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찌기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는 부익부 빈익빈,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 농민의 착취가 반복되어 멸망하게 된다"고 말 하였다.
그 말의 옳지 않음은 역사가 말해준다.
그 연유는 자본주의 국가의 현명함, 즉 노동법을 만들어서 노동자들을 보호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법은 자본주의의 현명함이 낳은 아들이다"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면 자본주의는 왜 노동법을 만들어서 노동자를 보호해야 했는가?
산업혁명 이후 기업의 생산기술은 눈부신 속도로 발전하였다.
기술진보가 일어 날 때 마다 늘어나는 생산 능력은 엄청난 상품을 만들어 내었고, 그 상품들은 노동자들의 소득 증가에 의해서 소비로 연결되었습니다.
자본의 선순환이 일어 난 것이다.
그런데 20세기 말부터는 그 순환과정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기술진보가 워낙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생산기술이 엄청난 속도로 향상되면서 공장에서 노동자들의 일자리는 기계와 로보트에게 빼앗기게 되었고 경제는 성장해도 일자리는 생기지 않는(jobless growth)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은
「노동의 종말」(The END of WORK)에서 자본주의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서는
정부가 부자들로부터 세금을 받아 내
그 돈으로 사회봉사 활동영역을 통해 노동자의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해결책을 제시했다.
소비 없는 생산능력 향상은 상품의 재고만 쌓이게 되고 결국 자본주의는 멸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본가가 생산한 제품은 노동자가 소비해야 하는 것이지, 엄청난 기술진보에 따라 무진장으로 쏟아지는 상품을 부자들이 전부 소비할 수는 없기 때문에,
노동자를 괄시하는 자본주의 국가는 힘 든 앞날을 각오해야한다.
http://hantoma.hani.co.kr/board/view.html?board_id=ht_politics:001216&uid=267550의 글의 일부를 고쳐서
요즈음 같은 경기 후퇴의 시기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모두 다 아는 이야기인데
그 것을 정책에 반영하지 못하는 까닭도 있으리라.
말을 조심해야한다.
힘은 위에 있지만, 그 힘의 원천인 표의 숫자는 아래가 많다.
그래서 항상 잊어서는 안 되는 경구(警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