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때는 어려웠던 옛일을 생각하라했다.
난곡은 서울 관악구 신림 7동을 중심으로 3, 10, 13동에 걸쳐 있던 빈민촌이었다.
난곡은 햇볕이 잘 들어 난초가 무성한 데서 비롯된 고유 지명이다.
1967년 정부의 도심 판자촌 철거 정책 이후 대방동, 용산, 서울역, 청계천 등지의 판자촌 주민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구청은 흙바닥에 8평씩 분필로 금을 그어 철거민들에게 나눠줬다. 흙으로, 벽돌로, 판자로 요령껏 지은 집들이 다닥다닥 들어섰다. 이렇게 2600가구, 1만3000명이 모인 ‘하늘 아래 첫 동네’가 섰다.
70년대에는 농촌에서 유입된 인구가 다시 한번 들어와 거주민이 급격하게 늘었다.
산비탈의 가파른 골목을 따라 단칸방마다 7~8명이 한데 모여 살았다. 야학을 하는 대학생들이 찾아왔고 수많은 사회운동가들이 이곳에서 빈민운동을 했다.
난곡은 재개발지구 지정 당시 전체 가옥주 2498세대 가운데 실제 이곳 거주자는 전체의 14.7%인 435세대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난곡지구에 입주권리만을 가진 채 다른 곳에서 살고 있었다는 얘기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는 이제 사라졌다.
이시영은 가난했던 시절, 누나의 단칸방(지상의 방 한 칸)에서 결핵을 앓으며 학교 다니던 난곡(蘭谷)의 기억을 가슴시린 이야기로 노래했다.
먼지 자욱한 길가에 루핑을 이고 엎드린 한칸 방. 누나와 조카 둘과 나의 보금자리였지…찌는 듯한 더위에 못 이겨 야산에 오르면 시골처럼 캄캄하던 동네. 개천 건너 그 동물병원 같은 보건소는 잘 있는지 몰라’. 겨울이면 조카의 어린 몸을 난로처럼 안고 자야 했다.고
김승봉은 '난곡에 가면'
아침마다 줄이 늘어서는 재래식 공동화장실, 가파르고 쩨쩨한 골목들, 길모퉁이마다 쌓인 연탄재…. 가난을 대물림하는 빈민촌. 그러나 어려울수록 사람 사는 냄새는 진했다.
‘막차로 돌아올 식구들을 위해 여자들은 아직 벌겋게 달아오른 연탄재를 들고나와 가파른 골목길에 뿌려준다 며
난곡에 가면 만나는 고단한 삶, 누추한 골목도 보금자리로 알고 살던 난곡 사람들, 공부방을 열어 아이들의 희망을 키워 주던 그 시절 대학생들을 건강한 이웃들이라 했다.
재개발후 난곡의 세입자 중 일부는 주공 임대아파트로 옮겨갔다. 임대아파트 보증금이 부담스러웠던 나머지 세입자들은 이주비로 600만원쯤 받고 어딘가 또 다른 가장자리로 떠밀려 흘러갔다.
오늘의 천지개벽하듯 휘황찬란한 난곡 아파트숲은 지난 그늘을 알고 있을까?
그 그늘이 아직도 ‘지상의 방 한 칸’을 찾아 떠도는 난곡 사람들의 한숨임을....
너무 쉽게 잊는다.
너무 쉽게 잊으려한다.
그 시절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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