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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02 조선인이 조선인 잡는 '간도특설대'
- 2014.09.02 해방 후 친일파 득세…의열단장 끝내 '평양 행'
- 2014.09.02 이재유--남과 북 모두 '독립유공자'로 표창한 혁명가
- 2014.09.02 '지도에서 사라진 평양'…처절했던 폭격의 공포
조선인이 조선인 잡는 '간도특설대'를 아십니까?
2014-04-03 09:13CBS노컷뉴스 임기상 기자
http://m.nocutnews.co.kr/news/4000118
[임기상의 역사산책⑨]죄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실제는 국군 수뇌부
조선인 청년들이 일본군이 준 무기를 들고 조선 독립군에게 총을 쏘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이 소설 같은 장면이 1930~1940년대에 만주벌판에서 실제 펼쳐졌다.
1931년 만주를 점령한 일본군은 중국인과 조선인으로 구성된 '동북항일연군'의 게릴라전에 휘말려 고전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중국 본토 침략 때문에 바빴고, 만주인을 주축으로 구성된 만주국 괴뢰군은 전투의지도 없고 군기도 엉망이었다.
이에 따라 만주의 대표적인 친일파인 간도성 성장 이범익 등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조선인으로 구성된 독립적인 특수부대를 만들기로 했다.
1938년 12월 14일 만주국 기병대가 쓰던 밍웨거우의 병영에서 간도특설대 1기 지원병 입대식이 열렸다.
하사관을 포함한 사병은 모두 조선인이었고, 장교는 일본인과 조선사람이 섞여 있었다.
이들의 토벌대상은 연변 일대를 무대로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는 조·중 연합 독립군이었다.
당시 만주에는 동북항일연군 등 다양한 항일조직이 군대와 관헌의 추적을 피하면서 집단주거 마을시설과 격리된 채 은신하면서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을 대상으로 간도특설대는 1939년부터 1943년까지 5년간 전투를 벌였다.
항일운동을 하는 조선 청년들과 일본군의 지휘를 받는 친일 조선인 사이에 총질이 벌어진 것이다.
간도특설대의 진압이 얼마나 무자비했는지 역사학자 필립 조웰은 "일본군의 만주점령 기간 중에 간도특설대는 잔악한 악명을 얻었으며,그들이 점령한 광범위한 지역을 황폐화시켰다"고 평가했다.
이들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소식도 받지 못한 채 팔로군 토벌작업을 계속 벌였다.
어처구니없게도 팔로군측이 일제의 패망 소식을 전해주면서 전투가 종식되었다.
소련군에게 쫒기던 간도특설대 대원들은 일본군이 남긴 돈을 나눠 갖고 각자 살기 위해 뿔뿔히 흩어져 한반도로 도피했다.
◈ 항일부대에 귀중한 탄약 10만발을 넘겨준 일본군 병사
1933년 3월 하순.
만주 젠산쯔(尖山子,뾰족산) 일대에서 항일 유격대와 일본군·만주군 혼성 토벌대 간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군인은 일본어로 쓴 유서를 남겼다.
"나는 당신들과 만나서 공동의 원수를 치고 싶습니다. 그러나 파쇼 야수들에게 포위되어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자살하기로 했습니다. 내가 여기까지 운반해 온 10만발의 탄알을 귀군에게 드립니다. 바라건대 그 탄알로 파쇼 군대를 쏘십시오."
이다라는 군인은 일본군이 트럭을 회수하지 못하도록 엔진을 부순 상태였다.
유격대는 이다의 주검을 이번 전투에서 전사한 유격대원들과 함께 매장했다.
사흘 후 다시 이다의 묘소에 모여 엄숙하게 추도식을 거행하고 그를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이 지역의 소학교 이름을 '이다 소학교'로 개명했다.
◈ 대한민국 국군 수뇌부로 올라선 간도특설대 대원들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했던 대원들은 해방 후 과거를 숨기고 신생 대한민국의 국군에 들어갔다.
이들 중 상당수가 장관, 군사령관, 고위 관료로 출세했다.
해병대의 경우 신현준, 김석범에 이어 김대식 등 간도특설대 출신이 사령관을 맡는 진기한 기록을 세웠다.
이들 중 일부는 과거를 지우기 위해 이름을 바꾸는 경우도 있었으나 누구 하나 자발적으로 당시의 일을 고해하거나 참회한 인물은 한 명도 없다.
가장 유명한 인사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백선엽 장군이다.
그나마 일본에서 일어판으로 발간한 '대 게릴라전-미국은 왜 졌는가'에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우리들이 쫒아다닌 게릴라 가운데 조선인이 많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에 차이가 있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요구하며 싸우고 있는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하려는 일본의 책략에 그대로 끼인 모양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진지하게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진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들이 역으로 게릴라가 되어 싸웠으면 독립이 빨라졌으리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 그래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고 비판받아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게릴라전이 전개된 지역의 참상을 알게 되면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 이해될 것이다".
그냥 "젊은 날 철이 없어 우리 민족에게 죽을 죄를 졌다"고 하면 될 것을 해괴한 논리로 포장하고 있다.
'친일인명사전'은 일본군에 복무해도 소좌 이상만 등재했지만, 간도특설대는 '독립군 말살'이란 악랄한 임무 때문에 장교는 물론 사병까지 전원 등재했다.
최근 만주벌판 현장을 답사하며 '간도특설대'라는 걸작을 저술한 언론인 김효순 씨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간도특설대가 민족의 자랑거리였느니, 민중의 편이었느니 하는 새빨간 거짓말이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 그래도 그 경력을 살려 '한국전쟁에서 공비를 토벌했다'는 말이 항일 영령을 악귀처럼 내쫒아버리는 전능의 부적으로 사용되는 시대는 끝나야 한다. 공비 토벌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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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질 친일경찰, 광복군 장군의 뺨을 때리다
2014-04-02 09:42CBS노컷뉴스 임기상 기자
http://m.nocutnews.co.kr/news/1216257
해방 후 친일파 득세…의열단장 끝내 '평양 행'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싸고 임시정부와 갈등을 빚은 김원봉은 임정을 탈퇴하고, 좌우합작 운동에 주력했다. 이마저 여의치 않자 중간파를 이끌고 좌익계열인 '민주주의 민족전선'(민전)에 합류했다.
이때부터 미군정과 경찰의 탄압이 시작됐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대규모 폭동이 발생하자 그 배후로 몰려 성북경찰서에 연행 구금돼 친일경찰들한테 폭행을 당했다. 이어 공공연한 협박은 물론 테러 위협까지 받자 중국에서처럼 거처를 수시로 옮기고 잠행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이 기정사실화되자 월북을 결심한다.
김원봉은 남북에서 정부가 수립되기 전 마지막 회담인 평양의 '남북한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한 뒤 북한에 남았다. 공산주의자가 아닌 김원봉이 북한을 선택한 건 친일경찰 노덕술의 폭력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생전에 이렇게 회고했다.
"경찰서에 붙잡혀가 대표적인 악질 친일파 노덕술한테 뺨을 맞고 욕설을 들었다. 내가 조국 해방을 위해 중국에서 일본놈들과 싸울 때도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 경찰 손에 수갑을 차고 모욕을 당했으니…. 의열단 활동을 같이 했던 유석현 집에 가서 꼬박 사흘간 울었다."
▣대표적인 친일경찰 '노덕술'은 누구인가?
침략 당사자인 일본 경찰보다 조선인 경찰을 더 미워한 것은 그들이 일본인보다 더 악랄하게 굴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가장 악명을 떨친 인물이 노덕술이다.
그는 일제하에서 경찰로 일하면서 체포된 학생, 사회주의 운동가, 신간회 간부 등 나이, 성별, 좌우를 가리지 않고 숱한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해 무자비한 고문을 가했다. 그 결과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고문을 받다가 또는 그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런 인물이 미 군정청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으로 변신해 평생을 의열단원과 광복군과 함께 총을 들고 일본과 싸운 의열단 단장의 뺨을 갈겼으니 그 심정은 어땠을까?
▣해방 후 다시 마주친 독립운동가와 친일군경
김원봉보다 더 기막힌 사연은 많다.
한국전쟁 때는 피난가지 않고 서울에 남았다가 부역죄 혐의로 종로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를 받으면서 구타를 당했는데,자기를 때리는 경찰관이 일제 때 자기를 구속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일제 말인 1943년 합천독서회 사건으로 구속돼 1년여 동안 감옥에 있었던 이구영(1920~2006)은 한국전쟁 때 월북했다가 1958년 7월 남파공작을 위해 남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접선에 실패하고 2달만에 부산에서 체포되었다.
그런데 이때 그를 체포한 형사 역시 일제시대에 그를 고문했던 형사였다.
저명한 언론인이자 문인인 송지영씨의 사연도 기구하다. 그는 상해임시정부와 연결된 혐의로 1944년 2년 선고를 받고 나가사키 형무소에 있다가 해방 후 출소했다.
그는 국내의 대표적인 논객으로 활동하다 5.16 쿠데타 직후 민족일보 사건과 관련돼 혁명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때 그를 살리기 위해 국제 엠네스티는 물론 문인과 언론인 104명이 관대한 처분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박창암 혁명검찰부장에게 제출했다.
"독립운동가가 친일파들한테 살려달라고 구걸하는 세상이 됐구나."
왜 이런 비극이 벌어진걸까?
어느 나라건 외세로부터 해방되면 국가건설과 함께 2가지 일에 착수한다.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숨을 거둔 애국자들의 시신을 수습해 국립묘지에 안장하고, 식민지 시절 동포를 핍박한 매국노를 처단하는 일이다.
우리는 이 두가지 과제 수행에 실패했다. 나치 독일로부터 나라를 되찾은 드골장군은 적에게 협력한 군인, 경찰에 이어 문인과 학자, 언론인 1만명을 체포해 대부분 교수형대로 보냈다.
너무 가혹하지 않느냐는 일부 주장에 대해 그는 "위대한 프랑스의 미래를 위해 우리 민족의 정신을 타락시킨 매국노를 처단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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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31 09:53CBS노컷뉴스 임기상 기자
남과 북 모두 '독립유공자'로 표창한 혁명가
"이재유가 또 탈출했다~"…일본경찰 '혼비백산'
http://m.nocutnews.co.kr/news/4040302
◈ 경성제국대학의 양심 미야케 시카노스케 교수, 조선독립을 도와주다
1934년 5월 21일 서대문경찰서.
이 곳에 끌려온 경성제대 법문학부 교수 미야케 시카노스케는 공산주의 조직과의 관련과 이재유의 행방을 대라는 일경의 고문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재유는 당시 조선 최대의 공산주의 지하조직인 '경성트로이카'의 지도자로, 서대문경찰서에 체포됐다가 탈출에 성공해 어디론가 사라진 상태였다.
그를 잡기 위해 500원의 현상금이 걸리고, 경성 시내 5개 경찰서가 비상근무 중이었다.
고초를 겪던 미야케 교수는 "하루만 시간을 주면 다 자백하겠다"고 토로했다.
일경은 일단 조사를 중단했다.
한편, 미야케 교수의 동숭동 관사의 다다미방 아래에 토굴을 파서 숨어있던 이재유는 미야케가 경찰에 연행되고 가택수색을 하는 소리를 들으며 숨어 있었다.
일본 경찰이 철수하자 조용히 토굴에서 나와 짐을 챙긴 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한편 하루가 지난 후 미야케 교수는 경찰에게 자백했다.
24시간이면 이재유가 충분히 잠적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내 집에 이재유가 숨어 있습니다"
놀란 경찰이 관사를 덥쳤지만 이재유는 사라지고 없었다.
이재유를 놓친 경찰은 미야케를 두둘겨 패며 분노를 쏟아냈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상태였다.
이 사건은 일제의 보도통제로 기사화하지 못하다가 1년 후인 1935년 8월 24일에야 조선은 물론 일본의 각 신문에 보도되면서 세간에 알려졌다.
조선인들은 경찰서를 탈출한 이재유가 숨어있던 곳이 일본인 경성제대 교수의 집이었다는 사실에 '독립운동 사상 초유의 일'이라며 흥분했다.
더 충격을 받은 건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부의 수뇌부였다.
"대일본제국의 최고 엘리트가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도와주다니..."
미야케 교수는 도쿄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독일 유학을 다녀온 후 경성제대 경제학부 교수로 부임한 일본 최고의 마르크스 경제학의 권위자였다.
그가 수감되고 교수직에서 쫒겨나자 관사를 나온 아내는 헌책방을 차린후 출소 때까지 남편을 뒷바라지했다.
미야케 교수는 일제가 망할 때까지 강단에 서지 못하다가 8.15 해방 후 다시 일본의 대학에 들어갔다.
미야케 교수가 투옥되고 바로 일본에 돌아간 후에도 그가 키운 제자들은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벌였다.
조선 최고의 국문학자 김태준을 비롯해 이강국, 정태식, 최용달, 박문규 등 기라성같은 제자들은 변절하지 않고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벌여나갔다.
식민지 지배 36년간 한민족의 정신을 좀먹은 수많은 일본인 황국사관 학자들도 있었지만, 음으로 양으로 조선 독립을 도와준 일본인 학자들도 적지 않았다.
◈ 경찰서를 빠져나와 감쪽같이 사라진 거물급 공산주의자 '이재유'
일제가 만주를 석권한 1934년 4월 13일 밤. 조용하던 서대문경찰서에 한가닥 호루라기 소리가 울렸다.
이어 "이재유가 달아났다"는 고함소리와 함께 당직경찰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경성과 경기도 경찰부 모든 병력이 총동원되어 시내를 뒤졌지만 그의 행방은 묘연했다.
일본 경찰이 더 충격을 받은 것은 이재유가 한달 전 탈출했다가 다시 붙잡혀 2명의 감시인을 붙이고 양손에 자동수갑까지 채운 상태였기 때문이다.
당시 이재유는 경찰서 고등계 형사실에서 고문과 구타를 받으며 조사를 받다 양심적인 일본인 모리다 순사의 묵인 아래 1차 탈출에 성공했다.
그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에 정동 골목길로 달리다 경찰이 보이자 어떤 집의 담장을 넘어 들어갔다.
그러나 하필 그 곳은 미국 영사관이었다
미국 영사는 이 초라한 행색의 조선인을 도둑으로 단정하고 일본경찰에 넘겨줘 1차 탈출에 실패했다.
그러면 이번에 이재유는 어떻게 탈출했나?
그는 배달되는 우유의 양철 병뚜껑과 짓이긴 밥알을 이용해 수갑 내부의 형을 떠서 열쇠를 만들었다.
이어 개인 사물함에서 외투와 마스크, 지폐를 꺼내놓고 탈출 기회를 노렸다.
그러다 같은 방에 있던 피의자가 설사 때문에 당직경찰과 함께 화장실에 간 사이 유유히 경찰서를 빠져 나갔다.
택시를 타고 이재유가 찾아간 곳은 동숭동 경성제대 교수 관사였다.
평소 친분이 있는 일본인 사회주의자 미야케 교수가 반갑게 맞았다.
이 곳에서 다다미 밑의 나무마루 아래 흙을 파서 토굴을 만들었다.
이재유는 38일 후 미야케 교수가 다른 사건으로 체포될 때까지 이 토굴에 은신했다.
경찰이 미야케 교수 집을 샅샅히 뒤지고 떠나자 이재유는 토굴에서 나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농사를 지으며 조직을 재건하다 다시 체포
탈출하기 2년 전에 1차 수형생활을 마친 이재유는 동지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상황은 이미 민족주의 진영이 친일로 돌아서고 조선공산당 마저 궤멸되자 사실상 일본에 대한 저항은 끊긴 상태였다.
이재유는 붕괴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로 하고,비타협적 운동가들과 함께 경성시내 노동자와 부두 노동자, 학생운동, 농민조합을 연결해 연쇄파업, 동맹휴학을 지도했다.
일련의 파업을 주시하던 일본 경찰은 배후에 조직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대규모 검거와 고문수사 끝에 이재유를 검거한 것이다.
이재유는 갓 출옥한 동지 이관술(전 동덕여고 교사)을 만나 서울서 멀지 않은 경기도 양주군 공덕리(지금의 노원구 창동)의 농촌마을에 정착했다.
두 사람은 여기서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전국 조직에 뿌릴 팜플렛을 만들었다.
이재유는 수시로 서울로 나가 조직 재건에 몰두했다.
이재유의 뒤를 쫒던 일본 경찰은 드디어 성탄절인 1936년 12월 25일 창동역 부근 야산에 이재유가 나타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오전 11시, 온갖 복장을 한 형사 60명이 코밑에 수염을 기른 농부 차림의 사내를 덮쳤다.
이재유는 끌려가면서도 미친 사람처럼 소리지르며 저항했다.
"놔라~ 이 더러운 쪽발이놈들아! 일본이 영원할 줄 아냐?"
그가 소리지른 것은 자기를 기다리는 이관술에게 빨리 도망가라는 신호였다.
이렇게 해서 이재유는 서대문경찰서에서 탈출한 지 2년 8개월만에 붙잡히고, 6년 후 1944년 10월 26일 해방을 보지 못하고 청주보호교도소에서 병사하였다.
일본이 패망한 뒤 북한 정권은 이재유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남한 정부도 독립운동을 통해 건국에 기여한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이재유 계열의 일제하 마지막 저항운동…'경성꼼그룹'
이재유가 체포되자 잠적한 이관술은 다시 이재유의 조직 재건에 나섰다.
그는 전국을 돌며 이재유와 연결된 인물들 100여명을 엮어 전국 조직을 만들었다.
지도자로는 감옥에 있는 이재유 대신 조선 공산주의운동의 상징인 박헌영을 영입했다.
이 조직이 36년간의 일제치하에서 마지막으로 저항한 '경성꼼그룹'이다.
그러나 1941년 몇 차례에 걸친 검거 선풍으로 조직원 대부분이 체포되면서 와해된다.
당시 서대문형무소에 있던 제3차 조선공산당 대표였던 김철수씨의 회고담이다.
"감옥에 자꾸만 박헌영파만 잡혀와. 공산당 재건운동 한다고 잡혀오는거야.우리 파는 이권운동이다 양조장이다, 정미소나 하면서 왜놈들한테 얻어먹고 다니는데…. 그걸 보고 일본놈들이 패망하면 아무래도 박헌영을 내세워야지 그런 생각을 했지."
해방이 되자 이재유 계열이 조선공산당의 주도권을 잡는다.
그러나 남북 분단과 미소 주둔, 단독정부 수립, 한국전쟁을 거치며 남과 북에서 버림받는다.
하지만 여자들은 살아남았다.
이재유로부터 지도를 받은 이관술의 동덕여고 제자 이효정 할머니는 이렇게 과거를 되돌아봤다.
"일제시대에는 사회주의가 진리였습니다. 사회주의도 많은 일을 했어요. 적어도 독립운동에서는 그랬어요. 나는 젊음을 사회주의 운동에 바친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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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바다로 변한 북한…"더 이상 폭격할 곳이 없다"
#장면1
1950년 6월 27일 저녁.
도쿄에 있는 맥아더 장군은 제5공군사령관 파트리지에게 퉁명스럽게 명령을 내렸다.
"당장 폭격기를 한반도로 출동시켜 앞으로 36시간 동안 모든 폭탄을 북한군에게 쏟아부어라"
"지형도 모르고 한국군과의 교신이 안돼 적군과 아군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38선과 전선 사이에서 움직이는 건 다 폭격해. 미군이 왔다는 걸 알면 북한군은 제 자리로 돌아갈거야"
1950년 7월 7일 김일성 내각수상 사무실.
연신 전화벨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김일성 수상이 슈티코프 북한 주재 소련대사에게 언성을 높였다.
"사방에서 전화로 미 공군의 폭격과 대규모 파괴에 대해 보고한다. 왜 소련은 공군을 안 보내는 건가? 정말 힘들다~"
당시 전황은 북한군이 오산에서 미 육군 선발대를 궤멸시키면서 쾌속의 속도로 대전으로 남하하는 중이었다.
급하게 출동한 미군 폭격기들은 여의도 비행장이나 서울역,한강 교량 등 요충지에 폭탄을 투하하는 등 전과를 올리기도 했지만, 한국군을 북한군으로 오인해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당시 제1사단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은 "임진강 방어선에서 철수하다 문산에서 B-26 경폭기가 우리 부대를 폭격해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고 회고했다.
처음에는 남하하는 북한군이나 산업시설, 군수창고, 유류저장소, 도로·철도·항만 등 북한의 전투력에 기여하는 곳을 주로 파괴했다.
그러나 구름 위 높은 곳에서 B-29 중폭격기가 쏟아부운 폭탄이 정확히 맞을 리 없었다.
1950년 7월 13일 B-29 중폭격기 56대가 참가한 원산폭격에서는 주민들이 사는 주택가에 폭탄이 떨어져 1,249명이 희생되었다.
이중 195명이 여성, 125명이 어린이, 122명이 노인이었다.
그러나 북진하던 유엔군이 대거 참전한 중국군에게 참패하자 양상이 달라졌다.
맥아더 장군은 1950년 11월 5일 중대한 명령을 내렸다.
"수력발전소를 제외하고 북한의 모든 도시와 마을을 군사목표로 삼아 초토화시켜라"
이때 등장한 폭탄이 독일과 일본을 불바다로 만든 소이탄과 네이팜탄이다.
이때부터 유엔군 북쪽에서 압록강과 두만강 사이의 모든 지역이 불길에 휩싸이게 된다.
독일과 일본의 대도시와 중소도시를 대상으로 했던 2차대전과 달리, 북한에서는 아주 작은 시골마을까지 모두 불살라버렸다.
폭격의 패턴은 먼저 중폭격기가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면, 이어 전폭기가 나타나 화재 진화를 못하도록 기총소사를 하고 시한폭탄을 뿌렸다.
세번째 단계는 휴전회담이 시작된 1951년 여름부터였다.
전선이 교착되자 미 공군은 전선으로 보내는 보급을 끊기 위해 북한전역을 연결하는 철도망을 파괴했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포로송환 문제로 휴전협상이 중단되자 적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 모든 민간인들에게 무차별적인 폭격을 가했다.
동시에 폭격대상에서 제외시켰던 수력발전소와 논농사에 필수적인 저수지를 대거 파괴하기 시작했다.
수풍발전소를 시작으로 부전, 장진, 허천발전소 등이 무너졌다.
포로수용소를 나온 미 24사단장 딘 장군은 "희천 시가지를 보고 놀랐다. 도로와 2층 건물로 이뤄진 도시가 사라졌다. 건물은 공터 아니면 돌무더기만 남았다. 사람들로 가득한 도시가 텅 빈 껍데기로 변했다"고 회고했다.
◈ "폐허만 남은 도시…북한 주민 가슴에는 '미국에 대한 증오'만 남았다"
"왜 고향을 두고 내려왔습니까?"
"공산당도 싫었지만 그 무시무시한 폭격이랑 원자폭탄이 더 무서웠지"
유엔군의 후퇴와 함께 남한주민의 1차 피난에 이은 북한주민의 2차 피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폐허 속에 남겨진 주민들은 배고픔과 함께 가슴 속에 깊은 원한이 자리잡았다.
한반도에서 가장 친미적이고 기독교가 번성했던 평양 일대 서북지역은 '반미'의 중심지로 탈바꿈했다.
지금도 북한에서 가장 심한 욕이 '미제 승냥이놈'이다.
탈북자들은 모두 어린 시절 유치원과 인민학교에서 '미국놈 때리기' 놀이를 했다고 진술했다.
6자회담도 그렇고, 미북 양자회담도 그렇고, '통일대박'도 좋지만, 북한 주민 가슴 속에 응어리진 공포와 미국에 대한 증오심을 현실로 인정하면서 대북관계를 풀어가야 하지 않을까?
남쪽은 남쪽대로 처참한 전쟁을 일으킨 북한 수뇌부에 대한 증오와 모든 것을 두고 고향을 두고 혈혈단신 내려온 한을 안고 살고 있다.
이 간극을 어떻게 좁히는가가 통일로 가는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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