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4. 26. 15:40


http://www.buddhism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2730

에서 퍼온글

최근에 종단에서 봉은사를 직영사찰로 지정한 문제가 발생함으로 해서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께서 많이 불편해 하시고, 그리고 봉은사를 아끼고 사랑하시는 모든 불자분들께서 많이 술렁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 자신이 이른 바 종단 제도권에서 벗어나 있는 몸이기 때문에 어떤 목적으로, 어떤 절차를 밟아서 갑자기 그렇게 되었는지 그 까닭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다만 ‘봉은사와 종단이 충돌하는 모습으로 가서는 안 되지 않느냐’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종단과 봉은사를 책임지고 있는 명진 스님과 심도 있고, 그리고 격의 없는 대화를 통해서 존중될 것은 존중하고, 양보할 것은 양보해서 원만한 타결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제가 그 건에 대해서 더 이상 드릴 말씀은 없고, 제 소회를 일단 그것으로 마무리하고, 제가 준비한 법문을 하겠습니다. 오늘 제가 준비한 법문의 제목은 ‘나를 봐라’입니다. 이 말씀은 경전에 보면, 한 비구 스님이 수행을 잘하다가 도중에 수행을 중도에서 포기하는 것을 보고 부처님께서 그 제자를 향해서 지도하는 말씀 중에 나오는 말입니다.


한 비구 스님이 열심히 정진하다가 그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저도 이런 경우 많이 봤습니다만, 어떤 스님들은 몇 달 내로 일대사를 해결하고자 하는 굳은 결의와 열정을 가지고 남보다 배 넘는 정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수행이하는 것이 작심한 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조급한 마음으로 빨리 끝내고자 하는 열의에서 열심히 했습니다마는 어느 때 열심히 해온 그 열정에 찬물 한 방울이 딱 떨어집니다. 이로 인해 그 열정의 마음이 식고 식은 상태서 이런 생각 하게 됩니다. 내가 열심히 정진해 왔는데 그 정진 통해서 온 깨달음의 목적지에 얼마만큼 접근해 있는가. 그리고 내가 서있는 위치는 어디인가, 내가 깨달음에 도달하기까지의 거리는 얼마나 남아 있는가. 이런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마는 그에 대해서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학교 공부는 1학년에 입학하고 1년 지나면 2학년에 올라가고 2년 있으면 3학년 올라가고, 진행과정이 얼마 남고 얼마 해왔고, 그것이 스스로 인식할 수 있으나 수행이라는 것은 그 진행과정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 점검할 수 없고 객관적으로도 확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답답함 때문에 열심히 정진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에 떨어진 찬 물방울 하나에 딱 스톱돼 거기서 도중에 정진의 불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아마 비구 스님도 그런 경우가 된 것 같습니다. 어떻든 이 비구 스님이 열신히 정진하다 도중에 포기했다는 말씀을 그 말씀을 부처님께서 듣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그 비구를 찾아갔습니다. 그 비구를 향해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내 듣자니 너는 남보다 열심히 정진을 잘하다가 도중에서 정진 포기했다는 데 그게 사실인가?” “예, 그렇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해탈로 가는 길을 잘 그리고 열심히 가다가 정진을 포기하고 타락하고 말았느냐? 만약에 나 역시 너처럼 참고 정진하는 것을 포기했더라면 오늘의 이 영광이 주어질 수 있겠느냐, 사람은 마땅히 희망을 잃지 않고 항상 노력해야 한다. 참고 노력하는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는 나의 오늘처럼 영광이 되는 것이다. 비구여, 희망을 가지고 있는 한 분투하라. 참으로 용기 있는 자는 정진하다가 의기소침하거나 지치지 않는다. ‘나를 봐라’ 모든 재앙을 극복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성취하지 않았느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바로 이 가운데 ‘나를 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부처님께서 수행을 포기한 제자를 어떻게 지도하는가를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가령 자녀들 중에서 서울대를 목표하고 입시준비를 열심히 하다가 중도 지쳐서 포기하게 되면 대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내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다. 니 주제에 서울대가 가당키나 한 일이냐, 예라이 못난 놈아, 다 때려 치고 붕어빵이나 구워라.’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이유를 따집니다.

‘내가 너에게 밥을 굶긴 적이 있느냐, 옷을 안준 적이 있느냐, 용돈을 적게 준 적이 있느냐 아니면 남들처럼 과외를 안 시켰느냐, 학원을 안 보냈느냐, 공부를 못하게 일을 시켰느냐, 도대체 서울대 포기한 이유가 뭐냐, 이렇게 따지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말은 힘을 잃고 쓰러진 사람 몸 위에 바윗돌을 얻은 것과 같습니다. 그 결과는 그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힘을 잃은 사람에게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은 힘마저 빼앗아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행위는 부모로써 자녀를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폭력으로 죽이는 것입니다. 지도는 어떤 경우에도 가능성을 내려주고 힘을 얻게 하고, 희망 갖게 하고, 분발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쓰러지는 사람을 일으켜 세워주는 것이 지도이고 그가 몰랐던 것을 알도록 깨우쳐 주는 것이 지도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의지가 나약해 정진을 포기하고 타락한 제자 향해서 ‘나를 봐라’ 하시고 당신의 네 가지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첫째는 ‘정진하는 것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나’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출가 이후 정진하는 것을 중도에 지쳐서 포기한 적이 절대 없습니다. 외도들의 가르침이 해탈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스승들과 결별하고 그리고 중도에 수행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즉시 시정하는 일들이 있었으나 수행자체를 감당 못해 주저앉거나 포기한 경우는 전혀 없었습니다. 마치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오직 해탈만을 향해 매진하셨습니다. 경전에 보면 부처님께서 얼마만큼 치열하게 수행 정진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수행 시에 피골이 상접할 때가 있었습니다. 악마가 이때를 기다렸습니다. 가장 의지가 나약해진 때가 저때다. 이렇게 판단하고 악마가 부처님 수행시의 수행자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아주 애처로운 눈길로 아주 애뜻한 마음 담아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지금 죽음에 임박해 있습니다. 당신이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가망은 천의 하나입니다. 당신이 그렇게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정진하다가 죽으면 수행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애쓰는 정진의 길은 가기 힘들고 행하기도 힘들며, 도달하기는 더욱 더 어렵습니다. 수행만 포기하면 당신은 얼마든지 편히 살 수 있는 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한 고생을 사고 있는 것입니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게는 믿음이 있고, 노력이 있고, 지혜가 있다. 이 세 가지로 전심전력하는 나에게 너는 어째서 목숨의 보전을 말하는 것이냐. 애쓰는 대서 일어나는 뜨거운 바람은 강물도 마르게 할 것이다. 오로지 수도에만 정진하는 내 몸의 피가 어찌 마르지 않겠느냐, 나는 수행의 적들에게 나약한 모습으로 굴복해서 의미 없는 인생을 사느니 차라리 그 뜻과 힘껏 싸우다가 장렬히 죽겠다.”

이와 같이 수행시 목숨을 걸고 정진하셨습니다. 이 불굴의 모습을 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잃지 않는 나’입니다.

부처님의 희망을 잃지 않는 모습은 이른 바 ‘사문유관’에서 역력히 볼 수 있습니다. 왕자시절에 동문을 나가서 노인을 만났습니다. 그 노인에게서 왕자는 미래의 자기모습을 보았습니다. 내가 현재는 젊지만 이 젊음이 내 몸에서 떠나게 되면 나도 장차 저런 모습이 되겠지. 따라서 노인을 통해 본 그러한 미래의 자신의 모습은 절망이었습니다. 다음 문을 나가서는 병자를 만났습니다. 왕자는 그 병자에게서 미래의 자기 모습을 보았습니다. 지금은 건강하지만 건강을 잃게 되면 나도 장차 저런 병자가 되겠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래의 자신을 본 거기서 역시 절망을 느꼈습니다. 다음에 서쪽성문을 나가, 거기서는 상여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상여에서 태자는 역시 미래의 자기 보습을 보았습니다. 내 목숨이 다하게 되면 언젠가 상여에 실린 몸이 되겠지, 이렇게 생각한 자기의 미래의 모습, 그것 역시 절망이었습니다. 어느 날 마지막으로 북문을 나가서는 거룩한 수행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비로서 왕자는 거기서 미래의 자기가 되고 싶은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왕자에게 바로 희망이었습니다. 왕자의 희망은 절대 즉흥적인 게 아니었습니다. 절망 가운데서 발견한 실로 고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희망은 절대 어떤 것에도 부서지지 않는 금강석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무엇 때문에 잃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희망을 가진 모습을 보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참고 노력한 결과로 영광을 얻은 나’입니다.

어떤 검사들은 죄 없는 사람들의 죄를 만들어서 자신의 영광을 누리려는 사람들도 있고, 어떤 사람은 국민을 속이는 사기행각으로 대통령이 되는 영광을 누리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처가 되는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권력을 휘둘러 얻을 수 있는 게 아니고 사람을 잘 속이는 수법으로 차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비자금으로 매수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부처라는 영광은 지난한 고통을 참고 뼈를 깎는 각고의 노력의 결과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인도에서 태어나 6년 동안 피나는 정진 끝에 성불하신 부처님은 그 이전에 원력에 의한 무수한 수행과 보살행의 전생이 있었습니다. 그 장구한 전생동안에 보시한 물이 항하라는 강가의 모래수와 같고, 보시한 피가 사해의 바닷물과 같고, 보시한 살이 천개나 되는 수미산과 같고, 보시한 혀가, 보시한 귀가 순다라산 같고, 보시한 코가 비구라산 같고, 보시한 치아가 비사불산 같고, 보시한 가죽이 삼천대천세계를 덮을 만 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부처라는 영광을 얻게 된 것입니다. 바로 참고 노력하는 결과로 얻은 영광의 모습을 보라는 것입니다.


넷째로, ‘모든 재앙을 극복하고 원한 것을 다 성취한 나’입니다.

부처님은 과거 처음 발심하실 때 오백 가지의 대원을 세웠습니다. 오백 가지 원은 다 중생제도를 위한 원이었습니다. 오백 가지의 원을 다 성취하지 못하면 성불하지 않겠다고 서원을 세웠습니다.

석가모니는 부처님이 되셨기 때문에 이미 오백 가지 원을 100%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중생들이 복을 구하면 복을 주고, 지혜 원하면 지혜를 주고, 그리고 병을 고쳐달라고 하면 병을 고쳐주고, 이렇게 중생들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줄 수 있는 능력과 위신력을 갖추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쉽게 되지 않았습니다. 초지일관의 불굴의 의지와 강철 같은 원력으로 무수한 고난과 재앙들을 극복하여 마침내 영원무궁한 불법과 지혜 복덕을 완전히 구족하신 부처님이라는 인격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오백 가지 원하는 바를 만족하게 하는 성취한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경전에서는 이와 같이 나약해 빠진 수행자를 위해서 부처님께서 한 비구를 향해 ‘나를 봐라’라고 말씀하셨으나, 이것이 어찌 한 비구에게만 한정된 말씀이겠습니까? 사실은 용두사미로 인생을 사는 사람들, 뼈가 없는 벌레처럼 사는 사람들, 바람 부는 대로 쏠려가는 연기같은 사람들, 삶의 좌표가 없이 불의(不義)하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각성을 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부처님은 인격적으로 흠격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능력 면에서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지혜가 있어서 더 보탤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모든 것에서 완전하고, 원만하고, 능통하십니다. 우리에게 부처님은 두려움 없이 당당히 힘 있게 세상을 향하여 ‘나를 봐라’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나를 봐라’는 말씀은 경전의 몇 군데서 볼 수 있습니다마는, 보다 근원적으로는 성불 그 자체가 ‘나를 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부처님께서 존재하는 자체도 ‘나를 봐라’는 말씀이며, 그분의 가르침을 담은 팔만대장경도 모두 ‘나를 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 봉은사 비롯해서 세계에 산재한 무수한 사찰들도 부처님의 ‘나를 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나를 보고 어쩌라는 것인가, 부처님을 거울삼아서 거기에 자신을 진솔히 비춰보라는 것입니다. 탐욕에 의해, 어리석음에 의해, 갈등에 의해서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진실을 외면하고 도리를 망각하고, 자아를 상실한 데서 부도덕 문제가 발생하고, 더 나아가 비인간 적이고 비이성적 행위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에게는 자기 실상을 여실히 비춰주는 거울이 필요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바로 그런 인간들의 실상을 비춰주는 거울인 것입니다. ‘나를 보라’. 부처님은 끊임없이 우리들 곁에서 ‘나를 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처님을 보지 않았습니다. 돈을 보고, 권력을 보고, 출세를 보고, 명예를 볼 뿐이었습니다. 자신의 꿈을 보고, 자신의 욕망을 보고, 자신의 학벌을 보고, 자신의 능력을 보고, 자신의 얼굴을 볼뿐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흠결투성이가 되고, 조직에는 갈등이 끊이지 않고, 사회는 온갖 불의와 부정이 횡횡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을 보지 않고 그런 것들만 보았기 때문에 바르게 보지 못한 것입니다. 부처님을 보지 않으면 눈이 어두워집니다. 어두운 눈으로 무엇을 제대로 보고, 무엇을 제대로 분별하겠습니까?


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인가 덮인 사람에게는 어두움이 있다. 바르게 보지 못한 사람은 반드시 암흑이 있다. 부처님께서 ‘나를 봐라’하시면 우리는 어리둥절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무엇을 보라는 것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나를 보라’ 말씀은 얼굴이나 부처님의 어떤 형상을 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부처님의 무엇을 보라는 것인가? 부처님의 법을 보라는 것입니다. 법은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고, 되지 않으면 안되는 원리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에게는 부처님으로서 깨달으신 법이 있습니다. 그 법에는 없는 것이 없습니다. 다 있습니다. 이른 바 사는 법도 있고, 죽는 법도 있고, 흥하는 법도 있고, 망하는 법도 있고, 바른 법도 있고, 삿된 법도 있도, 화합하는 법도 있고, 싸우는 법도 있고, 행복한 법도 있고, 불행하는 법도 있습니다. 심지어 귀인이 되는 법, 천인이 되는 법, 지옥에 가는 법, 극락에 가는 법까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런 법을 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런 법을 보고 자신의 모습, 자신의 행위, 자신의 생각, 자신의 바람을 비춰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무엇이 잘못되고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부족한 것인가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이러한 깨달음이 없는 관계로, 온갖 모략과 기만과 분열과 투쟁들이 창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정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부모들을 돌아봅시다. 그분들은 자녀들에게 훈시도 주고, 잘못이 있으면 꾸짖기도 합니다. 훈시를 주고 꾸짖는 것도 교육의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보이는 행위와 보이지 않는 마음까지 완전히 조화된 인격자를 만들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강요만 있을 뿐, 인성으로 몰래 스며드는 부모님의 덕화와 훈향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로서 덕화와 훈향을 가지려면 부모로서 사는 모습에서 허물이 없고, 자녀의 눈을 벗어나는 일체의 행위가 없어야 합니다. 즉 반멸과 반항감을 촉발시킬 원인들을 제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녀들은 자연히 부모들을 멸시하거나 만만히 보는 불경한 생각들을 아예 갖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어느정도 철이 들게 되면서부터 부모들을 비판적으로 보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냉정하고 예리하한 시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들은 이것을 모릅니다.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자녀들에게 주시 받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니까 부모들은 방심하고 밑바닥까지 다 드러내는 행위를 서슴없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부모들의 모습입니다. 부모들은 일상 속에서 자녀들에게 주시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할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을 가려서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이성적으로 절제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 부모도 언젠가 잘못을 저지른 자녀들 앞에서 ‘나를 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굳이 부모님이 옆에서 지켜보지 않고 살아계신 것만으로도 언제 어디서나 ‘나를 보라’는 말씀이 자녀에게 들려서 탈선은 감히 생각도 안할 것입니다. 과연 모든 부모들이 자녀 앞에서 ‘나를 보라’ 말할 수 있는 삶을 살아왔는가? 아닙니다. 기성세대를 불신하는 청소년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도 돌아 돕시다. 사회 지도자들은 우리 사회의 어른들입니다. 사회지도자들은 현재 사회상을 총체적으로 진단해서 무엇이 문제인가를 도출하고 그에 대한 처방으로 다각적인 대응책을 마련하고 방향제시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도자들이 해박한 식견과 높은 안목과 넓은 도량과 원만한 인격이 수반돼야 합니다. 사안에 대한 탁월한 분석력과 명석한 판단력이 첨가돼야 합니다. 지도자들의 의무는 사회구성원들을 각성시키고 계몽하고 향도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발전과 공동선을 역행하는 세력에 대해서 준엄히 비판하고 꾸짖고 지도해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도자는 함량 미달입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투철한 시대정신과 지식인의 양심과 익숙한 경륜을 가지고 정의롭고 건강한 민주사회 만들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분도 있다. 유감스럽게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수는 모자라고 부족해 지도자적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안타까운 것은 철새행보로 신뢰 잃거나 깨끗해야할 인격에 망국지도가 그려져서 이미 지도력이 땅에 떨어진 점입니다. 이런 현실이기 때문에 사회지도자들도 사회구성원을 향해 나를 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다음으로 사회의 공기인 언론들의 작태를 봅시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부터 TV가 갑자기 달라진 것 두 가지가 잇습니다. 하나는 정부정책을 홍보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침묵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만 있고 방송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정부 정책에 대한 심층 분석과 비판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부에 부담이 되는 사안에 대해서는 침묵해 버립니다. 방송사가 죽은 것입니다. 이점은 신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보수언론은 가관입니다. 논조는 정부기관지 수준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 진위에는 정부와 갈등관계의 단체나 조직의 기사들이 절대 없습니다. 공권력으로 발생한 사건들 인명살상도 그 신문에는 기사가 되지 않습니다. 신문의 생명을 내버렸음에도 자의적 잣대로 사람들의 색깔 공세를 해서 매도하고 나아가 편 가르기를 일삼고 있습니다. 신문이 할 짓이 아닙니다. 언론의 고유한 사명이 있습니다. 곧 정견과 정사와 정론으로 권력을 비판하고 대중들을 깨워주고, 나아가 사회적 환경과 분위기 바꾸고 건강케 해서 억울함과 갈등과 분쟁 없는 이른바 좋은 세상이 되도록 계도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언론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유가 증발했습니다. 결국 언론도 사회를 향해 ‘나를 보라’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 이명박 대통령은 어떠한가? 언젠가부터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들을 향해 온갖 추파를 보내면서,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노래를 부르고 있지만 국민들은 돌아보지 않습니다. 국민들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4대강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영국 어떤 신문은 한국인들은 이명박 정부를 괴물로 인식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찮은 벌레 흔한 풀도 이름이 다 있는 데 괴물은 이름이 없습니다. 동물의 족보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괴상하고 기이하게 생겼으니까 현상 그대로 괴물이라 칭할 뿐입니다. 한마디로 괴물은 공포의 대상입니다. 그것이 가진 힘과 폭력성은 무자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명박 정부를 괴물로 인식한 것은 의미상 무자비한 폭력성을 상징화한 것이다. 아무리 보검이라도 쓸 곳을 가리지 않고 아무렇게 휘두르면 그것은 죄 없는 사람을 다치게 하는 한낯 흉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통령의 권력도 국민이 수긍할 수 있는 곳에 행사해야만 존중을 받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사람을 잡는 데 쓰게 되면 괴물이 되는 까닭에 국민은 자연히 치를 떨고 외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의 의식 속에 괴물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대통령 역시 국민을 향하여 ‘나를 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는 어느 누구도 ‘나를 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나를 보라는 부처님을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모들도 부처님을 보지 않았고, 지도자들도 부처님을 보지 않았고, 언론도, 대통령도 부처님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비난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부모도 지도자도 언론도 대통령도 여기저기서 씹히는 껌이 되고 말았습니다. 껌은 입을 가지고 있는 한 어린아이부터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씹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껌을 씹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 껌이니까 씹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더욱 심각한 것은 ‘왜 씹느냐고 시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 자신이 껌이 되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껌이 된 자신의 허물을 보지 않고 씹는 입만 탓하고 있으니 이런 양태가 실로 심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옛날 중국에서 산짐승 잡아먹고 사는 한 사냥꾼이 있었습니다. 그가 어느날 산에서 사슴을 쫓다가 어떤 절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마침 한 스님을 만났습니다. 사냥꾼은 모르지만 스님은 당시 중국에서 유명한 마조 스님이라는 큰 스님이었습니다. 사냥꾼은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스님, 혹시 이쪽으로 사슴 한 마리가 뛰어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스님은 사냥꾼을 똑바로 쳐다보다가 말했습니다.

“그렇게 묻는 그대는 누구인가?”

“보시다시피 저는 사냥꾼입니다.”

“사냥꾼이라고? 그래, 활은 쏠 줄 아는 가?”

“물론 활을 쏠줄 아니까 사냥꾼 노릇을 하지요.”

“그럼, 화살 하나로 몇 마리나 맞추는 가?”

“그야 화살 하나에 한 마리씩 맞춥니다.”

그러자 마조 스님께서 껄껄 웃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대의 사냥실력이 형편 없구만.”

스님 주제에 사냥실력을 가지고 비웃는 것을 보니까 사냥꾼은 은근히 화가 났습니다. 사냥꾼은 마조 스님에게 대들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스님께서는 활이나 쏠 줄 아십니까?”

“물론이지.”

“그러면 스님은 화살하나에 몇 마리나 맞춥니까?”

“나는 한 무대기를 다 잡는다.”

그러니까 사냥꾼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 좋으시군요, 헌데 짐승들도 살고자하는 욕망은 스님과 같을 건데 어째서 스님이 돼서 무자비하게 한 마리도 아니고 무더기로 잡을 수 있습니까?”

그 말에 마조 스님은 정색하고 사냥꾼에게 말했습니다.

“그대는 그렇게 잘 알면서 방금 나에게 쏜 화살을 어째서 그대를 향해서는 쏠 줄 모르는 가!”

그 말을 듣는 순간 사냥꾼은 몸 어디엔가 피가 터진 것처럼 힘이 쭉 빠졌습니다. 마조 스님의 일갈은 사실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사냥꾼은 다소곳한 모습으로 스님께 말했습니다.

“저는 자신을 향해 화살을 쏘고 싶어도 그 방법을 모릅니다.”

그때 마조 스님께서 그를 지긋이 건네 보시면서

“이 사람 억겁에 걸쳐서 번뇌와 업장만 쌓아 오더니 오늘에서야 빛을 찾았군.”

사냥꾼은 자신을 바라보는 마조 스님의 눈빛에 활을 버리고 출가를 단행했습니다. 그가 바로 무주혜장(無州慧藏) 스님입니다.


현재 자기 자신이 껌이 되어 남에게 씹히고 있으면서도 이미 껌이 된 줄 모르고 씹는 입만 공격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사냥꾼과 같습니다. 자신을 많은 생명을 살생한 사냥꾼이면서 수도하는 스님이 어떤 깨우침을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한 말을 가지고 마치 사실인 것처럼 무자비 하다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냥꾼은 정작 화살을 쏘아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인데 남을 향해 쏜 것입니다. 자기 잘못을 보지 않고 남의 정당한 것을 잘못보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우리사회가 이런 꼴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사회의 문제이며 병인 것입니다. 우리 사회를 이끄는 주체들이 자신을 향해 화살을 쏠 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도리어 남을 향해서 화살들을 날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나를 보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를 보라고 말씀하신 부처님을 보아야 한다. 정계도 법조계도 경제계도 교육계도 언론계도 모두가 부처님을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부처님을 보라고 한 것은 불교를 믿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세상을 향하여 보여주신 법 을 보고, 거기서 각자에게 요구되는 법을 발견하라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을 통해서 회복해야 할 각자의 자신의 모습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화살 쏠 줄 모르는 병은 믿음으로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각성만이 약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이 여러분을 향하여 ‘나를 보라’한다면 여러분은 명진 스님의 무엇을 보겠습니까? 안상수 의원이 큰 절, 부잣절 주지를 하면 큰 일 날 것처럼 말한 좌파 주지라고 하는 명진 스님을 보겠습니까, 아니면 천일 동안 바깥출입도 일체 삼가하고 하루에 천배 씩하면서 천일 기도를 잘 회향한 그 기도하는 명진 스님을 보겠습니까?


당연히 기도하는 명진 스님을 여러분은 보아야 합니다.

안상수 의원은 자신을 향해서 화살을 쏠 줄 모르는 사냥꾼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은 들은 즉시 귀를 씻어야 합니다. 오염되니까.

그러나 명진 스님은 자신의 향해서 화살을 쏠 줄 아는 분입니다. 여러분은 몰랐겠지만 명진 스님이 봉은사 주지로 와서 천일기도를 한 그것이 명진 스님 자신을 향해서 쏜 화살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봉은사 신도여러분을 향해 ‘나를 봐라’하는 말씀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명진 스님을 모시고 봉은사 신도여러분들은 이 사회를 향하여, 오탁악세를 향하여 ‘나를 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봉은사 부처님을 바라보고 정진해야 할 것입니다.


강남달이 밝으면 강북달도 밝고, 강남달과 강북달이 밝으면 대한민국 달이 밝습니다. 그러나 강남달이 구름에 덮이면 강북달도 구름에 덮이고, 강남달과 강북달이 구름에 덮이면 대한민국의 달이 구름에 덮입니다. 부디 강남달이 밝아서 온 나라가 밝도록 다함께 노력합시다. 그러면 우리 모두는 언젠가 우리 사회에서 당당히 ‘나를 보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두 ‘나를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분들이 되길 바라면서 말을 마치겠습니다.



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