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론의 실력자인 박원양(朴元陽)의 아들로 수원에서 태어났다.
1872년 음력 4월 선왕 철종의 딸 영혜옹주와 혼인하였으나 3개월 만에 사별하고, 금릉위(錦陵尉)에 책봉되었다.
1870년대 중반, 형 박영교(朴泳敎)를 따라 재동 박규수의 사랑방에 드나들면서 개화사상을 익히기 시작하였다.
1882년의 제물포조약에 따른 사과 사절로 일본에 다녀왔다. 이때 그가 대한민국의 국기 태극기의 원형이 되는 깃발 도안을 처음 그려서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1882년 음력 12월 19일 한성부판윤으로 임명되었다. 일본에서 접한 인력거를 한성부판윤 재임 기간 중 조선에 보급했다.
1883년 음력 3월 17일 광주부(廣州府) 유수로 발령을 받았다.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1895년 갑오경장으로 사면되어 귀국했다. 그는 김홍집의 친일 내각에 내부대신으로 입각하여 개혁을 시도했으나 고종 양위 사건으로 다시 일본으로 망명했다.
1907년 오랜 망명 끝에 귀국하여 사면을 받고, 이완용 내각의 궁내부대신을 하다가 한때 제주도에 유배되기도 했다.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일본으로부터 후작 작위와 매국공채 28만 원을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으며, 귀족원 의원(1932년)과 조선식산은행 이사,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 선전 심사위원, 조선농회 부회장 및 조선농회 회장 등을 지내며 친일행위로 시종하였다.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
1920년 동아일보의 초대 사장으로 취임한다. 1935년 5월 3일 박영효의 손녀 박찬주는 이우와 결혼하였다.
1939년 정 2위 훈 1등으로 사망하였다.

박영효는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반면 조선의 근대화에 이바지한 공을 평가하는 견해도 있으며, 뉴라이트 등은 박영효와 김옥균 등 개화파가 청나라에 바치던 조공과 문벌제도의 폐지 등, 정치 개혁을 시도했다는 점을 들어 근대화의 선각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1882년 일본에 수신사로 간 박영효(1861∼1939)의 모습이 담긴 초상화가 첫 공개됐다. 한철호 동국대 교수는 최근 독립기념관내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발간하는 학술지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1집에 기고한 '우리나라 최초의 국기(박영효 태극기)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제작 국기의 원형발견과 역사적 의의'라는 논문을 통해 1883년 조일신문에 실린 박영효의 초상화를 공개했다./한철호 교수 제공

박영효가 일본에 도착한 직후 최초의 태극기를 내걸었던 니시무라(西村) 여관의 전경이 담긴 동판화. 한철호 동국대 교수는 최근 독립기념관내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발간하는 학술지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1집에 기고한 '우리나라 최초의 국기(박영효 태극기)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제작 국기의 원형발견과 역사적 의의'라는 논문을 통해 니시무라 여관의 모습을 공개했다. /한철호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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