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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4.25 모윤숙(毛允淑) 1
- 2011.04.25 [1954년 6월 28일] 변영태 제5대 국무총리 취임
- 2011.04.14 1956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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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윤숙(毛允淑)에 대하여
1925년 함흥 영생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개성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 2년에 편입하였다.
1927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예과에 입학하여 1931년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그해 북간도 용정에 있는 명신여학교(明信女學校) 교사로 재직하며, 시 〈피로 색인 당신의 얼골을〉(東光, 1931.12.)을 발표하였다.
1932년 명신여고 7회 졸업 앨범 사진. 용정 출신으로 이화여전을 나와 1931~32년 이 학교 국어교사로 있던 모윤숙(가운데 왼쪽) 시인의 모습도 들어 있다. 명신여학교는 1913년 영국인 선교사 베이커의 부인 박혜선(레베카)이 세운 곳으로, 가운데 보이는 건물이 초기의 기와집 교정이다.
1932년 서울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자리를 옮겼으며, 첫시집 《빛나는 지역(地域)》(朝鮮彰文社, 1933)을 발간하였다.
1934년 보성전문학교 교수였던 안호상(安浩相)과 혼인 하였으나 곧 이혼하고 독신으로 활동하였다.
김수임(뒷줄 오른쪽)과 모윤숙(뒷줄 왼쪽)이 1945년 일본의 디자이너 노라노(앞줄 가운데)씨 가족과 함께 한 기념촬영http://j.mp/dRhyQL .
1948년 제3차 UN총회 한국대표로 참가하여 정부수립에 여류외교관으로서 활약한 바 크다.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하는 결의안 통과를 위해 1948년 9월부터 12월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한 한국 대표단. 앞줄 왼쪽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모윤숙, 조병옥, 장면, 김활란, 성명 미상, 장기영, 김우평, 정일형.
1949년 월간 순수문예지 《문예(藝術)》를 창간하였고, 1951년 이화여자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다.
1955년 국제펜클럽 한국대표로 참가하였고, 1960년 국제 펜클럽한국본부 회장, 1971년 공화당의 전국구 국회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조경희와 모윤숙 http://j.mp/dV8WNM
초기작품 〈피로 색인 당신의 얼골을〉에는 과거의 영광을 생각하거나 찰나의 환희를 구하기보다 논쟁과 분열을 지나 건전하게 살아가는 굳센 주인공을 찬양하고 신뢰한다는 서정적 내용을 보인다.
여기에 찬양된 주인공은 굳센 사람이고 피로 물든 얼굴을 가진 것으로 나타나 열정의 인물로 보이는데, 일제치하에서 민족적인 진로를 모색하는 의미와 정열적인 삶을 추구하는 시인의 지향이 엿보인다.
시집 《빛나는 지역》에는 신변적인 것과 자연과의 교감이 시적 제재로 나타나 있으나, 《옥비녀》(동백사, 1947)에 이르면 민족적인 주체의식이 전경화(前景化)되며 화자의 역사적 인식이 보인다. 예컨대, 화랑 무사를 노래한 〈문을 여소서〉 같은 작품과 〈조선의 딸〉·〈이 생명을〉 등 민족의식이 뚜렷한 작품들을 발표하여 1940년 경기도 경찰국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민족의식은 ‘님’ 인식의 시적 표현으로서, 시인의 민족애의 신념을 드러내고 있다. 광복 후 6·25를 겪으면서 시집 《풍랑(風浪)》(1951)을 출간하였는데, 그 중에서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와 같은 애국적 시상을 작품화하기도 하였다. 젊은 군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으로서 정열과 슬픔이 교차하는 감상성이 짙은 작품이다.
시적 화자의 이러한 정열과 감상성에 의거하여 《렌의 애가(哀歌)》(1937·1949·1951)와 같은 연애 장편 산문시를 창작하여 발표하기에 이른다. 작품에는 한국남성을 연모하는 절실한 서정적 화자의 호소가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은 그 이루지 못한 절절한 호소력으로 인한듯 1950년대 중반의 독서계에 큰 호응을 일으켰다.
시집으로는 《정경 情景》(1959)·《구름의 연가(戀歌)》(1964)·《풍토 風土》(1970) 등이 있고, 서사시집으로 《논개 論介》(1974), 수필집으로 《내가 본 세상》(1953)·《포도원》(1960)이 있으며, 《모윤숙시전집》(1974)·《모윤숙전집》(1982)·《국군은 죽어서 말한다》(1987) 등 이 있다.
1962년 대한민국예술원상(공로상)과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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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8월8일 韓美상호방위조약에 서명하고 있는 변영태 외무장관과 댈러스 美 국무장관.
http://kr.blog.yahoo.com/nanumial/87
한국 대표로서 제네바정치협상회담에 참석하고 서울 여의도 공항으로 돌아온 변영태 외무부장관!
귀국과 동시에 제5대 국무총리로 임명됐다.
그는 이로써 외무부장관직과 국무총리직을 겸임하게 됐다.
사흘 뒤인 7월 1일 변영태 총리와 신임 5부 장관에 대한 임명식이 거행됐다.
그는 총리직을 같은 해 11월 말까지, 외무장관직은 이듬해까지 수행했다.
변 총리는 외국에 다녀올 때 여비를 남겨와 국고에 반납할 정도로 청렴하고 지조가 굳었다.
1956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서울대와 고려대 등에서 후진양성에 힘쓰다 1963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1969년 77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http://ytn.co.kr/news/etc_news_view.php?s_mcd=0422&key=200906272250432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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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5월 15일 제3대 정부통령 선거가 있었다. 이 선거는 53년 3년간의 전쟁이 정전협정을 통해 막을 내렸지만, 민주주의가 실종되고 전쟁복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치러졌다.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듯 ‘못 살겠으니 갈아보자’와 ‘갈아봤자 더 못 산다’는 구호가 야당인 민주당과 여당인 자유당 사이에서 경합하면서, 신익희 후보의 급서 이후 이기붕과 장면의 부통령 선거로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었다.
관권 개입과 폭력이 난무하는 가운데 치러진 선거 결과 이승만 대통령이 50%가 넘는 득표율로 당선되었지만, 부통령 후보에는 민주당의 장면 후보가 당선되었다. 부정 선거 속에서도 부통령 선거에 집중한 민주당의 노력 덕분이었다. 대통령의 유고 시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도록 규정한 헌법으로 인해 81세의 대통령을 모신 자유당은 큰 충격을 받았다.
또 다른 충격은 진보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봉암의 200만 표가 넘는 득표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낙승이 예상되었지만, 서울에서 이승만의 득표율은 투표자의 3분의1밖에 되지 않았고, 대구·진주·울산·진해에서는 조봉암이 이승만보다 많은 득표를 했다. 또한 경북에서 신익희의 지지표로 추측되는 무효표와 조봉암의 득표를 합친 표의 수가 이승만의 득표수를 앞질렀다. 진보당은 아직 창당도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진보당이 창당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갈 경우 4년 후의 선거 결과는 예측하기 어려웠다.
조봉암의 200만 표가 넘는 득표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뒤따랐다. 조봉암의 지지자들은 민주당이 조봉암을 지지하느니 이승만을 지지하는 편이 낫다고 하면서 진보당의 표를 지켜주지 않았기 때문에 ‘투표에 이기고 개표에 졌다’고 주장했다. 3·15 부정선거로 인해 61년 교수형에 처해진 최인규 전 내무부 장관은 56년 선거에서 엄청난 부정이 자행되었으며, 부정이 없었다면 조봉암이 승리했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그는 3·15 부정선거가 기획된 것은 부통령 선거 때문이 아니라 조봉암의 선전 때문이었다고 했다. 주한 미국대사관은 한국사회 내부에서 자본주의와 이승만 정부에 대한 염증이 표출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물론 조봉암의 기호가 1번이었기 때문에 많은 득표가 가능했으며, 조봉암에 대한 지지표의 대부분은 신익희에 대한 추모표라는 주장도 있다.
조봉암의 200만 표 득표는 결국 58년 총선을 앞두고 진보당 사건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조봉암은 59년 7월 31일 간첩혐의로 처형되었다. 만약 그가 살아있었다면 4·19 혁명 이후 정세는 어떻게 되었을까? 어쨌거나 그 어려운 시대에도 94.4%의 투표율을 자랑했던 높은 민의가 그리울 따름이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현대사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4174321&cloc=olink|article|default
사법부가 반세기 만에 ‘사법살인’을 인정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박시환)는 20일 간첩으로 몰려 사형당한 죽산(竹山) 조봉암(1898~1959)에 대한 재심에서 국가변란과 간첩 혐의에 대해 전원일치로 무죄를 선고했다. 이에 따라 진보당을 창당한 조봉암은 사형 집행 52년 만에 간첩 누명을 벗게 됐다.
http://img.seoul.co.kr/news/newsView.php?id=20110121010009
사진출처
http://blog.joinsmsn.com/media/folderlistslide.asp?uid=fabiano&folder=6&list_id=7706625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Id=71113&logId=4698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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