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9. 2. 18:11

"은궤와 귀한 책들 실었으면 나머지는 전부 불태워라"

2014-04-16 14:07CBS노컷뉴스 임기상 기자


[임기상의 역사산책 ⑱]초토화된 강화도…의궤약탈 사실도 몰랐다

http://m.nocutnews.co.kr/news/4008197


◈ 강도로 돌변한 프랑스군, 강화도를 약탈하다 




1866년 10월 16일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군함 7척이 강화도 앞에 출현했다. 

프랑스군은 프랑스 신부 9명을 극형에 처했다는 이유로 보복하러 왔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내심 보물을 약탈하기 위해 침입한 것이다. 

먼저 선제 포격을 한 후 극동함대의 병력이 강화도에 상륙했다. 

이들은 큰 저항없이 관아와 행궁을 점령했으나 곧 자신들이 포위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점령했다는 보고를 받은 조선 조정은 먼저 이경하를 순무사로 삼아 강화도가 내려다보이는 문수산성에 병력을 집결했다. 

조선군 동태를 파악하러 온 프랑스군 정찰대는 공격을 받아 전사자 3명,부상자 2명을 내고 퇴각했다. 

조선군은 이어 강화도 정족산성으로 잠입해 전등사에 진을 쳤다. 

양헌수가 이끄는 강계 출신의 포수 500명이 프랑스군을 기다렸다. 

프랑스군은 다시 108명의 보병 정찰대를 보냈으나 매복에 걸려 맹렬한 사격을 받아 29명의 부상자를 내고 캠프로 돌아갔다. 

로즈 제독은 상황이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다음날인 11월 11일 강화도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문화강국의 국민이라는 프랑스인들이 떼강도로 돌변하게 된다. 

◈ 불타오르는 조선행궁과 관아건물...재로 변한 외규장각 도서 5천여책 






중국에 돌아온 뒤 로즈 제독은 해군성 장관에게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보낸다. 

"즉시 모든 국가 소유물을 파괴하기 시작했고,200여 척의 정크선박을 침몰시켰습니다. 
임금의 저택과 관아가 남아 있었는데,이 관아의 일부는 우리 군인들이 거처로 사용하고 있어 제일 마지막에 파괴했습니다. 
본인은 계획대로 10일과 11일 강화읍 관아의 파괴를 마치고 모두 선박에 올라 일상의 업무로 돌아왔습니다" 

프랑스군은 조선의 역사가 담긴 건물들을 불태우기 전에 금은보화를 찾기 위해 이잡듯이 뒤졌다. 

먼저 관아 건물 깊숙한 곳에 보관돼 있는 은괴 19상자를 찾았다. 

더 이상 보물이 나오지 않자 이번에는 외규장각의 서고도 뒤졌다. 

다시 로즈 제독의 보고서를 보자. 


"겉으로 보기에 꽤 가난해 보이는 강화읍은 각하에게 보내드릴 만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조선 국왕이 간혹 거처한다는 저택에는 아주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수많은 서적들로 가득 찬 도서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공들여 340권을 수집했는데, 기회가 되는대로 프랑스로 보내겠습니다" 

거의 해적 부하들이 두목에게 보내는 서신 수준이다. 

프랑스군은 은괴 상자와 외규장각의 중요 도서,족자 등을 배에 실은 뒤 관아 건물과 그 옆의 별궁,외규장각을 모조리 파괴하고 불을 질렀다. 

순조 때 기록에 따르면, 외규장각에 보관 중인 책이 약 1천여종,6천책이었다니,그들이 강탈한 200종 340책을 빼고는 모두 불길에 사라진 것이다. 


◈ 한 통의 편지...파리국립도서관에서 잠자는 외규장각 도서를 깨우다 





1990년 봄 규장각도서 관리실. 

아침에 출근한 이태진 관리실장은 책상 위에 한 장의 협조 공문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대통령 비서실이 접수한 편지가 첨부되어 있었다. 

프랑스에 있는 박병선 박사가 노태우 대통령 앞으로 보낸 편지였다. 

파리국립도서관에 보관 중인 외규장각 도서 중 의궤 자료들에 대한 연구작업을 마쳤는데 국내 출판을 도와달라는 건의서였다. 

외규장각과 의궤가 무엇인가? 

외규장각은 정조대왕이 1782년 강화도에 설치한, 왕립도서관 격인 규장각의 부속건물인데,아쉽게도 프랑스군이 태워버렸다. 

의궤는 왕실에서 열린 각종 행사나 궁궐의 신축과 보수가 있을 때마다 자초지종을 기록해 후세에 같은 일이 열리면 참고하도록 편찬한 저서이다. 

이태진 실장은 이 일은 규장각 도서를 관리하는 서울대가 나서야 한다고 판단했다. 


박병선 박사가 정리한 외규장각 도서 현황은 서울대의 지원으로 국내에 출판되었고, 이 책을 토대로 반환운동이 시작되었다. 

◈대통령이 도서 반환을 지시하고, 국립도서관과 사서들은 집단 반발하고.... 


1993년 9월 미테랑 당시 프랑스 대통령은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방한할 때 2권의 조선왕실의궤를 들고 왔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에게는 '맛보기'로 1권의 의궤만 전달되었다. 

수행한 도서관 사서 2명의 반발에 부딪쳐 1권은 주지 못한 것이다. 





환영 만찬에서 미테랑 대통령은 고충을 털어놓았다. 

"이 고문서는 프랑스 해군이 전쟁 중에 가져왔는데,이제 한국으로 되돌려주는데도 전쟁을 해야 할 형편입니다" 

불길한 전조였다. 

프랑스는 비싼 값에 TGB(떼제베 고속열차)를 팔고도 거래가 끝나자 태도를 돌변했다. 

사서 두명은 귀국하자마자 사표를 제출하고, 국립도서관들은 의궤 반환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집단 휴관하고... 

이들은 한국이 반환을 요청한 299권의 외규장각 도서를 문제삼은 게 아니라 대통령이 전달한 단 한권의 책 때문이었다. 

명분은 문화재는 어디에 있든 잘 관리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이를 지켜 본 박병선 박사는 분노했다. 

"관리는 무슨... 내가 책들을 찾았을 때는 중국책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100년 가까이 도서관 파손 창고에 나딩굴고 있었다. 
내가 그 중요성을 보고하자 그제서야 창고에서 꺼내 수리하고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외규장각 도서에 대한 연구도 145년 동안 박병선 박사가 출간한 두 권의 책 외에는 하나도 이뤄지지 않았다. 


이후 양국 정부간의 지리한 협상 끝에 '소유권은 프랑스가 갖되 5년간 빌려주면서 기간을 연장한다'는 어정쩡한 방식으로 마무리했다. 

우리 것이 아니니 소장인도 못 찍고 지방전시도 할 수 없다. 

프랑스가 관리를 소홀히 한다고 기간 연장을 거부하면 속수무책으로 뺏기게 된다. 

프랑스가 약탈한 도서는 340책이다. 

이번에 돌아온 것이 297책이니 나머지 43권은 어디에 있나? 

◈ 145년만의 귀환...그 높은 문화수준에 반하다 




우여곡절 끝에 외규장각 도서가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국립중앙박물관은 2011년 7월 19일부터 9월 18일까지 으뜸홀에서 '145년만의 귀환, 외규장각 의궤' 특별전을 열었다. 

이날 처음 공개된 의궤를 본 시민들은 특히 그 재질의 우수성에 감탄했다. 




의궤들을 처음 보았을 때 모두 금방 만들어진 것처럼 깨끗해서 놀랐다. 

흰 종이의 질감이 빳빳해 그 위에 찍힌 붉은 괘선이 살아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최고급의 종이에 정성 들여 글씨를 쓰고 아름다운 색깔의 그림을 그린 다음 암녹색 비단으로 표지를 싸서 놋쇠 물림으로 묶은 이 조성 왕실 어람용 의궤는 세계 출판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프랑스가 소유권을 갖고 있는 외규장각 도서 340책은 언젠가 우리 소유로 돌아올 것이다. 

국가 차원에서 만들어진 역사적 기록물은 소유권이 변동될 수 없기 때문이다.




Posted by qlstnfp
2014. 9. 2. 17:47

http://m.nocutnews.co.kr/news/list?c1=262&t2=1343&page=7


美대사관은 문화재 반출 전초기지?…'슬픈 청자'

2014-04-15 09:57CBS노컷뉴스 임기상 기자

http://m.nocutnews.co.kr/news/4007041


[임기상의 역사산책 ⑰]한국에서 닥치는대로 수집해 미국에 들고가 '돈벌이'


◈ 한국의 국보급 도자기가 즐비한 약탈 문화재 '헨더슨 컬렉션' 
지난 2009년 1월 9일 오전 10시 미국 하바드대학 아서 세클러 박물관. 

이 곳을 방문해 '헨더슨 컬렉션'을 찾은 '해외 반출문화재 반환을 위한 미국 방문단'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들 국립중앙박물관에 온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이날 대학측은 공간상의 이유를 들어 도자기 12점만 공개했다.









이 청자는 고려청자의 신비스런 색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다. 

하바드대학은 비취색이 은은히 감도는 이 작품은 현존하는 고려청자 중 가장 최고의 색깔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 의전용 스탠드의 미적인 가치는 인상적인 균형미와 강건함, 구조상의 미, 균형잡힌 삼각 세공에 있다. 




이 잔에 대해 하바드대학은 "다른 동아시아 국가에서는 발견되지 않은 독특한 작품으로 기마 유목문화와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독특한 작품"이라며 "이런 형태는 사찰이나 거주지가 아닌 무덤에서 나온 것으로 보아 부장품으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 주한 미국대사관 직원이었던 그레고리 헨더슨의 부인은 남편이 죽자 1991년 한국에서 수집한 도자기 150점을 하바드대학에 기증했다. 

대학측은 '헨더슨 컬렉션'이라고 이름을 붙인 도자기들 중에서 이날 12점만 공개한 것이다. 

◈ '그레고리 헨더슨'…그는 누구인가? 






다음은 전광용 씨가 쓴 소설 '꺼삐딴 리'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청자병을 몇 번이고 쓰다듬으면서 술잔을 거듭하는 브라운 씨도 몹시 즐거운 표정이었다. 
"미국에 가서의 모든 일도 잘 부탁합니다" 
"네, 염려 마십시오. 떠나실 때 소개장을 써드리지요." 
"감사합니다." 
"역사는 짧지만, 미국은 지상의 낙토입니다. 양국의 우호와 친선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탱큐…" 

소설의 주인공 이인국 박사는 미국으로 이민가기 위해 주한 미대사관 직원을 찾아 이렇게 고려청자 한병을 들고와 뇌물로 바친다. 

바로 이 대사관 직원은 실존 인물이고, 그 주인공은 한국에서 두 차례(1948~1950년,1958~1963년)에 걸쳐 7년간 문정관과 정무참사관을 지낸 그레고리 헨더슨이다. 

그는 조각가인 아내 마리아 폰 아그누스와 함께 모든 분야를 망라하는 중요한 문화재를 수집했다. 

하바드대학에 기증한 도자기 150점 말고도 다량의 불화, 불상, 서예, 전적류를 수집했다. 

도자기는 1년마다 30여점을 수집했고, 다른 수집품까지 세보면 이틀에 하나 꼴로 닥치는대로 모았다. 

마리아 헨더슨은 1988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절대 골동품상을 찾아간 적이 없다. 골동품 상인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물건을 싸들고 왔다. 거기서는 그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었다" 

이들 부부는 1963년 한국을 떠나면서 외교관의 면책특권을 이용해 어마어마한 문화재를 싸들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들이 떠나기 1년 전 제정된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지정 문화재를 해외로 반출하려면 정부에 신고해 허가를 받도록 규정했다. 

헨더슨 부부의 이삿짐에 보물이나 국보급 문화재가 있었다면 이는 불법 반출이다. 

무사히 한국 문화재를 빼돌린 헨더슨 부부는 1969년 오하이오 주립대 미술관에서 '한국의 도자기:예술의 다양성-헨더슨 부부 컬렉션'이란 타이틀로 전시회를 열었다. 

이는 소장품을 자랑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비싼 값에 팔려는 언론플레이였다. 

아니나 다를까~ 전시회가 끝나자마자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자기들 소장품을 100만 달러에 사라고 요구했다. 

거의 100배 장사다. 

여기에 더하여 자신을 박물관 큐레이터로 특채할 것을 덧붙였다. 

대학측이 거절하자 여기저기 물건을 팔려고 돌아다니다 헨더슨은 한국에서 올림픽이 열리는 1988년 나무에서 떨어져 죽었다. 

헨더슨이 죽자 삼성이 접촉했으나 마리아 헨더슨이 부른 가격이 너무 엄청나 무산됐다고 한다. 

문화재 보관과 관리가 힘들어지자 헨더슨의 부인은 도자기 컬렉션을 하바드대학에 기증하고 나머지는 경매로 헐값 처분했다. 





◈ 우리 문화재로 도배질한 헨더슨 부부의 자택 


마리아 헨더슨의 아내가 사는 거실 사진은 몇번 언론에 공개됐다. 

집 전체가 한국의 국보급 문화재로 도배를 하다시피했다. 

그들의 집은 보통 서민주택보다는 비싼 곳이지만 귀중한 문화재를 전시할만한 대저택은 아니다. 

저 좁은 거실의 벽난로 위에 걸려 있는 고려시대의 탱화를 보면, 이들 부부가 우리 문화재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한때 서재에 걸려 있었다는 안평대군의 글 '금니법화경'이 아직 경매처분되지 않고 헨더슨 재단이 보관 중이라는 사실이다. 







이 작품이 한국에 남아 있었다면 당연히 국보로 지정될 만한 귀중한 문화재이다. 

현재 국내에 있는 유일한 안평대군의 글씨 '소원화개첩'은 국보 238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이라도 우리 정부나 문화재단이 많은 돈이 들더라도 사서 우리 박물관에 전시해야 한다. 

◈ 해외로 흩어진 문화재…모두 고향으로 돌려보내자 
그레고리 헨더슨만 이렇게 우리 문화재를 마구잡이로 불법 반출한 건 아니다. 

1970년대에 한국에 근무한 스나이더 미국대사 부부도 한국의 민화를 대량 수집해 미국으로 들고가버렸다. 

이들이 한국을 떠난 무렵 민화값이 폭등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1980년대 한국에서 근무한 리차드 워커 대사의 관저 창고에는 한국의 유력인사들이 뇌물로 바친 우리 문화재가 가득 차있다는 사실이 여러 증언에서 나오고 있다. 

더이상 우리 정부는 해외에 흩어진 우리 문화재 회수를 더 이상 민간에 맡기고 뒷짐 지고 있으면 안된다. 




Posted by qlstnfp
2014. 9. 2. 13:43

불타는 '조선왕조실록'과 시골 선비의 '분투'

2014-04-14 10:49CBS노컷뉴스 임기상 기자

http://m.nocutnews.co.kr/news/4006332


[임기상의 역사산책 ⑯]시골 선비들, 실록과 태조 어진을 지키다

◈ 임진왜란 발발…조선왕조실록 가까스로 피신하다 

선조 25년(1592년) 4월 13일 아침 8시경. 

왜선 7백여척에 탄 조선침략 선봉군 제1진 1만 8,700명이 부산에 상륙하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됐다. 

왜군은 북상하면서 닥치는대로 살인, 방화, 약탈을 저질렀다. 

이 와중에 한양의 궁궐에 있는 춘추관, 충주, 성주에 보관하던 조선왕조실록이 모두 불에 탔다. 

유일하게 왜군이 들어가지 못한 전주사고의 실록만 남아 있었다. 

전주사고에는 실록을 비롯해 <고려사>, <고려사절요>등 모두 1,344책이 보관되고 있었다. 

또 전주사고 옆에 있는 경기전에는 조선왕조를 창건한 태조의 어진이 걸려 있었다. 

그해 6월 왜군 제6진이 성주, 금산, 남원을 거쳐 전주로 진격하고 있었다. 

왜놈들이 몰려온다는 소식에 경기전 참봉 오희길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실록과 어진을 산속 깊숙한 곳으로 옮기려면 말 20여필과 많은 인부들이 필요한데..." 

그의 머리 속에 이 지역사회에서 학문적으로나 인격적으로 명망이 있었던 전라도 태인에 사는 유생 손홍록이 떠올랐다. 

바로 달려가 간청했다. 

"나라의 역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실록을 보관해야 하는데, 저 혼자서는 역부족입니다. 부디 뜻을 같이 하십시다" 

손홍록은 흔쾌히 동의하고 학문을 같이 했던 고향친구 안의와 함께 하인 30여명, 수십마리의 말을 데리고 전주로 달려갔다. 

이때 손홍록의 나이는 58세, 안의의 나이는 64세로 고령의 노인들이었다. 

오희길은 실록을 숨길만한 장소를 물색하던 중 정읍 내장산의 은봉암이 적격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이들 세 사람은 태조부터 명종 때까지 13대에 이르는 180년의 기록을 47개 상자에, <고려사> 등 다른 서책을 15개 상자에 담아 수십개의 수레에 싣고 전주를 떠났다. 

시골 선비들, 산속 깊숙한 곳에서 불침번을 서면서 실록을 지키다. 

은봉암에 도착한 것은 이레만인 1592년 6월 22일. 

다음날에는 태조 어진과 제기들을 용굴암으로, 다음달 14일에는 실록을 더 깊숙한 곳인 비래암으로 옮겼다. 

이들은 책들을 일일히 지게에 지고 한발 한발 내딛으며 산으로 올라갔다. 

지금도 용굴로 올라가는 길은 험난해서 난간에 의지해야 오를 수 있다. 

이들은 소식을 듣고 달려온 영은사(현 내장사)의 희묵스님과 무사 김홍무, 이름없는 사당패에 이르기까지 자발적으로 나선 100여명과 함께 실록을 지켰다. 

이렇게 실록과 어진을 조정에 인계할 때까지 보관했던 기간은 14개월에 달한다. 

후일 안의가 쓴 <난중일기초>에는 안의와 손홍록이 함께 자리를 뜨지 않고 실록을 지킨 날이 53일, 안의가 혼자 지킨 날이 174일, 손홍록이 혼자 있는 날이 143일이었다. 

곳곳을 전전하다 묘향산 보현사로 옮겨진 조선왕조실록 

전라감사 이광은 의주에 피난가있는 선조에게 태조 어진과 실록을 내장산에 잘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선조는 크게 기뻐하며 병조좌랑 신흠을 내장산에 보내 관헌들을 동원해 정읍으로 옮기도록 명했다. 

이후 실록은 왜군을 피해 아산으로 옮겼는데, 이때도 안의와 손홍록은 사재를 털어 식량과 말을 준비해 실록을 지켰다. 

정유왜란이 발발하자 실록은 황해도 해주~강화도~묘향산 보현사로 옮겨진다. 

안의는 실록이 아산을 떠난 직후 병을 얻어 집으로 돌아와 생을 마친다. 

남은 손홍록 일행은 실록이 묘향산에 도착할 때까지 5~6년간 실록과 동행한다. 

전쟁이 끝난 뒤 조정은 안의와 손홍록에게 종6품의 벼슬을 내렸다. 

이 포상은 민간인에게 내려진 최상급의 벼슬이다. 

지금도 전북 정읍에는 안의와 손홍록의 위패를 모신 '남천사'라는 사당이 남아 있다. 

다시 출판된 조선왕조실록...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전주사고본을 원본으로 실록을 4개 더 출판했다. 

그리고는 지역을 안배해 궁궐의 춘추관, 강화도 마니산, 평안도 영변 묘향산, 경상북도 봉화 태백산, 강원도 평창 오대산 등 5곳에 분산 배치했다. 

이후 이괄의 난, 병자호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제각기 수난을 당하게 된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대한민국에는 서울대학교에 있는 정족산 사고본과 국가기록원이 갖고 있는 태백산 사고본만 남았다. 

나머지 오대산 사고본과 적상산 사고본의 행방은 묘연했다. 

홀연히 도쿄대학교에 나타난 오대산 사고본 

2006년 7월 인천국제공항에 특별한 화물이 도착했다. 

전 국민의 관심 속에 돌아온 화물은 일제 때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대지진 속에서 살아남은 오대산 사고본 47책이었다. 

오대산실록은 1913년 강탈당해 도쿄대로 넘어갔다가 관동대지진으로 대부분 소실됐다. 

그러나 개인이 대출받아 집에 보관하던 47책이 살아남았다. 

이 소식을 접한 종교계,학계,정계 인사들이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를 구성해 끈질기게 반환을 요청한 끝에 서울대 개교기념일에 맞춰 돌려준 것이다. 

일본은 이를 돌려주면서 끝까지 '반환'이 아니라 '기증'이라고 주장해 국민적 공분을 샀다. 

'기증'이란 용어를 고집하는 건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하고 강탈한 실록이 도쿄대 재산이란 걸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북한으로 넘어간 적상산 사고본 

한국전쟁이 발생한 직후인 1950년 7월 초. 

북한 수뇌부는 서울의 한 도서관 먼지구덩이 속에 나뒹굴고 있는 적상산 사고본 1,800여권을 평양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이 실록은 묘향산 사고에 있던 것이 전라도 적상산을 거쳐 일제시대에 서울 장서각으로 옮겨진 것이다. 

최고사령부는 군사작전도에 '리조실록 구출 노정'을 그려넣고 수송을 담당할 군용차량들을 배치했다. 

이 차량들은 미군 폭격기를 피하기 위해 밤에만 이동하면서 실록을 평양으로 옮겼다. 

더 이상 폭격할 목표물이 없다는 평양에서 실록이 살아남은 건 기적같은 일이다. 

전쟁이 끝난 후 북한에서는 벽초 홍명희의 장남인 홍기문 사회과학원 부원장의 진두지휘 아래 실록의 번역작업이 진행되었다. 

드디어 16년만인 1991년 번역본 '리조실록' 400권이 출간되었다. 

남한의 한글본 413권보다 3년 앞선 것이다. 

번역의 주체가 누구이든간에 전쟁의 불길을 피해 귀중한 우리의 문화재가 살아남은 건 다행스런 일이다. 

살아남은 조선왕조실록은 국보 제151호로 지정된데 이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도 등재되었다. 

이 방대한 저서를 볼 때마다 외적의 침입 앞에서 사재를 털어 실록을 옮기고 밤새 교대로 숙직을 서던 그 전라도의 유생과 이름없는 백성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Posted by qlstnfp
2014. 9. 2. 13:21

"천년고찰을 불태우기 전에 나부터 죽여라"

2014-04-11 10:02CBS노컷뉴스 임기상 기자

http://m.nocutnews.co.kr/news/4005202




◈ 잿더미로 변한 월정사…큰 스님이 몸으로 지킨 상원사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의 강원도. 

중공군에게 밀려 후퇴하던 국군 제1군단에게 명령이 떨어졌다. 

"작전지역 안에 있는 사찰을 포함한 모든 민간 시설물을 소각하라" 

산속에 있는 민가나 절이 적의 은폐물이나 보급기지로 활용될 가능성을 없애려는 가혹한 조치였다. 

이런 소식이 알려지자, 오대산 입구에 있는 월정사의 스님과 신도들은 북한군이나 인민군이 주둔지로 사용할 수 없게 되면 국군이 태우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들은 일주일 동안 절 건물의 방구들을 파내고 모든 문짝을 뜯어냈다. 

마침내 국군이 들이닥쳤다. 

이들도 천년고찰을 제 손으로 태우려니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민간인들을 시켜 잿더미로 만들었다. 

월정사는 화강암으로 만든 팔각구층석탑(국보 제48호)만 남고 폐허로 변했다. 

국군은 이어 오대산 중턱에 있는 상원사로 몰려갔다. 

당시 오대산에는 주민들 대부분이 피난을 가고, 한국불교의 거목으로 우뚝 서게 되는 한암스님만 상원사에 남아 있었다. 

상원사로 들어온 군인들은 법당에 불을 지르려고 했다. 

한암스님은 "잠깐만 시간을 주게"라고 이르고는 방에 들어가 가사와 장삼을 입은 뒤 법당 안에 있는 불상 앞에 정좌했다. 

그리고는 "이제 불을 질러도 좋다"고 말했다. 

이를 본 장교가 "스님~ 이러시면 어떻게 합니까? 밖으로 나오세요"라며 끌어내려고 했다. 

한암스님은 단호하게 일갈했다. 

"그대가 장군의 부하라면 난 부처님의 제자야. 중이란 원래 죽으면 화장을 하는 법. 나는 여기서 힘 안들이고 저절로 화장을 할 터이니 당신들은 명령대로 어서 불을 지르게" 

스님의 기개에 압도당한 군인들은 결국 법당의 문짝만 뜯어내 불을 태운 뒤 떠났다. 

상원사는 자장스님이 당나라에서 가져온 진신사리를 봉안한 곳이며,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범종인 동종(국보 제36호)을 보관하고 있었다. 

◈ "화엄사를 불에 태워라"…"안된다~ 문짝만 소각하라" 

1951년 5월 지리산. 

빨치산 주축부대인 남부군을 토벌하던 전투경찰대 제2연대장 차일혁은 고민에 빠졌다. 

상부에서 "화엄사를 소각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미 연곡사 등 인근 사찰들은 모두 공비의 은신처를 없앤다는 이유로 불길에 휩싸였다. 

차일혁은 이 명령을 거부하기로 결심했다. 

"절을 태우는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데는 천년 이상의 세월이 걸린다" 

전쟁 중이라지만 화엄사는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유산이고, 더구나 각황전은 그의 어머니의 기도처였다. 

차일혁은 100여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화엄사에 들어갔다. 

부하들에게 각황전 문짝들을 모두 떼어와 대웅전 앞에 쌓아놓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절을 태우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이를 어길 순 없다. 문짝을 태우는 것으로 명령을 이행한 것이다" 

이로써 화엄사 전각들은 무사히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이런 조치 때문에 차일혁은 작전명령 불이행으로 감봉처분을 받았다. 

2년 후 차일혁 부대는 남부군 총사령관인 이현상을 사살해 빨치산 토벌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적장의 예를 최대한 갖춰 그의 시신을 스님들의 독경 속에 정중하게 화장한 후 하동 송림에 뿌리며 장례를 치렀다. 

이런 일들로 차일혁은 승진도 늦어지고 수많은 공훈에도 불구하고 훈장도 받지 못했다. 

1958년 조계종 초대 종정이었던 효봉스님은 그에게 감사장을 수여했고, 조계종은 1998년 6월에 화엄사 경내에 그의 공적을 기리는 비를 세웠다. 

이 비석에 고은 시인은 글을 새겼다. 

"이제 해원의 때가 무르익었으니 천하의 영봉 지리산을 생사의 터로 삼아 동족상잔의 피어린 원한을 풀어 그 본연으로 돌아감이 옳거니, 여기 근본 법륜 화엄사 청정도량에 한 사람의 자취를 새겨 기리도록 함이라" 

◈ "해인사를 폭격하라~" VS "해인사 주변에만 기관총을 갈겨라" 

경남 합천에 있는 해인사에 들어가면 올라가는 길목에 거대한 비석이 나타난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지켜낸 김영환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팔만대장경 수호 공적비'다. 

1951년 12월, 지리산 일대에는 한창 빨치산 토벌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김영환 대령이 지휘하는 한국 공군의 유일한 전투비행대인 제10 전투비행전대는 공비토벌작전에 항공지원을 맡고 있었다. 

미 공군은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정찰기와 연락장교를 파견해 한국 공군기가 작전하기 전에 미리 지상의 동향과 공격 목표를 지정해주고 있었다. 

아침식사가 끝나자마자 우리 전투비행대에 출격명령이 내려졌다. 

공비를 토벌하는 경찰부대로부터 긴급 지원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4대의 비행기가 사천 비행장을 출발해 지리산으로 향했다. 

비행기마다 각각 500파운드 폭탄 2개와 5인치 로케트탄 6개, 캘리버 50 기관총 1.800발씩을 장비하고 있었다. 

드디어 정찰기의 목표 제시용 연막탄이 해인사 마당에 떨어져 하얀 연막을 내고 있었다. 

이때 김영환 편대장의 다급한 명령이 떨어졌다. 

"각 기는 내 뒤를 따르되 편대장 지시 없이 폭탄을 사용하지 말라. 기관총만으로 사찰 주변의 능선을 사격하라" 

잠시 후 정찰기에서 독촉 훈령이 내려왔다. 

"해인사를 폭탄으로 공격하라~ 도대체 편대장은 무엇을 하고 있나?" 

편대장의 2차 명령이 떨어졌다. 

"각 기는 폭탄 공격을 하지 말라~" 

4대의 비행기는 해인사를 지나쳐 뒷산 능선 너머에서 폭탄과 로케트탄을 빨치산들에게 퍼부었다. 

그날 저녁, 미 공군 고문단의 한 소령이 편대장실에 나타났다. 

그는 김영환 대장에게 물었다. 

"아까 목표를 알리는 연막탄의 흰 연기를 보셨습니까?"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런데 엉뚱한 곳을 공격하더군요" 

"소령께서는 경찰의 요청에 따라 목표를 지정했지만 그 곳은 사찰이었습니다" 
"사찰이 국가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씀이군요" 
"공비보다 사찰이 더 중요하다는 얘기입니다. 그 사찰에는 공비와 바꿀 수 없는 세계적인 국보 팔만대장경이 있습니다. 미군도 2차대전 때 귀중한 문화재가 많은 교토시를 폭격 대상에서 제외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말문이 막힌 미군 장교는 돌아가버렸다. 

이렇게 해서 천년고찰 해인사와 장경판전, 고려대장경판은 우리 곁에 남아있게 되었다. 

이 일화를 알게된 해인사는 2002년에 높이 2.2m 높이에 팔만대장경의 경판을 본떠 오석과 황동석으로 제작한 공적비를 해인사 마당에 세웠다. 

큰 스님이 상원사에 없었다면, 차일혁과 김영환 두 분이 상부의 명령을 따랐다면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는 흔적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