대표로 활동하고, 수중의 재산을 틈틈히 아동문학 작가들을 위해 기부했다.
그녀는 1999년 2월 10일 95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임종 전에 유언을 남겨 자기의 전 재산 5만원을 대련시 조선족학교에 기증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한국의 이윤옥 시인은 시 한 수를 헌정했다.
"화려한 불빛 속 상하이의 밤
서러운 이방인 삼삼오오 모여 이룬 숲
서둘러 국권회복의 길 암중모색 중
일본 사쿠라다몬으로 떠나는
이봉창 가슴에 안겨준 폭탄
불발로 품은 뜻 히로히토 화들짝 놀라
그날 밤 이불에 오줌 지렸을게다
석달 뒤 상하이 홍구공원
물샐 틈 없는 수비 뚫고
단번에 날린 윤봉길의 도시락 폭탄도
여장부 이화림이 도운 거사였다네
태항산 거친 산림 속 마다치 않고
조선의용대 끌어안고 부르던 노래
아리랑 피 끓는 함성 속에
절절이 묻어나던 조국해방의 염원
돌미나리 민들레 수양버들 잎사귀로
배 채우며 쟁취한 광복
고국은 그 이름 잊었어도
그 이름 천추에 길이 길이 남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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