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4. 8. 21:26

피의사실공표에 관한 대법원판례의 태도


이영훈 판사(법원행정처)

형법 제126조는 수사기관이 공판청구 전에 피의사실을 공표한 때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피의사실공표와 관련하여 법무부훈령인 ‘인권보호수사준칙’은 국민의 알 권리 보장, 언론사의 과당경쟁으로 인한 오보 방지 등 중대한 공익상의 필요성이 인정될 경우 필요한 최소한의 범위에서 공개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전직 대통령에 대한 수사와 관련하여 수사기관이 보여준 모습은 수사준칙에서 제시하는 기준과는 동떨어진 행태로서, 유리한 방향으로 수사를 이끌기 위한 목적으로 과도하게 수사정보를 언론에 유포했다는 비판과 의심을 받았다. 전직 대통령 정도의 중요 인물이 아니라도 우리나라에서는 수사기관이 범죄수사결과 발표나 기자회견 또는 보도자료의 형식으로 피의사실을 공표하여 언론에 보도되게 하는 관행이 굳어져 있다. 그로 인해 나중에 무죄 확정판결을 받더라도 명예훼손을 포함하여 이미 입게 된 사회생활상 각종의 피해를 회복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움에도 아직까지 피의사실공표죄로 기소되거나 처벌된 사례를 찾아볼 수 없다. 그 원인으로 범죄의 주체가 수사기관이어서 고소, 고발을 당해도 기소하는 경우가 없다는 점, 무죄추정 원칙의 무시 풍조, 국민의 알 권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언론의 보도 경향 등이 지적되고 있다.


피의사실공표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쟁점은 어떤 경우에 피의사실공표행위의 위법성이 조각되어 허용될 수 있는가이다. 대법원이 피의사실공표죄에 관해 판시한 형사 판례는 아직 없지만, 수사기관의 피의사실공표와 관련한 손해배상책임에 대하여 판시한 사례는 여러 건 있는데, 이러한 민사 판례에 대한 검토를 통해 법원의 입장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경찰이 당시 초등학교 4학년 남학생이던 피의자로부터 여동생을 찔러 살해한 다음 이를 은폐하기 위해 방화하였다는 자백을 받자 곧바로 기자들에게 보도자료를 배포한 사안(대법원 94다29928)에서, 대법원은 경찰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한 원심 판단을 수긍하면서 ‘피의사실을 공표하는 행위는 사실의 진실 여부와 관계없이 피의자의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이나, 그러한 행위로 피의자의 명예를 훼손하였다고 하더라도 공공의 이해에 관한 사항으로서 그 목적이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일 때에는 진실한 사실이라는 증명이 있거나 또는 증명이 없더라도 행위자가 그것을 진실한 사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 위법성이 없는 것’이라고 하여 피의사실 공표로 인한 명예훼손의 위법성조각사유를 일반적인 명예훼손과 동일한 논리로 판단하였다.


그런데 대법원은 1999. 1.26. 선고한 97나10215, 10222 판결에서는, 담당검사가 회사의 기밀 누설 및 배임 혐의로 피의자를 구속한 날 검사실에서 신문사 기자 등에게 피의사실을 요약 정리한 자료를 배포하면서 수사경위를 발표한 사안에 대하여 “수사기관의 발표는 원칙적으로 일반 국민들의 정당한 관심의 대상이 되는 사항에 관하여 객관적이고도 충분한 증거나 자료를 바탕으로 한 사실 발표에 한정되어야 하고, 발표하는 과정도 정당한 목적하에 수사결과를 발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에 의하여 공식의 절차에 따라 행해져야 하며, 무죄추정의 원칙에 반하여 유죄를 속단할 우려가 있는 표현이나 추측 또는 예단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는 표현을 피하는 등 그 내용이나 표현 방법에 대하여도 유념해야 하므로, 수사기관의 피의사실 공표행위가 위법성을 조각하는지를 판단함에 있어서는 공표 목적의 공익성과 공표 내용의 공공성, 공표의 필요성, 공표된 피의사실의 객관성 및 정확성, 공표의 절차와 형식, 그 표현방법, 피의사실 공표로 인하여 생기는 피침해이익의 성질, 내용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고 판시하면서, 검사는 피의자로부터 기밀을 넘겨받았다는 상대방을 소환조사하지 않은 단계에서 피의사실을 공표하였으므로 피의사실의 진실성을 담보할만한 객관적이고도 충분한 증거를 확보한 상태가 아니었고, 당시까지 객관적으로 밝혀진 사실만을 발표한 것이 아니라 참고인들의 불확실한 진술을 근거로 성급히 피의자의 범행 동기나 그가 유출한 회사기밀 내용, 경쟁업체 관계자들에 대한 향후 수사확대방향 등을 상세히 언급함으로써 마치 피의자의 범행이 확정된 듯한 표현을 사용하였으며, 이 사건 피의사실을 국민에게 알려야 할 현실적 필요성도 없었다는 이유로 위법성이 조각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이 판결은 피의사실 사전공표행위는 피의자의 인권 보호 측면에서 일반적인 명예훼손의 위법성조각사유보다 엄격한 요건이 갖추어져야 위법성이 조각된다는 입장을 제시하였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고, 그 뒤로 위 대법원판결의 기조는 계속 유지되고 있다.


손해배상책임에 관하여 기왕에 나온 대법원 판례들은 거의 대부분 무죄가 확정된 이후 피고인측이 수사기관과 언론을 상대로 한 사건들에 관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무죄로 확정된 사건에 관하여는 사후적으로 손해배상책임을 논함에 있어서, 피고인측의 손상된 신용과 명예의 회복을 통하여 그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하는 일이 상충될 수 있는 다른 가치보다 더 우선되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경솔한 수사 및 언론기관의 행태를 추인해 주는 결과가 되고 마는 위법성 조각을 그리 쉽게 용인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실무 감각도 고려해 보게 된다. 더구나 위 94다29928 판결은 “피의사실 공표로 인한 명예훼손의 경우, 공표한 피의사실의 진실성에 관한 오신에 상당성이 있는지 여부는 발표 당시의 시점에서 판단되어야 하지만 발표 당시의 시점에서 판단한다고 하더라도 그 전후의 수사과정과 밝혀진 사실들을 참고해야 발표시점에서의 상당성 여부를 가릴 수 있는 것이므로, 발표 후에 수집된 증거자료도 상당성 인정의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고 판시하기까지 하였다. 즉 피의사실 진실성에 관한 오신 상당성, 즉 무죄임에도 유죄일 것이라고 오판한 것이 상당한지를 평가할 수 있는 자료나 사정(혹은 위법성 조각을 위하여 참작할 수 있는 사정)이 수사발표 이후에 비로소 드러난 것이라고 하더라도 참작 사유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엄격한 판례들 입장에 비추어 볼 때, 수사기관으로서는 나중에 엉뚱한 반증이 발견되어 혐의가 뒤집힐 여지가 없을 정도로 고도의 압도적인 유죄 확증이 없는 한 피의사실을 공표하는 데 부담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언론으로서도 후일 손해배상 책임을 면하기 위하여는 보도하는 표현 하나하나에 대단한 신중함이 필요할 것이다. 적어도 피의사실공표와 관련된 민사책임에 관한 한 나중에 무죄임이 확인된 사건에 대한 피의사실 사전공표는 다른 명예훼손과 비교해 볼 때, (과실책임을 포함하여) 손해배상책임을 지는 범위가 상대적으로 더 넓어질 수 있다는 점에 관계기관들의 주의를 요한다. 특히 공인의 경우 국민의 알권리의 문제는 또 다른 차원에서 고려할 사항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유형의 사건 공표와 보도에서는 본질적으로 대상이 되는 당사자가 손쉽게 특정되어 폭넓게 알려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것이 결과적으로 오판이나 오보로 이어지는 경우라면 늘 명예훼손이라는 문제가 뒤따르게 될 여지가 있다는 데 주의를 요한다. 국민의 알권리도 범죄의 발생이라고 하는 팩트에 근거하여 보장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공명심이나 경솔함, 만용과 성급함은 오도된 여론과 실추된 명예, 침해된 인권 앞에서 후일 변명거리가 되기는 조금 어려울 것 같다.

출처 :http://www.lawtimes.co.kr/LawNews/News/NewsContents.aspx?kind=&serial=48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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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