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5월 조미(朝美) 수호통상조약 당시 조선은 국기가 없었다. 5월 14일(이하 양력), 미국 전권특사 슈펠트(Schufeldt) 제독은 만약 조선이 청나라의 '황룡기'와 비슷한 깃발을 게양한다면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려는 자신의 정책에 위배되는 처사라고 생각해 조선 대표인 신헌(申櫶)과 김홍집(金弘集)에게 '국기를 제정해 조인식에 사용할 것'을 요구했다.
이 때 김홍집은 역관 이응준에게 국기를 제정할 것을 명했고, 이응준은 5월 14일에서 22일 사이에 미국 함정인 스와타라(Swatara)호 안에서 국기를 만들었다. 이 '국기'는 22일 제물포에서 열린 조인식에서 성조기와 나란히 게양됐다.
조미조약 체결 2개월 뒤인 7월 19일 미국 해군부(Navy Department) 항해국이 제작한 문서 《해상 국가들의 깃발(Flags of Maritime Nations)》에 태극과 4괘를 갖춘 태극기가 실렸다. 지금의 태극기와 4괘의 좌·우가 바뀌었고 태극 모양이 약간 다를 뿐 전체적으로 매우 흡사했다.
박영효의 일기인 《사화기략(使和記略)》에는 그가 준비해 간 '태극팔괘도'를 본 영국인 선장 제임스(James)가 '너무 복잡해서 식별이 어렵다'는 의견을 내 '팔괘도'에서 괘 네 개를 뺀 '사괘도'로 고쳤다고 기록돼 있다.
박영효가 이 국기를 만든 것은 9월 25일이었고, 일본을 떠나 귀국길에 오른 것은 12월 27일이었다.
이 태극기는 11월 1일 일본 외무성 외무대보 요시다 기요나리(吉田淸成)가 주일 영국공사 해리 파크스(Parkes)에게 보낸 문서에 수록되었다.
이 태극기가 1883년 3월 6일 조선 정부가 국기 제정을 공식 반포한 직후인 3월 18일 청나라 문서 《통상장정성안휘편》 에 실린 '대청국속 고려국기(大淸國屬高麗國旗)'와 비슷한 형태이다.

19세기 태극기. 위스칸신주에 사는 댄 폰홀트씨로 부터 기증받아 1893한국전시관복원 기념사업회가소장하고 있다.
1822년 조미수호조약 때의 이응준 태극기처럼 COREA가 우측 하단에 씌어 있다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있는
'박영효 태극기'라고 한철호 교수가 주장하는국기
1882년 조미통상조약 당시에 모델이 되었을 것이라는 이응준 깃발.
국기 개념인 'Flag'라는 말 대신에 깃발 의미정도인
'Ensigh'이라는 말이 들어 있다.
1893 시카고 콜롬비아박람회 코리아 주최 뱅퀴 메뉴판.
이 태극기는 코리아최초로 참가한 국제행사에 한글로 '대조선'이 씌어 있다
1893 시카고 콜롬비아 세계박람회 공식기록 문헌인
'The Book of The Fair' (1천페이지 문서 및 화보).
이 책 안에 유일하게
Corea Exhibit(한국전시관) 사진과 정경원 대표 사진이 들어 있다.
이 책의 COREA EXHIBIT을 가까이서찍은 사진이
태극기가 게재되어 있는 것이보이는 아래의 사진이다.
한국전시관(Corea Exhibit) 사진을 게재하면서
한국전시관이 잭슨공원 내에 들어설 것이라는 기사를 내보낸
시카고 Hyde Park Herald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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