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점동(金點童) 1876년(고종 13)∼1910년.
사회봉사에 헌신한 여자 의학박사이며 한국 최초로 서양의학을 전공한 여의사이다.
본래 성은 김씨이고, 본관 광산(光山), 이름은 점동(點童)이다.
1891년 1월 25일에 Franklin Ohlinger에게서 세례를 받고 김에스더(愛施德)라 불리기 시작했고 결혼 후에 남편의 성을 따라 박에스터라 불렸다.
박에스터는 1876년 3월 16일, 정동 부근에서 가난한 김홍택의 딸 4형제 가운데 세 째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 10년쯤 되었을 때,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a)가 정동땅과 집을 사서 교회와 학교를 시작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아펜젤러에게 고용이 되어 일하였다. 에스더의 집안은 개화의 물결이 스며들고, 그리고 에스더에게는 새로운 학문에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아펜젤러의 소개로 이화학당(이화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때의 이화학당은 스크랜톤(Mary F. Scranton)부인이 창설하여 막 문을 열었다. 입학하는 학생이 많지 않았다. 한 두 명이 들어왔다가 도중에 나가 학교 자리가 잡히지 아니한 때였다.
이화여고 80년사에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엉터리로 모이는 학생들이었지만 1888년 10월에는 학생이 4명, 연말에는 7명이 되었다. 이들이 졸업할 수 있었던 학생은 1명뿐이다. 1887년에스더는 4번째 입학을 하고 이미 들어온 3명과 공부를 시작하였다. 여기에서 신학문만이 아니라 기독교의 복음으로 회심의 경험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에스더라는 세례명을 사용하였다. 그녀의 이름은 에스더로.
1890년 이화학당을 졸업한 에스더는 영어를 잘하여 그해 10월에 보구여관에서 일하던 로제타 셔우드(Rosetta Sherwood)의 통역을 맡는다.
1892년 보구여관이 동대문 분원을 설치하고 볼드윈 시약소(Boldwin Dispensary)이름으로 하였을 때, 에스더는 로제타 셔우드를 따라 특별히 뽑힌 학생이 약을 짓고 환자를 간호했다.
6월에는 로제타 셔우드가 1891년에 내한한 캐나다 의료선교사 제임스 홀(Hall, William James, M.D)과 결혼을 하고,
에스터는 닥터 홀이 데리고 있던 24세 된 청년 박유산과 1893년 5월 24일 결혼하였다.
그해 7월 홀이 평양선교 개척자로 임명되자, 1894년 5월 4일 홀의 가족과 평양으로 가서 "홀 부인의 특별 조수"가 되었다.
최초의 여의사 Dr Hall의 가족과 함께 평양에서 에스더 가족은 단순한 조력자 이상이었다. 김창식의 평양 핍박사건 때 박유산은 매를 맞았고, 에스더는 홀 부인과 가마를 타고 위험한 상황에서도 진료소로 출근해서 병자들을 돌봤다.
1894년 청일 전쟁 후 각종 전염병이 창궐한 평양에서, 혼자 남아 치료하다, 발진 티푸스에 걸려, 한국선교 3년 평양선교 2년 4개월 만에 홀이 생을 마쳤다. 홀의 가족은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그 때 에스더 가족도 함께 미국에 따라갔다.
1895년 2월 에스더는 리버티 공립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그녀의 남편은 셔우드 가(家)의 농장 일을 도우면서, 에스더의 학업을 도와주었다. 그해 9월에 에스더는 뉴욕시의 유아병원에 들어가, 그곳에서 1년 이상 근무하면서 생활비를 버는 한편 개인 교수를 찾아 라틴어 물리학, 수학을 공부하였다.
1896년 10월 1일에는 볼티모 여자의과대학(Woman's Medical College of Baltimore)에 입학하였다. 1900년에는 의대를 졸업하고,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그때 그의 남편을 잃었다. 남편 박유산은 에스더의 졸업을 20여일 앞두고 뇌일혈로 사망했다. 학위 받았지만 기쁜 줄 몰랐다. 그녀는 곧 귀국하였다. 귀국은 환영되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슬퍼하였다.
귀국하여 여성전용 병원 보구여관(保救女館)에서 의사로 재직하였다.
로제타 셔우드가 다시 한국에 돌아와 평양에 건립한 홀기념병원으로 전근하여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를 순회, 무료진료를 베풀면서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과거는 미숙한 조수였으나 통역자로 그와 함께 의료사업에 종사하였다. 그를 도와 광혜원 여자 전용 건물을 신축하며, 한국 최초의 간호원 양성소를 개설한 공으로 1908년 4월 28일에 고종(高宗) 황제로부터 은메달을 받았다.
환자를 돌보는 일에 헌신적이었지만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못해 1910년 4월 13일 34세때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에스더의 죽음은 그녀를 아는 모든 사람들을 슬프게 했지만, 그 가운데 가장 가깝게 지냈던 홀 부인의 가족이 더 슬퍼하였다.
닥터 홀의 아들 셔우드(Sherwood Hall)는 장차 결핵 전문의가 되어 한국에 다시 와서 꼭 결핵 요양소를 설립할 결심을 하였다. 결심대로 1928년에 최초의 요양소 및 결핵전문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1932년에는 최초로 결핵 퇴치를 위해 "크리스마스 실"을 도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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