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각 맞은편은 중국산 비단을 취급하던 육의전의 우두머리 선전(縇廛)자리였다.
임오군란 이후 중국 상인들이 서울에 들어오면서 육의전 중 선전이 가장 먼저 곤경에 처했다. 갑오개혁으로 금난전권이 소멸한 뒤 곤경은 더 심해졌다. 1890년대 말, 선전 건물은 신태화라는 상인에게 넘어갔다. 신태화는 여기에 신행상회를 차리고 귀금속 제품을 팔았다.
그 얼마 뒤 신태화의 ‘화’와 신행상회의 ‘신’을 합하여 이름을 화신상회로 바꾸었다.
1930년 10월 24일 경성의 ‘작은 도쿄’라 불렸던 혼마치(本町·오늘날의 충무로) 입구 옛 경성부청 터에 미쓰코시(三越) 백화점이 문을 열었다. 조선에 들어선 첫 백화점이었다.
같은 날 ‘삼월 오복점’이라고 불린 이 백화점도 문을 열었다.
불똥은 종로 사거리에 있던 화신상회로 튀었다.
화신상회의 입지가 흔들리자 양지(洋紙) 도매상이었던 박흥식은 신태화를 찾아가 화신상회를 35만 원에 인수한다. 1931년 기와집을 헌 자리에 미쓰코시에 버금가는 3층 콘크리트 대형건물로 증개축한 뒤 백화점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이듬해 화신상회 옆에 새로 건립된 최남이 세운 동아백화점까지 인수했다.
1934년 공장에서 각종 생산품을 다량 구입해 소매상에 공급하는 연쇄점 사업에 투자했다.
순풍에 돛을 단 듯하던 화신백화점이 위기를 맞은 것은 1935년 음력 설날을 하루 앞둔 일요일이었다. 백화점 근처 노점상에서 시작된 불씨가 삽시간에 백화점 건물을 삼켰다.
2년 후인 1937년 11월 11일 지하 1층, 지상 6층의 화신백화점이 다시 문을 열었다.
한국인 건축가 박길룡이 설계한 이 건물은 당시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을 뿐 아니라, 내부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고 옥상에 전광뉴스판이 걸려 준공되자마자 장안의 명물이 되었다. 서울에 다녀간 시골 사람이 가장 먼저 받는 질문이 “화신에 가 보았느냐”가 되는 시대가 열렸다.
새 건물은 미쓰코시를 비롯해 조지야, 히라다 등 혼마치의 어느 백화점보다도 큰 규모였다.
'개관 첫날 이른 아츰부터 귀부인 유한마담에서 룸펜에 이르기까지 장안사람들은 물밀듯이 화신 문전에로 몰여 드러온다. 수만은 사람들은 그러케도 아츰 아홉시부터 저녁 열시까지 끗칠줄을 몰으고 작구 몰여 들어오는가…'('삼천리' 1935년 9월호 '새로 낙성된 오층루 화신백화점 구경기' 일부·당시 맞춤법 그대로 인용.)
화신백화점은 1987년 헐렸고 국세청이 입주한 종로타워가 이 자리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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