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겨 쓴 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350건
- 2014.09.02 현해탄 건너간 경천사십층석탑...
- 2014.09.02 무령왕릉 '엉터리' 발굴…
- 2014.09.02 마지막 조선 총독의 저주
- 2014.09.02 도둑같이 새벽 기차 타고 서울 떠난 대통령
2014. 9. 2. 13:00
고려석탑 약탈한 日관료…분노한 英 청년
2014-04-10 10:52CBS노컷뉴스 임기상 기자
http://m.nocutnews.co.kr/news/4004414
[임기상의 역사산책 ⑭]현해탄 건너간 경천사십층석탑...박물관에 우뚝 서다
◈총칼을 앞세우고 약탈해간 경천사십층석탑
조선이 일본에게 외교권을 뺏긴 후 2년이 지난 1907년 3월.
한 무리의 일본인들이 총칼을 들고 개성에서 서남쪽으로 약 20Km 떨어진 부소산 기슭에 있는 경천사 절터로 몰려왔다.
이 당시에는 사찰의 건물은 다 사라지고 특이한 형태의 대리석 석탑 하나만 우뚝 서있었다.
13.5m의 큰 키에 탑신마다 섬세하게 조각된 불상과 보살상은 화초들로 뒤덮여 있었지만 걸작 중의 걸작이었다.
일본인들은 이 석탑을 마구 해체하고 포장하기 시작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인근 주민들과 군수 일행이 가로막자 '고종 황제가 하사했다'는 거짓말을 내세워 총검으로 위협했다.
한 무리의 일본인들이 총칼을 들고 개성에서 서남쪽으로 약 20Km 떨어진 부소산 기슭에 있는 경천사 절터로 몰려왔다.
이 당시에는 사찰의 건물은 다 사라지고 특이한 형태의 대리석 석탑 하나만 우뚝 서있었다.
13.5m의 큰 키에 탑신마다 섬세하게 조각된 불상과 보살상은 화초들로 뒤덮여 있었지만 걸작 중의 걸작이었다.
일본인들은 이 석탑을 마구 해체하고 포장하기 시작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인근 주민들과 군수 일행이 가로막자 '고종 황제가 하사했다'는 거짓말을 내세워 총검으로 위협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달구지 수십대에 석탑 조각들을 싣고 개성역으로 빼돌린 뒤 일본으로 실어갔다.
어떻게 해서 백주대낮에 이런 날강도짓이 벌어진건가?
◈대리석탑을 탐내 사기극을 벌인 다나카 미쓰아키
다나카 미쓰아키는 일본의 궁내대신으로 문화재 약탈자 가운데 최고 악질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1904년에 발간된 <한국건축조사보고>라는 책에서 본 경천사십층석탑에 흠뻑 빠졌다.
높은 탑이지만 위압감보다는 상승과 안정의 느낌을 주면서 균형감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회색 대리석 탑이었다.
그는 자나깨나 이 탑을 자기 집 정원에 갖다 놓을 궁리만 하고 있었다.
1907년 1월 24일에 열린 대한제국 황태자(순종)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집어갈 방법을 찾았으나 실패하고 그냥 돌아갔다.
그러다 뒷돈을 주고 무뢰배들을 고용해 명령을 내렸다.
"고종황제가 결혼식 기념으로 나에게 하사했다. 개성 근처의 절터에 있는 대리석탑을 도쿄에 있는 우리 집 정원으로 가져와라"
어떻게 해서 백주대낮에 이런 날강도짓이 벌어진건가?
◈대리석탑을 탐내 사기극을 벌인 다나카 미쓰아키
다나카 미쓰아키는 일본의 궁내대신으로 문화재 약탈자 가운데 최고 악질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1904년에 발간된 <한국건축조사보고>라는 책에서 본 경천사십층석탑에 흠뻑 빠졌다.
높은 탑이지만 위압감보다는 상승과 안정의 느낌을 주면서 균형감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회색 대리석 탑이었다.
그는 자나깨나 이 탑을 자기 집 정원에 갖다 놓을 궁리만 하고 있었다.
1907년 1월 24일에 열린 대한제국 황태자(순종)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집어갈 방법을 찾았으나 실패하고 그냥 돌아갔다.
그러다 뒷돈을 주고 무뢰배들을 고용해 명령을 내렸다.
"고종황제가 결혼식 기념으로 나에게 하사했다. 개성 근처의 절터에 있는 대리석탑을 도쿄에 있는 우리 집 정원으로 가져와라"
그래서 이같은 문화재 약탈과 야반도주라는 범행을 저지른 것이다.
◈들끓는 여론...야만적인 약탈을 준엄히 꾸짖은 푸른 눈의 외국인들
황제의 이름을 팔아 문화재를 훔쳐간 이 사기행각은 순식간에 한양으로 전해져, 신문을 발행하고 있던 젊은 영국인의 귀에 들어갔다.
바로 35세의 언론인 어네스트 베셀이다.
◈들끓는 여론...야만적인 약탈을 준엄히 꾸짖은 푸른 눈의 외국인들
황제의 이름을 팔아 문화재를 훔쳐간 이 사기행각은 순식간에 한양으로 전해져, 신문을 발행하고 있던 젊은 영국인의 귀에 들어갔다.
바로 35세의 언론인 어네스트 베셀이다.
베셀은 영국 특파원으로 조선에 왔다가 이 쓰러져가는 나라를 돕기 위해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뉴스>라는 일간지 2개를 발간하고 있었다.
그는 통감부의 매수와 회유를 뿌리치고 이 전대미문의 문화재 약탈 소식을 신문에 실었다.
1907년 3월 12자로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기사다.
"개성군과 풍덕군 접경지역에 있는 경천사탑은 고려 공민왕 때 공주를 위해 옥석(대리석)으로 10층 높이로 세운 수백년된 유물이다. 그런데 무슨 허가를 받았는지, 일본인들이 그 탑을 무너뜨려 일본으로 실어간다 하기에 두 군민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빼앗기지 않겠다고 결사적으로 맹세했다고 한다"
이렇게 군민들은 맨 손으로 우리 유물들을 지키려고 했지만, 이 사정을 알고 있는 중앙 조정은 남의 일처럼 바라봤으니 정말 참담한 일이었다.
다나카가 잠시 조선에 왔을 때 심상훈 궁내대신에게 이 탑이 탐난다고 말하자, 조선의 대신이라는 인물이 "탐이 나거든 가지고 가시지요"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베셀이 연일 이 사건을 보도하자, 통감부가 지원하는 <서울프레스>와 일본 정부의 대변지인 <저팬 메일>은 '이것은 분명한 거짓말'이라고 반박해 일대 논전이 벌어진다.
그는 통감부의 매수와 회유를 뿌리치고 이 전대미문의 문화재 약탈 소식을 신문에 실었다.
1907년 3월 12자로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기사다.
"개성군과 풍덕군 접경지역에 있는 경천사탑은 고려 공민왕 때 공주를 위해 옥석(대리석)으로 10층 높이로 세운 수백년된 유물이다. 그런데 무슨 허가를 받았는지, 일본인들이 그 탑을 무너뜨려 일본으로 실어간다 하기에 두 군민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빼앗기지 않겠다고 결사적으로 맹세했다고 한다"
이렇게 군민들은 맨 손으로 우리 유물들을 지키려고 했지만, 이 사정을 알고 있는 중앙 조정은 남의 일처럼 바라봤으니 정말 참담한 일이었다.
다나카가 잠시 조선에 왔을 때 심상훈 궁내대신에게 이 탑이 탐난다고 말하자, 조선의 대신이라는 인물이 "탐이 나거든 가지고 가시지요"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베셀이 연일 이 사건을 보도하자, 통감부가 지원하는 <서울프레스>와 일본 정부의 대변지인 <저팬 메일>은 '이것은 분명한 거짓말'이라고 반박해 일대 논전이 벌어진다.
◈인류의 양심에 호소한 선교사 헐버트
서울에서 <코리아 리뷰>라는 월간지를 발행하던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는 이 소식을 접하자 피가 끓어 올랐다.
그는 1905년 일사늑약이 체결되자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밀서를 전하기 위해 워싱톤에 다녀오기도 했고, 1907년에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도 밀사로 파견되기도 했다.
헐버트는 일본 고베의 영자신문 <저팬 크로니클>과 미국에서 영향력 있는 신문인 <뉴욕 포스트>에 이 사실을 알려 대대적으로 보도하도록 했다.
이처럼 국내외의 여론이 들끓자 일본 정부는 더 이상 석탑 약탈을 없는 사실이라고 부정할 수 없었다.
양심적인 일본인들도 나서 다나카를 질타하고 조선으로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고민하는 조선총감부...버티는 다나카
여론이 악화되자 당시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다나카는 실어간 석탑을 조선의 원래 위치로 돌려보내라. 그것은 불법적인 반출이다"라고 요구했다.
데라우치가 양심적인 인물이라 그런 게 아니고 곧 조선을 병탄해야 하는데 반일감정이 고조될 것을 우려한 것이다.
그는 1905년 일사늑약이 체결되자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밀서를 전하기 위해 워싱톤에 다녀오기도 했고, 1907년에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도 밀사로 파견되기도 했다.
헐버트는 일본 고베의 영자신문 <저팬 크로니클>과 미국에서 영향력 있는 신문인 <뉴욕 포스트>에 이 사실을 알려 대대적으로 보도하도록 했다.
이처럼 국내외의 여론이 들끓자 일본 정부는 더 이상 석탑 약탈을 없는 사실이라고 부정할 수 없었다.
양심적인 일본인들도 나서 다나카를 질타하고 조선으로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고민하는 조선총감부...버티는 다나카
여론이 악화되자 당시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다나카는 실어간 석탑을 조선의 원래 위치로 돌려보내라. 그것은 불법적인 반출이다"라고 요구했다.
데라우치가 양심적인 인물이라 그런 게 아니고 곧 조선을 병탄해야 하는데 반일감정이 고조될 것을 우려한 것이다.
초대 총독으로 올라서는 데라우치는 조선의 유물 반출을 엄금했는데, 이는 조선이 억년만년 일본 땅이 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그도 조선을 떠날 때 석굴암 본존불을 반출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다나카는 귀를 막고 11년동안 버텼다.
1918년 결국 국내외 여론의 단합과 계속되는 총독부의 반환 요구에 무릎을 꿇고 탑을 경성으로 보낸다.
◈41년간 방치된 경천사십층석탑...경복궁에 다시 서다
다나카는 귀를 막고 11년동안 버텼다.
1918년 결국 국내외 여론의 단합과 계속되는 총독부의 반환 요구에 무릎을 꿇고 탑을 경성으로 보낸다.
◈41년간 방치된 경천사십층석탑...경복궁에 다시 서다
우여곡절 끝에 경천사십층석탑은 현해탄을 건너 고국에 돌아왔지만 심하게 망가진 상태였다.
애써 찾아오고도 해방 때까지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방치되었다.
결국 세월이 흐른 뒤 1959년 경복궁 내 전통공예관(현재의 경복궁 관리사무소) 앞에 세워졌다.
3년 후에는 국보 제86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복구기술이 낙후해서 조잡스럽게 복원되었다.
일부 훼손된 부분을 시멘트로 칠하고,야외에 세워놓으니 산성비나 풍화작용에 의해 계속 망가져갔다.
결국 1995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석탑을 해체한 뒤 10년간 보존.복원작업을 벌였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넓은 홀에 위용을 드러내다
애써 찾아오고도 해방 때까지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방치되었다.
결국 세월이 흐른 뒤 1959년 경복궁 내 전통공예관(현재의 경복궁 관리사무소) 앞에 세워졌다.
3년 후에는 국보 제86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복구기술이 낙후해서 조잡스럽게 복원되었다.
일부 훼손된 부분을 시멘트로 칠하고,야외에 세워놓으니 산성비나 풍화작용에 의해 계속 망가져갔다.
결국 1995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석탑을 해체한 뒤 10년간 보존.복원작업을 벌였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넓은 홀에 위용을 드러내다
서울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들어서면 넓은 홀의 맨 끝에 있는 아름다운 대리석탑이 한 눈에 들어온다.
늘씬하게 솟아 올라간 몸매와 독특한 생김새, 탑에 새겨진 정교한 조각 등 늘 볼 때마다 그 우아한 멋에 감탄하게 된다.
이 탑이 세워진 것은 1348년 고려 때이다.
생김새도 특이하지만 '병을 치유해주는 약황탑'으로도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멀리서 보면 팔작지붕의 기와집들이 빼곡하게 마을을 이룬 듯 보이는 걸작이다.
이 수려한 탑을 보고 지나가는 저 어린이들이 이 탑을 지키려고 맨 몸으로 총칼에 덤빈 군수와 군민들, 이 척박한 나라를 사랑했던 푸른 눈의 외국인들을 기억할까?
누구보다 조선을 사랑했던 베셀과 헐버트의 유해는 유언대로 고국에 가지 않고, 합정동 서울외국인묘지공원에 묻혀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고 있다.
늘씬하게 솟아 올라간 몸매와 독특한 생김새, 탑에 새겨진 정교한 조각 등 늘 볼 때마다 그 우아한 멋에 감탄하게 된다.
이 탑이 세워진 것은 1348년 고려 때이다.
생김새도 특이하지만 '병을 치유해주는 약황탑'으로도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멀리서 보면 팔작지붕의 기와집들이 빼곡하게 마을을 이룬 듯 보이는 걸작이다.
이 수려한 탑을 보고 지나가는 저 어린이들이 이 탑을 지키려고 맨 몸으로 총칼에 덤빈 군수와 군민들, 이 척박한 나라를 사랑했던 푸른 눈의 외국인들을 기억할까?
누구보다 조선을 사랑했던 베셀과 헐버트의 유해는 유언대로 고국에 가지 않고, 합정동 서울외국인묘지공원에 묻혀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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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2. 12:51
[임기상의 역사산책 ⑬]최초의 '처녀 왕릉' 발굴…파국으로 끝나다
◈도굴을 면하고 처녀분으로 남은 '무령왕릉' 자태를 보이다
http://m.nocutnews.co.kr/news/4003491
# 장면 1
"어~ 이게 뭐지?"
일본인 교사 카루베가 송산리 고분군에 있는 제6호분을 파헤친 후 39년이 지난 1971년 7월 5일 6호분의 뒷산.
배수로를 파던 인부의 삽에 뭔가 단단한 물체가 부딪쳤다.
그것은 흙을 구워 만든 벽돌이었다.
조금씩 파내려가 보니 벽돌을 쌓아 만든 아치형 구조물이 보였다.
카루베가 죄다 도굴해버린 6호분은 벽면 사방에 사신도만 남고 도굴되는 과정에서 천장이 훼손돼 물이 스며들었다.
또 여름만 되면 무덤 안과 밖의 기온 차이로 이슬이 생겨 벽화가 훼손되고 있었다.
그래서 그해 여름부터 배수로를 만들기 위해 뒤쪽 언덕을 파내려가게 되었다.
그러다 인부의 삽날에 왕릉 입구의 전돌이 걸린 것이다.
인부들은 서둘러 공사 책임자인 김영배 국립공주박물관장을 찾았다.
# 장면 2
김영배 관장은 이날 새벽에 기이한 꿈을 꾸었다.
돼지인지 해태인지 모를 괴상하게 생긴 짐승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꿈이었다.
'무슨 짐승일까?'
이 꿈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연락을 받고 현장으로 달려 나갔다.
공사현장에서 점점 파내려가니 벽돌로 만든 아치형 구조물이 보였다.
다음날까지 흙을 파헤치니 이 구조물이 6호분이 아닌 또 다른 무덤의 입구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백제무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여기서 공사가 중단되고 서둘러 문화재관리국에 신고를 했다.
# 장면 3
보고를 받은 문공부장관은 김원용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단장으로 하는 발굴단을 파견했다.
7월 7일 오후에 현장에 도착한 발굴단원들은 벽돌로 쌓은 구조물이 또다른 전실묘의 입구란 것을 확인했다.
"어~ 이게 뭐지?"
일본인 교사 카루베가 송산리 고분군에 있는 제6호분을 파헤친 후 39년이 지난 1971년 7월 5일 6호분의 뒷산.
배수로를 파던 인부의 삽에 뭔가 단단한 물체가 부딪쳤다.
그것은 흙을 구워 만든 벽돌이었다.
조금씩 파내려가 보니 벽돌을 쌓아 만든 아치형 구조물이 보였다.
카루베가 죄다 도굴해버린 6호분은 벽면 사방에 사신도만 남고 도굴되는 과정에서 천장이 훼손돼 물이 스며들었다.
또 여름만 되면 무덤 안과 밖의 기온 차이로 이슬이 생겨 벽화가 훼손되고 있었다.
그래서 그해 여름부터 배수로를 만들기 위해 뒤쪽 언덕을 파내려가게 되었다.
그러다 인부의 삽날에 왕릉 입구의 전돌이 걸린 것이다.
인부들은 서둘러 공사 책임자인 김영배 국립공주박물관장을 찾았다.
# 장면 2
김영배 관장은 이날 새벽에 기이한 꿈을 꾸었다.
돼지인지 해태인지 모를 괴상하게 생긴 짐승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꿈이었다.
'무슨 짐승일까?'
이 꿈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연락을 받고 현장으로 달려 나갔다.
공사현장에서 점점 파내려가니 벽돌로 만든 아치형 구조물이 보였다.
다음날까지 흙을 파헤치니 이 구조물이 6호분이 아닌 또 다른 무덤의 입구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백제무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여기서 공사가 중단되고 서둘러 문화재관리국에 신고를 했다.
# 장면 3
보고를 받은 문공부장관은 김원용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단장으로 하는 발굴단을 파견했다.
7월 7일 오후에 현장에 도착한 발굴단원들은 벽돌로 쌓은 구조물이 또다른 전실묘의 입구란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이날 밤 큰 비가 내리면서 쏟아지는 빗물을 밖으로 내보내는 배수구 설치공사를 밤 늦게까지 벌였다.
그래서 이튿날 아침에 무덤의 문을 열기로 하고 철수했다.
이때만 해도 발굴단은 무덤은 맞지만 도굴되지 않은 처녀분 '무령왕릉'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백제고분은 신라고분과는 달리 출입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열이면 열 모두 도굴됐기 때문이다.
또 이번 발굴작업이 세계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참사로 끝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아수라장이 된 발굴현장
7월 8일 어떻게 알았는지 조간신문인 한국일보가 공주에서 왕릉을 발견했다는 특종보도를 냈다.
이 바람에 보도진과 구경꾼들이 꾸역꾸역 송산리로 몰려들었다.
발굴단은 아침 8시쯤부터 인부를 투입해 무덤 입구로 파내려가기 시작했다.
오후 3시쯤 무덤 입구가 나타났다.
발굴단은 일단 막걸리와 수박,북어를 올려놓고 위령제를 지냈다.
이어 김원용과 김영배는 막아놓은 부분의 맨 위 벽돌 2개를 들어냈다.
그 순간 무덤에서 하얀 수증기가 새어나왔다.
1,400년 이상을 밀폐상태로 갇혀 있던 찬 공기가 바깥의 더운 공기를 만나 흰 수증기로 변한 것이다.
그래서 이튿날 아침에 무덤의 문을 열기로 하고 철수했다.
이때만 해도 발굴단은 무덤은 맞지만 도굴되지 않은 처녀분 '무령왕릉'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백제고분은 신라고분과는 달리 출입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열이면 열 모두 도굴됐기 때문이다.
또 이번 발굴작업이 세계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참사로 끝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아수라장이 된 발굴현장
7월 8일 어떻게 알았는지 조간신문인 한국일보가 공주에서 왕릉을 발견했다는 특종보도를 냈다.
이 바람에 보도진과 구경꾼들이 꾸역꾸역 송산리로 몰려들었다.
발굴단은 아침 8시쯤부터 인부를 투입해 무덤 입구로 파내려가기 시작했다.
오후 3시쯤 무덤 입구가 나타났다.
발굴단은 일단 막걸리와 수박,북어를 올려놓고 위령제를 지냈다.
이어 김원용과 김영배는 막아놓은 부분의 맨 위 벽돌 2개를 들어냈다.
그 순간 무덤에서 하얀 수증기가 새어나왔다.
1,400년 이상을 밀폐상태로 갇혀 있던 찬 공기가 바깥의 더운 공기를 만나 흰 수증기로 변한 것이다.
마침내 무덤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무덤이 조성된 뒤 한번도 개봉되지 않은 처녀분을 만난 것이다.
김영배는 꿈에 본 멧돼지처럼 생긴 돌짐승을 보고 크게 놀랐고, 김원룡은 입구에 놓인 무령왕의 지석을 보고 놀랐다.
'석수'라고 불리는 돌짐승은 악귀를 쫒아 죽은 이를 지키는 일종의 수호신이다.
지석은 왕릉 주인공의 신원과 조성 연도 등을 새긴 돌이다.
수많은 왕릉이 발굴되고 도굴되었지만 그 무덤이 어느 왕의 무덤인지를 확실한 기록과 유물로 알려준 것은 무령왕릉이 처음이었다.
무덤이 조성된 뒤 한번도 개봉되지 않은 처녀분을 만난 것이다.
김영배는 꿈에 본 멧돼지처럼 생긴 돌짐승을 보고 크게 놀랐고, 김원룡은 입구에 놓인 무령왕의 지석을 보고 놀랐다.
'석수'라고 불리는 돌짐승은 악귀를 쫒아 죽은 이를 지키는 일종의 수호신이다.
지석은 왕릉 주인공의 신원과 조성 연도 등을 새긴 돌이다.
수많은 왕릉이 발굴되고 도굴되었지만 그 무덤이 어느 왕의 무덤인지를 확실한 기록과 유물로 알려준 것은 무령왕릉이 처음이었다.
이때부터 발굴 책임자들을 시작으로 다들 흥분하면서 이성을 잃었다.
무덤에 들어간 지 20분 후에 두 사람이 나와 무령왕릉 발견 사실을 발표했다.
발굴 현장은 집단 패닉에 빠졌다.
보도진들이 앞다투어 들어가려고 하자, 유물 훼손을 막기 위해 한 언론사당 서너컷만 찍기로 했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심지어 무덤 안에 함부로 들어가 촬영하다가 청동 숟가락을 밟아 부러뜨리는 불상사도 일어나고, 뒤늦게 도착한 모 신문사 기자는 자기네 회사에 연락이 늦었다며 문화재관리국 과장의 뺨을 때리는 일까지 일어났다.
구경꾼을 통제해야 할 경찰들마저 "나도 한번 구경해보자"며 대열의 앞장에 섰다고 한다.
이런 중요한 유물이 발굴되면 경찰의 협조를 받아 철조망을 둘러쳐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충분한 장비를 갖춘 뒤 몇달이고 몇년이고 눌러 앉아 연구를 했어야 했다.
무덤에 들어간 지 20분 후에 두 사람이 나와 무령왕릉 발견 사실을 발표했다.
발굴 현장은 집단 패닉에 빠졌다.
보도진들이 앞다투어 들어가려고 하자, 유물 훼손을 막기 위해 한 언론사당 서너컷만 찍기로 했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심지어 무덤 안에 함부로 들어가 촬영하다가 청동 숟가락을 밟아 부러뜨리는 불상사도 일어나고, 뒤늦게 도착한 모 신문사 기자는 자기네 회사에 연락이 늦었다며 문화재관리국 과장의 뺨을 때리는 일까지 일어났다.
구경꾼을 통제해야 할 경찰들마저 "나도 한번 구경해보자"며 대열의 앞장에 섰다고 한다.
이런 중요한 유물이 발굴되면 경찰의 협조를 받아 철조망을 둘러쳐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충분한 장비를 갖춘 뒤 몇달이고 몇년이고 눌러 앉아 연구를 했어야 했다.
아수라장이 된 현장 안쪽에서 발굴단은 긴급 회의를 가진 끝에 사고 방지를 위해 신속하게 발굴을 끝내기로 했다.
있을 수 없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17시간만에 끝난 무령왕릉 발굴...천추의 한으로 남다
있을 수 없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17시간만에 끝난 무령왕릉 발굴...천추의 한으로 남다
발굴단은 급조된 발전기로 마련한 전등 2개를 갖고 철야작업에 들어갔다.
조사팀을 2개로 나눠 한 팀은 왕 쪽을, 다른 팀은 왕비 쪽을 맡아 사진 촬영과 실측 작업을 벌였다.
속전속결로 진행한 작업은 밤 10시쯤 마무리됐다고 하니 이건 그냥 통에다 유물을 쓸어담은 셈이다.
자정쯤부터 유물을 밖으로 반출하기 시작해 다음날 아침 9시경 바닥 청소까지 끝냈다.
처음 무덤에 들어간 지 17시간만에 모든 조사와 유물 수습을 끝내는 기네스북 기록을 남겼다.
◈발굴 이후의 혼란…
이 혼란의 와중에 김영배 관장은 몰래 중요 유물을 상자에 넣어 고속버스를 타고 청와대로 갔다.
일종의 충성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때 박정희 대통령은 은팔찌 같은 걸 휘어보고 해서 다들 기겁을 했다고 한다.
김 관장은 유물을 갖고 다시 고속버스를 타고 공주로 돌아왔다.
국보급 유물을 운송 차량이나 호위 없이 상자에 넣어 고속버스로 이동한 것도 전무후무한 일이다.
한편 대통령이 유물을 갖고 노는 것을 TV로 본 공주시민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공주서 출토된 유물은 우리 고장의 소중한 재산인데 멋대로 서울로 가져가다니..."
주민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유물의 서울 반출을 격렬하게 반대했다.
급하게 내려온 허련 문화재관리국장과 김원용이 주민 대표들과 협상을 벌여 이렇게 합의를 봤다.
1.공주에 무령왕릉 출토물을 전시할 박물관을 짓는다.
2.그전에 유물의 보존 처리와 보고서 작성을 위해 임시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송한다.
이렇게 해서 무령왕릉 유물보존을 위한 국립공주박물관이 다음해 준공됐다.
조사팀을 2개로 나눠 한 팀은 왕 쪽을, 다른 팀은 왕비 쪽을 맡아 사진 촬영과 실측 작업을 벌였다.
속전속결로 진행한 작업은 밤 10시쯤 마무리됐다고 하니 이건 그냥 통에다 유물을 쓸어담은 셈이다.
자정쯤부터 유물을 밖으로 반출하기 시작해 다음날 아침 9시경 바닥 청소까지 끝냈다.
처음 무덤에 들어간 지 17시간만에 모든 조사와 유물 수습을 끝내는 기네스북 기록을 남겼다.
◈발굴 이후의 혼란…
이 혼란의 와중에 김영배 관장은 몰래 중요 유물을 상자에 넣어 고속버스를 타고 청와대로 갔다.
일종의 충성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때 박정희 대통령은 은팔찌 같은 걸 휘어보고 해서 다들 기겁을 했다고 한다.
김 관장은 유물을 갖고 다시 고속버스를 타고 공주로 돌아왔다.
국보급 유물을 운송 차량이나 호위 없이 상자에 넣어 고속버스로 이동한 것도 전무후무한 일이다.
한편 대통령이 유물을 갖고 노는 것을 TV로 본 공주시민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공주서 출토된 유물은 우리 고장의 소중한 재산인데 멋대로 서울로 가져가다니..."
주민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유물의 서울 반출을 격렬하게 반대했다.
급하게 내려온 허련 문화재관리국장과 김원용이 주민 대표들과 협상을 벌여 이렇게 합의를 봤다.
1.공주에 무령왕릉 출토물을 전시할 박물관을 짓는다.
2.그전에 유물의 보존 처리와 보고서 작성을 위해 임시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송한다.
이렇게 해서 무령왕릉 유물보존을 위한 국립공주박물관이 다음해 준공됐다.
◈2천여점의 유물 서울로 이송‥…끊이지 않는 저주
7월 16일 새벽 무장경관들의 호위 속에 유물을 실은 차가 공주를 떠났다.
차량들이 중간에 휴게소에 들렀다 출발하려는데 문제가 생겼다.
문화재관리국장 차량의 운전기사가 넘어졌는데 공교롭게도 엉덩이 정맥이 터져 운전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일단 유물차량과 호송차량이 먼저 출발했다.
이번에는 모 신문기자에게 뺨을 맞은 장인기 문화재관리국 과장의 지프차 운전기사가 동대문 근처에서 어린애를 다치게 하는 사고를 냈다.
다음해 서울대로 복귀한 김원룡 교수는 어쩌다가 빚더미를 떠안아 살던 집을 처분해야 했다.
고고학계에서는 큰 무덤,즉 왕릉을 파면 액이 따른다는 유언비어가 돌았다.
7월 16일 새벽 무장경관들의 호위 속에 유물을 실은 차가 공주를 떠났다.
차량들이 중간에 휴게소에 들렀다 출발하려는데 문제가 생겼다.
문화재관리국장 차량의 운전기사가 넘어졌는데 공교롭게도 엉덩이 정맥이 터져 운전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일단 유물차량과 호송차량이 먼저 출발했다.
이번에는 모 신문기자에게 뺨을 맞은 장인기 문화재관리국 과장의 지프차 운전기사가 동대문 근처에서 어린애를 다치게 하는 사고를 냈다.
다음해 서울대로 복귀한 김원룡 교수는 어쩌다가 빚더미를 떠안아 살던 집을 처분해야 했다.
고고학계에서는 큰 무덤,즉 왕릉을 파면 액이 따른다는 유언비어가 돌았다.
이렇게 해서 고대사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수많은 정보가 엉터리 발굴 과정에서 영원히 미궁 속으로 사라졌다.
발굴 작업에 참가했던 고고학자 조유전 씨는 다음과 같은 회고담을 남겼다.
"무령왕릉 발굴은 고고학 발굴사에서 커다란 오점을 남겼다. 보도진들의 현장공개 독촉과 공주읍민 등 현장에 몰려든 일반인들의 이상 열기, 경비에 자신이 없었던 공주경찰서 등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현장의 분위기는 어떤 거대한 힘에 떠밀리듯 통제 범위를 벗어나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다. 무엇보다 체계적인 준비없이 왕릉 발굴을 하룻밤만에 해치운 일은 씻을 수 없는 실수였다"
발굴 작업에 참가했던 고고학자 조유전 씨는 다음과 같은 회고담을 남겼다.
"무령왕릉 발굴은 고고학 발굴사에서 커다란 오점을 남겼다. 보도진들의 현장공개 독촉과 공주읍민 등 현장에 몰려든 일반인들의 이상 열기, 경비에 자신이 없었던 공주경찰서 등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현장의 분위기는 어떤 거대한 힘에 떠밀리듯 통제 범위를 벗어나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다. 무엇보다 체계적인 준비없이 왕릉 발굴을 하룻밤만에 해치운 일은 씻을 수 없는 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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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2. 12:25
"조선인은 노예처럼…" 마지막 조선 총독의 저주
2014-04-07 10:36CBS노컷뉴스 임기상 기자
http://m.nocutnews.co.kr/news/4001864
[임기상의 역사산책 ⑪]아직도 유령처럼 떠도는 '식민사관'
◈ 저주를 남기고 떠난 마지막 조선 총독
“우리는 비록 전쟁에 패했지만, 조선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인이 제 정신을 차리고 옛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인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놨다. 조선인들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이 섬뜩한 말을 남기고 간 아베 노부유키는 누구인가?
그는 1944년 7월부터 패전 때까지 조선 총독을 지낸 인물로, 재임 기간 중에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조선의 물자와 인력을 쥐어짰다.
친일을 거부한 조선인들을 탄압하고, 여자정신대근로령을 공포해 12~40세의 미혼여성들을 끌고 가 군수공장에서 강제노역하거나 전선에 보내 군 위안부로 착취한 인물이다.
그가 자신있게 조선을 떠나기 전 총독부 직원들에게 이런 말을 내뱉은 것은 바로 총독부에 설치한 '조선사편수회'라는 조직과 거기서 일했던 친일파 때문이다.
◈ 총독부,독립운동가들의 역사관에 대항하기 위해 '조선사편수회' 설치하다
“우리는 비록 전쟁에 패했지만, 조선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인이 제 정신을 차리고 옛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인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놨다. 조선인들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이 섬뜩한 말을 남기고 간 아베 노부유키는 누구인가?
그는 1944년 7월부터 패전 때까지 조선 총독을 지낸 인물로, 재임 기간 중에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조선의 물자와 인력을 쥐어짰다.
친일을 거부한 조선인들을 탄압하고, 여자정신대근로령을 공포해 12~40세의 미혼여성들을 끌고 가 군수공장에서 강제노역하거나 전선에 보내 군 위안부로 착취한 인물이다.
그가 자신있게 조선을 떠나기 전 총독부 직원들에게 이런 말을 내뱉은 것은 바로 총독부에 설치한 '조선사편수회'라는 조직과 거기서 일했던 친일파 때문이다.
◈ 총독부,독립운동가들의 역사관에 대항하기 위해 '조선사편수회' 설치하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등 한국사 연구단체와 독립운동 단체들은 지난 3월 19일 국회에서 '식민사학해체 국민운동본부'를 발족했다.
국민운동본부는 "동북아역사재단이 설립 이래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제 식민사관에 맞서는 대응 논리를 세우기는 커녕 지속적으로 그에 동조해 왔다"고 주장했다.
이 단체는 동북아재단이 올해 초 미국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를 통해 발간한 연구서 '한국 고대사 속의 한사군'(The Han Commanderies in Early Korean History)이 한국 고대사에 대한 식민사관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민운동본부는 "이 책의 논리대로라면 한반도 북부는 중국 식민지가 되고 남부는 일본 식민지가 된다"며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산하의 조선사편수회가 정립한 식민사학을 국가기관이 세계 학생과 재외공관에 배포하는 셈"이라고 주장했다.
재단 측은 서둘러 기자간담회를 통해 "구미학계에서는 심지어 1930년대 일본 식민사학자들의 한국사 인식이 영문으로 번역돼 유포되는 것이 현실"이라며 "국내외의 기존 연구성과를 전반적으로 검토하면서 한사군을 중심으로 일본 식민사관에 의해 왜곡된 한국 고대사 내용을 설명한 책"이라고 반박했다.
동아시아의 영토·역사 분쟁에 맞서는 대응논리를 만들라는 정책 목표로 설립된 국가기관이 동북아역사재단이다.
연간 수백억대의 국고가 지원되고 있어 대다수 국민들은 당연히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침략사관에 맞서 싸우고 있을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동북공정과 식민사관에 동조해 매국적인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어떻게 이런 해괴한 일이 일어날 수 있나?
그 뿌리는 192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는 3.1운동 이후 민족주의 역사가인 박은식 선생이 중국에서 저술한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가 조선에 유입되자 당황했다.
그래서 서둘러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식민사관을 토대로 한 <조선사>편찬에 열을 올리게 된다.
이 단체에는 천황을 신봉하는 일본인 어용학자를 중심으로 친일 소장 한국인 학자들이 대거 참가한다.
또 구색을 맞춘다고 이완용,박영효,권중현 등 거물 친일파들을 고문으로 위촉했다.
이들이 저술한 <조선사>의 요체는 조선의 역사는 식민지 혹은 외세의 압제에서 시작했다고 강조하면서, 일본의 조선 지배는 고대사회에서 일약 근대사회로 도약시켰다고 조작한 것이다.
이 역사 조작의 주역은 일본 학자로는 이마니시 류가, 조선 학자로는 이병도와 신석호가 주도했다.
◈ 식민사관을 완성한 이마니시 류와 이병도
국민운동본부는 "동북아역사재단이 설립 이래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제 식민사관에 맞서는 대응 논리를 세우기는 커녕 지속적으로 그에 동조해 왔다"고 주장했다.
이 단체는 동북아재단이 올해 초 미국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를 통해 발간한 연구서 '한국 고대사 속의 한사군'(The Han Commanderies in Early Korean History)이 한국 고대사에 대한 식민사관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민운동본부는 "이 책의 논리대로라면 한반도 북부는 중국 식민지가 되고 남부는 일본 식민지가 된다"며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산하의 조선사편수회가 정립한 식민사학을 국가기관이 세계 학생과 재외공관에 배포하는 셈"이라고 주장했다.
재단 측은 서둘러 기자간담회를 통해 "구미학계에서는 심지어 1930년대 일본 식민사학자들의 한국사 인식이 영문으로 번역돼 유포되는 것이 현실"이라며 "국내외의 기존 연구성과를 전반적으로 검토하면서 한사군을 중심으로 일본 식민사관에 의해 왜곡된 한국 고대사 내용을 설명한 책"이라고 반박했다.
동아시아의 영토·역사 분쟁에 맞서는 대응논리를 만들라는 정책 목표로 설립된 국가기관이 동북아역사재단이다.
연간 수백억대의 국고가 지원되고 있어 대다수 국민들은 당연히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침략사관에 맞서 싸우고 있을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동북공정과 식민사관에 동조해 매국적인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어떻게 이런 해괴한 일이 일어날 수 있나?
그 뿌리는 192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는 3.1운동 이후 민족주의 역사가인 박은식 선생이 중국에서 저술한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가 조선에 유입되자 당황했다.
그래서 서둘러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식민사관을 토대로 한 <조선사>편찬에 열을 올리게 된다.
이 단체에는 천황을 신봉하는 일본인 어용학자를 중심으로 친일 소장 한국인 학자들이 대거 참가한다.
또 구색을 맞춘다고 이완용,박영효,권중현 등 거물 친일파들을 고문으로 위촉했다.
이들이 저술한 <조선사>의 요체는 조선의 역사는 식민지 혹은 외세의 압제에서 시작했다고 강조하면서, 일본의 조선 지배는 고대사회에서 일약 근대사회로 도약시켰다고 조작한 것이다.
이 역사 조작의 주역은 일본 학자로는 이마니시 류가, 조선 학자로는 이병도와 신석호가 주도했다.
◈ 식민사관을 완성한 이마니시 류와 이병도
<조선사> 편찬에 앞장선 한.일 학자들은 '한국사는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에서 출발했다'는 침략논리를 세우고 역사서 조작을 통해 한국사의 주체성을 부정했다.
이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분야가 고대사다.
한국사의 뿌리를 말살하기 위해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중국 식민정권인 한사군이 한국을 발전시켰다는 논리를 세웠다.
이병도는 한사군의 위치를 만주로 본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주장을 부인하고, 한반도에 있었다고 강변했다.
이마니시 류는 '단군조선'을 곰과 호랑이의 허황된 이야기라고 왜곡하는데 앞장섰다.
그는 또 1천년간 불리어 온 '삼각산' 이름마저 지워버렸다.
일제가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고 지명을 바꿀 때 그가 제멋대로 '북한산'이라고 기록해버렸다.
이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분야가 고대사다.
한국사의 뿌리를 말살하기 위해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중국 식민정권인 한사군이 한국을 발전시켰다는 논리를 세웠다.
이병도는 한사군의 위치를 만주로 본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주장을 부인하고, 한반도에 있었다고 강변했다.
이마니시 류는 '단군조선'을 곰과 호랑이의 허황된 이야기라고 왜곡하는데 앞장섰다.
그는 또 1천년간 불리어 온 '삼각산' 이름마저 지워버렸다.
일제가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고 지명을 바꿀 때 그가 제멋대로 '북한산'이라고 기록해버렸다.
◈ 일본인들은 떠났지만 여전히 우리 주변을 떠도는 '식민사관'
해방과 함께 역사학계는 친일 학자를 강단서 쫒아내고 식민사관의 뿌리를 근절해야 했었다.
그러나 반민특위가 무산되고 박은식, 신채호 선생에 이어 민족주의 사학자인 안재홍, 정인보 선생이 떠나면서 그 공백을 친일학자들이 채우게 된다.
조선사편수회에서 맹활약한 이병도와 신석호는 각각 서울대, 고려대 교수로 들어가 제자를 양성했다.
이병도가 걸어온 길을 보자.
서울대 대학원장~국방부 전사편찬위원장~대한민국 학술원 회원~국사편찬위원~문교부장관~대한민국 학술원 원장.
경력 중 특이한 것은 1962년에 문교부 산하 독립유공 공적조사위원회에 같은 친일학자인 신석호와 함께 참가한 것이다.
평생을 친일문제를 연구한 임종국 선생은 생전에 친일 전력가들이 삼가해야 할 몇가지를 언급했는데 그 중 하나가 '독립유공자 공적 심사'였다.
해방과 함께 역사학계는 친일 학자를 강단서 쫒아내고 식민사관의 뿌리를 근절해야 했었다.
그러나 반민특위가 무산되고 박은식, 신채호 선생에 이어 민족주의 사학자인 안재홍, 정인보 선생이 떠나면서 그 공백을 친일학자들이 채우게 된다.
조선사편수회에서 맹활약한 이병도와 신석호는 각각 서울대, 고려대 교수로 들어가 제자를 양성했다.
이병도가 걸어온 길을 보자.
서울대 대학원장~국방부 전사편찬위원장~대한민국 학술원 회원~국사편찬위원~문교부장관~대한민국 학술원 원장.
경력 중 특이한 것은 1962년에 문교부 산하 독립유공 공적조사위원회에 같은 친일학자인 신석호와 함께 참가한 것이다.
평생을 친일문제를 연구한 임종국 선생은 생전에 친일 전력가들이 삼가해야 할 몇가지를 언급했는데 그 중 하나가 '독립유공자 공적 심사'였다.
이렇게 청산이 안된 식민사관이 흘러 흘러 동북아역사재단에 침투해 급기야 해방이 되고도 69년이 지난 이 시점에 '식민사학해체 국민운동본부' 가 출범한 것이다.
아베총독의 마지막 저주를 곱씹어봐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최근 식민사학을 분석한 문제작 '한국사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를 저술한 소장 역사학자 이주한 씨는 이렇게 강조했다.
"식민사관의 가장 큰 폐해는 진실을 훼손해 국민들에게 열등감을 주입하고,비주체적인 삶을 내면화한다는데 있다. 민족에게 노예의식을 심는데 식민사관만큼 효과적인 수단도 없다. 이것이 역사학자가 아니었던 단재 신채호,위당 정인보,석주 이상룡 등이 무장투쟁을 하면서도 역사연구에 매진한 이유이다"
아베총독의 마지막 저주를 곱씹어봐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최근 식민사학을 분석한 문제작 '한국사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를 저술한 소장 역사학자 이주한 씨는 이렇게 강조했다.
"식민사관의 가장 큰 폐해는 진실을 훼손해 국민들에게 열등감을 주입하고,비주체적인 삶을 내면화한다는데 있다. 민족에게 노예의식을 심는데 식민사관만큼 효과적인 수단도 없다. 이것이 역사학자가 아니었던 단재 신채호,위당 정인보,석주 이상룡 등이 무장투쟁을 하면서도 역사연구에 매진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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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2. 12:15
도망가기 바빴던 이승만…'스탈린은 달랐다'
2014-04-04 10:20CBS노컷뉴스 임기상 기자
http://m.nocutnews.co.kr/news/4000927
[임기상의 역사산책⑩]'빨리 도피한다' VS '수도 사수한다'...엇갈린 국가의 운명
▣도둑같이 새벽 기차 타고 서울 떠난 대통령
"각하~ 지금 서울을 버리고 떠나시면 안됩니다. 대통령이 피신하면 한국군 병사 전체가 전쟁을 포기합니다"
"내가 북한군에게 잡히면 한국한테는 재앙이야"
운명의 1950년 6월 25일 밤.
이승만 대통령과 무초 주한 미국대사 간에 설전이 벌어졌다.
즉시 서울을 빠져나가겠다는 대통령의 고집을 꺽으려고 남의 나라 외교관이 진땀을 흘리고 있다.
무초 대사는 대통령이 적군의 수도 함락을 사수하다 군대가 버틸 수 있을 때까지, 그러나 적군에 잡히지 않을 그 순간까지 머물러 있어 달라고 호소했다.
끝내 설득은 실패했다.
이승만은 27일 새벽 내각이나 국회에도 알리지 않고 달랑 4명의 수행원만 데리고 객차 2량만 달린 낡은 3등열차를 타고 남쪽으로 달렸다.
가다보니 대구다.
"어~ 너무 내려갔다. 대전으로 돌려라"
대전에 도착한 대통령은 또 어처구니 없는 일을 벌인다.
녹음방송을 통해 마치 자신이 서울에 남아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서울시민은 물론 국민들 모두 안심하라고 연설했다.
서울로 올라간 녹음테이프는 27일 밤 10시부터 여러 차례 방송되었다.
최고 지도자가 서울에 남아 '안심하라'고 방송하니 서울시민들은 피난을 가지 않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러나 입소문을 통해 대통령이 서울을 빠져나갔다는 소식을 들은 정부와 군, 경찰의 고위 관계자들과 대다수 국회의원들은 일제히 가족과 함께 재산을 챙겨 서울을 탈출했다.
방송 다음날인 6월 28일 새벽 2시 15분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었다.
이렇게 해서 서울 시민 대부분과 국군 주력부대, 많은 군사장비들이 고스란히 한강 북쪽에 남게 되었다.
이것으로 끝난 게 아니다.
3개월 후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서울이 수복되자 군경은 적 치하에 남은 서울시민들을 상대로 검거작전에 나섰다.
시민들은 자기들을 버리고 떠난 정부로부터 다시 부역, 친공, 북한협력 등의 혐의로 처벌받거나 처형되었다.
국민과 정부를 버리고 도망간 이유로 처벌받은 자들은 한명도 없었다.
다음 해 1월 4일 중국군이 밀고 내려오자 서울시민들은 노약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서울을 벗어나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한번은 속지만 두번은 속지 않는 법이다.
"각하~ 지금 서울을 버리고 떠나시면 안됩니다. 대통령이 피신하면 한국군 병사 전체가 전쟁을 포기합니다"
"내가 북한군에게 잡히면 한국한테는 재앙이야"
운명의 1950년 6월 25일 밤.
이승만 대통령과 무초 주한 미국대사 간에 설전이 벌어졌다.
즉시 서울을 빠져나가겠다는 대통령의 고집을 꺽으려고 남의 나라 외교관이 진땀을 흘리고 있다.
무초 대사는 대통령이 적군의 수도 함락을 사수하다 군대가 버틸 수 있을 때까지, 그러나 적군에 잡히지 않을 그 순간까지 머물러 있어 달라고 호소했다.
끝내 설득은 실패했다.
이승만은 27일 새벽 내각이나 국회에도 알리지 않고 달랑 4명의 수행원만 데리고 객차 2량만 달린 낡은 3등열차를 타고 남쪽으로 달렸다.
가다보니 대구다.
"어~ 너무 내려갔다. 대전으로 돌려라"
대전에 도착한 대통령은 또 어처구니 없는 일을 벌인다.
녹음방송을 통해 마치 자신이 서울에 남아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서울시민은 물론 국민들 모두 안심하라고 연설했다.
서울로 올라간 녹음테이프는 27일 밤 10시부터 여러 차례 방송되었다.
최고 지도자가 서울에 남아 '안심하라'고 방송하니 서울시민들은 피난을 가지 않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러나 입소문을 통해 대통령이 서울을 빠져나갔다는 소식을 들은 정부와 군, 경찰의 고위 관계자들과 대다수 국회의원들은 일제히 가족과 함께 재산을 챙겨 서울을 탈출했다.
방송 다음날인 6월 28일 새벽 2시 15분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었다.
이렇게 해서 서울 시민 대부분과 국군 주력부대, 많은 군사장비들이 고스란히 한강 북쪽에 남게 되었다.
이것으로 끝난 게 아니다.
3개월 후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서울이 수복되자 군경은 적 치하에 남은 서울시민들을 상대로 검거작전에 나섰다.
시민들은 자기들을 버리고 떠난 정부로부터 다시 부역, 친공, 북한협력 등의 혐의로 처벌받거나 처형되었다.
국민과 정부를 버리고 도망간 이유로 처벌받은 자들은 한명도 없었다.
다음 해 1월 4일 중국군이 밀고 내려오자 서울시민들은 노약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서울을 벗어나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한번은 속지만 두번은 속지 않는 법이다.
▣왜군 무서워 압록강 거쳐 만주로 도망가려 했던 선조
지금부터 422년전인 1592년 4월 28일.
믿었던 신립 장군마저 일본군에게 패하고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는 겁에 질렸다.
<선조실록>은 이날 "충주에서 패전 보고가 이르자, 임금이 대신과 대간을 불러 입대케 하고 비로소 파천(播遷: 임금이 도성을 버리고 피난가는 것)에 대한 말을 발의하였다"고 기록했다.
패전 소식에 패닉 상태에 빠진 선조가 가장 먼저 도주하겠다는 얘기다.
대신들은 통곡하며 반대했다.
이 시점에서는 남은 병사를 모아 한강 교두보를 지켜야 하는데 다 포기하고 도망가겠다니 대신들은 아연실색 했을 것이다.
선조는 반대를 뿌리치고 이틀 후 새벽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궁궐을 나왔다.
임금이 도성을 버리자 한양 일대는 무법천지로 변했다.
노비들이 들고 일어나 먼저 장예원과 형조에 불을 질렀다. 이 곳은 공사 노비들의 문서가 보관돼 있는 곳이다.
이 혼란 속에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도 다 불에 타 폐허로 변했다.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한강방어선도 맥없이 무너지고 장수와 병사 모두 달아나기에 바빴다.
한편, 벽제관~개성~평양을 거쳐 압록강변 의주에 도착한 선조는 이번에는 강 건너 요동으로 넘어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나라를 가장 먼저 포기한 인물이 국왕이다.
신하들이 반발하고 명나라가 '오지 말라'고 통보하자 그제서야 주저앉았다.
이 와중에 나라를 지킨 것은 전국에서 들고 일어난 의병들과 바다에서 일본 해군을 궤멸시킨 이순신 장군과 그 휘하의 수군들이었다.
▣ 적 침공 앞에서 혼란 수습하고 수도 지킨 스탈린
지금부터 422년전인 1592년 4월 28일.
믿었던 신립 장군마저 일본군에게 패하고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는 겁에 질렸다.
<선조실록>은 이날 "충주에서 패전 보고가 이르자, 임금이 대신과 대간을 불러 입대케 하고 비로소 파천(播遷: 임금이 도성을 버리고 피난가는 것)에 대한 말을 발의하였다"고 기록했다.
패전 소식에 패닉 상태에 빠진 선조가 가장 먼저 도주하겠다는 얘기다.
대신들은 통곡하며 반대했다.
이 시점에서는 남은 병사를 모아 한강 교두보를 지켜야 하는데 다 포기하고 도망가겠다니 대신들은 아연실색 했을 것이다.
선조는 반대를 뿌리치고 이틀 후 새벽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궁궐을 나왔다.
임금이 도성을 버리자 한양 일대는 무법천지로 변했다.
노비들이 들고 일어나 먼저 장예원과 형조에 불을 질렀다. 이 곳은 공사 노비들의 문서가 보관돼 있는 곳이다.
이 혼란 속에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도 다 불에 타 폐허로 변했다.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한강방어선도 맥없이 무너지고 장수와 병사 모두 달아나기에 바빴다.
한편, 벽제관~개성~평양을 거쳐 압록강변 의주에 도착한 선조는 이번에는 강 건너 요동으로 넘어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나라를 가장 먼저 포기한 인물이 국왕이다.
신하들이 반발하고 명나라가 '오지 말라'고 통보하자 그제서야 주저앉았다.
이 와중에 나라를 지킨 것은 전국에서 들고 일어난 의병들과 바다에서 일본 해군을 궤멸시킨 이순신 장군과 그 휘하의 수군들이었다.
▣ 적 침공 앞에서 혼란 수습하고 수도 지킨 스탈린
1941년 10월 16일 모스크바는 대혼란에 빠졌다.
3갈래로 소련을 침공한 히틀러의 '전쟁기계' 독일군은 서와 남, 북에서 모스크바를 압박해 들어왔다.
독일군 선봉대는 모스크바 교외까지 진격해 들어왔다.
희미하게나마 크레믈린 궁의 나선형 탑이 보이는 곳이다.
외국 외교관들이 모두 동쪽으로 탈출했다는 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대거 수도를 빠져나가거나 약탈, 파업에 가담했다.
영화관들은 문을 닫고 지하철은 운행을 멈추었다.
시민들은 절규했다.
"우리의 지도자 스탈린은 어디에 있는거야? 그는 우리를 버렸다"
그 시간에 스탈린은 모스크바의 집무실에 앉아 반전의 계기를 찾고 있었다.
집무실로 장군들과 참모들을 불러 명령을 내렸다.
"매년 거행하던 볼셰비키 혁명 24주년 기념일 퍼레이드를 올해도 실시하겠다"
부하들은 대경실색했다.
독일군이 코 앞에 온데다 독일 공군으로부터 폭격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다시 강조했다.
"모스크바 시민뿐 아니라 전국의 군대의 사기를 올려주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열병식을 거행한다"
1941년 11월 7일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드넓은 붉은 광장에서 소련군의 장중한 행진이 벌어졌다.
이어 스탈린이 연단에 서서 연설을 했다.
"지금 우리는 그 어떠한 군사적 지원도 없이 단독으로 해방을 위한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독일 침략자들은 소련 국민들을 섬멸하기 위해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원하는 바를 스스로 당하게 해줄 것입니다. 나폴레옹의 운명이 어떠했는지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 연설은 라디오 방송과 확성기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퍼레이드와 연설을 직접 본 시민들이나 중계를 들은 소련 국민들 가슴에 피가 끓어 올랐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스탈린이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퍼레이드에 참가한 한 병사는 이렇게 회고했다.
"최고 지도자가 모스크바에서 우리와 함께 있기로 결정한 사실을 확인한 것은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 사실에 고무되어서 우리는 마치 진군하는 나찌놈들을 잡아 관에 가두고 못질 하듯이 의기양양하게 행진했습니다"
1년 후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을 궤멸시키고 쾌조의 속도로 베를린을 향한 진군을 시작한다.
스탈린의 공과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이때 이 순간만은 진정한 '지도자'였다.
임진왜란~병자호란~한국전쟁에서 한민족의 지도자들은 도망가기에 바빴다.
중요한 것은 국난 속에서 리더는 백성과 군대와 자리를 함께 해야한다는 사실이다.
3갈래로 소련을 침공한 히틀러의 '전쟁기계' 독일군은 서와 남, 북에서 모스크바를 압박해 들어왔다.
독일군 선봉대는 모스크바 교외까지 진격해 들어왔다.
희미하게나마 크레믈린 궁의 나선형 탑이 보이는 곳이다.
외국 외교관들이 모두 동쪽으로 탈출했다는 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대거 수도를 빠져나가거나 약탈, 파업에 가담했다.
영화관들은 문을 닫고 지하철은 운행을 멈추었다.
시민들은 절규했다.
"우리의 지도자 스탈린은 어디에 있는거야? 그는 우리를 버렸다"
그 시간에 스탈린은 모스크바의 집무실에 앉아 반전의 계기를 찾고 있었다.
집무실로 장군들과 참모들을 불러 명령을 내렸다.
"매년 거행하던 볼셰비키 혁명 24주년 기념일 퍼레이드를 올해도 실시하겠다"
부하들은 대경실색했다.
독일군이 코 앞에 온데다 독일 공군으로부터 폭격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다시 강조했다.
"모스크바 시민뿐 아니라 전국의 군대의 사기를 올려주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열병식을 거행한다"
1941년 11월 7일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드넓은 붉은 광장에서 소련군의 장중한 행진이 벌어졌다.
이어 스탈린이 연단에 서서 연설을 했다.
"지금 우리는 그 어떠한 군사적 지원도 없이 단독으로 해방을 위한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독일 침략자들은 소련 국민들을 섬멸하기 위해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원하는 바를 스스로 당하게 해줄 것입니다. 나폴레옹의 운명이 어떠했는지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 연설은 라디오 방송과 확성기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퍼레이드와 연설을 직접 본 시민들이나 중계를 들은 소련 국민들 가슴에 피가 끓어 올랐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스탈린이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퍼레이드에 참가한 한 병사는 이렇게 회고했다.
"최고 지도자가 모스크바에서 우리와 함께 있기로 결정한 사실을 확인한 것은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 사실에 고무되어서 우리는 마치 진군하는 나찌놈들을 잡아 관에 가두고 못질 하듯이 의기양양하게 행진했습니다"
1년 후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을 궤멸시키고 쾌조의 속도로 베를린을 향한 진군을 시작한다.
스탈린의 공과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이때 이 순간만은 진정한 '지도자'였다.
임진왜란~병자호란~한국전쟁에서 한민족의 지도자들은 도망가기에 바빴다.
중요한 것은 국난 속에서 리더는 백성과 군대와 자리를 함께 해야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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