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5. 14. 00:15

天安門事件은 1989년 6월 4일, 후야오방의 사망을 계기로 톈안먼 광장에서 발생한 학생과 시민의 민주화 시위를 중국 정부가 군을 동원해 무력 진압한 사건이다.


6·4 톈안먼 사건, 6·4 사건, 천안문 사태, 북경 대학살 사건 등으로도 불린다. 애초 공식 발표로는 민간인 사망자 300여 명, 부상자 7천여 명이 발생한 사건이다. 국제적십자협회는 2,000 여명의 사망자를 발표했다. 비공식 집계로는 5천여 명 사망, 3만여 명 부상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그 후 중국 공안부가 1990년 7월 10일 제5차 국무원 보고에서 정식 발표한 것을 따르면, 민간인 사망자는 875명, 민간인 부상자는 약 14,550명이었으며, 군인은 56명이 사망, 7,525명이 부상당했다.


덩샤오핑은 중국 공산당 내 개혁파들인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을 자신의 후계자로 정하고 그들을 정치적으로 후원하였다. 그런데 1982년 공산당 총서기에 취임한 후야오방은 덩샤오핑의 기대와는 달리 사상 해방, 언론 자유, 개인 자유의 신장, 법치주의, 당내 민주화 등 과감한 정치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정치 개혁은 당내 보수파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후야오방은 공산당 총서기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은 오랜 침묵 끝에 사망했다.


4월 15일 -

후야오방(胡耀邦) 사망과 함께 베이징 시를 중심으로 학생, 시민 시위 시작. 이들은 후야오방의 당 총서기직 해임 이유를 밝힐 것과 그의 명예 회복을 요구.

4월 21일 -

경찰과 충돌이 빚어지면서 시위 참여 대학이 10여 개로 늘어났고 베이다오(北道)를 주축으로 한 47명의 저명한 학자들이 학생운동 지지 성명 발표.

4월 22일 -

후야오방 장례식. 시안(西安)에서 군중이 10여 대의 차량에 불을 지르고 성(省) 정부를 습격하며 공산당 타도 외침.

4월 26일 -

최고 실권자 덩샤오핑(鄧小平), 리펑(李鵬) 총리에게 시위 강경 진압 지시. 인민일보는 이 날짜 사설을 통해 학생 시위를 ‘반혁명 폭동’으로 규정.

5월 13일 -

학생 수천 명 천안문 광장서 무기한 단식농성 시작. 시위 인원 며칠 새 200만 명으로 급증.

5월 19일 -

자오쯔양, 단식 농성장 방문해 학생들에게 자신이 너무 늦게 온 것에 대해 사과.

5월 20일 -

베이징 일부 지역에 계엄령 선포.

6월 4일 -

0시 57분. 계엄군 본격적인 진압작전 개시. 중국 정부, 진압과정에서 민간인 300여 명이 사망하고 7천여 명이 부상했다고 발표. 비공식 집계로는 5천여 명 사망, 3만여 명 부상이라는 주장도 있음.


중국에서 천안문 사태를 언급하는 것은 위험한 일로 되어 있다. 후야오방에 대한 재평가는 곧 천안문 사태의 재평가로 이어지기 때문에 쉽게 손을 댈 수 없는 뜨거운 감자이다.

지금도 매년 6월 4일을 전후하여 천안문 광장에는 중국 공안이 대규모로 배치되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