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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3.19 쪼인트 까는 어떤 큰집?
- 2010.03.11 똘레랑스(tolerance)
- 2010.03.10 세월은 간다.
- 2010.03.07 “이제중생 허망횡계”(而諸衆生虛妄橫計)
"이번 인사는 김00 사장(혼자 한) 인사가 아니다"며 "큰집도 (김 사장을)불러다가 '쪼인트' 까고 매도 맞고 해서 (만들어진 인사)"라고 밝혔다. 그는 '큰집'과 관련해 "만났다는 걸 확정적으로 쓰면 안 된다. 그런 얘기가 있다고만 해야 한다"고 밝혀 구체적인 대상을 밝히지는 않았다.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86695
말로 설득하고 훈계 해야지.
공영방송 사장을 불러다 때리고 쪼인트 깐다.
폭행! 아 상해도 되겠구나.
인사를 강요한다.
협박! 공갈 !
법치의 근간을 훼손하는 행위다.
수사하라!
큰집 [명사]
1 크은집-Big house
2 분가하여 나간 집에서 종가를 이르는 말. =맏집.
할아버지 제사라 큰집에 친척이 모두 모였다.
3 작은 부인이나 그 자손이 본부인이나 그 자손의 집을 이르는 말.
4 죄수들의 은어로, ‘교도소’를 이르는 말.
그 사람은 큰집에서 10년 동안 콩밥을 먹었다.
이중에 어딜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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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레랑스(tolerance)
나의 자유를 인정 받기위해서는 남의 자유의 인정이 전제되어야한다.
프랑스어 똘레랑스(tolerance)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사고방식 혹은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 행동의 자유를 "존중한다"라는 뜻이며
적용되는 두 개체 사이에서 주체와 객체는 관점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물론 앵똘레랑스(intolerance)-"불관용(不寬容)"은 이와 반대로 언제나 타자와의 구별 속에서 자신의 주체를 모든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놓는 절대적인 개념이다
흔히 똘레랑스(tolerance)의 시원(始原)으로 낭트칙령을 든다.
낭트 칙령이 있기 전까지 프랑스 국민은 ‘왕의 종교 구교 이외의 이단(異端)은 엄벌에 처하며, 이의 밀고자는 벌금 또는 몰수재산의 1/4을 양여한다’ 에 복종해야했다.
그러나 칙령은 개신교를 하나의 종교로 인정하여 유럽 최초로 한 왕국에 두 개의 종교를 용인한 대변혁이었다. 지배층의 가치와 다른 가치를 인정한 최초의 공식적 사건이었다.
위그노전쟁 (Huguenots Wars 1562∼1598), 개신교와 카톨릭의 내전이었다.
격렬한 내전에서 앙리 2세의 왕비이며 샤를 9세의 섭정인 카트린드메디시스가 왕권을 보전하고 신구(新舊) 양파의 세력균형을 꾀하기 위하여, 프로테스탄트에게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다. 그러나 내전(內戰)은 더욱 격화된다.
앙리 3세는 ‘구교 이외의 이단(異端)은 엄벌에 처한다.' 고 엄포를 놓지만 1589년 8월 수도사 J.클레망의 칼에 찔려 죽고, 14세기 이래의 발루아왕조는 멸망하였다.
위그노(Huguenots) 출신으로 프랑스의 왕위에 오른 앙리 4세 신교에서 구교로 개종하면서 '낭트칙령(勅令)'을 공포한다.
구교를 국교로 규정하면서도
프랑수아 1세와 앙리 3세에 의하여 규정된 ‘구교 이외의 이단(異端)은 엄벌에 처하며, 이의 밀고자는 벌금 또는 몰수재산의 1/4을 양여한다’ 등의 조항을 삭제시킨 것이다.
① 기정사실로 인정한 곳에서의 위그노의 예배의식 집행은 용인되나 파리 시내에서는 금한다.
② 위그노에 대하여도 재산상속 ·대학입학 ·관리취임의 권리를 인정한다.
③ 이미 8년 전부터 위그노가 장악한 요새는 이후에도 신앙상의 안전지대로서 장악함을 허가한다.
④ 구 ·신 양교도 간의 분쟁을 심리하기 위하여 가톨릭교도 10명, 위그노(신교도) 6명으로 구성된 특별법정을 파리 고등법원 내에 두며, 신 ·구교 같은 수의 인원으로 구성된 특별법정을 세 곳의 지방고등법원 내에 설치함을 인정한다
결국 신앙의 자유를 규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위그노에게는 완전한 신앙의 자유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측의 불만은 꺾일 줄 모른다.
12년 뒤 앙리 4세가 광신적인 카톨릭 교도에게 암살을 당하고,
다음의 루이 13세 때에는 재상 리슐리외가 무력으로써 위그노의 정치력을 분쇄하고 칙령 중의 안정지대 인정조항을 삭제하기에 이르렀고(알레 칙령),
또 절대군주인 루이 14세는 85년 10월 18일 전 조항을 폐지하고, 위그노의 종교적 ·시민적 자유를 전면적으로 박탈하였다. 수십 만명의 개신교인들이 순교하고 남 ·서 프랑스에 많이 신교도 약 40만 명이 영국 ·네덜란드 ·프로이센 등으로 망명하였다.
이 피의 역사는 왕정을 무너뜨린 나폴레옹이 등장하면서 중단됐지만,
결국 똘레랑스는 세계 최대의 개신교 순교라는 대가를 지불한 프랑스 사람들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단어로 기억되고 있다.
이런 피로 얼룩진 역사를 갖고 있기에 프랑스는 모든 종교에 대해서 똘레랑스, 즉 관용을 갖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들에 대해서는 어떤 나라보다 엄격하게 다스리고 있다.
똘레랑스(tolerance, 라틴어 tolerare)라는 말은
우리말로 번역하면 "관용"이라는 단어로 번역될 수 있다.
흔히 관용은 사전적 의미로 남에게 베푸는 너그러움이나 자선이라는 어떠한 억압된 상황에 묶인 무엇에 대한 "허용"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똘레랑스"는 우리의 전통적 계급사회에서 통용되었던 "관용"의 개념과는 다소 의미적인 차이를 보인다.
오랫동안 우리의 가부장적 사고에서 특히 유교문화의 미덕이라는 개념에서 이해되는 동양의 관용은 우선 가진자 혹은 지배자를 말하는 베푸는 주체와 그 수혜자인 객체와의 분명한 계급체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예컨대 부처님이 베푸는 자비, 주인이 죄지은 하인이나 구속된 자들에게 주는 사면, 혹은 가진자들이 서민들을 위해 만든 빈민구제 제도 등에서 볼 수 있는 동양의 "관용"은 절대자 혹은 지배자의 선행이 피지배자에 대한 "동정"으로 행하는 일방적인 진행을 가지며 다소 논쟁의 여지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불평등적인 계급체제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똘레랑스는 계급관계가 아니라 평등관계 즉 동등한 두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그 철학적 배경으로 하는데 이는 소외된 개체의 존재론적 인정(승인)을 암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두 개체 사이의 계급관계에서 야기되는 동정이나 자선 혹은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미덕이 아니라 동등한 수평관계에서 이해되는 "상호 존재의 일치"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사실상 동양의 관용과 서양의 똘레랑스는 근본적으로 그들의 개념적 출발을 서로 달리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맹목적인 이데올로기의 숭배, 절대적인 진리를 앞세운 명분론에 순응하여 왔기 때문에 똘레랑스의 진정한 개념을 쉽게 감지할 수 없다.
이는 마치 천동설을 믿었던 시대에 누군가가 하늘이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고 사람들에게 설명했을 때 아무도 믿어선는 안되는 것처럼, 언제나 흑백논리나 공리주의와 같은 절대적 기준에 따른 한 집단의 가치관이 강요된 시대에 익숙하기에 불관용 혹은 편견이 정상적인 것이 되었다.
똘레랑스는 프랑스의 '끄 쎄-쥬?(Que sais-je? 나는 무엇을 아는가?)'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사상과 행동만이 옳다는 아집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 및 다른 사람의 정치적·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
"자신의 이념과 신념이 귀중하면 남의 것들도 똑같이 귀중하며 자신이 존중받기 바란다면 남을 존중하라."는 결론에 이른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이다.
똘레랑스가 있는 사회에서는 토론하고 상대를 설득시키려고 노력하지만 똘레랑스가 없는 사회에서는 자기와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 자체를 미워하여 결국 사람과 사람이 싸우고 미워하고 강요나 강제를 한다.
그러면 어디까지 토론하고 설득해야 하는가?
왜 어떤 것은 인정되고 다른 것은 거부되는가?
브라운은 이성애자인 여성은 남녀평등의 대상이 되지만 동성애자인 여성은 똘레랑스(tolerance)의 대상이 된다고 말한다.
이성애자는 현재의 사회 질서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동성애자는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동성애자는 평등이 아니라 똘레랑스(tolerance)의 대상이다. 즉 동성애자가 현재의 질서를 더욱더 위협하기 때문에 지배 질서는 그들을 정치적 평등이 아니라 똘레랑스(tolerance)의 대상으로 만든다.
브라운은 이를 '대리보충(supplement)'이라 부르며 "똘레랑스(tolerance)는 평등의 확장이 아니라 평등의 대리보충으로 등장한다"고 얘기한다.
국가는 부족한 정당성을 보강하기 위해 똘레랑스(tolerance)라는 말을 필요로 하기에 언제나 똘레랑스(tolerance)의 대상을 만들고 그들을 관리해야 한다. 따라서 똘레랑스(tolerance)의 뒤에는 언제나 폭력이 따라다닌다. 변화될 수 없는 차이를 타고난 똘레랑스(tolerance)의 대상들은 국가가 정한 선을 넘어서려 하면 곧바로 폭력에 노출된다.
http://hiscrivener.wordpress.com/2009/04/06/new-survey-the-bible-belt-is-getting-unbuckled/에서캡쳐
미국인으로 살려는 착한 흑인, 착한 무슬림이 다른 삶을 생각하는 순간 그는 테러리스트가 된다.
테러리스트에게 똘레랑스(tolerance)는 없다.
브라운은 얘기한다. "오늘날에도 개인은 예전 공동체에 대한 공적 애착과 충성을 버리고 새로운 공동체에 충성을 바칠 때에만, 즉 하나의 민족주의를 다른 민족주의로 대체할 때에만, 똘레랑스(tolerance)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한 국가를 넘어서 이런 논리를 확장하면 서구 사회는 야만을 만들어 관리하고 관용해 왔다.
브라운은 미국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인 자유주의가 똘레랑스(tolerance)의 통치술을 적절히 활용해 왔다고 얘기한다.
자유주의는 문화를 공공재나 공적 유대의 차원으로 보지 않고 삶을 향유하는 선택의 차원으로 보면서 각자의 문화를 존중하자는 다문화를 주장한다.
하지만 자유주의의 실제 모습은 자기 문화 외의 다른 문화들을 야만으로 몰아붙이고 자신의 문화를 교육하려 든다. 타고난 차이는 변하지 않으므로 똘레랑스(tolerance)의 정신을 교육해야 한다 주장한다.
브라운은
다문화 교육의 실제 최종 목표는 "자유주의적 원리들의 보편적 지위에 도전하는 사회 내부의 집단과 초국가적인 비자유주의 세력을 연결·결합시키고, 이 둘을 동시에 길들이"는 것이라고 폭로한다.
브라운의 얘기는 자유주의와 다문화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타자를 배척하는 한국 사회의 모순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똘레랑스(tolerance)의 현란함이 아니라 그것이 가리려는 실제 현실로 들어가야 변화가 가능하다.
똘레랑스는 민주주의 성숙을 위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투쟁의 무기이고 사회 정의를 위해 똘레랑스할 수 없는 것에 저항한다는 점을 내세운다.
"똘레랑의 문제는 견디는 것에 있기보다는 똘레랑스를 보존하기 위하여 어느 선에서 견디는 것을 멈추어야 하는지를 아는 데에 있다"고 얘기한다.
그런 점에서 똘레랑스는 관용과 달리 권력에 저항하는 사회 정의의 관점을 내세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지배 세력이 성찰 이성이 성숙되지 못한 사회 구성원들의 비교 우위를 통해 자기만족하려는 저급한 속성을 이용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낳는 엥똘레랑스 행위를 반대하기 위해서 똘레랑스 사상이 강조됐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양창렬과 이기라 등 프랑스의 한국 유학생들이 쓴 <공존의 기술>(그린비 펴냄)에서 잘 드러나듯이 2005년 프랑스 파리 근교의 방리유에서 이주민들이 일으켰던 폭동은 공화국의 숨겨진 똘레랑스(tolerance)의 실상을 드러냈다. 우리는 프랑스만큼만 되어도 좋겠다고 얘기할지 모르지만 프랑스의 꿈 똘레랑스(tolerance)는 사라지고 있다.
브라운의 얘기가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브라운도 언급하듯이 1960년대에 마르쿠제가 이미 그 속성을 폭로하며 똘레랑스의 한계를 지적한 바 있다.
소수자들의 권리를 주장하던 좌파들은 어느 순간 그 차이를 인정하며 따로 살자는 우파들을 만나고 있다. 이 땅을 이미 차지했다고 생각하는 우파들은 그러려면 나가서 너희들의 나라를 따로 만들어 살라고 얘기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니 각자 서로를 인정하고 알아서 살아남자고 얘기한다. 더 이상 싸우지 말고 오늘부로 정리하고 '쿨'하게 끝내자고 얘기한다. 세계화의 시대이니 우리가 갈 곳은 많다고.
이런 주장들에 좌파는 어떤 해답을 가지고 있을까? 계속 함께 살자고 매달려야 하나, 아니면 깔끔하게 헤어져야 하나? 만일 헤어지려면 지금까지의 몫을 챙겨야 하는데,
동양적 관용은 그 몫을 쳐줄리 없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 상대를 비판할 수는 있지만 내 몫을 받을 힘이 없기에 우리는 관용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 저급한 관용을 비판하지만 어느 순간 다시 관용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이 딜레마.
이런 딜레마에 빠진건 인권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논어에 '군자는 화이부동하고 소인은 동이불화한다(君子 和而不同, 小人 同而不和)라고 쓰여 있습니다. 군자는 획일화하지 않으면서 서로 평화롭다는, 그러니까 다른 것을 그대로 놔둔 채 평화롭게 공존한다면, 소인은 같으면서 불화한다는, 그러니까 별 차이 없으면서 불화한다는 거죠."
여기에 기댈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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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멈추지 않고 간다.
눈 속에서 봄 가까운 줄 알고
꽃 피고, 푸른 기운 보인다.
지금은 영원 할 것 같은 세월 속에서
우리의 아이들은 그 세월 속에서 계속 자란다.
세월 지나면
잊는 것도 있으리라.
잊어서는 안되는 것도 있으리라.
그 것은 되풀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 것은 꼭 지켜져야 하는 것이리라.
상말로
조퉁소는 불어도 세월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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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중생 허망횡계”(而諸衆生虛妄橫計)- Vain
“모든 중생은 허망하고 비뚤어지게 헤아린다.”
석가의 말씀이다.
중생들은 허망이라는 `망상’으로 인해서 자기중심적으로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입장이나 마음은 헤아리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내가 옳고, 내가 있어야 다른 사람도 있다는 생각이 앞서 제 마음대로 안 되면 성을 낸다.
제 생각과 다르면 惡이라 우긴다.
實用主義와는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다.
쓸모만 있으면 善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성립되는 것이 실용주의다.
다른 이의 생각은 모두 쓰잘데 없는 것이란 말인가?
다른 사람이 없으면 `내가 주장하는 쓸모’는 쓸모가 없어진다.
쓸모란 원래 비교해서 누구 것이 더 많은것인가를 따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축생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을 보고 어리석음을 되풀이 하는 허망횡계의 자라고 하시고, 여기서 벗어나라고 가르침을 주신 것이다."라고 불가에서는 말한다.
인생은 구름 같은것.
하늘의 구름을 가리켜 진리라 우겨 본들 다시 쳐다본 구름은 아까 그 모양이 아닌걸....
http://blog.roodo.com/good_morning_press/archives/4961447.html
이자연의 '구름 같은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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