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7. 15:47
애쓰는데 남은 것이 없다. 한 것이 없다.
‘0’이다.
‘0’은 아무리 많아도 그 앞에 다른 숫자가 놓이지 않으면 ‘0’일 뿐이다.
수 많은 ‘0’의 행렬도 종내는 ‘0’이다.
오늘도 ‘0’의 행렬을 쌓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 앞에 숫자가 쓰여지는 요행을 기대하는 안쓰러운 모습을 하고
괜한 헛기침하는 모습을 본다.
눈 부라리고, 주먹질하며 기념탑에
어떤 글귀가 좋은지 공모한다.
안타깝다.
"-"가 앞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기억될 것이다.
아직 남아 있는 수치가 있다
버려도 버려지지 않는
세계가 있음을
‘0’
김광림
예금을 모두 꺼내고 나서
사람들은 말한다
빈 통장이라고
무심코 저버린다
그래도 남아 있는
0이라는 수치
긍정하는 듯
부정하는 듯
그 어느 것도 아닌
남아 있는 비어 있는 세계
살아 있는 것도 아니요
죽어 있는 것도 아닌
그것들마저 홀가분히 벗어버린
이 조용한 허탈
그래도 0을 꺼내려고
은행 창구를 찾아들지만
추심할 곳이 없는 현세
끝내 무결할 수 없는
이 통장
분명 모두 꺼냈는데도
아직 남아 있는 수치가 있다
버려도 버려지지 않는
세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