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 25. 19:43
Undiplomatic Memories(初步 外交官 의 回想)




William Franklin Sands (山島)

Whittleley House

New York, 1930


Owen이 중국의 미움을 받아 물러난 후 일본주재 미국 대사관 Second Secretary 로 일하던 25살

William Franklin Sands는 고종의 고문관이 되어 일한다.

淸日 전쟁 직후, 露日 전쟁 직전 까지----,


왼편이 ㅓ자

임명장

당시 영의정 조병식

고종의 형 이재순과 그 손자들

조선의관리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을 떠나는 러시아 대사 M. Pavlow 와 그 이행. 맨 왼쪽이 sands


한강의 포구 라는데...
Posted by qlstnfp
2011. 1. 25. 18:27

The Happiest Girl in Korea

Minerva L. Guthapfel


Fleming H. Revell Company

Minerva L. Guthapfel

미국 북 감리교 (Episcopal Methodist Church) 독신 선교사로( Philadelphia 출생 ) Wome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파견으로 1903년 입국하여 서울, 경기도 지방 중심으로 선교 활동 하다가 1912년 귀국한다.

이 이야기는 그동안 미국 잡지에 실린 것을 모아 출판한 것이다.


아홉 개의 짤막한 주일 학교 소년 소녀과의 일화를 쓴 글.

대부분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 한다.



어느 집에 팔려간 어린 소녀...

그녀의 이름은 옥분이.

종(從)으로 일하다가 눈속에 파묻혀 사경을 헤매는 것을 여선교사가 발견하여 살린다.

심한 동상으로 손 발이 썩어 절반을 절단했지만....


완전 회복되어 여 선교사와 대화를 나눈다.


옥분이는 제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소녀라고 말한다.

선교사 왈, "너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지."

옥분이 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조선"에서는 가장 행복해요. 왜냐구요?


첫째, 전혀 아프지 않아요. 손 발이--,

둘째, 아무도 때리는 사람이 없어요.

세째, 여기 온 후로 이젠 배 고프지 않아요.

네째, 크리스마스 트리를 볼수있어 좋아요.

다섯째, 가장 중요한건데 당신도 아실거예요. 무엇이냐?

예수님이 날 사랑 하시니까요.


여선교사 울었다.


조선 최고 행복한 소녀, "옥분이" 모습 과 글쓰기.

여러분이 읽어 보세요.








여자 盲人 학교. 1909. Rosetta S. Hall, M.D. 시작 하다.

Women's Hospital (保救女館) 의 어린 환자와 함께


http://j.mp/eyY7xi 에서 퍼 왔습니다.

Posted by qlstnfp
2011. 1. 25. 17:37

김점동(金點童) 1876년(고종 13)∼1910년.




사회봉사에 헌신한 여자 의학박사이며 한국 최초로 서양의학을 전공한 여의사이다.


본래 성은 김씨이고, 본관 광산(光山), 이름은 점동(點童)이다.

1891년 1월 25일에 Franklin Ohlinger에게서 세례를 받고 김에스더(愛施德)라 불리기 시작했고 결혼 후에 남편의 성을 따라 박에스터라 불렸다.

박에스터는 1876년 3월 16일, 정동 부근에서 가난한 김홍택의 딸 4형제 가운데 세 째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 10년쯤 되었을 때,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a)가 정동땅과 집을 사서 교회와 학교를 시작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아펜젤러에게 고용이 되어 일하였다. 에스더의 집안은 개화의 물결이 스며들고, 그리고 에스더에게는 새로운 학문에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아펜젤러의 소개로 이화학당(이화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때의 이화학당은 스크랜톤(Mary F. Scranton)부인이 창설하여 막 문을 열었다. 입학하는 학생이 많지 않았다. 한 두 명이 들어왔다가 도중에 나가 학교 자리가 잡히지 아니한 때였다.


이화여고 80년사에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엉터리로 모이는 학생들이었지만 1888년 10월에는 학생이 4명, 연말에는 7명이 되었다. 이들이 졸업할 수 있었던 학생은 1명뿐이다. 1887년에스더는 4번째 입학을 하고 이미 들어온 3명과 공부를 시작하였다. 여기에서 신학문만이 아니라 기독교의 복음으로 회심의 경험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에스더라는 세례명을 사용하였다. 그녀의 이름은 에스더로.


1890년 이화학당을 졸업한 에스더는 영어를 잘하여 그해 10월에 보구여관에서 일하던 로제타 셔우드(Rosetta Sherwood)의 통역을 맡는다.

1892년 보구여관이 동대문 분원을 설치하고 볼드윈 시약소(Boldwin Dispensary)이름으로 하였을 때, 에스더는 로제타 셔우드를 따라 특별히 뽑힌 학생이 약을 짓고 환자를 간호했다.


6월에는 로제타 셔우드가 1891년에 내한한 캐나다 의료선교사 제임스 홀(Hall, William James, M.D)과 결혼을 하고,


에스터는 닥터 홀이 데리고 있던 24세 된 청년 박유산과 1893년 5월 24일 결혼하였다.


그해 7월 홀이 평양선교 개척자로 임명되자, 1894년 5월 4일 홀의 가족과 평양으로 가서 "홀 부인의 특별 조수"가 되었다.


최초의 여의사 Dr Hall의 가족과 함께 평양에서 에스더 가족은 단순한 조력자 이상이었다. 김창식의 평양 핍박사건 때 박유산은 매를 맞았고, 에스더는 홀 부인과 가마를 타고 위험한 상황에서도 진료소로 출근해서 병자들을 돌봤다.



1894년 청일 전쟁 후 각종 전염병이 창궐한 평양에서, 혼자 남아 치료하다, 발진 티푸스에 걸려, 한국선교 3년 평양선교 2년 4개월 만에 홀이 생을 마쳤다. 홀의 가족은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그 때 에스더 가족도 함께 미국에 따라갔다.



1895년 2월 에스더는 리버티 공립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그녀의 남편은 셔우드 가(家)의 농장 일을 도우면서, 에스더의 학업을 도와주었다. 그해 9월에 에스더는 뉴욕시의 유아병원에 들어가, 그곳에서 1년 이상 근무하면서 생활비를 버는 한편 개인 교수를 찾아 라틴어 물리학, 수학을 공부하였다.



1896년 10월 1일에는 볼티모 여자의과대학(Woman's Medical College of Baltimore)에 입학하였다. 1900년에는 의대를 졸업하고,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그때 그의 남편을 잃었다. 남편 박유산은 에스더의 졸업을 20여일 앞두고 뇌일혈로 사망했다. 학위 받았지만 기쁜 줄 몰랐다. 그녀는 곧 귀국하였다. 귀국은 환영되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슬퍼하였다.


귀국하여 여성전용 병원 보구여관(保救女館)에서 의사로 재직하였다.

로제타 셔우드가 다시 한국에 돌아와 평양에 건립한 홀기념병원으로 전근하여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를 순회, 무료진료를 베풀면서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과거는 미숙한 조수였으나 통역자로 그와 함께 의료사업에 종사하였다. 그를 도와 광혜원 여자 전용 건물을 신축하며, 한국 최초의 간호원 양성소를 개설한 공으로 1908년 4월 28일에 고종(高宗) 황제로부터 은메달을 받았다.


환자를 돌보는 일에 헌신적이었지만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못해 1910년 4월 13일 34세때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에스더의 죽음은 그녀를 아는 모든 사람들을 슬프게 했지만, 그 가운데 가장 가깝게 지냈던 홀 부인의 가족이 더 슬퍼하였다.


닥터 홀의 아들 셔우드(Sherwood Hall)는 장차 결핵 전문의가 되어 한국에 다시 와서 꼭 결핵 요양소를 설립할 결심을 하였다. 결심대로 1928년에 최초의 요양소 및 결핵전문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1932년에는 최초로 결핵 퇴치를 위해 "크리스마스 실"을 도입하였다.



http://blog.daum.net/koobk103/7998766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6JOc_A1876_1_0017298


Posted by qlstnfp
2011. 1. 25. 15:44

I * KOREA

W. A:son Grebst

Forlagsaktiebolaget Vastra Sverige

1912






1986년 [김상열] 번역


역자 후기

구한말(舊韓末)인 1904년 겨울, 크리스마스 이브날인 12월 24일 부산항에 도착한 스웨덴의 기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아손 그렙스트(W. A;son Grebst). 그 당시 유럽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도쿄에 온 그는 일본이 한반도 취재를 금지하자 영국인 무역상으로 위장하여 우리나라에 밀입국한 후 1905년 초까지 한국을 여행하며 취재, 1912년 스웨덴에서 < I.KOREA >라는 책을 펴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스칸디나비아어과 김상열 교수가 스웨덴 스톡홀름 대학 유학 시절, 이 사실을 대학 구내식당에서 그 도서관의 사서로 일하고 계시던 교포 유재호님에게서 듣게 되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정말로 일생에 한두 번 있을까말까 하는 '우연'한 기회로 이 책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단순한 풍물지리서려니 했는데


이건 그런 단순한 책이 아니었다. 그의 조사에 의하면 이 책은 현재까지 세계에서 한권 밖에 없는 귀중한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사실보다는 이 책의 내용이 100년 전의 우리 모습이 사실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나와 숨 쉬고 있기에, 과거를 이해함으로서 우리 자신의 참모습을 찾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숙제를 한다는 느낌으로 이 책을 완역하였다고 한다.


완역본의 이름은 <스웨덴의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이다.


이 책은 그때까지만 해도 유럽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던 은둔의 나라 조선을 두루 여행하며 장막에 싸인 당시의 우리 생활상을 기자의 시각으로, 기자의 탐구정신으로 절묘하게 그린다.


그는 고종 황제부터 시골의 평범한 사람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으며, 100년 전 한국의 이모저모를 예리한 관찰하고 섬세하게 묘사했다.


우리는 역사적인 사건이나 귀족들의 생활상은 단편적으로나마 문헌을 통해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평민들이나 사회 밑바닥을 이루는 계층들의 삶의 기록은 거의 없기에 그들의 정확한 모습과 일상의 삶은 풍문이나 추억을 더듬어 막연히 추측만 할 뿐이다. 그러나 사실을 세세하게 표현하지 문헌이나 추측은 우리가 편한 대로, 느낌대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어 비슷할 지는 몰라도 실제와는 많은 거리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아손은 기자다. 그때나 지금이나 기자는 사명감과 기자의식은 비슷한 듯하다. 기록을 볼 때 그는 보통의 기자가 아니라 기자 정신이 투철한 기자다.


유럽의 북쪽 스웨덴에서 대서양과 태평양을 건너 일본으로 오고, 그것도 모자라 세계열강의 이해가 복잡하게 얽혀있어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기에 접어들어 있는, 신변조차도 전혀 보장받을 수 없는 낯설고 물설은 코레아를 용감하게 취재하려 뛰어들었다.


문인들이나 동양의 글과는 달리 그의 글은 기자의 글이라서 상세하고 정확하다.

조기잡이 배 하나를 설명해도 '길이가 21.9m에 너비가 7.3m이고 깊이는 3.7m이다'까지 설명하고 한강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낚시꾼에게 다가가 낚시 얼음구멍을 관찰하며 얼음의 두께는 90cm이고 얼음 아래는 놀라울 정도의 맑은 물이 흐르고 있고 모래와 자갈이 환히 보인다는 것까지 적고 있다.


또한 상세한 기록뿐만 아니라 당시의 생활을 담은 140여장의 사진은 모든 것이 100여 년 전의 과거와는 너무나 달라진 오늘에 와서 지난날의 우리 모습과 사회 풍물을 생생하게 만난다는 것은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부산항에 처음 도착한 소감을 말한다.

"우리는 엄청나게 넓은 만에 닻을 내렸는데 이 만 주위에는 까맣고 울퉁불퉁한 바위들이 솟아있고 높고 황량한 갈색의 언덕들이 보초처럼 서 있었다"면서 부산항 사진을 하나 실었다.


기자는 자기의 나라 스웨덴을 강대국이라고 소개하며

날로 기울어져 가는 코레아를 한없이 측은한 모습으로 바라보았지만 이제 우리나라는 스웨덴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국으로 부상한 것과도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는 '코레아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낙천적인 민족이다.

이들은 일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증오한다'라고 말한다.


한국인의 특징으로 온화하고 무관심한 얼굴 표정, 일본인들보다 머리통 하나가 더 있을 정도의 큰 키, 균형 잡힌 신체, 자연스런 태도와 여유를 들어 긍정적으로 평가하였지만 코리아의 고요한 새벽은 그 평온함이 깨진지 이미 오래였고 종말을 고하는 듯한 회색구름이 코리아의 지평선 위에 낮게 드리워져 있다고 했다.


일본의 조심스러운 행위는 이제는 아주 노골적으로 변해

코리아는 사실상 일본의 보호령이 된 것이나 다름없고

동서남북 어디를 가도 일본이 철도 우편 무역 해운을 온통 손아귀에 넣고 있었으므로 제국주의 근성이 강한 일본은 코레아를 곧 멸망시키고 일본에 종속시킬 것이라고 정확히 예상하고 있다.


기자와 서울 가는 기차를 같이 탄 일본군 대위는 우리나라에 대해 이렇게 진단한다.

"망국의 운명에 처한 민족이지요."

"장래성이 없고 중국인보다 더 엉망인 민족입니다.


1천 년 전 잠든 바로 그 자리에 아직도 머물러 있습니다.

너 나쁜 건 잠에서 깨어나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다리로 일어나기를 원치 않으며 독립을 바라지 않습니다.

코레아인들은 독립하기를 싫어합니다.

그들이 살아가면서 원하는 것은 단지 아무 걱정 없이 평화롭게 사는 것이지요. 독립이라는 말은 그들에게는 공포를 의미하고 불신이나 무법과 같다는 말입니다."


기자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잘 몰랐고 일본이 저지른 비행을 세부적으로 몰랐기에 우리나라 사람이었다면 함부로 평하기 어려웠을 고종황제와 황태자에 대해서 느낌을 본 그대로 표현했다.


"나는 황제 폐하와 황세자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볼 수 있었다. 황제의 얼굴은 개성이 없었으나 원만해 보였고 체구는 작은 편이었다. 조그만 눈은 상냥해 보였고 약간 사팔뜨기였다. 그의 시선은 한 곳으로 고정되지 못하고 허공을 헤매었다."


"태자는 아주 못생긴 얼굴이었다. 작고 뚱뚱한 체격에다가 얼굴은 희멀겋고 부은 듯해서 생기가 없어 보였다. 노란 두 눈을 신경질적으로 연방 깜빡거리면서 한시도 쉴 새 없이 이곳저곳에 시선을 돌려대었다. 전체적으로 봐서 인상은 찡그린 돼지의 면상을 보는 것 같았고 무슨 악독한 괴물을 대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바로 망국의 길에 들어선 한 왕조의 마지막 자손이었고 코레아의 마지막 황제가 될 사람이었다."


코레아의 군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황제의 질문에 남이 칭찬을 바랄 때는 칭찬을 하는 법이지 꾸중을 하는 게 아니라는 옛 말이 생각나서


"코레아의 군대의 질서정연함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배알할 수 있는 영광을 베풀어주신 지고한 황제폐하이자 코레아 군대의 대원수를 고국에 돌아간 뒤에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라는 외교적인 답변에

황제는 매우 마음에 들어했다는 글을 보며 대선을 앞둔 지금도 진실을 보지 못하는 자에게는 이러한 사실이 계속되고 있으며

역사는 이미 예견되어지고 꾸준하게 진행되고 있으므로

우리 역시 똑바로 눈뜨고 세상을 정확히 바라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글과 사진의 출처

http://j.mp/eS6jiD

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