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명문 엘테대학교 한국학과장인 초머 모세 교수가 최근 '헝가리 최초의 한국학 학자 북한을 만나다'(국문)를 발간했다. 이 책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부터 1956년까지 평양 주재 헝가리 대사관의 문화관으로 일한 쇠베니 얼러다르(1914∼1980)가 본국에 올린 기록과 아내에게 보낸 편지, 헝가리 공문서 보관소의 기록 등을 바탕으로 삼고, 당시 잡지와 신문 기사, 사진 등을 보태 완성됐다. 쇠베니는 헝가리가 1951년 한국 전쟁 중 당시 공산주의 국가 간 연대 차원에서 받은 북한 전쟁고아 200명에게 헝가리어를 가르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 2015.11.9 << 초머 모세 교수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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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중 헝가리가 받아들인 북한의 전쟁고아를 가르친 헝가리 교사가 전쟁 후 평양에 외교관으로 주재하며 겪은 경험을 담은 책이 당시의 모습을 찍은 사진을 곁들여 출간됐다.
헝가리 명문 엘테대학교 한국학과장인 초머 모세 교수는 엘테대와 자매결연한 단국대학교 출판부인 '노스보스'를 통해 최근 국내에서 발간한 책 '헝가리 최초의 한국학 학자 북한을 만나다'(국문)에서 관련 헝가리 공문서 보관소의 자료와 사진, 인터뷰 등을 모아 한국전쟁 직후 북한의 모습을 소개했다.
책의 주인공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부터 1956년까지 평양에 주재하면서 헝가리 대사관의 문화관으로 일한 쇠베니 얼러다르(1914∼1980).
책은 쇠베니가 본국에 올린 기록과 아내에게 보낸 편지, 헝가리 공문서 보관소의 기록 등을 바탕으로 삼고, 당시 잡지와 신문의 기사와 사진 등을 보태 완성됐다.
쇠베니는 헝가리가 1951년 한국 전쟁 중 당시 공산주의 국가 간 연대 차원에서 받은 북한 전쟁고아 200명에게 헝가리어를 가르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쇠베니는 이 과정에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1953년에는 최초의 헝가리어-한국어 사전이라 할 '웽조 사전'을 완성해 그 공로로 북한으로부터 '3급 국가훈장'을 받았다.
전쟁고아들은 12∼14세로 이중 대표라 할 박찬우는 소년병 빨치산 출신으로 훈장을 받기도 했다. 박찬우는 나중에 김책공업대학교에 진학했다.
이들은 부다페스트의 한 빌라를 고쳐 기숙사를 설치한 '김일성초등학교'에 다니면서 학업을 이어갔고, 같은 공산주의 형제국가 출신이라는 점에서 많은 선물이 헝가리 각지에서 자주 왔다고 쇠베니는 전했다.
쇠베니는 이어 1954년 북한의 평양 주재 헝가리 대사관의 문화관으로 부임, 한설야와 리기영 등 월북 작가들을 비롯해 화가와 조각가 등 예술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한다.
하지만, 1956년 반소 봉기인 '헝가리 혁명'이 발발하자 북한이 소련 쪽으로 기울면서 부다페스트의 북한 유학생 이탈을 우려해 모두 귀국시키며 헝가리와 북한 관계는 급속히 냉각했다.
특히 이런 와중에 북한의 사리원시에 헝가리가 건립한 '라코쉬 마챠쉬' 병원에서 일하던 헝가리 의사 두명이 1956년 판문점을 통해 남한으로 망명을 시도했으나 개성에서 북한 당국의 검문으로 무산됐다.
그러나 다른 헝가리 의사들이 판문점을 여행하면서 미군 헌병들과 사진을 함께 찍었던 점으로 미뤄볼 때 1960년대 이전에 외국인의 북한 내 통행이 자유로웠고, 판문점 역시 삼엄하게 관리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은 이런 상황을 뒤늦게 깨닫고 휴전선 근방과 사리원시-원산시를 잇는 구간을 외국인 통행금지 구역으로 지정했다고 북한주재 헝가리 대사가 1962년 1월 본국에 보고했다.
이와 함께 한국에 현대 무용을 소개하고, 공연단을 이끌고 유럽과 남미에서 공연해 호평을 받은 월북 무용가 최승희가 한국전쟁 도중 헝가리를 포함해 동유럽 5개국을 순회 공연한 사실도 새로 밝혀졌다.
최승희(1911-1969)는 1936년부터 4년간 유럽과 남미 순회공연에서 한국 전통춤으로 인기를 얻었으나 해방 후 친일파로 낙인 찍히자 남편 안막과 함께 1946년 북으로 넘어가 평양에 '국립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세워 제자를 양성했다.
최승희는 88명으로 구성된 예술단을 이끌고 1951년 8월 동독에서 열린 세계 청년학생축전에서 공연한 데 이어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를 돌며 공연을 했다.
초머 교수는 당시 신문과 헝가리 공문서 보관소 기록을 찾아내 최승희와 그의 딸 안성희의 열흘간 체류 중 생긴 일과 헝가리 부다페스트 공연 상황, 언론의 반응 등을 자세히 소개했다.
최승희는 북한에 반(反) 수정주의 바람이 불면서 내리막길을 걷다가 1969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사망 연도와 원인 등 자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http://www.yonhapnews.co.kr/review/2015/11/06/3900000000AKR20151106080200009.HTML?template=6601
고인돌 앞에서 선 쇠베니
당시 김일성 대학 모습
김일성초등학교를 다닌 최용훈
헝가리 김일성초등학교
김일성초등학교를 다닌 최용훈이 쓴 글
쇠베니의 자동차 모습
쇠베니의 자동차가 대동강을 건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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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베니와 김일성초등학교 박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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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에서 만난 북측 헝가리 의사들과 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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