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2. 27. 13:31

안창호(安昌浩)에 대하여



1878년(고종 15)∼1938년. 독립운동가·교육자. 본관은 순흥(順興). 호는 도산(島山). 평안남도 강서 출신.

1. 어린 시절

8세까지 가정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9세에서 14세까지는 강서군 심정리에 머물며 김현진(金鉉鎭)에게 한학을 배웠다.


1895년 언더우드(Underwood, H. G.)가 경영하는 구세학당(救世學堂)에 입학하였다. 이곳에서 3년간 수학하면서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서구문물과 접하게 되었다.


2. 독립협회 가입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평양에서 관서지부조직을 맡게 되었다. 이때 평양지회 결성식이 열린 평양의 쾌재정(快哉亭)에서 감사 조민희(趙民熙)와 수백군중이 모인 가운데 18조목의 쾌재(快哉)와 18조목의 부재(不哉)를 들어 정부와 관리를 비판하고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연설을 함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1898년 서울 종로에서 이상재(李商在)·윤치호(尹致昊)·이승만(李承晩) 등과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였으며, 1899년에는 강서군 동진면 화암리에 강서 지방 최초의 근대학교인 점진학교(漸進學校)-점진공부와 수양을 계속하여 민족의 힘을 기른다는 교육목표를 설정하였으며, 초등과정의 남녀공학-를 설립.


독립협회 회원들과 안창호(중앙)


3. 미국에서

1900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인 친목회를 조직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대한인공립협회(大韓人共立協會)를 설립. 야학을 개설, 회원들을 교육시키고 《공립신보 共立新報》를 발행하여 교포들의 생활향상 및 의식계몽.


1902년 발행 대한제국 안창호 여권 여권번호 51번



공립신보



리버사이드 한국학교에서

1905년 11월의 을사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국내에서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이듬해에 귀국.


4. 신민회 조직과 애국계몽운동

1907년에 이갑(李甲)·양기탁(梁起鐸)·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하여 민중운동을 전개다.



1907년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고 평양과 대구에 출판기관인 태극회관(太極會館)을 건립하였으며, 평양에 도자기회사를 설립하여 민족산업 육성.


대성학교 일장기 거부로 1912년 폐교


또한, 1909년에는 박중화(朴重華)·최남선(崔南善)·김좌진(金佐鎭)·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민족계몽운동 및 지도자 양성에 주력하였다.


1909년 10월에 있었던 안중근(安重根)의 이토(伊藤博文)암살사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3개월간 일제에 의하여 피체되었다가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산동성에서 민족지도자들과 청도회의(靑島會議)를 열었다. 그러나 이 회의는 자금관계와 급진파의 반대로 실패하였으며, 이에 시베리아를 거쳐 1911년 미국으로 망명.


1912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를 조직하고 초대총장에 취임하였으며, 《신한민보 新韓民報》를 창간하였다. 1913년에는 로스앤젤레스에 흥사단을 창설

.

1916년LA의 흥사단 단소 겸 안창호의 살림집의 흥사단원들,
(이 집은 디즈니 콘서트 홀에서 사쪽으러 1불락 서쪽, 지금은 DWP의 주차장이 되었음)


멕시코 메리다의 한국학교 방문 1918년

멕시코의 국민회 임원들과 안창호, 1918년

멕시코 메리다의 흥사단 단우들



5. 상해임시정부 가담

1919년 3·1독립운동 직후 상해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직을 맡아 독립운동방략 작성, 연통제(聯通制)수립, 각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상해 소집 등을 실행.

상해 임정의 요원들 1919년, 중앙에 안창호가 보인다.

상해 임정 요원들과 안창호 (중앙 흰옷), 1919년


1919 상해 임정 요인들, 앞줄 좌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가 멕시코 탐피고 국민회 지방회에 보낸 편지, 1919



1923년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 부의장에 취임.


1924년에는 난징에 동명학원(東明學院)을 설립하였다.


6. 흥사단 조직과 이상촌 건설

1924년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각지를 순행하며 국민회와 흥사단의 조직을 강화,


1925년 LA에서 서재필과

1926년 중국에 돌아와서

1928년 상해에서 이동녕·이시영(李始榮)·김구(金九)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대공주의(大公主義)를 제창.

안창호가 필립핀 방문 원주민과 기념찰영,1929년


3남 필영은 임신 중 안창호가 원동으로 떠나기 전 가족사진,
가족과 찍은 마지막 사진, 1926년


1932년 4월 윤봉길(尹奉吉)의 상해 훙커우공원(虹口公園)폭탄사건으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서울로 송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가는 안창호


1932년 안창호가 상해에서 체포된 뒤 부인에게 보낸 편지

7. 실형선고

4년의 실형을 받고 서대문감옥과 대전감옥에서 복역하다가 1935년 2년6개월 만에 가출옥하여 지방순회 후 평안남도 대보산(大寶山) 송태산장(松苔山莊)에서 은거하였다.


1937년 6월 동우회사건(同友會事件)으로 흥사단 동지들과 함께 다시 일본경찰에 붙잡혀 수감중, 같은해 12월에 병으로 보석되어 이듬해 3월 경성대학부속병원에서 간경화증으로 죽었다.

안창호의 망우리 묘지를 참배하는 안창호의 조카딸 안맥결과 고향 친구인 김만식 (좌측), 1965년

1938년 순국한 안창호의 장례식에도 못가고, 해방 후에는 이승만이 집권하여 귀국을 못하다가
1963년 박정희의 초청으로 처음 환국한 이혜련과 유복자 필영(Ralph)이 망우리의 묘를 참배하고 안창호에게 주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받았다., 1963년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중장을 받았다. 죽은 뒤 망우리에 안장하였다가 1973년 11월 미국에 있던 부인 김혜련(金惠鍊)의 유해와 함께 도산공원(島山公園)으로 이장, 안장되었다.


1973년 안창호와 부인 이혜련이 합장한 서울 도산공원

8. 교육사상

“나 하나를 건전한 인격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민족을 건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말하면서 인격의 혁신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자아혁신은 곧 자기개조로 연결되며, 자기개조는 ‘무실(務實)·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勇敢)’의 4대정신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는 특히 무실역행을 강조하였는데, ‘무실’이란 참되기를 힘쓰자는 것이며 ‘역행’이란 힘써 행하자는 것이다. 무실은 개조의 내용이고 역행은 그것의 행동으로, 무실과 역행이 없이는 자기개조가 불가능함을 주장하였다.


개개인의 인격혁명으로서의 자아혁신은 곧 자기개조이며 자기개조가 곧 민족개조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는 자아혁신과 자기개조는 주인정신(主人精神)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보았다.


대성학교의 교훈을 주인정신으로 설정한 것도, 주체·독립·책임을 의미하는 주인정신을 통해서만이 진정한 자기개조와 민족개조가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대성학교의 건학정신은 ‘건전한 인격을 가진 애국심 있는 국민의 양성’에 두었다. 이것은 곧 설립자인 안창호의 교육이념이었다.


또한, 흥사단 창립 당시의 약법(約法)에 표시된 단(團)의 설립목적 조문을 보면 “본단의 목적은 무실·역행으로 생명을 삼는 층의 남녀를 단합하여 정의(情誼)를 돈수(敦修)하고 덕·체·지 삼육(三育)을 동맹, 수련하여 건전한 인격을 육성하고 신성한 단결을 조성하여 우리 민족 전도대업의 기초를 준비함에 있음이라.”고 하여, 정의돈수를 통하여 인격을 육성한다는 교육목적이 제시되고 있다.


교육방법상의 원리로는 성실성과 점진성을 강조하였다. 인생관과 세계관의 근본원리 및 인간이 믿고 의지해야 할 진리의 등불은 곧 성실이라 하였으며, 거짓없고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모든 일에 정성과 진실을 다해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성실이야말로 자아혁신과 민족개조의 가장 기본적인 방법적 원리라 보았다.


또한, 그는 공부하는 정신과 태도로 점진성을 강조하였다. 점진공부는 학문과 실천의 기본적인 태도로서, 자신의 생활은 남에게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개척하여 향상을 기하자는 것으로 이는 성실성과 함께 주요한 교육방법의 원리가 된다.

글은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7HIL_A1878_1_0006940


사진은http://www.koamhistory.com/home/bbs/board.php?bo_table=Pictorial_History&wr_id=195

도산 기념 사업회 http://www.ahnchangho.or.kr/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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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